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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의 메시아 - 이사야서 풀이4
글쓴이 : 바보새 날짜 : 2013-09-12 (목) 15:01 조회 : 2131
수난의 메시아
「이사야서」풀이 II
 
 
그러니까 개인으로 봐도 내 한 몸속에 나로 인해서, 나를 살리기 위해서 고통 받는 이가 있지만 민족으로도 그것은 그렇습니다. 민족이 지고 가야 할 짐이 있다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누군가가 지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대속해야만 된다 그 말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제 53 장 4 절)
 
내게 고통이 있는 것은 나더러 사람이 되라고 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그 뜻을 찾아보지는 않고 그저 “아이구, 못 먹을 거 잘못 먹어서, 아무개가 날더러 괜히 먹으라 그래서 그랬어.” 이런 식으로 밖에 생각을 못해서는 안됩니다. “이건 왜?” 하고 생각을 해보아야지요.
하나님한테 벌을 받아서 그런가 그렇게 생각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에서 온 것이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면 이 인간의 욕심에 먹기를 그만뒀겠습니까? 배가 터지도록 아마 먹었을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제53장 5절)
 
그러니까 알기 쉬운 실례로 성삼문, 박팽년이 목을 잘리고 죽지 않았으면 이 민족의 양심이 계속 살아 내려오지 못했을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요새 역사교과서에, 아 보시오, 사육신에 대해 쥐꼬리만치나마 몇 자 나기는 났지만, 그것도 과한 것 같아서, 사육신을 “너무 강조하지 말라” “세조 욕 너무 하지 말라” 그런답니다. 그래 내가“왜? 살아 있는 세조 때문에 그러냐?”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된 나라입니까? 도덕이 어디 있습니까? 감히 그럴 수가 있어요……
이것이,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가 그렇게 됐기 때문에,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하는 이것. 우리가 그를 불쌍히 여길 게 아니라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다행히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노릇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제53징- 6절)
 
왜 그렇게 하셨을까? 앞서 가다가 웅덩이에 빠진 것입니다. 앞선 사람의 운명은 그런 것입니다. 도덕으로 앞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식으로 앞섰다는 것, 사상으로 앞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밤낮 욕먹기 마련입니다. 선각자, 선구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제 선구자노래 부롭디다만, 선구자의 노래 부르면 부를수록 나는 건 눈물밖에 없습니다. 그전에 그러던 사람들 다 어디 갔습니까? 이름 할만한 선구자 노릇했던 사람들 다 비참하게 죽었을 뿐입니다. 비석 섰다고? 그 사람들 비석 생각하지도 않은 사람들입니다. 본래 그저 그럴려고 나왔던 사람들입니다. 어, 뒤에 와서 잘이나 하는 것처럼, 무덤 꾸미지요 뭐. “도산선생 무덤 꾸밉시다” “남강선생 동상 세웁시다” “고당선생 뭣 합시다” 하지만 그것을 세우는 것들은 도둑놈들입니다. 사실 그들은 민족의 죄를 지는 것인데, 그러는 것이 당연한 것 같아서 그러고 가는 것인데 그 값으로 멸망을 면하고 나서는 “우리는 그러지는 않는다, 그들을 그렇게 학대하지는 않을 거다” 하면서 스스로 어진 체하니 도둑놈 아닙니까?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로 인함이라 하였으리오.” (「이사야」, 제53장 7~8절)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죽기는 저이가 죽었습니다. 잘못은 나랏놈들이 다 잘못했는데 죽기는 성삼문, 박팽년이 죽었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이사야」, 제 53장 9절)
 
뒤에 있는 놈들이, 제 죄를 가리기 위해 도산 묘를 짓고, 남강 동상을 세웠지 그분들이 그런 것 생각이나 했겠어요.
 
“여호와께서 그를 상함을 받게 하시길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죄 재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사야」, 제53장 11절)
 
그 고난 받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랍니다. 하나님이 벌을 주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민족을 생각하시는 사랑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지.
어젯밤에도 한 말이지만, 우리가 평화주의자면 자기희생은 본래부터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우리가 싸우는 것은 저쪽을, 사회의 악한 것들을 세상에서 없애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저들이 나의 이웃이기 때문에, 우리와 한 몸을 이루는 한 지체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약하고 어리석은 하나도 버려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는 싸움입니다. 사랑의 싸움이기 때문에 첫 번에 잘못하면 그 잘못한 것을 말해줘야 하지요. 안 들으면 들을 때까지 해야지요. 죽일 수는 없습니다. 만일 죽인다면, 아무리 내가 옳더라도, 그가 죽기 전에 죽이는 내가 먼저 죽어버립니다.
 
