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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통한 구원 - 이사야서 풀이3
글쓴이 : 바보새 날짜 : 2013-09-11 (수) 16:19 조회 : 2324
고난을 통한 구원
「이사야서」풀0| I
 
 
여호와 고난의 종의 노래
우선 53장을 펼칩시다.
이사야 52장 13절부터를 ‘여호와 고난의 종의 노래’라 하는 거지. 네 개가 나와 있는데, 그 네째 노래예요. 13절부터 있어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예수께서 “인자가 높이 들림을 받은 후에야……” 운운하는 것도 이런, 여기 있는 이런 문구와 관련이 있는지도 몰라요. ‘높이 들린다’는 원어를 나 모릅니다만, 물론 예수님이 “모세가 광야에서 배암을 든 것같이 인자도 높이 들려야 될 거다. 그때까지는 안 믿을 거다. 사람들이 믿지를 않을 거다. 인자가 높이 들림으로 해서 네가 구원을 얻을 거다” 그런 의미의 말씀을 했는데 여기도 ‘높이 들려야’ 하는 것이 같은 원어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또한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그랬는데 이 ‘존귀’라는 말은, 예수님의 하신 말씀으로 보면 ‘영광’이라, glory라 불리게 된 말이랑, 처처에 늘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영광을 얻게 될 거다.” 혹은 자기가 기도하여 말하길 “아버지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소서” 그러니까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내가 이미 영화롭게 했고, 또다시 영화롭게 하리라.” 그 ‘영광’이라는 말은, 자기가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걸 두고 하는 말이에요. 자기도 그러셨고 복 음기자도 그랬고, 그런데 여기에는 그렇게까진 안 나왔지만, 높이 들려 지극히 존귀하게 된다는 것이 뭘로 존귀하게 되는 거냐? 고난으로 해서 되는 거야. 뭐 세상에서 임금자리에 오른다든가 그런 거로 되는 게 아니야.
 
우리가 예수님 생애에서 보지만, 이 사람은 사상으로 볼 때에, 예언자 이사야의 사상으로 볼 때, 어쩌면 그때 그런 생각 갖느냐, 여기「이사야」2장에 있는 것 같은 얘기, 여호와의 산이 높이 들리고 세계만방이 모두다 그리로 온다든지, 사자가 소와 같이 풀을 먹는다는 사상, 또 어린애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놀아도 상하지 않을 거라는 사상, 그러니까 전쟁을 인제 그만두고 창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운운하는 그런 것 다, 그 시대에 어쩌면 그런 놀라운 평화적인 생각을 했을까?
평화를 말하기엔 우리 동양에서는, 내가 알기에는 노자예요. 노자가 첫째 평화주의자라 그런 말 하는데, 그보다도 더 다른 평화사상, 다른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동양에서 알기론 그래요. 그건 이것과는 직접 관계는 안돼요. 안되는 말이지마는 우리나라, 우리가 우리 생각할 때에는 그 생각해요.
 
우리나라 고유종교의 평화사상
우리나라 고유종교라고 하는 것이, 그중 하나가 평화사상 꽉 들어있는 거예요. 단군설화에 나와 있어요. 거기 본래 전쟁 이야기 없어요. 전쟁해서 땅을 정복하고 나라 세웠다든지 그게 아니에요. 다른 어느 민족에서 봐도 이런 건 없어요. 그게 역사적으로 사실은 아니겠지만, 그런 평화적인 생각들이 결정이 되어가지고 소위 이 단군신화가 살아나온 듯한데 그런 말, 싸움해서 땅을 빼앗고 하는 것이 도무지 없다는 것은 주의할 만한 일인 거예요.
또 어제 내가 일부러 그렇게 말했는데, 바보 온달이라고 하던 사람, 처용이라고 하던 사람, 그 다음에 영암에서 나온 검도령, 쓰기는 검을 여(黎)자, 그래 검다고 할 때 여 그러잖아요. 쓰기는 이렇게 쓰고 발음을 할 때는 검도령이라고 해요. 검도령이라면 영암 가면, 영암에서 가까운 데 월출산(月出山)이라고 있잖아요. 그 산의 봉우리가 아주 이상하게 생겼지요. 그런데 그 산만이 아니고, 월출산 처처에 무슨 검산이니 수의제니 그런 게 많이 있어요. 그런 게 다 종교적인 것과 관계있는 것이에요. 또 경치 좋은 남해에 가면 한복판에 금산이라는 산이 있어.
 
거기 사람들의 설명으로는 뭐라 그러는고 하니, 이성계가 혁명을 해 가지고 나라를 얻으려고 할 때에 여기저기 있는 부처님, 뭐 이런 것에 기도하고 정성을 드리고 해도 별로 응답해주는 데가 없었는데, 그 금산의 무슨 신이 응답을 해줬다 그래. 그래 임금이 된 다음에 자기를 그렇게 알고 도와주었다 해서 그 산을 모두 비단으로 둘러쌌다, 그래서 그런다는데 그건 괜히 붙여서 하는 말이고. 그게 아니고 본래 이름이 검산일 거요. 캐고 들어가면 검산이라고 하는 것이 공주, 곰이라, 공이라, 금이라 하는 거나 검이라 하는 거나 다 같은 말인데, 원인이 다 그렇게 되어서 그런 거요.
여길 올라가보면 아주 묘하게 생겼어. 가본 사람 있는지도 몰라요. 맨 꼭대기에 올라가보면, 지금은 뭐 호텔도 있고 그런데, 돌로 이렇게 된, 자연으로 아취처럼 된 문이 있어요. 거길 지나서 올라가면, 그 산의 암석이 그것도 화강암으로 된 것인데, 기기묘묘하게 생겼어, 규모는 작지만. 그리고 물이 떨어지는 데가 있고 해서, 거기 올라간 소감이, 첨에는 그런 줄은 모르고 갔었는데, 옛날에 반드시 신선들이 여기 와서 도를 닦았다 그랬는데, 거기서 사람을 하나 만났어요. 그 사람이 설명을 하는데, 그거 모두 그렇다는 거야.
동해안에 가보면 선(仙)자, 신(神)자 붙은 게 많아요. 우리나라를 보면 선의 진리라, 무슨 영(靈) 영자에도 그렇고, 신(神)자도 그렇고, 선(仙)자도 그렇고. 바위·돌·물굽이·골짜기 그거 뭐 다 종교인들이, 우리나라 고유종교인 단군 이런 분들이 하던 때의 신인들이 도 닦던 데다 그 말이야. 지금도 평양에 가면, 평양 북쪽에 있는, 그리 높지도 않지만 을밀대라고 있어요. 을밀대라고 하는 것은 을밀이란 신선이 있어서 도 닦았던 데라 그런 말이야.
 
