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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죽어도 좋다 - 이사야서 풀이5
글쓴이 : 바보새 날짜 : 2013-09-17 (화) 12:12 조회 : 2401
이제,죽어도 좋다
「이사야서」풀이 Ⅲ
 
 
나는 6.25 이후 신문과 라디오, 텔레비전이 나라를 망쳤다고 봅니다. 물론 옳게 말한다면 우리 씨알 전체의 책임이지 누구만의 잘못이라 하겠어요? 하지만 같은 책임에도 못생긴 척하고 가만있는 이보다 자신 있는 듯 제노라고 나서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사람이 아무래도 더 잘못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정치인들의 책임이 제일 중하지요. 그러나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 하겠지만 그런 현실에서도 정말 씨알을 위해줄 사람은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인데 그들마저 생각 없이 정치인의 입노릇을 할 뿐 아니라 마구 떠들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나타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정치적인 것은 내놓고 정치의 잘못이 있더라도 그것과 싸우고 고쳐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인 사회생활면에서 볼 때 “6.25이후 신문기자들이 나라 망쳤다”그 말입니다. 정치는 물론이지만 정치에 협력을 해서도 그렇고 또 신문기자들이 툭 하면 외국말 쓰지, 잡지 하는 사람도 거 보여줄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인데 왜 여름방학이라면 쉽게 되겠는데 ‘바캉스’라, 왜 ‘바캉스’라고 그래? 거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야. 그 정신을 알 수가 없어. 무슨 심리로 그러는지. 건 도무지 ‘나’를 민족의 아들로도 생각을 안하는 거고, 무슨 도리의 아들로도 생각을 않는 모양이야. 그렇게 해서 내가 스스로 천대받게 만들었다 그 말이야. 그럴 때에 우리들 어른 되는 사람들이 “그러면 못 쓴다” 이 말 해줘야 되겠는데 “아이구, 요새 뭐 젊은애들한테 잘못 말했다가 괜히 핀잔만 받을려구? 망신만 할려구?” 그렇더라도 ‘구식’ 아니라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자기네가 지키는 것이 있으면 “야, 그렇게 앉으면 못쓰는 거다. 앉을 땐 이렇게 앉는 거다. 이럴 땐 이렇게 하는 거다. 어른이 들어오면 이러는 법이다. 남들에게 예(禮)를 할 땐 이렇게 하고 결혼식엔 이렇게 하고 장례식엔 이렇게 하는 거다.” 그거 일일이 잔소리 같지만 가르쳐주었어야 하는데 그저 무식하다고 해서 창피 받을까봐 무서워서 하룻밤 사이에 사회전통이, 가치관이 무너져버렸어. 그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에요. 그리 되면 나라를 유지해갈 수가 없어. 그렇게 되니까 그런 경위를 타서 그담엔 누가 제일 활약을 하는고 하니, 그저 주먹 튼튼한 놈이 무상출입이야, 어딜 가든지…… 평상시에는 무기가 위협을 부리는 것이 아니야. “어딜 감히 그러느냐!” 이처럼 딱 권위 있는 사람이 말하면 감히 그러지를 못하는 법인데, 이미 “이런 난(亂) 통에 뭐 다 죽지 않고 사는게 다행인데 뭣이 이러구 저러구가 있어!” 이런 망판으로 그러니까 그만 이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권위의식을 잃어 버렸단 말이야. 이건 나쁜 의미의 권위가 아니고 좋은 의미의 권위인데 기성세대가 권위의식을 잃고 자라나는 사람을 가르쳐줄 생각 못한 데가 이거 이 사회가 이렇게 된 데야. 그러니까 정치상황도 이렇게 됐지. 건전한 사회대로 있다면 어딜 감히 그래! 어딜 감히.
 
옛날에는 군인이 감히 일어서지도 못했단 말이야. 하지만 그때 정치엔 또 문인이 중하지 “군인 같은 게 뭐 사람이냐?” 이러는 때니까, 사회의식이 그렇기 때문에 감히 그러지 못했어. 기독교 목사님들조차도 “공산당이 있는 한은 전쟁을 아니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만 모르는 말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은 일어나선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 중에 가장 어질고 가장 지식 있고 가장 재주 있는 사람들이 수백 년 수천 년 동안에 쌓아올렸던 문화의 탑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지고 맙니다. 어제까지 남녀관계에서 한국 여자처럼 정조관념이 강한 사람은 없다고 그랬는데, 전쟁해 보니 누구보다도 더 무른 건 한국 여자였습니다. 『바가바드 기타』는 여자가 타락하면 나라는 망하고 만다고 했습니다. 또 전쟁은 하룻밤 사이에 나는 것이 아닙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러시아군이 북한에 진주하던 날부터 전국 공산화를 계획했더니 만큼 우리도 그 만큼 전국의 민주화를 계획해서 힘썼다면 전쟁은 아니 났을 것이고 났다 해도 그렇게 피해가 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라의 정책이 돈을 벌기 위해서 외국에 기생 떼를 보내서까지 ‘달러’를 벌어보려 한 담에는 나라가 옳게 될 리가 없습니다. 전쟁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목숨을 내버리면서라도 전체를 위해 지켜야 하는 정신적 전통입니다. 사람, 더구나 민족은 스스로 제 값어치를 몰라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을 알면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럼 내 가치를 어떻게 하면 알게 되나? 그것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를 믿지 않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생명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귀한 것의 근원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물질적인 것밖에 알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돈이요, 권력이요, 안락이요, 명예면 그만입니다. 그것의 종국은 경쟁이요, 전쟁밖에 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종말은 너도 나도의 멸망 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종교적인 신념 없는 사람들이 쓰는 역사가 읽을 때는 홍미진진한 듯하다가도 결국에 가서는 허망감 밖에 남는 것이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굽실굽실 스스로 자기를 천대하는데 남이 나를 천대 안하겠어요? 그 아까 공자님의 말씀 옳아요.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업수이 여긴 다음에야만 남이 업수이여기는 거고, 한 집이 스스로 자기들끼리 헐뜯기 시작한 다음에야만 남이 그 집을 헐뜯게 되고, 스스로 자기네끼리 나라를 망치기 시작한 다음에야만 다른 나라가 와서 침노하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뭔고 하니 이름은 종이라고 그랬지만 이거는 너희는 이제 “온 세계, 이 우주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된다. 종교가 많지만 참종교는 하나님 믿는 것 하나뿐이다. 신이 많지만 참신은 너희가 믿는 이 하나님뿐이다. 온 세계 만민에게 이것을 증거할 사람은 너희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와의 종으로 뽑았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하늘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는 것 아닙니다. 사실로는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정성 된 사람이 깊이 생각하고 간절히 기도하다가 마음속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어서 이것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섰다” 하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일부러 반복해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니까 그저 하나님이라고 하는 할아버지는 인심이 좋아서 여기도 주고 저기도 주고 하는 식으로 신화적으로만 알려고 합니다. 그런게 아니라 사실은 굉장히 무서운 정의의 하나님입니다.
 