물론 내 생각에도, 말해준다 해도 듣지 않을 것이 뻔합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말을 해주지 않으면 내가 잘못입니다. 내 속에 저런 사람을 그냥두면 나라가 안된다 하고 생각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속에 일으켜주신 것이지, 내 속에 있는 도덕성이, 양심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저것을 보고 너 가만있으면 안된다” 하고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로 가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하면 안 들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 주저주저 해보지만, 그러나 말 안하면 내 속에서 가만 안 있고 자꾸 따끔따끔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명령대로 한다면 그러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할는지, 때릴는지, 심하면 죽일는지 모르지만, 죽더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생각해보면 우리 속에는 언제나 나밖에 모르는 이 욕심의 나를 살리기 위해 끝없이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한 분이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십니다.
 
하나님이 왜? 전체를 건지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십니다. 자기가 영이신 것같이 인간과 만물을 영으로 변화케 하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어느 한 사람을 들어 그 고난의 짐을 지게 하십니다. 그 사람은 이미 죽음을 이긴 사람이므로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닙니다. 저기 있는 저들은 죽음의 종노릇 하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깨워줘야지 그대로 두면 영 죽음의 종노릇을 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도 아깝지만, 아까운 것을 모르는 거 아니지만, 그는 이미 땅 속에 던지우는 씨처럼 자기를 바친 사람이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씨를 보게 됩니다. 의인이 죽으면 의인의 씨 없어질 것 같지만, 반드시 전체 속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 역사의 법칙입니다.
씨를 본다는 말은 참 좋은 말입니다. 씨가 땅 속에 들어가 죽으면 다시 나지 않아요? 예수님 죽었으니까 기독교란 거 나왔지,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의 밤, 그 위급했던 장면에서 도망했던 제자들같이 “나도 나 살 생각해야지, 십자가는 못 지겠다.” 그런 생각 했다면 기독교 나왔겠어요? 그 ‘씨 있다’는 말은 그게 생명의 신비한 원리입니다. 죽음으로 산다 하는. 씨는 그래도 들어가서 죽지 않고, 싹이 터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의인이 참을 위해 죽는 것은 볼는지 몰라. 육신의 눈에는 정말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른말 하고 죽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죽었지만, 몸은 죽었지만, 그 사람의 영은 툭 튀어서, 폭탄처럼 확산되어 가지고 알지 못하게 천만의 가슴으로 쑥쑥 들어갑니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이만한 것은 그전에 죽었던 사람, 그 죽음으로 해서 튀어나왔던 그 영파가 다 이 속에 들어가서 여기 보이지 않게 어느 자리에 박힌 데가 있기 때문에 지금 나온 것 아닙니까? 내가 잘나서, 알아차려 가지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영의 알이 박혀서 된 것이지. 그러니 그 씨가 살아 있는 것 아닙니까?
간디 살아 있을 땐 반대하는 사람들 많았대요. 간디 죽은 다음에는 간디 찾는 사람 더 많아졌다고 그러잖아요? 그거 왜? 죽으니까, 정말 죽으면 말을 하게 됩니다. 몸이 있는 한은 완전한 말을 못해. 왜? 내가 아무리 말을 해도 “에! 저도 살려니까 그러지 뭐” 그럽니다. 이건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저도 잘 살려니까 저 사람 저러지 뭐. 제가 옳다고 저러는 거지 뭐” 하고 비평하는 데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하려고 해도 이 몸을 쓰고 있는 한은, 나는 살고 말은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써 말을 하면 죽으면서까지 “제가 옳을려고 하는 거지” 하는 비난이 그 사람에게 가 붙을 여지가 없어요. 그러니까 완전히 해탈이야. 모든 완강한 사람의 몸을 뚫고 그 영대에까지 들어갑니다.
 
12절에,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제53장 12절)
그래, 바로 이것인데, 이 글에서 수난의 메시아의 뜻이 완전히 밝아집니다. 수난이라는 말이 이제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해졌습니다. 이 사상은 그때로서는 아주 혁명적입니다. 메시아 사상이 있기는 구약시대 첨부터 있는 사상이었지만 그전에는 의인들이 얘기를 해도 하는 말이 “네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네 포도원에 심은 것을 네가 따먹을 것이요, 네가 심은 무화과를 네가 따먹을 것이요, 네 자손이 영원히 복을 받을 것이라” 이런 식의 말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말이 거짓말이 아니지만, 복이란 것을 그런 정도로 해석해서 그렇게밖에 몰랐습니다. 메시아란 그런 살림을 우리에게 주는 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러니까 쉬운 말로 그때의 복이란 것은 아직도 물질적인 행복이거나 또 나라라 해도 그런 정도의 생각밖에 안되는 것이거나 그랬는데 예수님한테 오면 메시아란, 아주 완전히 그것, 그 껍데기를 벗어버립니다.
 