우린 지금 신선이라 하면, 보통 사람이 아니고, 하늘이나 왔다갔다하는 그런 사람으로 알지마는 그런 게 아니에요. 선인이나 신인이나 다 거 종교적인 말인데, 이제 도를 닦음으로 인해서 어느 깊은 지경에 들어간 사람을, 그러니까 이제 자유자재하는 그런 경지에 들어간 사람을 신 혹은 선 그래요. 그렇기에 단군을 신이라고도 그래. 단군설화에 보면 선인왕검지택(仙人王儉之宅)이라, 평양을 선인왕검지택이라, 신선 사람 왕검이라는 사람의 집이라 그랬던 거예요. 왕검인지 임검인지, 임금·임검하는데 그것도 아마 그럴 거요. 우리가 보통 임금이라고 하는데, 임이란 건 물론 추존해 높이는 임이고, 어떤 때는 임 하고 하는데, 그 말일 거고, 그런 데서 나왔는데, 그런 사람들이 하던 정신, 지금은 샤머니즘이라고 하지만, 그건 새 종교라고 할 수 없고 민간 신앙으로 있는 그런 거예요. 그런 옛날의 우리의 고유한 종교사상이 내려오면서 제대로 발달을 못하고 기형적으로 남아 있는 게 지금 무당인데, 줄렁줄렁 방울을 달고 큰 댕기 드리고 손에 뭣을 들고 부채 들고 춤을 추고 뭘 외고 하는 것이야. 이건 우리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야. 만주에도 옛날에는 있었고 시베리아에도 있었고 일본에도 옛날에는 있었고 그랬어요. 이 동북아시아 지방마다 다 있던 거야. 세계 가는 곳마다에서 볼 수 있지…… 그 단군사상이, 단군이란 것이 반드시 그것만이 아닐 거고, 그런 것이 글자로 나와 있는 게『삼국사기』에 신라의 둘째 임금을 남해라고 해. 남해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하는 말, 거기다가 차차웅(次次雄)이라, 차차웅 혹은 차충이라고 한문자로 그랬어. 그건 옛날 말에 무당이란 뜻이다 그랬어. 그러니까 그걸 보면 고대의 부족사회의 장(長)이란 사람이 그런, 그 종교적인 지도자이고 그랬던 모양이야. 그걸 무(巫)라 그랬어. 여기, 지금은 무당이라고 해. 지금은 무라고 하면 타락되어서, 저꼴이지만…….
 
본래 정·교(政敎)가 일치하던 시대에는 종교 두령이던 사람이 정치도 하고 그랬을 거야. 아마 단군이란 역시 그런 거, 그런 일을 했던 분을 말했던 걸 건데, 그이들의 사상에 꽉 하나 들어 있는 게 평화사상이야. 싸움 그리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까 싸워서 뭘 정복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주로 한 것이 먹는 것을 뭘 어떻게 옳게 하고, 거처를 어떻게 하면 장생불사할 수 있냐 하는 거예요.
중국 사람이 우리나라를 생각하기를 동쪽에 가면 삼신산이 있다. 석삼(三)자 하고 신 하는 신(神)자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거기 이상한 약초가 있어서, 그걸 먹으면 장생불사, 죽지 않는다. 또 혹은 동방에 가면, 큰 구덩이, 대학(大壑)이라 그랬어, 대학이 있는데, 거길 지나면 큰 산이 있는데 그 산이 굉장히 높아서 그 산만 올라가면 모두 다 희다고 그랬어. 나무도 희고 짐승도 모두 희고. 그런 중국 옛날 기록이 있어요. 그거 아마 백두산이란 얘기가 옮겨가서 그랬을 거고, 거기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 그랬어.
 
그런 것이 중국에 전설로 많이 가고 또 중국의 산동반도의 연안에는 기압 관계로 해서 신기루가 잘 나타나요. 신기루란 건 땅 위에 있는 어느 무엇이 광선의 굴절에 의해서 공중에 투영이 되어, 거꾸로 비치는 거예요. 신기루 작용을 잘 알잖아요. 사막 같은 데서 잘 일어나고, 중국에선 산동반도에서 많이 일어나는데, 신기루(蜃氣樓)라고 하는 신자, 별 신(辰) 아래에 벌레 충(虫)한 것은 조개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바다에 있는 조개들이 무슨 이상한 기운을 통해서 저렇게 된다, 그런 말이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중국말에 진시황이 천하를 얻은 다음에, 자기가 장생불사하겠다고 해서 동남동녀 처녀총각만을 삼천 명을 보내서 삼신산에 불사약을 구했다, 그런 말이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 필시 옛날부터 있는 인삼·산삼을 캐먹은 것에서 유래해서 그럴 거예요. 고증을 해서 밝힐 수는 없지만 대개의 불로초라는 게 그게 아닐까? 그런데 그걸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도 그런 걸 많이 하지 않아요? 뭘 어떻게 먹으면 아주 병이 안 나고…… 우리나라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그렇지만. 그러나 본래 옛날 말이 그래요. 그런 게 다,저 유럽식으로 짐승 길러서 잡아먹고, 가정 뭐하고 그런다는 것과는 생각, 생활관념이 시작부터 다르지 않아요.
그래 모두 다 같은 그런 사상에서 나온 건데, 그런 것이 중국에 잘못 전해져가지고, 신화로 되어서 동방에 삼신산이 있다, 삼신산이 있다, 하니까, 신산이 셋 있다, 그래서 봉래, 방장, 영주라 그랬어. 역수입을 해가지고 우리들도 삼신산이 있거니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봉래산은 금강산을 봉래산이라 그러구, 또 방장이 뭐냐? 지리산이 방장인가, 영주는 제주도 한라산이라고, 그렇게 맞춰보면 그래.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고, 건 이능화씨의 말이 옳아요. 삼신이란 거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왕검(擅君王儉)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들 옛날부터 삼신이라는 말, 꽉 들어있는 말이에요. 애기를 나면 삼신님께 바친다든지, 삼신님께서 점지해주셔서 아들 낳게 되었다든지, 그거는 옛날부터 있던 거야. 그래서 나온 건데, 중국 사람이 모르고, 그걸 뭐 아주 이상한 세 산이 있는 줄을 알고 말하니까, 그건 세 산이 있는 줄 알고 그랬지만 그런 게 아니고, 산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종교인데, 종교의 중심이 되는 게 삼신이다.
그래 또 우리나라 윤성범씨가 ‘삼위일체’라고 재미있는 말 하고 한 바탕 겪기도 했지만, 그렇게 한번 생각해보면 어떠냐 그 말이지요. 물론 성경에 있는 삼위일체설과 같다고, 성격이 같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하여간 맨 위에 근본이 되는 이가 환인이고 다음에 환웅, 또 환웅의 그 아들이 왕검인데, 단군이란 분인데, 그걸 삼신이라고 그랬어. 사람의 생사화복이나 모든 것을 주장하는 건 그분들이 한다. 딴 얘기가 이렇게 길어졌지마는, 하여간 우리가 이제 생각을 할 때는 본래 우리 민족 속에도 평화적 의지, 언젠가는 모르지만 오래 전부터 그런 사상, 그런 게 있었다 하는 것 하나 아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결점도, 잘못되는 점도, 잘못돼서 혹은 용기가 부족하다든지 또는 다부진 생각, 아주 끈기있게 한다든지 하는 게 부족하다든지 그런 점이 나오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평화주의, 살생을 하길 좋아 안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거 하나 생각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바보 온달의 설화도 나는 그걸로 표현해. 처용이가 원수 갚지 않고 노래를 불러서 돌아가게 했다는 것, 적군이 왔는데, 싸우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피하다가 마지막에는 그냥 가면 어떠냐? 지족원운지(知足願云止). “족한 줄 알거든 그냥 돌아가면 어떻소” 그랬다는 거다 중요한 말이에요. 삼국을 보면, 바보 온달이는 고구려를 대표하고, 처용은 신라를, 검도령은 백제를 대표해. 검도령, 그는 영암서 났다 그거야.
그런데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다음에, 천하를 얻은 다음에, 천하를 한번 돌아봐. 그때, 다음에 한(漢)이라고 하는 나라를 세우게 되는, 거기서 획책을 보고 있던 장양(張良)이 진시황을 한번 습격해서 자기 나라를 찾아볼려고 해. 자기 나라는 한이라고 하는 조그만 나라였는데, 그래서 산동반도의 담량이라는 모래밭에서, 진시황이 지나가는데 숨었다가 습격해서 암살할려고 했어. 그런데 자기 힘이 부족하니까, 전하는 말에 뭐라고 되어 있는고 하니 창해에, 동방 한국에 창해역사라 불리는 사람 즉 검도령이 있어서, 힘이 아주 장사야. 평소에 칠팔십 근 되는 철퇴를 만들어두고 그걸 잘 쓸 줄 알아. 그런데 그는 언제든지 남에게 억울한 일이 있으면 그걸 들어 살펴주는 그런 사람이야. 그러니까 장량이 와서 찾아보고, 그 얘기를 하니까 쾌히 허락을 했어. 그래 둘이 가서 담량 모래밭에 숨어 있다가, 진시황이 지나가는 걸 습격을 했어. 철퇴를 들어서 내리치니까 임금 탔던 수레가 아주 박살이 났어. 가루 가 됐는데, 알고 보니까, 진시황이 제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죄가 있으니까,“내가 언제 습격을 당할지 모르지” 하는 생각에, 앞에는 늘 빈 수레를 하나 먼저 가게 두고 자기는 뒷수레를 타고 있는데, 그걸 모르고 앞의 수레를 습격했던 거야. 붙잡아놓고 “너 누가 시켜서 그랬느냐?” 문초를 하니까 마지막까지 “내가 천하에 옳지 않은 일, 불의한 일을 보면 그걸 한 번 시원하게 뒤집어보자, 그게 목적이 돼서 한 거지, 대장부가 누구의 시킴은 무슨 시킴을 받는다는 말이냐!” 그러면서 마지막까지 굴하지 않고 악형을 당하다 죽었다는 것이 검도령의 전설이야.
그러면 그것도 마지막에, 부득이해서, 힘을 쓴 걸 보면 폭력주의자라고 할 수가 있지만, 사상을 말하면 그들이 다 고래 우리나라에 있었던 평화사상에서 나온 거다, 그런 거 이능화씨의 도교사(道敎史) 읽어보면 잘 나와 있어요. 그런데 그게 뭘로 되느냐 그러면 여기 이 독특한 사상, 이게 위대한 사상이에요.
 