유대 사람은 그것 때문에 자기네를 뺀 백성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 지독히 무서운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한 것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약하니까 주권을 잃어버리고 세계 도처에 떠돌아다니며 업신여김을 당하지만 그 때문에 또 위대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주 자신 있게 주장합니다. “하나의 민족이 되려면 땅 없이도 된다 하는 걸, 주권 없이도 된다고 하는 것을 증명한 것은 우리 민족이다. 민족의 민족 되는 본질이 어디 있느냐, 그것은 정신에 있다고 하는 것을 증명한 것이 우리다” 그럽니다. 나라가 망하고도 그저 큰소리 아니에요? 우리는 땅이나 가지고 있으면 무얼 해요. 주권은 이거나마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가지고 있으면 무얼 해요? 사람이 당초 사람 노릇할 정신이 없는걸. 그러기에 누가 와도 그저 강한 무력만 있으면 양보합니다. 이제 이러고 있지만 무슨 사변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지 자못 부끄러운 일입니다. 나라는 그저 한데 얽히어 목숨만을 유지해 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지키는 어떤 정신적인 것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무시하려는 어떤 대적이 와도 “우리는 그런 데는 절대 복종하지 않는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린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하나님을 공경하는 건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하는 이것이 유대 역사의 등뼈입니다. 유대 민족이 오늘날까지도 나라는 망하고도 하나의 뼈대가 있는 민족 노릇을 하는 것은 그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도 이렇게 어렵게 됐으니 민족의 장래를 확실히 할 수가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그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되겠지 하고 멍청히 있는 것이 결코 믿음 아닙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이란 것을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유대 민족이 놀랍다 했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중에 애써 하나님을 찾고 연구한 예언자들 때문입니다. 그 민족을 가지고 여호와의 종이라고 한 신앙은 그 결과로 나온 것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을 얻는 길을 가르쳐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사는 목적, 그 할 일, 그 사명을 가르쳐주는 일입니다. 우리도 영토는 적을는지 몰라도, 큰 길목에 앉아서 다른 나라의 침노는 많이 받았을지 몰라도, 주권을 유지해가기 어려워서 어떤 때는 남의 속방이 된 일도 혹 있었을는지 몰라도 우리들의 할 일은 그 모든 부끄러운 경험을 살려서 위대한 정신을 갖고 앞으로 다가오는 위기에서 세계를 건지는 길을 알려주는 데 있어야 합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유대 민족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이들은 우리는 본래부터, 우리 조상 때부터 어느 민족에서 보는 것보다도 가장 깊은, 가장 높은 종교적인 이 전통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 아브라함 이래로 그런 사람들이니까 이담에 크고 본다면 세계 모든 민족에게다 정말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것은 우리만이 할 수 있을 거다. 그런 생각을 그 선각자가 했고 그 선각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걸 폈다. 이렇게 펴는데 이게 쉽게 됐겠습니까. 성경 보세요, 예언자들이 얼마나 고생했나. 바른말 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도 있지 않아요? 그러면서도 하나님한테 받은 진정한 애국심이 이것이라고 해서 이것을 민족에게 가르쳐준 덕택에 다윗도 다 없어졌고, 솔로몬도 다 없어졌고 그랬지만 이 고귀한 유산만은 없어질 수 없어요. 정신은 본래 죽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모세, 예레미야, 이사야, 다니엘, 호세아, 아모스 하는 이들은 잊을 수 없지 않아요. 그 사람들을 잊어버리고 유대 역사를 얘기할 수가 없고 유대 역사를 잊어버리고 기독교를 말할 수가 없고 기독교를 내놓고 세계 역사를 말할 수가 없어지지 않았어요.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나는 기독교를 인연으로 믿게 됐으니까 내가 특별히 하는 말입니다. 또 인도 사람은 인도 사람들로서 볼 점이 또 있을는지 모르지. 하나 세계를 객관적으로 놓고 보도 아무래도 이 세계의 어려운 걸 앞으로 건져갈 생각을 객관적으로 놓고 판단을 한다 해도 기독교인에게 기대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독교가 이게 망가졌다 그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만 아닙니다. 그때도 그랬습니다. 그것을 꿰뚫고 내려오며 인간을 건지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때 그 종교를 낳을 그때, 유대에 그런 종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자격을 잊어버리고 자꾸 다른 신도 섬기고 잘못을 해 그런 것을 애타서 애타서 해주는 소리가, 그중의 하나가 이 여호와의 종의 노래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2 장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이사야」,제42장 1절) 옛날 번역엔 “보라 나의 종을 보라” 그랬어요. 차라리 그 말이 좋을지도 몰라, 물론 영어로 하면 “ Here am I” “여기 내가 있다” 그럴 수도 있긴 있지만 “여기 여호와의 종을 보라. 그는 내가 믿어주는 자.”(「이사야」, 제42장 1절)
내가 믿어준다고 했지만 그것보다도 옛날 번역이 나아요. 내가 받들어, 내가 지지해주는 사람이다, ‘믿어’만이 아니라 이건 아주 받들어서 지지해. 다른 번역엔 다 ‘지지’로 되어 있어요. 다 믿어주는 자라 혹은 내가 지지하는 자다.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종이다.” (「이사야」, 제42장 1 절)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올 때 하늘이 열리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를 기쁘게 하는 자”라 하는 말을 들었던 걸 여러분이 자연히 기억할 것입니다. 이게 다 이 말과 그 말이 서로 여기 이 말이 있는 고로 또 이담에 예수님께서 그 말이 나오셨을 거예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를 기쁘게 하는 자라.” 그래 당신이 그렇게 해서 특별히 뺐다 그 말이야. 그런데 이제 그 사람이 그럼 어떤 사람이오?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리라.” (「이사야」, 제42 장 1 절)
‘바른 인생길’이라고 그랬는데 ‘하나님의 공의’ 라는 옛날 번역이 차라리 나아, ‘공의’를 선포한다고 그랬어. ‘바른 인생길’이라고 그렇게도 말을 할 수가 있지마는 영어로 하면 Righteousness라고도 그러고 Justice라고 할는지 이게 그런 거예요.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 의를 가르쳐준다, 공의를 가르쳐주는 것이 그게 사명이다. 그런데 그걸 뭘로 하는고 하니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이사야」, 제 42장 2절)
 
큰소리로 부르짖지도 않고 말조차도 크게 안해. 이 세상에서는 문제만 있으면 우선 외치지요. 뭐 “민족궐기대회 합시다” 그렇지 않아요? 속알머리 없는 사람이 외치기 잘하는 거예요. 속에 턱 자신이 있는 사람은 큰소리 안쳐. 집의 아버지는 말 가만가만 하지 큰소리 안 치지 않아요. “야 이 자식아, 일어나 내 말 좀 들어봐” 그러는 건 자기 속에 확신이 있어요. 사랑에서도 내가 절 사랑하는 줄 알 거요. 아는 데 있어도 내가 저보다 난 줄 알 거요. 진실에서 하는 줄 알기 때문에.
속에 속알머리 없는 것들이 큰소리로 떠들어낸다 그 말이야. 그 소리로나 해서 모으는 군중이 얼마나 속힘이 있겠나? 소리보다는 실지 살아가는 걸로 “오, 저 사람들은 정말 믿을 만한 사람들, 저 사람들의 동지가 되면 할 만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전도로도 옳은 길입니다. 사회 운동으로도 그것이 옳은 길입니다. 지금은 이 세상이 이래서, 덮어놓고 고함을 질러야만 되는 것같이 자꾸 이러는 세상이니까 그런 점이나 대조해 보세요. 하나님의 종은 그러지 않아. 뭐 누구누구를 선전을 한다든지 그런 말 안한다 그 말입니다.‘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이사야」, 제42장 2절)
방안에 있는 것을 길거리에다가 커다랗게 하지 않아도 사람의 맘속에 호소가 돼. 더구나 그런 것만이 아니라 정말 긴요한 것은 큰소리로 해서는 호소가 안돼. 이렇게 얘기하다가도 “야, 이리 좀 오너라, 나하고 좀 조용히 얘기하자.” 그러고 가서 이렇게 귀에다 대고 얘기하지 누가 큰소릴 치고 그래요? 그래 웅변으론 나라를 건지는 법이 없습니다. 웅변으론 나라 못 건지는 줄 알아야 돼. 선전구호로 못 건진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오히려 반대로 어디까지나 조용하고 잠잠 하게 하는 것입니다. 맘에 있는 정신적인 참이란 본래 성격이 그래. 그렇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 소크라테스는 뭐라고 그랬죠? ‘내 속에 있는 가늘고 고요한 소리’라고 그랬어. 그게 소크라테스의 소크라테스 된 점이지. 소크라테스가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외치고 아주 선전하고 그랬답디까? 동서를 말할 것도 없이 그렇습니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 (「이사야」, 제 42장 3절)
이것도 번역이 좀 좋지 않아. “꺾여진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끄무리는 등잔도 끄지 않으신다” 그러는 편이 좋습니다. “갈대가 꺾어졌다고 해서 잘라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럽시다. 몰라. 어감이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그런 걸 이제 그런 줄 아시오. 내가 왜 이러는고 하니 이걸 될수록은 영어 번역도 참조하고 일어 번역도 참조하고 해서 이런 것은 이 어감에도 관계되고 단어 쓰는 데도 크게 관계되는 거니까. 이런 건 될수록은 여러 번역을 참조하면서, 그 시인의 진의를 느껴보도록 노력을 하라고 해서 그러는 겁니다. 의미만 통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건 시(詩)니까, 더구나 이 42장 이하는 시가 많아요. 대부분이 시로 된 거고 문학 중에서도 놀라운 문학이라고 더구나 전문가들이 그러지 않아요? 이런 글은 자꾸자꾸 읽어서 배독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이담에 글을 쓸 때 훌륭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재주 부려도 나오나요? 훌륭한 글을 내가 먹어야 돼. 먹어서 그것이 내 살이 되어 있어야 돼.
 