얼마나 하면 삼손 같은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이 우리의 구세주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겠어요? 삼손이 별것이오? 남보다 힘 좀 잘 쓰고, 좀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었지. 여자 하나만 잘못 만나도 꼼짝을 못하는 그런 정도밖에 안됐지만, 그래도 나라일이 어렵고 보면 “저 사람이 우리를 구해주지 않겠나” 하고 바라보았습니다. 입다란 건 또 어떤 사람입니까? 입다란 건달놈이에요. 건달놈인데, 그놈이 건달 노릇을 하는데 요샛말로 하면 깡패대장인데 의기가 있는 사내야. 그러니 또 그를 보고 이 사람이 “기냐?” 하고 생각해보았다는 것이니 아직도 유치한 물질적인 정도를 못 면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의 길이 늘 그거 아니오? 저이가 긴가, 이이가 긴가, 천생 어느 ‘그이’라고 하는 이를 찾는데 그것이 그렇게 쉽게 분명하게 되지 못합니다. 첨에는 그이를 누구한테서 보느냐 하면 어머니한테서 봅니다. 어린이는 그저 어머니면 다야. 어머니만 나타나면 모든 시름이 다 사라져. 그렇지 않아요? 모든 근심 걱정이 다 없어지고 그저 행복이야. 그 담은 혹은 아버지야. 또 그다음 조금 나가다 보면 자기 동무가 제일이야. 동무와 친한 다음에는 밤낮을 몰라요. 밤에도 가 놀고 낮에도 가 놀고. 부모님이 그리 걱정을 해도 그냥 산에도 가고 물에도 가고. 왜? 거기서 뭘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양으로 사랑의 본성이 본래 엄마와 꼭 같은 것은 아니에요. 엄마는 엄마대로 본성을 가지기도 하면서 인간적인 데가 역시 있으니까 사랑을 해도 그것이 불완전한 사랑이야. 그래도 그것이 비교적 무사하기 때문에 어린 동안에는 어머니가 일생 찾는 ‘그이’, 곧 메시아의 모습을 애들한테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조금 자라면 아버지에게서 ‘그이’를 봅니다. 아버지만 보면 아픈 것도 다 나아. 아버지하고 함께만 가면 산속에 가도 걱정이 없어. 그러나 이제 조금 지나면 이제 아버지만으로 만족이 안되게 됩니다. 이젠 동무가 더 좋아. 그때는 생명이 활발하게 한창 자라나고 발표의식이 한창 강할 때니깐, 자기와 같이 그렇게 천진하고 발랄한 동무 속에서 ‘그이’를 보고 자랍니다.
그러다가 이제 스물이 가까워 오면 이제 이성에게서 봅니다. 의식적으로 사랑의 짝을 찾는 그때의 상대방 속에는 여러 가지 사모와 바람과 바침이 종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서 멈춰버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최고가 돼버립니다. 그렇지만 마음이란 결혼하고도 또 불만이 나는 게 있어요. 사람의 마음은 본래 그것만으로 만족하고 말기에는 너무도 종교적입니다. 아내만 있으면, 남편만 있으면 인생은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이 있어야 해. 어머니가 어머니 노릇만 하면 안돼요. 어머니인 동시에 그 이상이 있어야 돼. 동무도 친구 노릇만 해선 안돼. 친구인 동시에 그 이상이 있어야 하지. 그 이상이 뭔지 그걸 알게 되면 참 아내가 되고 참 동무가 되고 참 친구가 되고 참 스승이 되고 그러는데, 이 세상에 스승이라는 사람들조차도 스승에서 머물고 마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선생이 그래? 나 아는 것은 여기까지니 너는 이제 더 앞으로 가거라. 네 스승이 저 앞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비교적 옳게 하는 선생인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육신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고 영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영적인 사람인 담에는 어려서는 육 속에 쌓여 있던 싹이 점점 틔면, 정신 연령이 자라남에 따라서 나도 나를 초월해 벗어나려고 애쓰고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래 사람의 인격이 어느 정도 틀이 잡히게 되면, 자기를 이 육에서 해방시켜 영원무한의 세계에 들 수 있게 해주는 우리 정말 구세주는 누구인가 하고 찾게 됩니다. 일생 목표로 보고 나아갈 분은 저이다 할 만 한 이를 찾으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차원이 다른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을 예수에게서 찾았다 그 말입니다. 인도에서 말한다면 ‘크리슈나’다 인도 사람들은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는 아바타르, 화신이라는, 하나님 말씀이 육이 되어서 세상에 오는 이런 이가 있단 말입니다. 이상적으로 말한다면 타고나기를 아주 근기를 높이 타고 나서 절대의 지경을 사뭇 들어갈 수 있다면 그에서 더 좋은 것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간디조차도 화신으로 나신 이를 섬기는 편이 좋다고 권했습니다. 사람이 절대자에게 직접 깊이 갈수 있다면 좋지만 그건 생각뿐이고, 보통 사람인 담에는 육신으로 나 있으면서는 그것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입니다. 그보다는 “저이는 정말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분이다” 하고 보이는 그이한테 충성을 온전히 바치는 것이 좋습니다. ‘내 주님’이라고 할 때는 그런 의미로 하는 말입니다. 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학문도, 전체를 다해서 당신을 내 스승으로, 내 주님으로 믿습니다는 뜻 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도덕적으로 좀 깨어서 자존심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 노릇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나는 그랬기 때문에 젊어서 고민 했어. “내가 왜, 내가 어떻게 해서, 예수, 예수도 하나의 역사적 인간인데, 왜 그를 보고 주님이여 그런단 말이냐. 내 양심을 속이지 않고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저 사람들이 다 정말 양심으로 우리 주님 밖에 없다 해서 아멘,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니다, 그러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나는 이제 기도 다 드렸습니다, 그런 의미로, 부호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니다, 그러는 건가?” 이래서 나는 그렇게 안하는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생각한 끝에 달라졌습니다. 그래 내가 섬기는 건 영원한 그리스도지 역사적 인간 예수가 아니라 했습니다. 세상에 허다한 사람이 살지만 참 의미로는 오직 한 영원한 인격이 있을 뿐이고, 그 허다한 사람이란 그 참사람의 가지가지의 나타남입니다. 이 나타남으로서의 사람은 그 참사람을 믿어서만 하나됨을 얻어 참사람에 들어갑니다.
 