고난을 통한 구원
52장 13 절부터 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이사야」, 제 52장 13~14절)
그랬는데 그 얼굴이 얼마나 상하였는지 사람 같지가 않아. 사람이라 할 수 없으리만큼 그렇게 고난당한 거예요. 그래 그런 사람이지만
무리가 그를 보고 놀했거니와(「이사야」. 제 52장 14절)
너무도 먹지 못하고, 고난 받고 파리하고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고 놀랄 만큼 사람 같지가 않아. 그런 기상을 가진 사람인데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로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이사야」, 제 52 장 15 절)
그러고는 이제 53장에 이어서 내용을 설명해요. 그럼 뭣 때문에 그러느냐. 왜 놀라느냐, 그 말이야. 무슨 힘을 쓰고 재주가 많아서, 전쟁을 해서 나라를 정복했다든지 한다면 놀랄 게 아니지만, 이건 자기가 고난을 겪으므로 인해서 세상을 건진다는 그 말이에요. 이게 53장인데, 이건 구약만이 아니라 신구약을 통해서도 중심된 사상이야. 예수님의 생애가 결국 이거니까, 예수를 그림에 있어, 이대로 소묘를 해서 초상을 그려도 좋다 이거야. 아마 이런걸 많이 읽었기 때문에 그것이 실제 살림에 실현되어 나왔는지도 몰라요.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이사야」, 제53장 1절)
 
보통 상식으로는 알 수도 없는 사람이에요. 보통 사람들은 다 행복을 구하고, 풍채가 좋고 그래야만 그게 덕이 있는 사람, 잘사는 사람으로 아는데, 아 이건 뭐 남을, 전체를 위해서 고통을 받아서 보기에 사람 같지가 않아.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사야」, 제 53 장 1~2 절)
이건 멋을 인생관으로 아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는 말이에요. 그래 내가 자꾸 화가 나서 “어쩌면 생각이 그렇게 돼버렸느냐. 멋을, 멋지게 사는 것을 인생이라, 그런 말 하게 되었느냐?” 하고 말해요.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제53장 3절)
 
아주 못나서, 인생의 찌꺼기가 되어서 생존경쟁에 못 이겨서 저렇게 된 사람이라, 못난 놈이라, 그렇게 봤다 그거야. 요새도 그렇게 보지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이사야」, 제53장 4절)
그런데 실은 뜻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게 아니야. 그는 우리의 져야 할 질고, 병과 고통을 대신하여 지고 가느라 그렇다 그 말이에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제 53장 4절)
이것이 인생의 의의를 얼마나 깊이 해석을 하느냐 못하느냐 나타낸 거야. 병도 많이 앓고 못 사니까 “저놈은 하나님한테 벌을 받아서 저렇지” 하고 그렇게 생각하기 쉬워. “그건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라의 짐을 대신 진 거다” 하는, 그렇게 하는 것과 그 어느 생각이 깊은 생각이냐.
 