그래 옛날에 하던 소리 또 해야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글을 쓰고 싶은 데 잘 되지를 않아. 그래서 글 잘 쓰는 친구를 보고 글 잘 쓰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더니 그냥은 안 가르쳐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자꾸 조르니까 “한 턱 잘 내야 가르쳐준다.” 그래서 떡과 술 고기를 한짐 잔뜩 져가지고 와서 또 조르니까 대답하기를 저기 산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산골짜기 깊은 데로 데리고 가서야 떡과 술, 고기를 먹고 난 다음 귀에다 대고 가는 소리로 ‘다독다작’(多讀多作)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신기한 방법이나 가르쳐주려는 줄 알고 있다가 누구나 다 아는 다독다작이라는 소리를 듣고 나니 좀 멋적은 듯해서 그 사람보고 “그 소리나 하자구 예까지 오자고 했느냐?” 물었더니 그 사람이 “별다른 방법이 없잖아. 많이 읽고 많이 써보는 것밖에 없지. 그렇지만 그렇게만 말하면 자네가 듣지 않을테니깐 한일이지”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비싸게 밑천이 들어야 해. 세상에 그저 되는 일 어디 있어요? 밑천이 들어야 합니다. 무슨 청년회를 한다, 뭣한다, 돈은 어느 부자한테 타다가 친구 모아놓고 음식 먹이며 청년회 절대로 할 생각 하지 마시오. 제 주머니에서 털어서, 없는 데서 회비 내 가지고 너도 좀 나도 좀 내가 지고 있는 대로 해. 없으면 말이야 “우리 나가 길바닥을 쓸고라도 벌어서 하자! 쓰레기라도 주워다 팔아서 하자!” 이렇게 하는 것은 힘이 있게 오래 갈 수가 있지만, 술장사 하는 부자에게 가서 기부하시오. 술장사 돈 빌어가지고 교회당 세우는 것은 참 기막힌 일입니다. 이러니 돼요? 그러니 그거는 돈이 무서운 줄만 알아. 그러니까 술장사가 주고도 업수이 여겨. “저놈들 나한테 타다가 뭐 저 예배당 짓고 나보고 무슨 술장사한다고 그래.” 눈꼴 사나울 거 아니오? 그런 일이 실지 있어요.
 
그러게 내가 내 밑천을 들여서 하여야 그래야 이것이 내 속에서 힘이 나와,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진리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왜 하는고 하니 ‘결과주의’에 취하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기독교 성경을 어려서부터 보고 그랬지만 그러면서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성경에 그 진리가 있지, 없진 않아요. 그렇지만 그리 분명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바가바드 기타』를 보다가 아주 쑥 깊이 알았어. 결과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해. 결과주의에 제일 집착하는 사람 누군고 하니 정치하는 사람입니다. “상관없다. 강제로 왔거나 제가 왔거나 간에 저기다 갖다 잡아넣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되지 안될 리 있나.” 맘으로 존경을 했거나 할 수 없어서 그랬거나 “나보고 머리만 숙여라” 그러면 된다. 옆 찔러 절 받는다고 하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옆을 찔러서 절만 받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려니까 그것만이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이 세상의 그 영광 받자는 게 아닙니다. 하늘에서 영광을 누가 줘 ? 하나님이 주시는 건데 그건 무슨 다른 것을 보고 주시는 게 아니라, 우리 속에 참진리가 있고 사랑이 있으면 “아, 네가 참 잘했구나.” 그래서 그걸 하면 스스로 내 마음 가운데 기쁨이 오는 그게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물건을 갖다 안겨줘요!
하나님이 뭘 각별히 그러시겠어요. 잘못 보지 마세요. 천당에 가면 정말 금면류관이 있는 줄 알아. 그거는 상징적으로 한 말뿐입니다. 그랬는데 이 세상에서 금이 뭔지 만져보지도 못했던 가난뱅이들이니깐 “아이, 나도 하늘나라엘 가면 금면류관이 있겠지” 하고 기다리지만 세상에서 요새 부정수단으로 돈 모으는 사람들에게는 금이 물같이 흔한 것 인데 뭘 그것 바라고 하늘나라 기다리고 교회에 충성하고 있겠습니까? 뭐 저 누구는 똥통까지 금으로 했다고 그러지만 그 사람에겐 금면류관이고 뭐고, 뭣이 그다지 귀한 게 있어? 그까짓 천당 난 안 간다 그럴 거요. “나 같으면 여기 금을 잔뜩 가지고 있는데 뭐……”
그러니 기독교인조차도 그 따위 문학 하지 마시오. 금관이 뭐가 그다지 귀해요. 왕관이 뭣이 귀할 게 있어요. 그러니 그 기독교인들이 다 그 풍속을 따랐어. 그러니까 세상에 속알머리 없는 건 기독교 신자야. 이름만 하나님 섬기고 그러지 돈만 많이 갖다주고 그러면 그저그저 안 듣는 것이 없어요. 요새 학교 교수라고 하는 것들이 ᄋᄋ교의 돈 받고 이 소리 저 소리 하는 거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걸 좀 아세요. 알아보세요. 그저 돈으로 매수요. 도덕으론 허락이 안되는 걸, 그야말로 참 사교(邪敎)인데, 그렇건만 누구누구 하는 대학의 총장이란 사람들이 앞잡이가 되어서 세상을 황금으로 사려하고 있어요.
 
그러나 칼을 쓰는 자가 칼에 망한다면 돈을 쓰는 놈은 돈으로 망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그런 따위가 아닙니다. 순수한 영의 세계지. 그렇게 해서 세계에다 내놓으니 부끄러운 그걸 미국이 가져가요. 유럽의 사람들은 생각이 있기 때문에 상대 안해요. 독일도, 독일에서도 “쓰다” 그러고, 프랑스도 상대 안해요. 이 못생긴 미국놈들이 그걸 “좋다” 그러고 떠들고 그러지. 이 세상 영화 그것 팔아가지고 그것을 선전해. 그러는데 마음속에 금보다도 더 귀한 것이, 현상적인 우주 전체보다도 더 귀한 것이 이 내 속에 있는 줄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 현상적인 우주 전체보다도 더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나의 인격, 그 고갱이인 영혼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언제부터 키울 것인가?
어머니의 무릎에서부터 해야 돼. 무릎이 아니라 요새 누가 했던 모양으로 뱃속에 밸 때부터 해야 돼. 칼라일에게 어떤 귀부인이 가서 “제게는 세 살 난 아이가 있는데 될수록 일찍부터 교육 좀 해 볼랍니다.” 자기 딴에는 그러면서 열심이 있어 그랬는데 칼라일은 그 말을 듣자, “아이쿠 벌써 3년 늦었소” 했습니다. 우리 동양 사람보고 그랬다면 3년이 아니야. “3년 열 달 늦었다” 했을 겁니다. 밸 때부터 교육해야 되는 건데 거 옛날 태교(胎敎) 있지 않아요? 그렇게 해야 이게 되지. 이 세상에 나와서 못쓰게 될 대로 못쓰게 돼서, 돈맛 다 보고 술맛 다 보고 무슨 맛 다 보고 그런 다음에 언제 크리스천으로서의 하나님이 주시는 그 영 광 속에 들어갈 수 있을 줄 아세요. 여러분 자신이 하는 거, 영화 볼 때 마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나도 가보지. 거 못 가보면 병신인 것 같아서. TV 남의 집에 있으면 우리 집에도 있지. 볼 것도 가리지 않고 못 볼 것도 가리지 않고. 옛날엔 찬송가면 다였어. 음악이 별것 아니에요. 명곡이라고 그러지만 어려서부터 해 버릇하면 내 체질이 그걸로 되니까 기분 날 땐 그것만 부르면 좋은 거예요. 옛날엔 찬송가면 다 됐던 거야. 그런 거를 괜히 이제 이 종교 없는 무슨 문화다 그래 가지고 요새 교회에서까지 그걸 흉내를 내서 “우리도 팝송합니다. 우리도 사교클럽 있습니다” 한단 말이야. 그럴려거든 기독교 교회당 안 가고도 할 수 있지 않아요? 그런 걸 하고 싶거든 그런 것 하는 데 가서 그러지 왜 교회에 가서 그걸 한다구 그래? 교회가 그걸 안하고 못 배기겠거든 그놈의 교회 하지 말라고. 예수면 예수의 복음의 진리를 내 얼굴에 내 행실로 나타내서 “저 사람 보면 나도 예수를 믿어야겠다” 그런 맘이 들게 하지 못한다면 그런걸로 한다 치더라도 그거 몇 날 가겠어요? 그렇지 않소? 그러니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기독교 왕성한 것을 칭찬할 때마다 나는 아주 “아이쿠 실속 모르니까 저러는군. 내가 보기엔 답답한데” 합니다.
 