마르틴 부버의 “아이 앤드 다우”(I and Thou),“나와 너”란 말이 있습니다. 나와 너는 상대적입니다. ‘나’ 없이는 ‘너’ 없고 ‘너’가 아니고는 ‘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참이 아닙니다. 그 나와 너, 둘 사이가 ‘딱’ (안경으로 탁자를 치는 소리: 독립되어 있는 두 개체가 서로 빈틈없이 마주쳐 만나게 됨을 뜻함) 이렇게 되려면 그 둘 사이에 산 관계가 있어야 돼. 이걸 Living relation 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인격적으로 그러니까 “너는 너지만 곧 나고, 나는 나지만 곧 너고.” 이때는 이게 산 관련 즉, 둘이면서 둘이 아니고 하나인 때입니다. 그럴 때는 좋아요. 그런 의미에선 역사적인 인간을 보고도 ‘주님’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버는 나와 너는 필연적으로 곧 나와 그것(I and It)의 관계로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다시 산 관련으로 살려내려면 나도 죽고 너도 죽어야 합니다. 그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보통 사람은 못합니다. 예수님 같은 이는 아마 그러셨나? 그렇지만 그 예수님도 기도를 줄곧 계속해서 하지 않고는 안됐습니다. 그저 제자들하고 짬짬이 고요한 곳으로 나가 기도한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걸 비유하자면 이 ‘전기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전기, 이것은 직류(直流)가 아니고 교류(交流)예요.
교류전기란 뭔고 하니, 전기가 볼새없이 자꾸자꾸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것인데 왔다가 가요. 곧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능률적이라서 그래서 교류전기를 쓴다는데, 그러면 거 참 재미있지 않아요? 거 어째서 줄곧 대놓으면 좋을 것 같은데, 끊었다 이었다 그럴까?
 
그러면 우리도 참으로 살려면 무한 번 죽고 무한 번 살아나야 합니다. 전기의 성질이 그런 것같이 우리 생명의 성격도 그런 것입니다. 역사적 인간을 죽여보아야 참 산 관련 속에서 ‘하나인’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메시아’ 입니다. 그래서 ‘놓지 않는다’는 것은 천만 번 죽어서 천만 번 살아남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런 것을 내 가슴 속에서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시간이 다 됐습니다. 그 다음에 사실 좋기는 마지막에 있는 두 장을, 65장, 66장 이걸 죽 한번 읽어봤으면 좋겠는데, 그건 왜 그런고 하니 마지막, 민족의 이상과 세계사적인 사명이 거기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이게 뭐, 시간이 없으니까 무리하지 맙시다. 그건 그저 읽어보세요. 아무래도 여러 번 봐야 할 거니까.
보시는데 마지막으로 한마디 첨부한다면, 지금 우리나라에서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이 민족의 세계사적 사명, 요새 흔히 말하는 꿈, ‘vision’ 비전이 없어져서 그게 걱정입니다. 그게 왜 이렇게 되느냐, 현실적으로 38선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38선이 허리가 이렇게 끊어져 놓으니까 거기 정신이 온통 빼앗겨가지고 할 수 있는 일도 못하고 있습니다. 전 민족이 믿는 마음으로만 하면 끊어졌다고 해서 망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통 중대하게 얘기하려고 하니까 이걸 다시 붙여야 된다고 하지만, 거 뭐 갈라진다고 해서 못 사나요? 그건 어제도 있는 말이니까 생각을 깊이 해서 들으시오만.
 