전번 날도 얘기했지만, 그때 요양소에서 있었던 얘기, 남이 보기에는 그것이 기적이라고 했을는진 모르지만, 그때 내가 줄곧 말해준 것, 내 말의 요점이라는 건 “병은 네 병이냐? 나라 모양이 이렇게 됐으니” 물론 나라 모양이란 경제적인 것도 있지만, “도덕적으로 나라 상태와 민족정신 상태가 이렇게 됐으면 어느 놈이 앓아도 폐병을 앓고, 문둥병을 앓고…… 이거 문둥이 폐병장이 들끓게 생겼어.” 사람이 이렇게 살면 병이 나서, 사람이 못쓰게도 돼. 사람이 못쓰게 돼서 그만 병이 나기도 해요, 제가 못쓰게 되어서 제가 병나는 것 그런 게 아니고…… “사람이 온통, 마음씨가 나빠지면 나쁜 병이 든다.” 지금 보기에는 미신 말이에요. 지금 그 말을 그대로 믿으면 미신이 돼버려요. 그러나 옛날에는 뭐라고 그랬는고 하니 “문둥병이든지 폐병이라는 건, 아주, 하늘의 천벌을 받아서 그런다”고 했어.
여기에도 폐가 나빴던 사람들도 있고 문둥이, 문둥이도 었었는지 모르겠소만, 있다면 좀 어려운, 뭐 어려울 것도 없어. 거 어려운 거 없어. 그렇게 들으면 안돼.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문제가 심하거든. “그것은 형벌을 받은 병이다”라고 그러기 때문에 누가 그를 가까이 하려고 하질 않아. 자기도 또 부끄러워서 감추고 말하지 않아. 젤 나쁜 것이 폐병 걸린 다음에 그걸 숨기려 하는 거, 문둥병 들린 다음에 숨기려고 하는 거 때문에 낫지 못하고 죽는 거야. 그런데 지금 알고 보면 그 두 병이 다 고쳐지는 병이지, 못 고치는 게 아니거든. 그런데 거 무슨 생각인고 하니 “천벌받아 그런다”고 했는데, 그건 왜 그랬느냐 하면, 이놈 참 지독하고 나쁜 병이야. 불치의 병이고 하니까, 뭐를 도덕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인지라, 그런 말 나온 건 무리도 아니에요. 다만 그것이 어느 정도 깊으냐, 얼마만큼의 깊은 생각에서 나온 말이냐 하는 것이 문제예요.
 
개개인으로 하면 그렇게 들어맞지는 않아. 그러나 사람의 살림이 본래 개개인으로만 되는 게 아니야. 전체적으로 되는 거예요. 전체적으로 되는 것은, 내 속에 들어 있는 이 체질이라고 하는 거, 이게 민족이라 그 말이야. 괜히 그대로 있는 눈이 못생긴 듯해서, 가서 정형수술해서 눈썹 해박고, 코가 낮아서 못쓰는 듯해서, 코 높이고 하는 건 민족 반역하는 거다. 그게 민족 반역이라고 하는 건, 모처럼 이 민족이 그대로 좋은데 무슨 제 생각에 잘못된 것 같아서, 고치고 하는 게 민족 반역 아니냐. 병이 결코 개인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전체적으로 되지. 병이 결코 육체적으로만 되는 게 아니에요. 정신 속에 한데 어울려든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런 것을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민족이 온통 색어 있어서 그 썩음을 어느 누군가는 짊어져야 돼. 그런 의미에서, 이거 천벌 받아서 그렇다 하는 것, 참 깊은 사상이란 말이야. 고난으로 인해서 다시 나게 된다, 재처분이 된다. 예수라는, 구세주라는 인격이 결국 그건데, 그 사상이 참 깊은 거야.
 
귀한 자식 회초리를 많이 주라
우리나라 사람은 원래 어느 면으론 착하디 착하지만, 다른 한면으론 굉장히 낙천적인 사람이에요. 낙천적인 것 좋긴 좋아요. 여러분『삼국사기』를 한 번 읽어보시오. 그러면, 거기 나오는 말을 보면, 본래 음악을 좋아한다, 가무를 좋아한다고 그랬어. 요새 들은 거, 다 듣기 싫은 소리였는데, 듣기 좋은 게 하나 있어. 호메이니의 말 “거 음악 좀 그만두라고 그래라.” 거 참 좋은 말이야. 음악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소위 호메이니 말로 그래. “방송에서 나오는 걸 들어놓으면 젊은이들의 마음이 왼통 죽어버린다.” 옳은 말이야. 그걸 국가의 권력으로 금지하겠다는 건 잘못이야. 나쁜 음악은 좋은 음악으로 구축해서 없애고 그래야 옳은 거지. 나쁜 문학은 좋은 문학으로 내몰아야 하고, 나쁜 법률은 좋은 법률로 내몰아야 하고 그러는 거지, 그걸 폭력으로 이룩할려고 하면 잘못이 생겨.
확실히 우리의 낙천적인 건 좋은데, 낙천적인 고로 생각이 옅어져버려. 건성에서 놀아. 속알이 깊어지지 못하고 건성에서 놀게 되는데, 그러니까 요렇게 아주 지독히 파고드는 성질도 부족하고. 연구할려면 지독히 파고들어야 하는데, 그게 암만해도 우리 민족은 좀 부족한 사람들이야. 무슨 일을, 큰일을 할려면 어려움도 많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해야 하는데, 모험하는 정신 좀 부족한 사람들이야. 간디도 인도 사람을 얘기하면서 “우리 민족이 모험심이 아주 부족하다. 이 인도 사람들의 중심이 되는 중류사회 사람들이 상기도 자식들을 비단과 무명의 좋은 옷으로 싸서, 보자기에 싸서, 이불에 뚤뚤 싸서 기를려고 하는 한까지는 인도, 바로 안될 거다” 그랬어.
 
그래 우리 옛날에도 자식을 정말 사랑하거든 회초리 많이 주라고 하지 않았어. 증아(憎兒)여든 다여식(多與食)이요, 미운 자식이거든 먹을 거 많이 자꾸 주고, 연아(憐兒)여든 다여봉(多與捧)이라. 귀하게 생각하거든, 그 자식 회초리 많이 주어 책망해주라. 그런데 거꾸로 됐어. 그렇게 하는 것, 귀한 놈 책망하는 것은 안된 일, 잘 보살피고 잘 먹이지 못하는 건 다 불행하고, 애들한테 자꾸 좋은 걸로 해주는 것은 잘하는 일로 생각하는데……,잘살아보자는 것, 소위 잘산다는 얘기 하는 것 그게 지배적인 관념이 되는 건, 그건 아무리 선진국이라 해도, 그리고 또 선진국에서 하는 일이지만, 그게 무조건 좋은 얘기인 줄로만 알지만은 않아야 돼.
그런데 국가에서 썩 잘 애용하는 표어, 곧잘 내세운다는 것이 “우린 복지국가 건설한다.” 난 그 복지국가란 소리 아주 듣기 싫어. 새벽이면 거의 매일이다시피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하는 요놈의 소리가 참 듣기 싫어. 얼마나 잘살아보겠다고 그래.
그거 얼마나 지독한 사람들이야. “바로 살아보세, 바로 살아보세” 하고 가르친다면 잘 살 수 있지만,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하면 다 나쁜놈 되고 만다 그 말이야.
 