그러면 남이 “넌 그럼 얼마나 똑똑했느냐” 아마 그럴는지 몰라. 그러면 아닌 게 아니라 이 인간으로는 좀 머리가 안도는 데가 있지만, 그렇지만 내 이 사람은 조금도 까딱이 없습니다. 적어도 이게 그거 아닌 줄은 알아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도 답답하니까, 내가 그런 처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말할 자격도 없지만 그래도 속담에 “나는 ‘바담 풍’ 해도 너희는 ‘바담 풍’ 해야 한다” 하는 격으로 하도 잘못해서 쓰라린 것 있으니까 그런 것 하지 말라고. 나는 이제 조금 있으면 갈 것이지만 나라의 이 꼴 보고 죽기 참 안타깝군요. 살기에 안타까와 그러는 게 아니라, 이런 꼴을 보고 고치질 못하고 간단 말이냐! 우리보다 전에 있던 분들은 그래도 할 말을 남겨놓고 일러줄 걸 일러주고 갔는데, 이제 나이 많다면 나보다 많은 사람이 별로 없어. 대개 이젠 마지막 무엇에 들었는데 이걸 어떡하냐? 그러니까 나는 실지 여기서, 뭐 이론만이 아니에요. 기회 있는 대로 적어도 이 점은 들어두어라 그러고 싶은 것이 있어. 그런 점이 정말 문제되는 거니까. 젊었을 때는 욕심이 많으니까 이것저것 하려고 하지만 해서 늙어진 담엔 마음이 달라져요. 이젠 돈 모으려고 해도 소용없다, 이제 공부를 해서 박사가 될 리도 없지, 벼슬을 하고 싶은들 될 리 없지. 소망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 이제 남아 있는 것 있다면, 그럼 마음씨나 어떻게 바르게 써서 그것이나 할까, 그래 이제 비교적 하나로, 일점으로 모이게 됐어. 그래 마지막에 옳은 소리를 좀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말 뒤에는 그런 비감한, 그런 것이 있는 줄을 알고 들으시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시대에 태어난 것이 불행이라면 불행이지만 그 대신에 좋은 점도 있습니다. 바로 잡고 가질 못하니 슬프지만 보람을 느낄 수도 있어요. 십 년 전에 스웨덴으로 해서 영국의 우드브룩(woodbrook)에 갔을 때 그때 들은 말인데 유럽 청년들은 본국에 있어서는 보람을 못 느낀대요. 할 일이 없어서. 그 나라에는 모든 것이 다 되어 있지, 뭐 할 거리가 없어요. 그래서 청년들이 어디로 가는고 하니 아프리카로 간다고 해요. 아프리카로 가면 아직도 발달하지 못한 나라들이니만큼 해서 보람을 느낄 것이 많대요. 스웨덴에서 젊은 부부가 왔는데 자기네들도 아프리카에 가서 일한다고 그러고, 뭐 어디서도 왔다고 그러고. 그담에 인도에 가면 많이 그런 거 만나게 돼요.
그런데 그런 걸 보면 나는 참 잘 태어났다, 우린 문제 있는 나라에서 만났으니까 얼마나 좋으냐 할 수 있어요. 그 생각을 못하고 툭하면 이민이나 가려고 하는 거 못생긴 생각이에요. 내 몸을 생각하면 이거 불행한 것 같지만, 일거리가 이렇게 많은 나라, 이 사회 도덕이 이렇게 말이 못되지, 종래 가지고 오던 좋은 점은 다 깨지고 무너져가지, 정치도 이렇게 잘못 됐지, 통일도 못 됐지 얼마나 할일 많은 나라요? 그러니까 맘이 있기만 한 사람이라면 보람을 많이 느낄 거 아니오?
이 사람이 “너희는 내 미뻐 하는 여호와의 종이다” 그러는 말은 불행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불행을 도리어 일거리로 삼고 사명으로 삼고 거기서 마음에 위안을 얻고 영광을 느낀 데서 나온 말 아니오?
그래 다시 읽읍시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지지하는 자, 내 마음에 들어서 내가 좋게 보는 나의 종이다. 그는 나의 영을 받아서”(「이사야」, 제42장 1절)
제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영을 받아가지고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주리라” 하는 것이에요.
 
세상에 영광이 있다면 이에서 더한 것이 어디 있어요? 간디는 기회 있는 대로 말했어. 우리 인도가 서양 모방만 해서는 안된다. 그래 이 서양이란 나라는 군국주의요 제국주의인데 말이야, 그까짓 거 이제 다 몰락해가는 거 그걸 모방하면 뭘 하냐. 적어도 이담에 세계가 배울 데를 찾는다면 우리 인도에 와서 찾도록 돼야 된다. 그런 말을 자꾸 했어. 그랬기 때문에 인도 사람은 밥도 못 얻어먹는 사람이 많아요. 요센 좀 나아졌는진 모르지만 인도 사람이 외국에 와서 으스대는 것을 보면, 그 고자세를 보면 욕이 나갈 만큼 으스대는 거예요. 그것이 어디서 나오냐 그러면 “정신적인 것은 우리가 지도해야 한단 말이야” 그런 자부심 때문에 그럽니다. 그게 어째서 왔느냐 하면 간디가 그걸 가르쳐주었어. 아직도 거기 가려면 멀지. 멀지만 이것들이 그 무엇을 거기서 받은 것만은 사실이에요. 우리나라 사람은 반대로 개인으론 내노라고 하는 데가 있으면서도 민족으로 갈 때는 부끄러워서 부끄러워서 한국 사람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워하는 그런 사람 많지 않아요? 우리가 돌아봐서 재주가 모자라서 그러는 건 아닙니다. 이 속에 속알머리가 없으니까, 정신적으로 가진 것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들어보시오. 뉴욕의 어떤 한국 여자가 택시를 타고 가는데, 당신 어느 나라사람이오 하니까, “I am a Japaness” 했다는 거예요. 한국 사람이요라기가 부끄러워서 말 입니다. 제 민족이 부끄러워서 이름도 못 불러가지고야 돈을 모았다 해도 어디다 그 돈을 쓸까?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속알이 있는 민족은 화를 면해 복을 만들고 자기의 실패를 이용해 이담 인류의 장래를 위해 거울이 되는 값진 교훈을 남겨놓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사는 길은 우리보다 뒤로 오는 아프리카에 있는 모든 나라, 아시아의 모든 나라를 위해 교훈이 되는 것을, 새로운 체험을 남겨놓는 데 있습니다. 그럴려면 구식의 쓸데없는 교만, 허영심을 다 버리고 전체를 위해 즐겨 인생의 제물이 된다는 정신을 가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호와의 종이란 그런 자리입니다.
 
“뭇 민족에게 올바른 인생길을 펴주리라.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끄무리는 등잔도 끄지 않으시며, 성실하게 올바른 인생길만 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가 꺾여서 낙심도 아니하고”(「이사야」, 제42장 2~3절)
하다가 안된다고 기가 꺾이는 법도 없어. 왜? 하나님에게 받아가지고 온 거니까 기가 꺾일 리가 있어요?
“그는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 없이 끝까지 바른 인생길을 세상에 펴주리라.(「이사야」, 제42장 4절)
그러면 저만 아니라 “바닷가에 사는 주민들도”(「이사야」. 제42장 4절) 당시에는 “바닷가에 사는……” 할 때는 지중해 저편 세계의 맨 저 끝에 있는 섬들도, 그 사람들도 “우리에게 오게 될 거다” 하는 자부심에서 말하는 겁니다.
이걸 보면 성경에 있는 예수님을 두고 말하면서도 이사야의 말과 마찬가지로 “나의 택한 종을 보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들래지도 않고 길거리에 소리가 나가지도 않는다. 혹은 어린 양이 죽을 땅에 끌려가는 것 같아서, 털을 깎는 양이 그 주인 앞에 잠잠하는 것 같아서 겸손하고 순하고 잠잠하시고……” 그런 걸로 오지 않아요? ‘여호와의 종’은 말하자면 예수의 소묘의 하나예요. 이런 걸 하나님이 아니고 또 그려보고 또 그려보고 또 그려보고 그러는 거예요. 한 가지로는 되지 않으니까 이렇게도 그려보고 저렇게도 그려보고......
그 담엔 이제 쭉 내려가다가 둘째 노래라는 거 49장에 있는데 그건 생략합시다. 이것도 조금 다른 면에서
“바닷가에 사는 주민들아, 내 말을 들으라. 먼 곳에 사는 부족들아 정신차려 들으라. 여호와께서 태중에 있는 나를 이미 부르셨고.”(「이사야」, 49:1)
이건 여호와의 종이 하는 말입니다. 우리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벌써 나를 이미 부르셨다고 하는 말입니다.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에 이미 이름을 지어주셨다. 내 입을 칼처럼 날세우셨고……”(「이사야」, 49:1-2)
 