그런데 그 문제 때문에 그만 정신이 온통 거기만 쓸려 있어요. 38선, 공산당 하지만, 우리나라사람 아마 이제 공산당이 갑자기 없어진다면 허탈되고 말지도 모릅니다. 죽고 말는지도 몰라요. 정신을 온통 빼앗겨 가지고. 그거 있으니까…… 그게 물론 나쁜 거지만,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잘못되는 것같이 알고 있습니다. 무의식적인 핑계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면 나라는 땅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로 만사가 다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나긴 물질에서 났지만, 나라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나라도 물질이에요. 나 딱 잘라 말합니다. 그건 물질이야! 개인으로 비유하면 “우리의 의식작용인데, 의식도 물질이에요.” 그건 그 이전에 이미 말한 말이지만, 아주 분명히 잘라 말해요.
 
저, 인도 철학을 보십시오. 여기, 우리 기독교 믿는 사람들, 그런 말 별로 많이 하지 않아서 그렇지만, 이걸 뭐 굉장한 뭐나 되는 것처럼 그러지만…… 아닙니다. 그것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썩어지는 거, 그러니까 나라에다 목 멜 필요 없어요. 여기 지금 있는 동안에 이 나라의 덕택을 많이 입고 있어서 이 나라가 없으면 내가 살지 못하지만, 나라가 나라 이상 되는 것을 알고 있으면 나라가 계속되어 갈 수 있지만 저보다 이상 되는 것을 모르면, 없으면 없어지는 것입니다. 나라만 아니라 천지간에 모든 것이 그렇지, 천지 이상 되는 뭣을 파악한 것이 있으면 그건 살아나는 것이지만, 천지 이상 되는 걸 부정하고 그건 없다 그러면 얼마 못 갑니다.
현대가 자꾸 정신적으로 내리막길로 내려가는 것은 이거야. 과학은 자꾸 발달하는데 살림은 자꾸 넉넉해지는데, 사람은 답답만 해지고 위대한 인물은 안 나오고, 영적인 척도가 내려가는 건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상의 걸 모르고 있어. 그런 말을 하면 현실을 무시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건 안된 소리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38선이 그거 아니야? 38선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이 문제 해결하겠다고 둘이 싸움에 열중하고 정신이 없습니다. 지금 전쟁상태에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나라 옛말 옳쟎아요?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라고. 호랑이한테 물려 갈수록 정신을 차려야 돼. 정신 빠지면 안돼. “내가 호랑이한테 물렸지, 이놈이 어디로 가나, 이놈이 골짜기로 내려가나 위로 올라가나 물속으로 들어가나”, 정신 똑똑히 차리고 있어야 살아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또 그럽디다. 호랑이란 놈은 물고 갈 때 그걸 죽여서 물고 가는 법이 없대. 맹수가 짐승을 잡아먹지만 물 고 갈 때까지는 죽이는 법이 없대.
 