잘살기 위해서는 무소불위(無所不爲)예요. 못할 게 없어요. 잘살기 위해선……. 그래 ‘잘’이란 좋은 의미로도 쓰이지만 나쁜 의미로도 쓰이는 거야. 그런데 그것이 아주 우리의 인생관이 돼가지고, 정부가 그걸로 일부러 고칠려고 하고 있어. 서양 선진국이란 것도 역시 그런, 사회 복지라는 것, 그것만 강조해.
옛날에는 그렇지 않아요. 사람으로서 도리에 이르느냐, 아니냐.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 물론 그것만 하다가 그만 너무 잘못된 점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는 불행이 있기는 있었지만, 그 불행이 그다지 지독하진 않았어. 지금은 잘못만 되면 해독이 심한 건, 이건 그냥 썩어버려. 옛날에는 가난하고 병들고 해서 고생은 되고 했지만, 썩는 건 그렇게 없었는데, 지금은 썩어버려. 뼈대가 없이 물렁물렁하니까 안 썩을 재주가 없어. 그 썩는 건 옮아가는 법. 한 놈이 썩으면 옆에 있는 놈도 반드시 썩어. 안 썩을 수 없어. 그게 지금 사회현상 아니오. 그런 걸 생각하면서 이걸 보면, 그러니까 구세주 하나님, 하나님은 구속하는 하나님인데, 구원을 한다는 데는 고난이라는 게 어찌할 수 없이 들어 있는 거야.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자기희생이야.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오는, 받는 고난. 그저 고통만이 아니고, 고통보다는 전체가 받을 것을 내 몸에 받는 것이니까, 영어로 하면 suffering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저 pain만이 아니야. 그저 아픈 것만이 아니에요. suffering 이라고 하면, 아프기도 하지만, 내가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걸 견딘다, 내가 그걸 응낙해서 한다는 뜻이 있지 않아요. 그런데 간디는 suffering을 생명의 한 근본 원리라고 그랬어. 생명 있는데 suffering 없는 거 없다. 그건, 그저 내가 왜 이렇게 골치가 아프지? 나는 왜 이렇게 배가 아프지? 나는 왜 길을 조금만 걸으면 어깨가 쿡쿡거리며 쑤셔오지? 그저 왜 그러냐 하고 무심히 지나갈 수 있지만, 그런 건 생각해봐야 돼.
 
生動之死地者 十有三
구약성경이 뭐예요? 다른 게 아니야. 그거 자꾸 풀려는 거야. 왜 사람이 아프지? 왜 사람은 죽지? 지금은 뭔고 하니, 사람이야 으레 죽는 거. 이거 참 나쁜 거예요. 그거 의문도 한 번 안하고, 그러고 있어서야…… 아주 못생긴 것들이야. 옛날에는 안 죽어보려고, 이거 어떡 하면 안 죽지? 안 죽을려니까 얼마나 애를 썼겠어. 이렇게 하는 데서 이런 철학 저런 철학이 나왔는데, 지금은 과학이 증명하길 “사람의 수명엔 한정이 있다. 아무리 건강하다 하더라도 늙은 담에는 세포가 약해져서, 분열하기를 그만두고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니까 사람은 죽고 마는 거다.” 그러니까 “그렇담 나도 같이 죽겠지” 그러고, 아주 죽음에 대해서 승낙을 해버려.
그러니까 그게 사지도(死之徒), 노자 말에 있는 생지도(生之徒)가 아니고 사지도야. 생지도가 십유삼(十有三)이요, 사지도가 십유삼(十有三)이라. 생동지사지자(生動之死地者)가 십유삼(十有三)이라. 사람이 열이면 그 중에 산 놈이 세 사람이나 돼. 열 사람이 있담 “살아야지,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야지” 생각하는 게 십유삼이요, 또 열 치면 사지도가 “그거 뭐 죽으면 죽었지, 거 뭐 별로 죽음……” 하고 미리 죽기부터 먼저 하는 게 또 십유삼이란 말이야.
 
오산에서부터 친구였는데, 동창이고 재주 있고 마음도 좋은 사람이에요. 나중에는 서울 경성제대에서 의과공부 해가지고 의사 잘 하던 분이요, 6.25 때는 군의관 노릇까지도 하고 그런 분인데, 나하고 동갑이에요. 이 분이 죽은 지는 이미 여러 해가 됐어요. 한 육십 돼서 죽었는데, 참 아까운 사람이에요. 오산 있을 때 둘도 없는 친구였는데…… 이 사람이 의사 된 후에 술을 먹기 시작했어. 술을 먹을 수가 있나. 그 사람 본래 술을 먹게 생긴 사람이 아니에요. 어찌나 단단하고 그런 사람인데. 그의 부인도 보고 부러워할 만큼 친하고, 그래 난 아무래도 저이처럼 사람이 단단치 못하다 하고 그러던 사람인데, 어지중간에 그랬단 말씀이야. 병이 어디 들었는진 모르겠어. 하여간에 병이 어디 든 데가 있긴 있어. 내 추측으로는 병이 어디 들었는고 하니, 본처 이혼한 데서부터 든 것 같애. 본래 어려서 장가 들었거던. 그래서 사랑이 없고 해서, 주위에서 어른들이 반대를 많이 하고 그랬는데, 성격이 원래 딱 자기가 있는 사람이니까, 한번 그런다고 한 다음에는 할 수 없었지. 난 그래 동정을 하기는 해.
그래 본처와 이혼하고 해주 병원에서 같이 알게 된 이와 결혼하고 그랬는데, 그게 원인이 되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고. 아무리 친구이긴 하지만 잘라 말을 하지는 못해. 하여간 그렇지 않던 사람이 술을 먹었는데, 내 듣고 놀랬어. 술을 먹고 그러니까 누구들이 “아니 거 좀 마시오. 몸이 나쁜데 그러시오” 하니까 “그거 뭐 안 먹음 뭣해. 그저 그러다가 죽을랍니다.” 듣고 참 슬펐어. 그 사람이 그렇게 될 줄은……
 
사람의 마음이란 참 단단한 것 같지마는, 어느 중심에서 고장이 나면 그만 그렇게 돼. 그거 참 얼마나 슬픈 말이야. “허, 거 뭐, 그래 보면 뭘 해.” 그러니 중심에서 뭔가 없어져 패배한 거야. 사람은 죽으면서도 그건 악착같이 부르쥐어야 돼. “내가 죽으면 죽었지 이건 못 놓겠다.” 이게 사람이지, 하다가 그만 안돼서 “에이, 까짓거 뭐. 그러니까 술 먹는 거 좋은 일이 못되는 줄 알지만, 그것 뭐 그래 보면 뭘 해. 이러다 그저 죽을랍니다.” 마음이 이렇게 된 다음에는 술도 먹을 터이오, 뭐는 안하겠어요. 그러니 젊은 분들은 이거는 알아야 돼. 잘못된 일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그것에 매달려서 자기를 죽일 순 없어. 물론 잘못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지. 하니까 잘못 절대 안하도록 해야 해요. 간디가 뭐라고 그랬는지 아세요? “아무리 나아도 허물은 허물이다.” 참 무서운 말이에요. 아무리 병을 고쳤다고 해도 “웨이티 샬 웨이티” 찢어진 덴 찢어진 데지. 그거 없애지 않고, 찢어진 데 없애려고 애쓰지 않고, 찢어지지 않고 일생을 마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어느 때 잘못된 것으로 인해서 마음에 금이 가면, 그만 그 다음에 회개하겠지. 회개해서 아물기는 아물겠지마는, 그리고 아물어서 그전보다 더 좋게 쓸 수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렇지만 아깝기는 아까운 거야.
 