말이 얼마나 진리의 권위 있는 말인가 하는 것을 말한 거예요. 칼이 무서운 거냐 붓이 무서운 거냐? 네게는 칼이 무섭다고 그러지만 칼보다 날카로운 건 붓이에요. 붓이란 건 말을 하는 건데, 그래 야훼께서 태중에 있는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 이미 이름을 지어주셨다. 내 입을 칼날처럼 날세우고 진리의 말을 세워, 진리는 뾰족하기가 송곳 같은 거야. 꿰지 못하는 데가 없어요. 다른 건 못 들어가는 데도 그 말은 쏙 들어가서 사람이 숨겨두고 숨겨두고 하는데도 진리의 체험 있는 사람의 말이 가면 속에 숨길 수가 없어. 내 폐부를 뚫는다고 그래. 내 섭섭이도 내 간도 뚫고 들어가. 그리하여야 사람의 맘이 움직이고 사람의 맘이 움직인 담엔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 안 돌아올 리가 없을 거예요.
“내 입을 칼처럼 날세우셨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주셨다.” (「이사야」, 세 49 장 2 절)
 
날세운 거니까 조금 잘못했다간 그 날이 떨어질까봐 무섭고 조금 잘 못 써서 상할 수도 있고, 그래 좋은 칼일수록 잘 칼집에 건사해둬야 해. 여호와께서 자기 손가운데다 나를 숨기셨다. 옛날의 보검이라고 그러면 손바닥에 둔다고 그랬어. 큰거 써야 할 때는 이런 검이지만, 옛날의 비수(匕首)라는 건 손바닥에 이렇게 들어가는 작은 것인데, 자객들이 잘 쓰던 것입니다. 자객이 훌륭하단 말은 아니지만 장려하느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 옛날의 거기도 배울 점이 있습니다. 그거 놀라운 거요. 중국에 있던 자객이라는 거 우리나라에도 그 정신 있어요. 자객이라는 사람들은요 돈을 받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거 여러분이 놀라겠지만 무슨 벼슬을 주마 해서 가는 게 아니에요. 자기를 알아주고 어떤 어려운 일을 부탁하면, 한번 승낙하고 나면 목숨을 아끼지 않을 뿐 아니라 이름까지도 나는 것을 원치 않고 순전히 의협심에서 합니다. 아주 심한 예를 든다면, 자기가 죽은 후에라도 이름이 나는 것을 싫어하여 일을 다 해놓고는 자기 칼을 가지고 자기 얼굴을 싹 깎아버린 일도 있습니다. 진짜 정말 역사의 기록에 있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말을 들으면 놀랄 거예요. 요새 크리스천보다 훨씬 낫다고 그럴 거예요. 그 자객정신, 그것은 무슨 세력을 가지고도 못 꺾어요. 왜 그런고 하니 그 사람은 의를 위해 자기를 알아주는 그 의리가 고마워서 죽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죽는 거 겁 안내요. 살아가지고 그 값을 받아내려니 민중대회 한다고 그래가지고, 도끼 가지고 손가락 찍는 그런 더러운 물건이 아니란 말이야. 찍는 놈이 더러운 게 아니고 그렇게 만드는 놈들이 참 더러운 놈들이야. 그렇게 해서는 나라를 건져보자고? 이 답답한 나라야. 어쩌면 그렇게 됐어? 손가락을 찍어가면서 그거로 나라를 사보자고? 나라를 사는 게 아니라 권력을 사자는 거지만 이렇게까지 타락이 됐어. 그런데 이런거야 말로 보면 “우리가 불의 그것 못 고친단 말이냐?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나한 사람은 안 그래 본다.” 한번 내 동지 많이 모아가지고 해본다, 그런 그 건성에 뜬 생각, 어제도 말했는데 그런 생각하지 말고 “나 하나나 그래 보자. 지금 그 중국의 옛날 누구 모양으로.” 그거 말이 났으니까, 또 다른 얘기 그 비슷한 얘기 하나 합시다. 남자만 그런게 아니고 여자들도 그래요.
 
한창 전쟁이 심하던 전국시대의 여섯나라 중 하나이던 진(晋)나라 임금의 왕자들끼리 서로 왕위다툼이 일어나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중의 한 사람이 후에 진문공 되는 사람인데 쫓겨났어. 나라에서 나와서 망명을 해. 여기저기 다니다가 밥도 별로 못 얻어먹는 때도 있었어. 어떤 날 배가고파 그 부하 되는 사람이 길가 농부한테 가서 밥 좀 달라고 했더니 농사꾼이 묻기를 “그게 누구냐?” 했어. 그래 대답하여 아무개라고 했더니 “농사도 하지 않는 놈들, 여기 와서 이 흙덩이나 먹으라고 해라” 하면서 던져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모를 받았지만 역시 그 사람이 인물이었어. 제나라에 갔더니 제나라 임금이 보고 보통 사람 이 아닌 것을 알고 후히 대접하고 왕실 인척 중의 여자 하나를 아내로 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오래 쫓겨 다니다가 부부살림을 해보니까 도무지 좋기가 짝이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 신하들이 자기를 그렇게 열심히 따라다니며 고생하는 것을 온통 다 잊어버린 듯, 거기에 척 주저앉아서 도무지 떠날 생각을 아니해. 신하들이 걱정하여서 어서 본국으로 돌아가 나라를 얻도록 해야 하지 않느냐 해도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아. 그래서 그중 본국에서 그의 장인이었던 사람이 부득이 그 지금 부인한테 호소하기로 했습니다. 그래 그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그 부인이 또 보통 사람이 아니라, 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남편을 보고 하는 말이 “당 신은 큰일을 할 사람이 왜 이러고 있으십니까? 왜 이리 꾸물거리고 있습니까? 이것 때문에 그러지, 이것 때문에” 하면서 자기 얼굴을 가리키고는 옆에 있던 화로를 홱 들어 뒤집어썼습니다.
 
사랑이라면 정말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것은 썩어질 육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남편의 인격을, 또 세상에 있는 제 나라만 아니라 남의 나라까지도 의로써 사랑한 사람이에요. 모든 사람에겐 본래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고귀한 바탈이 있습니다. 지식이 있고 없고 간에 그 사람들 반드시 무슨 지식이 있어서 한 것 아닌 거예요. 그러기에 여러 사람을 모아가지고 큰일을 하자는 그런 것부터 우선 생각하지 말고, 나 하나가 우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이 모든 일의 근본임을 알아 그것을 정성되게 힘쓴다면 자기 속에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올 것이고, 그런 것만 맘속에 온다면 내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할 것인지 스스로 분명해질 것이요, 그러면 능히 사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상급이요 그러면 어떤 일이라도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이 십자가에 달린다고 하는데 죽을 것 같은 것을 억지로 참고 힘써서야 어떻게 달리겠어요. 그것이 즐겁고 좋기 때문에 순교할 때 찬송 부르면서 나가서 당하지 않았어요? 여기 우리나라에서도 저 가톨릭, 사람들 순교할 때 모두 그랬다고 그러지 않아요. 인생이란 그래요. 그것은 본래 하나님한테서 받은 천성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죄 사함을 얻고 새로 하나님의 자녀로 난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사명이 어디 있어요?
“내 입을 칼처럼 날세우셨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주셨다. 날카로운 화살처럼 나를 벼리어” (「이사야」, 제 49장 2절)
활을 쏘려고 할 때는 활촉을 갈아서 갈아서 그것이 가서 깊이 꽂혀야 하는데, 그런 모양으로 자기의 전하는 말이 그렇다 그 말이야.
“날카로운 화살처럼 나를 벼리시어 당신의 화살통에 꽂아두시고……” 전장에 나가 싸움하는 사람이 화살을 전통에 넣고 아껴야 되는데, 허투루 쓰지 않고 아주 정말 긴요한 때, 반드시 쏴 죽여야 할 놈이 나타날 때에만 겨누어서 쏘는 거니까.
“날카로운 화살처럼 나를 벼리시어 당신의 활통에 꽂아두시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사야」, 제 49장 2~3절)
 