전번에 거 신문에 났지요? 어느 애가 나흘 동안 산속을 헤매다가 아주 기적적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지요. 그래 조사하고 조사한 결과 거 아무래도 호랑이에게 물려갔나 보다 하고 그랬다는데 동네 사람들의 말 중에 명담이 있어. 뭔고 하니 호랑이나 승냥이가 본래 사람을 물어갈 때는 상처 안 나게 물어가는 것입니다 라고 거 참 좋은 얘기야, 좋은 얘기. 그거 그놈도 영물이니까 먹어도 생기 있는 걸 먹고 싶지 죽은 시체는 안 먹는다는 거야. 그거, 거기에 배울 점이 있잖아요?
지금 우리는 정치, 온통 죽음으로 하는 정치 속에 살고 있어. 사람을 온통 죽여 놔. 정신을 뽑고 말입니다. 그래서 전쟁하려고 하는 데 정신을 뼈앗겨 가지고 온통 잃어버렸어. 도덕이고 뭐고 다 없습니다. 그런데 요새 자꾸 하는 소리요만, 그 증거가 뭔고 하니, 요새 대학에 철학과 강좌가 지원자가 없어서 없어졌대. 이전에 우리가 젊었을 때는, 젊어서 학교 들어갈 때는 재주야 있든지 없든지 영광이라면 철학과 입학했다고 그래야 “아이구머니, 그래?” 그러고 했어. 요샌 “철학과? 바보로군” 그럴 거야 아마. “아주 철학과 없어진 데가 있으리만큼 세상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거 되겠냐” 그러면 날더러 “네가 세상을 보는 눈이 너무 구식이 되어서 그렇다” 그럴는지는 모르지만 한가지 말할 것은 있어. 구식이거나 신식이거나 이날까지 변할 수 없는 것은, “나긴 물질에서 났지만 정신적인 것에다 목표를 두지 않고는 사람 노릇은 못할 것이다.” 그 대답만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여간 그로 인해서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정신이 빠졌고, 정치하는 사람들은 힘과 돈이면 된다는 생각에 잡혀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냐”고 자화자찬만 합니다. 그럴 뿐 아니라 일반 국민을 아예 초등교육에서부터 그런 식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잘살아보세, 잘 살아보세”노래만 부르게 합니다. 우리를 세뇌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뇌시킨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지금 꾀가 발달되었어요. 정말 우리가 호랑이한테 물려가고 있습니다. 정신을 정말 똑똑히 차려야 합니다.
그거는 학문을 배웠는지라 이걸 자꾸 들으면 저도 모르는 동안에 이렇게 된다, 그렇게 믿기 때문인데 정신 똑똑히 차리면 절대로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런 속에 있는 것을 생각해서 지금은 최소한,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도로라도, 씨로라도, 세계적인 비전을 가지는 사람을 남겨놓도록 힘써야 합니다.
정말 없다면 “이 나 하나라도 해야지” 하는 그런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절대로 하나만은 아닐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7천 명은 언제나 있는 법입니다. 또 한마디를 첨부한다면, 그건 어제 저녁에 다들 말씀하는 데도 들어본 말입니다만, 옛날에 공자님이 하신 말씀을 거꾸로 읽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공자는 “격물(格物)해서 치지(治知)하고, 치지(治知)해서 성의(誠意)하고, 성의(誠意)해서 정심(正心)하고, 정심해서 수신(修身), 수신해서 제가(齊家), 제가해서 치국(治國), 치국해서 평천하(平天下)라” 물건을 연구해 지식을 얻고, 지식을 얻어서 뜻을 정성되게 하고 뜻을 정성되게 해서, 마음을 바르게, 지식을 알아가지고, 그걸로 해서 내 뜻 내 마음을 바르게 해서 집을 가지런히, 집을 가지런히 해서 나라를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려서 천하를 평화하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은 시대가 달라져서 거꾸로 내리읽어야 된다고 합니다. 세계 평화가 이루어져야 나라가 옳게 되고, 나라가 옳게 돼야 우리집이 옳게 될 수 있고, 집이 옳게 돼서야 내가 옳게 될 수 있습니다. 집이 온통 파탄이 나서, 어머니 어디로 가출 나가고 아버지 술먹고 있고, 죽어버리고 했는데 그놈의 집 자식이 옳게 될 리가 있습니까? 그래서 집이 옳게 돼야 내가 옳게 되지. 옛날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설혹 애비, 에미가 죽는다 하더라도 집이 깨지지는 않아. 할머니도 있고, 고모도 있고, 어쨌든 집이라는 거 문중이 책임지기 때문에 고아 안될 수가 있었는데, 애비, 에미 없으면 지금은 곧 고아가 돼버려. 책임질 사람이 없다 그 말입니다. 가정은 깨졌다 그 말 아닙니까? 내가 가정에 대해서 이렇게 여러 말 하게 되는 것은 가정이 그중에 중심이 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지! 가정이 옳게 돼야 비로소 사회도 나라도 옳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가정이 깨졌단 말입니다. 그러면 왜 가정이 옛날같이 튼튼히 서 있을 수가 없나? 사회, 국가가 어지러워졌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그것만이면 되는 것 같아서,그저 “격물치지 성의 정심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格物致知 誠意正心 修身齊家 治國平天下)로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것만을 강조하다가 지금처럼 세상이 변해 개인적인 수신제가의 노력만을 가지고는 도저히 나라를 건질 수 없게 되었으며 천하를 평화하게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왜? 세상이 달라지니 이제는 개인이 모여서 사회를 이룬다는 그런 생각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반대로 전체가 있어서 개인이 있다고 설명해야 되게 됐습니다. 어제도 우리는 “우리들은 뿌리파다” 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마는, 그것이 바로 오늘의 인간의 노래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전체가 먼저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와야 한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노래에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그 후렴에서 같이 죽고 같이 살자는 귀절입니다. 같이 살고 같이 죽자라고 하지 않고, 같이 죽고가 먼저 나와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죽어서 사는 것이지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살려면 싸움만 일어나지만, 같이 죽는 데서는 자연히 너도 나도 다 살게 됩니다.
전체는 같이 죽는 데서만 있을 수 있습니다. 개인의 가치를 강조했던 지나간 시대에는 각자가 스스로 살기를 강조해서 좋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 존재의 근본이 개인이 아니고 전체인 것을 알게 된 때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은 스스로를 전체 속에 죽여서만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뿌리주의 인생관, 사회관입니다.
 