필연적인 유익한 죽음
그러기에 간디가, 비노바가 열아홉 살에 자기에게 왔을 때 그랬어. 비노바가 열아홉 살까지 공업학교 다니면서 “이제 나도 독립운동 해야지. 폭탄을 만들어가지고 이놈의 영국놈들 죄 폭격을 해가지고 우리나라 독립시키겠다. 아주 열심있는 투쟁하겠다. 그래 이제 졸업장 다 필요 없다” 그래서 아궁이에다 졸업장 불사르고 있으려니까 어머니가 있다가 물었어. “너 거 뭐하느냐?” “예. 제 졸업장 이거 불태워요.” “이 자식아, 그건 왜 그러느냐?” “엄마. 나 이제부터 큰일 할 거요.” “너 임마, 네가 큰일은 무슨 큰일을 한다고 그러느냐?” “두고 보세요” 그랬단 말이야.
그래 이제 혁명길로 나갈려고, 그래 간디가 하도 유명하다니까 이제 간디를 찾아 갈려고 그랬단 말이야. 그래 간디를 안다는 사람이 하나 자기 동네 있었는데, 그 사람 찾아가 보니까, 이 사람 다른 건 안하고 물레만 돌리고 있단 말야. 영 답답해. 저거 가지고 되겠나? 간디한테 직접 가봐야지. 그래 간디한테 직접 갔어. 가니까 간디도 그걸 돌리고 앉았단 말이야. 그래서 “선생님, 우리 인도가 어떻게 하면 독립됩니까?” 그런데 참 용키는 용한 모양이야. 간디가 그거 뚫어본 모양이야. “너 설마 폭탄 만들어가지고 때려잡고 싶다 이런 생각은 안하겠지?” 떡 이래 놓으니까, 그래 그 생각 가지고 갔는데, 그거 정문의 일침 아니오. 우리 속담에 있는 그런 그 말이야. “너 설마 그런 생각은 안하겠지?” 그래 놓으니까, 그래 그게 되겠어요? 그래 말을 해주니까 듣고 감격해서, 엎어져서 ‘필연적인 유익한 죽음’ 했어.
 
그렇다고 이제 비노바가 됐는데,간디가 비노바한테 하는 말이 “너는 아직 여자가 뭣인지를 모르니까 참 행복하다.” 자긴 이미 장가갔다 그 말이야. 물론 간디가 반드시 성은 죄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사람이 영적인 데로 정진을 해나갈려면 그런 생각 안하면 안된다는 것이야. 물론 누구든지 간디처럼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미 결혼해 본 사람, 그래서 실패 실패 거듭하다가 서른아홉에 가서야 딱 갈라지고 부인과 자매같이 지내기로 됐던 거야. 물론 간디 부인도 첨에는 잘 응낙을 안하다가, 그래도 잘 생각하고 그런 일이라 나중엔 응낙했지. 여담이 되는 얘기요만, 이제 그러는 간디니까 비노바를 보고 “너 참 좋겠다. 여자가 뭔지를 경험 안해봤으니까 너는 참 좋은 거야” 그런 거야.
그런데 다 상처가 있는 사람이니까 “웨이티 샬 웨이티.” 터진 데는 아물어도 터진 데지. 아무리 아물어도 터진 데는 터진 거지. 안 터졌다고 할 수는, 안 터진 것만은 못해. 본래 타고난 이 깨끗한, 여기서 ‘깨끗’이 뭐 별건가요? 가능성만 가지고 났으면 깨끗이지. 유전이 우리에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그 타고난 가능성을 잘못을 안시키면 그보다 더 좋은 것 없는데, 그렇다고 어떻게 해서 잘못되게 했으면 그렇다고 내버려서는 못써. 그랬다고 낙망해선 안돼요. 아까 내 친구 모양으로, 그러다 죽을랍니다, 그건 못써. 죽어도 그러진 마세요. 안될 때는 안되더라도, 죽는 순간까지라도 어떻게든지 살아봐야지. 산다는 거 이 몸이 산다는 거 아니지만, 내 속이 살아서 악착같이 힘써야 돼.
 
놓아선 안된다
힘을 써야 돼. 이 생에서 안된다면 내가 일곱 번 여덟 번 나서라도 이것은 내가 기어이 고쳐놓고야 만다, 그게 믿음이야. 붙잡는다. 놓지 않아야 돼. 세상에서 좋은 선생을 만나는 것처럼 행복하고 좋은 건 없어요. 좋은 선생이 무슨 좋은 거다 해주어야 되나요. 그때 나한테 필요한 말 한마디 탁 해주면 돼. “놓아선 안된다”는 거. 난 일본에서, 고보리(小堀)상은 잘 알지, 찌가모도(塚本 虎二 쓰가모도 토라지) 선생한테서 들은 말이에요. 우치무라(內村) 선생 같지는 못하지. 그렇지만 그래도 그이는, 우리 선생도 참 존경하고 그러는 선생이지만, 그이는 나하고 맞잖는 데도 있어요.
대동아전쟁 때 마지막에는 약해져서인지는 모르지만 영·미국 비난하고, 그런 것이 맞지 않아가지고 내 성서지식을 받아보다가 그만두고 나온 사람이지만, 내가 마지막 나올 무렵에, 특별히 나보고 그런 건 아니지만, 신앙이란 별게 아니야, “하나사나이고도,” 놓지 않는 일이라고 그랬어요. 거 잘 들어두세요. 어떻게 하면 내가 내 자신, 난 그래요. 남을, 남의 죄를 용서하라고 그러지만, 그렇지만 우리 첫째 남이 누구야? 네 이웃의 죄를 용서하라 그러지만, 내 첫째 이웃이 누구야? ‘나 자신’이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이 사람’을 용서해줘야 돼. 남은 다 죽일 놈이라고 그럴는지는 몰라도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잖아. ‘이걸’ 죽여 버릴 순 없잖아. 어떻게든 다시 살아나도록 해야지. 남이 세상에서 비난하는 거 무섭지 않아. 그까짓 거 신문에 나도 일없어. 잡지에 나도 상관 마세요. 상관없어. 열 번 있어도 괜찮아. 나까지 ‘그 사람’을 죽여 버리면 안된다 그 말이야.
첫째는 물론 그런 데 안 나고, 절대로 그런 일 없어야 되는 거지만, 불행하게, 어떻게 잘못이 생겼다 해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 낙망해서는 안돼. 왜? 왜? 내가 내가 아니야. 하나님이 준건데, 내가 맡아가지고 나온 건데, 내가 어떻게 날 죽이고 살리고 할 재주가 있어. 자살할 수 없다는 것 그래 그러는 거야. 자살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거 아니에요. 자살하는 것도 자살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용기도 있고 책임감이 있는 거지만, 자살하는 걸로 해결 안된다 그 말이야. “네가 네 몸이냐? 모처럼 좋은 일 해보랬는데, 이 자식아, 네가 왜 버리느냐?” 아무 때 가서도 묻는 주인이 계시다 그 말이야.
 