하나님은 몸이 없으시니까 일을 할 때도 자기가 직접 못해. 사람을 시켜서 하지. 그러니 여호와의 종이라고 그러지. 사람을 건지려면 사람의 손을 빌어가지고야 건지는 거지. 하나님은 손이 없어요, 하나님은 발도 눈도 없어. 천생 누굴 시켜서 하신다 이 말이야.
“너는 나의 종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이사야」, 제49장 3절)
마치 무사가 칼을 잘 써서 단번에 대적을 베어버리면 참 칼빛이 그때 나지 않느냐, 활을 겨누어서 다윗이 골리앗을 쏘듯이 단번에 가서 맞춰서 그렇게 하면 그 참 영광이 나지 않느냐? 우리 하는 생각 하나가 어느 죽어가게 됐던 사람의 양심을 겨누어 뚫어서 그래서 새 생명의 감동을 일으킨다면 얼마나 좋은가? 우리 제일 미워하던 사람을, 그 말씀의 화살로 미워하던 겉사람을 죽여 없애버리고 속에 억눌려 신음하고 있던 사람과 참의 사랑을 살려낸다면 그 얼마나 아름답고 신나는 일이에요? 죽었던 그 양심을 살려내는 거예요. 그게 나와 같은 사람이 될 때 원수 갚아서 죽여버리는 것보다는 원수가 도리어 내 친구가 될 때, 게서 더한 기쁨이 어디 있겠어요. 그게 정말 참기쁨 아니겠나? 그런데 이 세상엔 기껏 한대도 미운 놈들 “죽여버리는 힘이 내게 있다. 내게로 오너라.” 그렇게 하는 데로만 자꾸 가려고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데 꼭 종으로 뽑으신 것이 아니라 “너는 나에게 영광이 크도다” 하고 나는 생각 하였다. 그런데 내가 잘못 생각해. 여호와의 종으로 뽑혔는데도, 그 자격이 그런 자격인데도.
“그러나 나는 생각하였다. 나는 헛수고만 하였다. 공연히 힘만 뺐다. 그런 데도 여호와만은 나를 바로 알아주시고 나의 하나님만은 나의 품삯을 셈해주신다.”(「이사야」, 제 49장 4절)
 
그래 내가 생각해보니 하나님은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실패만 한다. 사실 이제 생각해보니 우리들이 못생겼다는 것, 돈도 없고 세력도 없고 역사에 자랑할 것도 없고 38선도 가로놓였고 무슨 이래저래 하던 것이 차원을 바꾸어보면 아주 날카로운 칼인 셈이고 뾰족한 화살인 것 같다 그 말이야. 하나님의 손 가운데 든 비수같이, 하나님의 전통에 꽂힌 화살같이, 이렇게 경제 불황이 왔고 이 나쁜 정치 밑에서 몇 해를 고생한다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나를 비수처럼 감추어두시는 일이요, 아주 뾰족하게 갈아서 전통에 꽂아두시는 일인데, 나는 멋모르고 하나님이 왜 나를 돌아보시지 않습니까? 우리 하는 일마다 왜 실패만 되게 하십니까? 실패되게 하시는 것은 그보다 더 좋은 일 택해서 하라고 그러시는 건데 우리가 모르고 그렇게 어리석은 나무람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야훼만은 나를 바로 알아주시고 나의 하나님만은 나의 품삯을 셈해 주신다. 야훼께서 나를 지극히 귀하게 보시고 나의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신다. 야곱을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을 당신께로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태중에 지어 당신의 종으로 삼으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으로서 할일은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살아남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나는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너는 땅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여라.”(「이사야」, 제49장 4~6 절)
 
보아서 속에서 힘이 나게 하기를 이보다 더하게 하는 글이 어디 있어요? 이런 글이 당최 어디 있어요! 나는 내가 문학을 하지도 못하면서 남의 욕만 해서 안됐지만 6.25 같은 전쟁을 당하고도 어째서 우리나라 사람은 물론이요, 남의 나라 사람이 읽어만 보면 “한국 민족이란 이런 거냐.” 그렇게 감동이 될 만한 소설을 왜 못 썼을까? 김지하 하나가 있다고 그러고, 세계에서도 그러지만 그 김지하가 미워서 미워서 잡아가두고 죽이려고 할 줄만 알지 고생시킬 줄만 알지 사실 이걸로 해서 한국 민족의 지위가 올라갔다고 하는 생각은 왜 해줄 줄을 모를까? 이런 거를 김지하만 불행해 그런다고 하질 말고 이 당국이 생각이 없어서만 그런다고 그러질 말고 왜 좀더 깊이 보지 못할까? 천생 모든 짐은 우리 전체의 등에 떨어지는 겁니다. 대통령을 보고 욕을 해도 그 침은 내 얼굴에 떨어지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내가 기지, 대통령은 한 심벌이지 그게 주권자가 아니란 말이야. 정부라는 것도 마찬가지, 그걸 보고 욕을 한다면 그 욕이 내게로 떨어져.
그러는 게 이 사람들의, 이사야의 놀라운 시야. 그러니, 이런 시가 있으니 민족의 맘을 감동시키지 아니 시키겠어요? 그러고 보면 이런 걸 읽고 예수님 나신 거 무리가 아니야. 당연한 거야. 이사야 없었더라면 아마 못 났을는지도 몰라요. 물론 이사야 아니고도 길이 있겠지만, 어쨌거나 예수님이 되시는 데는 이사야 이건 분명히 어떤 작용을 했을 거예요.
 
그 다음 세째 노래. 50장 4절을 보자
“주 여호와께서 말솜씨를 익혀주시며 고달픈 자를 격려할 줄 알게 다정한 말을 가르쳐주신다. 아침마다 내 귀를 일깨워주시어 배우는 마음으로 듣게 하신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어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아니하고 꽁무니를 빼지도 아니한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다. 주 야훼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어 차돌처럼 내 얼굴빛 변치 않는다.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죄없음을 알아주시고 옆에 계시는데 누가 나를 걸어 송사하랴? 법정으로 가자. 누가 나와 시비를 가리려느냐? 겨루어보자. 주 야훼께서 이렇게 나를 도와주시는데 누가 감히 나를 그르다고 하느냐? 그들은 모두 낡은 옷처럼 좀이 쓸어 삭아 떨어지리라.” (「이사야」, 제50장 4~9절)
이런 노래가 어디 있느냐? 전편이 다 그렇지만 ‘야훼의 종의 노래’ 란 참 좋아. 다른 건 다 말고도 이건 자꾸 읽어보세요. 그러면 속에 힘이 자꾸 솟아나올 거요. 동양에서도 말했지만, 시(詩)는 흥야(興也)라, 동양에서 시는 왜 읽는고 하니 ‘흥(興)’. 다 피곤했던 영혼이 다시 일 어서, 시(詩)는 흥야(興也)라, 흥(興)은 비야(悲也)라, 흥하면 슬픈 맘이라, 흥야라 비야라.
여기서 우리는 나쁘게 말하여 “흥야라 비야라”가 뭐냐? 돈이고 뭐고 좀 벌었던 걸 “흥야라 비야라” 해서 다 버렸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다가 잘 안돼서 하는 소리고, 이 말은 시는 흥야라 비야라. 흥이비야(興而悲也)라, 그런 말에서 나온 거예요. 시편(詩篇)에, 중국의 옛날의『시경(詩經)』에, 공자님이 다 시정하신 건데, “시란 흥하는 거다.”『논어(論語)』에도 “선비는 우선 시 읽어야 된다” 그랬어. 시 읽어야 말이 이렇게 감동흥기(感動興起)한다, 일어난다. 흥은 비야라, 흥하면 슬퍼진다. 말이 올바르게만 되면 자연히 내 맘이 안타까와서만이 아니라 좋아서 좋아서 기뻐지는 거예요. 그래 내가 언제 시에서, 난 시도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진리는 슬프다, 파랗게 슬프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와서 “거 왜 파랗게 슬픔니까?” 그래. 어이가 없어서 대답도 못하고 말았어. 그것을 내가 뭐라고 말해야 좋겠어. 그렇게 말해도 못 느끼는 사람은 설명을 해도 모를 거예요. 나는 적어도 그럴 때는 내 심정을 그대로 그려본 건데 “진리는 슬프다, 파랗게 슬프다.”
성경에서 예수님 보면 어쩐지 우리 주님이라고 그래 고맙기도 하지만 보기만 하면 맘이 슬퍼지는 데가 있지 않아요? 슬픔의 사람이에요. 슬픔의 사람, “주 세상 계실 때 늘 슬퍼하셨네.” 사랑이 있고 참이 있고 하니까 슬프지 않을 수 없어요.
 