이것이 현대가 지나간 날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입니다. 전날의 개인주의 이상 가지고는 사회를 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처럼 아래서부터 전체가 옳게 된다던 말은 논리로는 옳은 듯한데 사실로는 맞지 않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한 민족으로서도 살아나려거든 세계가 옳게 되기를 늘 염두에 두고 생각해서만 될 수 있습니다. 세계 일이 잘되길 바랄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진 참여해서 세계를 건지기를 힘쓰며, 우리가 공헌할 것이 어디 있는가를 아는데서 우리 살길도 밝아질 수 있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시대가 지나가고 다음 시대를 일으켜 세워갈 만한 원리를 찾는다면, 다른 큰 나라보다도 우리 같은 나라에서 먼저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나라가 떨어진 것은 바로 이 낡아가는 국가주의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세계의 죄짐을 지고 고난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생각을 성경을 연구하는 데서 얻었습니다. 30대에 내 마음에 온 생각이지만 그후 5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나는 점점 더 그 점에 확신을 가집니다.
십계명의 근본 뜻은 우상과 싸우는 데 있는데 이제 세계사에 있어 가장 큰 우상은 지배주의의 권력국가입니다. 우리의 사는 길은 이 우상과 싸워 이기는 데 있습니다. 반성해 봐요, 지금도 이 사상 들어맞을까 안 들어맞을까? 지금도 나는 고치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고난의 역사란 말도 옳고. 그런데 고난의 역사의 사명을 다하려면 우리가 바로 이 ‘메시아’의 정신을 가지고 이 고난의 짐을 충실히, 겸손히 져야지. 미국이나 소련이 하는 모양으로 힘드는 건 제가 지지 않고 남에게 떠밀어 넘겨버리는 버릇을 가지고는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네가 전쟁하기 싫으니까 우리나 월남 같은 약한 것을 내세워 하지 않아요? 그것이 대 국가주의 입니다. 나쁜 놈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람들한테 넘어가면 못씁니다. 나를 위해서도 세계를 위해서도 그 악의 협조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항거하다가 나라가 일시 넘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차라리 그것을 영광으로 알고 택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메시아적 국가관은 모르긴 몰라도 큰 나라에선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소위 ‘대국가’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인 한 그렇게 되고 말 것입니다.
대국가주의가 이제 무너져야 된다, 국가 관념이 달라져야 한다고 하는 데, 그럴려면 우리가 그런데 대한 무슨 민족으로서의 비전이 있어야 되겠는데 그거 어디서 나나? 이런 걸 읽지 않고는 안됩니다. 구약을 똑똑히, 다른 경전도 그렇지만 더구나 이 성경, 성경 중에서도「이사야서」같은 것을 반드시 읽지 않고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형편이 없는 나지만,「이사야서」없이는, 특히 제2 이사야 아니고는 없습니다.
왜? 그 사람이 원래 6세기, 기원전 6세기에, 8세기에 있으면서, 사자가 풀을 먹고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다가 손을 넣어도 상하지 않고, 창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자, 전쟁이 필요치 않다는 꿈을, 그런 꿈을 3천년 전에 꾸었습니다. 꿈이 아닙니다. 사실의 예언, 선견입니다. 참 놀랍단 말이야.
 
동양에서 본다면 노자(老子)나 장자(莊子)나 다 그런 꿈을 꾼 사람들 입니다. 아 전쟁, 전쟁은 고사하고 “기계 소용없다!” 했습니다. 기계를 쓰면 기계일 하는 놈은 깜찍한 마음이 있고(有機事者 有機心) 깜찍한 마음이 있는 놈은 새하얀 마음이 없다(純白不存備)라고 했습니다.
양심에 순수한 게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도(道) 못 들어간다고 했습니다.『장자』(莊子)에 있는 말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마음에 기계 없는 사람 없습니다. 기계, 기계, 기계! 기계가 가정에까지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양심이 그대로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줄을 모릅니다. 보기에 좋은 것을 보고 있는 동안에 내 속에서 양심이 쏙쏙 빠져나갑니다. 내 정신이 쏙쏙 빠져나가서 내 속이 텅텅 빈다고 하는 거, 모르긴 모르지만 목사님들이 텔레비전 한참 들여다보고 앉았다가, 그러고 나서 설교하는 거 아닌지 몰라. 안될 겁니다. 한다면 아주 가짜, 발라붙인 거짓을 하는 거지. 그걸 들여다보고 앉아서 영감이 올 리가 없어요. 그걸 보고, 그렇게 하고 생각해보세요. 되나.
 