생이란 누구도 알지 못하는 큰 세계 속에서 나온, 이 난데, 내가 조금 해보다가 뭐라고 그만두고, 일 년쯤 시험해보다가 안된다고 낙심하고, 이 년쯤 해보다가 안된다고 자살하고……
그건 어느 한 사람의 잘못 아니라 이 민족이 당최 끈기가 약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도대체 전체의 인생관이 고장이 났기 때문에 그래. 그놈만이 잘못이라고 그러지 말고, 이놈의 민족 왜 이렇게 돼가느냐, 전체의 공기가 맑아야 건강하지. 내 말이 나라가 이 꼴이면 폐병이 나게 마련이고, 문둥이가 나게 마련이다. 전체의 공기가 썩어진 다음에는, 전체의 피가 썩어진 담에는 문둥이 나는 거고, 전체의 공기가 흐려진 다음에는 폐병이 있게 마련이다 그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전체가 중요한 건데, 그 전체를 구체적으로 대표하는 것이 ‘나’니까 감히 ‘나’를 홀대할 수 없다 그 말이야. 잘해도 내가 한 것처럼 그럴 수 없고 잘못해도 내가 한 것처럼 이렇게 수그러들 수 없고, 또한 잘한 것도 내가 한 것이 아니야. 그렇다면 이 나는 아무 의미도 없어? 그렇진 않지. 전체 걸음, 요걸 말하자면, 요것을, 요건 내가 알아, 내가 기다, 내가 한다, 알아차려 하는 건 내가 해야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란 귀하지. 귀하지만 남을 업신여길 만큼 귀하진 않아. 또 그걸 잘못하면, 부끄럽지. 부끄럽지만 내버릴 만큼 부끄러운 건 아니야. 그럴 수 없어요. 자랑도 아니고. 자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자기를 내 버리지 않을 수 있어. 자기를 내버리지 아니하는 사람이 자기를 자랑하지 않을 수 있고……. 어쨌건 ‘나’란 마음이 남아 있은 담에는 잘 되었으면 자랑할려 그러고, 못되었으면 비관하고 그러는 거야. 믿음이란 그러질 말라는 거요. 이래서도 못쓰고 저래서도 못쓴다. 너를 보지 말고 나를 보라. 하나님을 봐라. 근원만 바라보는 거지 왜 그러느냐? 그러니까 믿음만이라, 글로 인해 사는 거라고 그러잖아요.
 
꽉 들어찬 ‘대속의 원리’
그런데 그 가운데서 알 건 뭔고 하니, ‘대속의 원리’가 꽉 있다 그말이야. 대속의 원리. 전체의 짐을 누군가가 져야 해. 전체 다른 사람이 다 못 지는 수가 있어도 누군가가 져야만, 그로 인해서 살아간다 그 말이야. 그게 집에서는 누군고 하니 첫째는 어머니예요. 어머니가 대신 지는 사랑이야. 하나님이 어머니의 모성애를 그렇게 넣어줬어. 그렇기 때문에 자기 생각 안하고 우선 자식 생각만 하는 게 어머니예요. 또 아버지란 건, 난 팔십이 돼 와서야, 지난해에 와서야, “내가 맨 첨으로 하나님 모습을 본 것은 우리 아버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가 뭐 하나님 그대로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란 건 뭐냐? 하나님의 성격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나타나 보이는 이가, 그게 아버지가 아니냐. 세상에, 거저 둘이 한방에 자가지고, 세포 조금 들어가고 알이 조금 나와서 그렇게 해서, 자식을 낳고 뭐 그런 것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것 중에서 근본이요 사랑이, 그런 걸 대표한다면, 첫째 내가 들어본 건 우리 아버지한테서란 말이야. 어 머니한테서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예수님도 그랬을 거야. 그자리에 가니까, 세상에서, 아버지를 이쪽에서 알자, 세상의 아버지는 내 아버지가 아니야. 세운 이가 정말 아버지이지. 나를 낳아준 아버지를 존대해서 그러는 건 아니야. 그런 의미에서 그러는 거지. 그런데 그렇게 된 나란 점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십자가를 진다 이거야. 낳을 때부터 벌써 십자가야. 그러니까 올라가면 천지창조부터가 십자가라고 나는 그래. 하나님이 자기희생을 안하고 천지창조가 되었겠느냐고 나는 그래. 완전한 하나, 완전한, 완전한 하나님이라면 만들기는 무얼 만들고, 무얼 나와 그래.
 
내가 문구를 그렇게 잘 생각하지는 못하겠지만, 어릴 때 유영모 선생님 그렇게 말하면서부터 그랬던 것 같애. “천지창조 때부터 잘못되었다.” 이거 보통 말이 아니에요. 안됐다면 참 안된 말씀이고, 감히 그럴 수가 있어요? 그리고 불교에서도 그런다고 그러잖아요. 나 그 중 모르지만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고 그러니까, 그건 듣기에 좋지. 그래 ‘유아독존’ 참 좋다. 석가가 유아독존이면 나도 유아독존이지.” 그러고서 좋다고 그래. 그랬는데 어느 중이 그러지 않았어?
“고 석가란 놈이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고?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저 쇠망치로 대가릴 부숴버릴 걸 그랬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잘못되었나요? 그러니까 그거 참 자리에 가지 않고는 그 말 못 나와요. “고 자식 고거, 그저 철퇴로 바숴버릴 건데!”
여러분이 서양 철학에서 보면 ‘코기토 에르고 숨’하는 말 잘 알지요. “내가 생각한다. 그런 고로 내가 있다” 나도 그런 건 해봤어. “고 자식 이 제가 뭘 사유한다고 그랬어. 제가 생각하는 게 어디 있어. 하나님께서 당초 생각하니까 내가 있다, 건방지다면 건방지다.” 그러고 나서 생각을 해봐야 돼. 그래야, 그런다고 그럼 그거 다 쓸데없는 거냐? 그건 아니에요. 말은 다 자유자재야.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하고, 말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되어야, 그게 뚫린 사람인 거야.
어떤 때 아버지를 찾으면 “이 자식아, 죽으란 말이야. 뭣 하려고 세상에 나왔어.” 또 어떤 때는 말이지 “이 자식아, 살 생각은 않고 왜 그래” 그리고 어떤 때는 “사람이 좀 착해야지, 너 그렇게 해서 뭐 될래?” 뭐 이렇게 했다가 저렇게 했다가 그러니, 그건 왜 그러지?
아들을 위해서, 산 걸로 대접할려니, 이렇게 했다가 저렇게 했다가 하지. 아무리 바람이 이리 불고 저리 불어도 큰 나무는 꼿꼿이 서는 거야. 바람이 이리 불고 저리 불어 흔들리는 데서, 나무는 뿌리를 점점 깊이 박아서 큰 나무가 되는 거야. 선생이라는 건 그저 제 기분나는 대로야. 죽어라 했다, 살아라 했다, 먹어라 했다, 먹지 말아라 했다. 그러니까 그 말을 듣다가는 미쳐버리고 말아, 미쳐버리고……
그러니 여러분들이 다른 훌륭한 글을 봤을 때는, 그러는 줄 짐작하고 봐야 돼. 그거 모험이라면 모험이지. 그러니까 말을 사뭇 쉽게 하는 건, 풋내기 때 말이 자꾸 쉽게 나가는 것이지, 그런 생각을 자주 하다 보면 말이란 건 차차 쉽게 못 나가. 그들이 요거 어떤 의미에서 나오신 말일까? 그런데 그것도 곁가지로 나간 말이고, 이제 하나님이 본래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건, 생명의 원리에 그게 있어. 대신하는 게 있어.
 