이 노래 이제 이거 “여호와께서 내게 말솜씨를 주셨는데” 난 아무 재주도 없는 못난 사람인데 어쩌면 내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말솜씨를 주셨는데……” 그런 소리가 나올 게 아니오? 이게 문학을 많이 한 사람이라면 이런 소리 안할 거예요. 그런데 원체 내가 못난 걸로 알았는데 어쩌면 내 속에서 이런 말이 나와? 그러니깐 “하나님이 내게 말솜씨를 주시며 고달픈 자를 격려할 줄 알게 하시니.” 고달픈 사람 만날 때 어쩔 줄 몰라.
난 지금 요새도 자꾸 하는 소리요만, 어떤 사람이 나이 서른이 못 됐는데 백혈병 걸렸다니 기가 막혀. 서울 또 올라온다고 그러는데 만나면 뭐라고 위로해주지? 이 세상에 났으면 죽는데 무어라고 다소라도 위로가 될 만한 말을 해줄 의무가 내게도 있어요. 모르는 사람도 그렇지만, 아는 사람이라도 그래. 무슨 말로 위로가 될까? 보통말로 인사나 하는 것 가지고는 안돼. “아이고 뭐 걱정 마세요” 한다든지 그런 따위 수작이나 해가지고는 결코 위로를 못할 겁니다. 여기도 폐병을 앓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니까 하는 말이오만, 저번 날도 말했지만 반대로 내가 죽으라고 했더니 도리어 살아나더라 그러지 않았어요? 진심으로 나오는 것이 문제인데, 그러기에 말재주가 어디서 나냐? 꾸미고 꾸며서 되는 게 아니에요. “고달픈 자를 격려할 줄 알게 다정한 말을 가르쳐주신다.” 진심에서 나온다는 게 문젠데, 그런 말재주가 어디서 나냐? 꾸미고 꾸미는 것 아니라 나 자신이 고달픈 사람이 되는 것 입니다. 하나님 모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될 생각을 하면 나는 자연 고달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정한 말이,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서 솟구치니까 자연히 그 말이 나왔지. 말이야 살아라 했거나 죽어라 했거나 그건 상관없어요. 내 정말 진정에서만 나오는 말이면 저 사람을 울리지 않을 리가 없어. 그건 내가 지내봐서 하는 말이야. 그러게 말 걱정 마세요. 내 속에 여기 참만 있나 없나 그것이 문제지, 말로 우리 대적을 정복하려고 하는 데가 잘못이야. 선언문 보고 물러갈 사람이면 거 19년 동안이나 정치해 먹었겠어요? 절대로 안 그래요. 거 맘이 돌보다 더 굳은 사람들이에요. 암초보다도 더한 사람들이야. 그걸 녹여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건성으로 도는 생각가지고 그러는 건, 난 겁이 많은 사람이 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것 가지고 무너질 사람이 아닌데.
나도 어디선가 들은 소리가 있어, 보통 자리도 아니고, 누구한테서 들은 얘긴데, 아주 그인 두렵고 놀라서 와서 얘기해. 아주 높은 사람하고 얘길 하는데 옆에서 듣고 있더니 “허, 우리가 군사정권이란 걸 아셔야 됩니다. 거저는 안 내놓고 나갑니다. 놓고 나간대도 크게 소리를 내고야 나갑니다. 소리 내도 크게 내고야 나갈 겁니다” 그랬다는 거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한테 선언문이나 내가지고 되겠어요. 그런 생각으로 하는 것 아니에요. 그렇겐 아마 안될 겁니다. 그보다도 힘있는 게 있어야지. 그건 뭔고 하니 그 사람의 폐부를 찔러야지. 살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찔러야겠다는데, 다른 게 아니라 이 노래대로, 이제 마지막 장에 나옵니다만, 요점은 다른 데 있는 것 아니고 내가 이제 이겨야겠는데 이기는 건 다른 데 있는 것 아니고 저 사람이 무서워서 굉장한 무장을 했는데, 무장은 왜 했는고 하니 양심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그래. 사람의 맘을 잊어버렸어. 그러니까 내가 이기는 것은 그 사람 맘속에 있는 양심만 깨워놓으면 이긴다, 그 말이야. 이제 비폭력의 비결은 다른 데 있는 것 아닙니다. 저쪽의 “그 무장한 것을 무슨 폭탄을 가지고 터칠까” 그런 시시한 생각 안합니다. 그런 건 되지도 않는 거고. 해도, 될 수 있대도 그건 죄악이야. 나도 사람 미워하고 사람 죽이고 뭘 “누구보다도 낫겠다”고 그래! 그래서 안하는 건데, 왠고 하니 내가 미워하는 대적으로 보는 그 사람의 양심을 때리자 그 말이야. 양심을 때린다는 건 양심이 없어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양심을 일깨워 놓자는 그 말이야. 그게 비결이야. 양심만 깨면 이 손에서 무기 저절로 떨어져. 내가 사람인데 사람 죽일 수야 없지.
 
그게 결코 공상이 아니에요. 공상이 아닌 것을 근대에 와서 잘 실현해 보인 이는 간디, 간디가 그걸 해보였어. 그리고 우리는 물론 예수님 보았어. 예수님은 당장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데, 돌아가서 영 없어지고 실패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살아있을 때 한 일보다 도리어 예수가 돌아가시니까 굉장한 일 나오지 않아요? 이제 거기, 여러분은 어떻게 보시는지 모르지만 난 그걸 볼 때마다「마태복음」에 있는 말에 걸려버렸어. 옛날에 뭐라고 그랬는고 하니 십자가에 예수가 달리니까, 오후 세시인데 천지가 캄캄해졌다고 하는 것하고, 그 다음 자던 성인들이 모두 일어났다고 하는 것, 정말 그럼 예레미야가 일어나고 이사야가 일어났겠냐? 이건 거짓말을 하는 건가? 여러분은 어떻게 푸세요? 그럴 때 어떻게 지나갔어? 자던 성인들이 모두 일어났다고 했는데, 거 무슨 소리로 해석을 합니까. 그럼 그적에 예수 못박히던 날, 그날, 그 전에 죽었던 뭐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호세아 하던 이들 모두 다 나와서 예루살렘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걸었습니까? 그랬다면 그놈의 예루살렘이 그대로 있었을 리가 없어요. 그 사람들 다 울고 회개했겠지. 한데 그런데도 그놈들이 예수를 갖다가 땅에 묻고 군사로 지키고 한 것은, 정말 그런 성인들이 나왔다면 아무리 악독한 놈들도 그냥은 못 있었겠는데, 그건 아닐 거요. 난 그렇게 봐.
그게 뭔고 하니, 이 믿는 사람들이 체험한 거야. 영감으로, 뭐 무슨 눈으로 봤거나 간에 보았어. 저「히브리서」에 있지 않아요? “봐라, 너 뒤에 먼저 싸우고 갔던 모든 사람들이 말이야, 천군천사가 구름같이 두르고 있다”고 그러지 않아요? 그걸 노상 그저 과장으로 알아서는 여러분이 성경 잘 모르는 거예요.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난 첨엔 성경을 그렇게 알았어. 그리고 힌두교 경전을 읽으면, 여기 불교 아는 사람 더러 있을 터인데, 인도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해. 석가가 턱 좌정을 하고 앉으니까 “무슨 천왕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부하 몇 천 몇 만을 데리고 와서 길이가 몇 천 척 되는 기를 받고, 그러고는 동쪽에 와서 좌정, 또 무슨 어느 천왕은 자기 군사 얼마를 데리고 와서 서쪽에 와서 좌정. 그런 말이 있어. 대체 인도사람들은 과장도 하기도 한다. 깃대가 높기를 뭐 우리가 말하면 몇 십 길이라든지 뭐 이런 거, 또 사람을 몇 천만 군중을 데리고 와서 여기 와서 좌정 저기 와 좌정, 이제 그렇게 한 다음에 그런 걸 말하고는 ‘설교를 하신다’ 그랬는데, 이게 뭐냐? 이게 다 과장을 하느라 그랬느냐 그랬는데, 그런 게 아닐 거라는 걸 후년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어. 그건 뭔고 하니 이 속에, 맘속에 새 눈이 열리면 뻔히 이렇게 앉아 있으면서 새 천지가 보여, 새 천지가. 다른 사람은 그걸 꿈이라고 하든지 환상이라고 하든지 상관없어. 꿈이라고 하겠거든 꿈이라고 그러고 환상이라고 하겠거든 환상이라고 그러고. 하지만 체험 한 ‘이 사람’에게는 천지가 무너지면 무너졌지 이건 분명히 확실한 사실이야. “내가 봤다” 아주 그러는 거예요.
 