나, 피난 때 일을 하나 못 잊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집 빌어가지고 3년 동안 피난살이 할 때, 금석호라는 나이 많은 노인이 있었는데, 재미있는 일 있어. 영감이 아주 소탈한 이였어요. 젊은이들이 잘 찾아오곤 했는데 어떤 날 한 젊은이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에, 이제는 술 먹어야 기독교인이지, 술 먹을 줄 모르면 신자 아니오” 했습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기는 합니다. 과거에 너무 “술 먹으면 죄인이다, 담배 피우면 신자 아니다” 이랬던 반동으로 그러는 것도 무리가 아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목사들이 술 먹을 줄 모르면 목사가 아니다. 심지어는 신학교 졸업생이 졸업을 하면 환영회에 데려다놓고서 강제로 술 먹인 다는데. 이제 겪어보시오.
그래서 그 젊은이가 그 금장로 보고 술 마실 줄 알아야 된다고 한 것 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금장로 대답이 시원했습니다. “그래? 먹겠음 먹게, 하지만 생각해보게. 목사, 장로가 턱 앉아서 목사님 한잔 잡수오, 장로님 한잔 드시오 이렇게 하고 나가서 설교가 되겠나?”
 
그건 물어볼 것도 없잖아요? 그러니 지금 기독교라는 거, 종교라는 거 온통 우습거든. 성경 구절이 하나 생각나는데 그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따가 찾아서 읽어보세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빛을 보내줄 것이니 너희가 빛을 발하여라”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 말이 아주 우스운 말이고도 재미있어.
하나님이 너를 비춰준다 하면서 무얼 또 네가 빛을 발하라 그럽니까? 그렇지만 그것이 정말 옳은 말씀입니다. 내가 빛을 낼 생각을 해야 하나님은 빛을 비춰주셔. 하나님이 비추니까 내가 빛을 발하기도 하지만, 내가 빛을 발하려고 하지도 않는데 하나님 빛이 오나요? 오지도 않지. 그래 그 말 좋은 말이야. 다 껌껌한데 있는 사람들인데, 그런, 참 그런 시대가 오지 않겠나 답답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래 다른 건 다 못하더라도, 그거 뭐 나가서 싸움에 참여 못해도 괜찮아. 나는 공석에서 그 말 하기도 했어요. 대구 가니까 정보과장이 와서 “선생님, 내려오셨습니까?” 굽실 허리가 아주 부러지도록 절을 하고 그러면서 “선생님, 제발 거 문제의 발언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여보시오, 나더러 제발 하라 그래도 안할 거요.” 이렇게 대답하고 단에 올라가서 청중보고 그랬다고 하는 얘기를 다하고 나서 하는 말이 “문제의 발언이란 것이 뭐겠어요? 유신체제 폐지해라. 무슨 대통령 하야해라, 아마 그 말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만, 내가 아무리 작은 사람이라도 아무개 하야해라 그런 소리나 하려고 이 세상에 난 사람은 아니에요.” 내가 그랬어. 얼마나 조그마하면 그거 하러 나왔겠어. 할 일이 그게 다란 말이냐? 그게 뭐냐? 그걸 무슨 큰일로 생각하는 그 사람들이 얼마나 작은 사람들이에요?
 
난 아닌게 아니라 참 지극히 작게 난 사람이오. 작게 난 것이 다행이지 크게 났더라면 잘못 됐을지도 몰랐는데, 작게 났기 때문에 내 속에 지킬 거 있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인데, 그런데 세상이 어째서 도도해서 젊은 사람들까지 큰 것만 생각하고 저 지킬 생각은 아니할까?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 난 우리 우치무라 선생한테 들은 소리 지금도 잊지 않고 있지만 “참 종교는 젊었을 때 나오게 돼 있다”고. 아닌게 아니라 그러고 보면 예수도 서른 때지, 석가도 서른 때이지, 마호멧이 조금 나이 늙어서 마흔 몇으로 그랬지 다 젊을 땐데, 늙었다고 낙심하는 건 아니에요. 난 아직도 “이제라도 되려면 되는 거지” 하고 그랬던 사람이지만, 소망은 늙지 않지만 인간으로 볼 때는 젊어서 되는 거니까 어름어름 지내면 안 됩니다.
그만둡시다. 시간을 내가 너무 잡아먹었어.
 
 
친우회보 1981 봄호
저작집30; 21- 111
전집20; 11-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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