여기 내 몸 이거는 뭣 때문에 있는 것이냐? 그저 먹자는 것, 보자는 것, 듣자는 건데, 그럼 나는 그저 내가 살기 위해서, 좋기 위해서, 할 만하면 그것도 보자 그러고, 들을려고 그러고, 먹을려고 그러고, 만지려고 그러고 그저 가만있지를 않지만, 이것 하나 때문에 우리 속에 이 속에 밤낮 고생하는 이가 있어. 봐서 고생당하는 이 늘 때마다, 고생 당하는 이 많을 때마다, 고생당하는 이 하나 있잖아요. 그거 그렇게 고생을 당하는 탓으로, 여기 이 속에서 십자가를 지는 이가 내 속에 하나 있기 때문에 내가 사람 됐다 그 말이야 그럼. 배가 아팠기 때문에 내가 사람 노릇 했지. 배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내가 사람 노릇 했겠느냐? 못 했을 거요. 처먹어도 처먹어도 아픈 줄 몰랐다면 내가 사람 노릇 못하고 죽지 않았을까요? 그러니 그거 한 가지 실례지만, 모든 일에 하면 할수록 생의 일에 짐이, 고생이, 아픔이 있는데, 좋아서, 감정에 따라서 좋고자 해서 그러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속에는 고통을 겪는 이가 있어.
그게, 그이가 고통을 겪으므로 해서 내가 살아난다 그 말이야. 너무 지나치게 먹으면 배가 아프기도 하지, 머리가 아프기도 하지, 기운이 없기도 하지. 너무 많은 걸, 너무 많이 음악을 듣고 나면, 들은 건 좋아서 들은 건데, 또 듣고 나면 싫증이 나기도 하지. 세상의 모든 일치고 마지막에 고통스럽지 않은 거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말에 좋아서 죽겠다. 아파서 죽겠다. 슬퍼서 죽겠다, 그저 죽겠다는 거예요. 이 ‘죽겠다’는 게 뭐예요. 기쁜데 왜 죽겠어. “아이구, 난 참 좋다. 죽고 싶도록 좋다”는 거야. 아닌게 아니라 좋아하면, 좋아하는 뒤끝이 죽는 거야.
그래 옛말에 호사다마(好事多魔)라. 좋아하는 일에 악마 많다. 좋은 놀음 하자면, 좋은 놀음 하면 나쁜 것만 있다 그 말이야. 다행히 좋은 놀음만 하는데, 그 중간에 나서서 그걸 못하게 하느라고 고통을 겪는 이가 있어.
 
그것이 내 주님이란 말이야.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매달린 그 예수가 주님이 아니라, 예수님도 자기 속에 모셨던 그 주님 때문에 주님이 됐어. 자기를 옳게 만들려고 해서 고생을 하는, 부모님을 따라 가다가도 부모님과 같이 안 가고 혼자 헤매이면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뭣 좀 알아보고 가야겠다, 하고 부모님 걱정을 시켜서 자기 맘이 좋았을 리가 있소만, 어려서부터 그랬다는 데가 그게 보통이 아닌 데가 아니오? 평안만 구하면 산 사람이 아니오. 그러니까 그도 마음 편안치 않은 데가 있었어.
그래 성경에 그런 말은 없는데,「히브리서」의 기자만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예수님도 살아 계실 때에 자신을 음에서 건지기 위해 눈물과 탄식으로 기도했다”고, 통곡으로 기도했다고 했어. 어디서 출처를 얻어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거짓말이 될 리가 없지. 그저 ‘참’ 전해준 거야.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은 근심해본 일도 걱정해본 일도 없다. 그저 나기를 본래 하나님을 알고 났기 때문에, 어디 가서든지 맘대로 척 말만 하면 모든 게 다 되고 그런 인줄 알지만, 예수님도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했고, 받으신 고난으로 인해서 아들 되심을 얻었다, 그랬어. 받으신 고난, 그걸 통해서 완전함을 얻어서 아들 되는 경지에 갔다 그랬어.
 
통회하는, 아파하는 영혼
「히브리서」가서 고쳐 읽어보세요. 그러니까 우리 생명의 고통이란 것은 뗄 수 없는 원리예요. 그거, 그 고통이, 그것이 사람의 원리예요. 그건 누가 왜 그렇다고 할 수가 없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지. 그러니까 개개인으로 봐도, 내 속에, 내 한 몸속에, 날로 인해서, 나를 살리기 위해서 고통 받는 이가 있어.
내 입은 설탕을 먹으면 먹을수록 좋다, 달다, 달다, 그러지만, 내 이 속에 “어이구 그거 이젠 못 먹겠다. 그거 이젠 먹으면 안되겠다” 그러는 것이 있어요. 반대되는 이가 여기 있어요. 자리에 드러누우면, 편안하고 싶어서 눕지마는, 이 속에 뭔고 하니 “아이고 너무 드러누우면 못쓰겠다. 일어나거라. 일어나야 하겠다” 하는 이가 누구예요. 이쪽으로 누우면, 조금 못 가서 못 견디어서, 이쪽으로 돌아눕고…… 거 누가 그러는 거예요. 도대체 돌아누우라고 하는 이가 누구예요. 일시를 가만 아니 두고 자꾸 이러는 이가 누구예요. 내 욕심은 아니에요. 욕심이란 건 잘 알아서 그러는데, 그러니 그래 놓으니 괴로울 수밖에 없어요. 더위도 괴롭고 추위도 괴롭고 돈이 많아도 괴롭고 없어도 괴롭고.
그것을 내 잘못을 대신 지는 나의 참 자아라 그럽시다. 대문자로 쓴 Self라, 인도식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영혼이라. 그게 있어서, 그러니까 성경에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이 “나는 소로 제사 드리고 양으로 제사 드리고 하는 그까짓 제사보다도 말이야, 통회하는, 아파하는 영혼이 젤 좋더라”라는 게 별게 아니야. 구약에 있는, “그 기름지고 그 피가 뚝뚝 흐르는 제사” 그걸 드리면 복을 받을 줄 알지마는 “난 그것보다는 통회하는 심령이 더 좋더라.”
 
아파하는 영혼, 영혼인 담에는 아파 안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런고 하니, 이놈, 이 눈이란 놈은 자기 뜻대로 못하니까. 자기가 다 우연히 하기는 하지만 그 일만은 잘못해요. 그러니까 그 고통으로 인해서 이것이 살아가게 돼. 그리고 먼저 좋은 것은, 나는 좋다 쾌감을 얻지마는 불쾌감을 얻는 이는 내 영혼 혹은 내 양심, 그 불쾌감을 밤낮 24시간 갖는 양심으로 인해서 내가 살아난다 그 말이야.
이거 뭐 어렵게 생각 맙시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고로, 그런 말 말고, 우리 몸에 단축되었던 그 원리를 전체에다 적용해서 사신 이가 예수님이에요. 그러니까 그가 우리 죄를 대속했다, 그러는 거예요.
 
 
친우회보 1980 겨울호
저작집30; 21- 85
전집20; 11-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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