이제 그렇게 생각하고 보아야 그 뜻을 알지. “예수님이 돌아가셨는데 잠자던 성인들이 일어났다.” 그건 예수님을 칭찬하려고 과장해서 그랬나? 그럼 예수 믿는 사람이란 시나 쓰는 사람이냐? 나는 젊어선 그런 의혹이 많았던 거요. 근래에 오다가 정신에 나타난 것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여기서도 보고 저기서도 보고 하는 동안에 다소 짐작이 가서, 그런 것만이 아니다, 주관만이 아니고 상상만이 아니고, 시적으로 형용하는 것만도 아니고, 그건 차원이 다른 세계가 이렇게 앉은 이 자리에 있으면서도 우리 맘이 어느 순간에 맑아지면 순간적으로 경험할 수가 있는 거다. 그런데 잘하는 분들은 순간적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그런 게 아주 부동, 변하지 않고 있을 수도 있어.
 
『금강경』의 말대로 한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아녹다라 삼막삼보리’에 영원히 주(住)할 수 있습니까?” 거기 머문다 그 말이야. 거기 머물러 내가 내 속에, 그리스도가 내 속에서 머물게 돼야 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머물 수가 있게 돼야 돼. 우리는 어느 순간은 예수님 품안에 있으면서 “아, 고맙습니다” 다 된 것같이 그래. 또 그다음 순간에 “쓸데없는 생각을 괜히 했군” 그러지 말고, 그런 거를 “아이고 내가 잘못해 그렇습니다.” 그래도 사람인지라 또 그랬으면, 했으면 하는 생각이 나겠지만 그런다고 반드시 오느냐 하면은, 오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럼 “이건 맹랑한데”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나고 그래요. 그런데 이거 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많이 많이, 내딴으로는 칠전팔전 쌈해보고 하는 거니까, 그래도 낙심을 말고 그대로 하면 혹 가다가 한 달 후에 두 달 후에, 다 잊어버리고는 자다가 갑자기 또 괜히 일어나 앉아 기도할까 그래. 또 그러는 동안에 오기도 하고, 또 안 오기도 하고 그러는 거요. 그걸 통해서 “그러면 옛날 사람들의 말이 헛말이 아니겠군.” 순간적으로 오는 것만 가지고 안되고, 그러나 순간적으로 오는 것이 있을 땐 또 “이것이 거짓이 아니군. 예수님이 거짓말 안하셨군,” 그럼 내가 “참 믿는 지경엘 가면 흔들리지 않는 지경엘 갈 수 있을 거다.” 이렇게 믿는 것 입니다.
그래 그 점을 바라고, 내가 죽기 전에 되겠는지 안되겠는진 몰라요. 안돼도 난 믿을 거요. 내가 죽은 후에라도 그 자리에 갈 줄을 믿을 거요. 내 지금으로는, 이거 뭐 칭찬을 듣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들에게 좋은 인기를 얻자고 하는 말도 아닌 거요. 있는대로 고백을 하는 데 “그것만은 난 믿어!” 저 인도식의 말을 한다면, 이생만이 아니라 열두 번 고쳐 태어나도 백 번을 고쳐 태어나서라도 하나님이 계신 이상은 내 그것 완성이 되고야 말거다. 그래 예수 믿는 사람이지만 불교 믿는 사람처럼 이야길 하나 하겠어요. 재미도 있고 하니까, 그런 말로 하는 건데 모르는 말이에요. 시간 공간이 없어요. 여기 이 현상계인 여기서 생각을 하니까 시간이고 공간이고 몇 년이고 몇 해고 그러지, 그 자리엘 들어가면 시간 공간이 없어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는 게 그런 말이에요. 그것은 이렇게 지나보면 조금씩은 짐작을 할 수 있어요. 옛날 사람들은 그래서 증거했단 말이야. 뭐 그 사람들이라고 영 흔들림이 없는 줄 아세요? 하지만 몇 번 그래 보면 확신이 가요. 그런 고로 이것은 분명히 썩어질 건지 썩어지지 않을 건지를 알게 되니까, 우리 같으면 저런 소릴 했다가 안 들어맞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할지 모르지만 그건 벌써 그 지경에 있으니까 걱정을 말고. “이게 참 입니까?” 하고 선생님에게 물었댔자, 선생이 확실한 대답하는 사람은 아마 별로 많지 않을 겁니다. 목사님한테 가서 물었댔자 “글쎄 내가 아나. 하나님의 뜻이겠지” 그러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지금 말한 그 지경을 순간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확실하기만 하다면 물을 거 없다. 누구에게 갈 것 없이 “분명히 이렇다” 여러분에게 알려줘.
 
그렇기 때문에 인자가 오려고 할 때는 “어느 날에 오나 어디 오나 찾을 것 없다”하지를 말고, 어느 시간에 오는 것도 아니고 어느 땅에 오는 것도 아니고, “번개가 동에 번쩍하고 서에 번쩍하는 모양으로 오신다” 하는 말은, 오는 것, 예수님 오는 것을 못 만날까봐 그래.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어느 시간에 오는 것도 아니고 어느 곳으로 오는 것도 아니란 말이야. 환하게, 눈을 감으려도 감을 수가 없고 피하려도 피할 수가 없을 만큼 온다. 그게 뭘까? 뭔지 모르지만, 그렇지만 그런 지경을 말하는 거요.
그것은 내가 그 지경은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지경이 있다고 하는 것만은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내가 여러분한테 고백할 수가 있다 그 말이야. 먼저 있는 사람들이 증거해 주는 것이 힘이 된다는 건 그래서 하는 말이야. 그러니 간디는 비록 한 사람이라 하지만, 내 말이 참으로 철저한 비폭력의 사랑의 정신을 품기만 하면 백만군의 악이 있더라도 이길 수 있다 했습니다. 그것을 간디라고 해서 과장한 거다 하지 말라 그 말입니다. 그건 간디의 실정을 잘 알지 못해서 그래. 그 양반이 거짓말하고 과장하는 게 아니거든. 그건 말이 아니야. 의사들이 몇이 달라붙어서 “우린 당신이 그렇게 고집하겠다면, 그만 두겠소. 당신 목숨은 또 모르지만, 당신 아내까지도 그렇게 이런 고집을 해가지고 죽인단 말이오?” 간디가 하는 말이 “그건 안돼. 하나님에게 약속한 담엔 죽어도 변하지 못한다” 그러지 않았어요? 그랬는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자기가 요행으로 살아났고, 죽었다면 큰일날걸 살아났다 그러겠지만, 간디는 그런 게 아니야.
그러니까 이 진리의 나라요 정신의 세계요 하는 것은 속으로 아주 속은 듯이, 속아버리는 줄 알고. 그럭하고는 믿겠으면 믿고 안 믿겠으면 안 믿고. 그러니까 도박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없앤 담엔 밑천도 못 건진다! 그런데 사실 밑천이란 게 어디 있어요. 밑천 본래 없는 거야. 없는 걸, 밑천으로 알고 있는 게 그만 잘못이야. 잘 믿다간, 이제 그런 사람이 아니고는 거길 못 올라가는 거야. 그러기에 그런 지경에 도달했다는 사람들 다 들어보세요. 반드시 그런 데가 있어. 우리들에게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건, 거짓말할 것 같지 않은데, 그 사람들이, 그래 여기에 있는 이 말이 이거다. 보통 사람의, 그저 잡지에 쓰고 돈이나 받아먹는 그런 시인들의 말로 생각하지 마시오. 그래 자기도 이게 너무 좋아서 하는 말이야.
 
50장
“주 야훼께서 나에게 말솜씨를 익혀주시며 고달픈 자를 격려할 줄 알게 다정한 말을 가르쳐주신다. 아침마다 내 귀를 일깨워주시어 배우는 마음으로 듣게 하신다.”(「이사야」, 제50장 4절)
얼마나 좋아요. “주 야훼께서 내 귀를 열어주시니” 평소에 그는 귀가 메었어. 귀가 열렸다는 게 귀가 멘 거예요. 멘다는 건 열린 거고. 귀가 정말 메어서 세상소리가 안 들리게 되면 그건 귀가 열린 사람이고, 그저 남의 시비소리 무슨 무슨 소리 다 들리는 것은 정말 귀는 멘 거로 반댄데. “내 귀를 열어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아니하고 꽁무니를 빼지도 않는다.” 이게, 꽁무니 빼지 않는다는 말이 보통 말이 아니에요. 도망, 웬만한 사람들은 큰소리 쩡쩡 치다가도 정말 이제 죽을 자리가 나오면 설설 빼는 거예요. 꽁무닐 빼는 거예요. 나는 그렇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그런 말 못했어. 아 보니까 뭐 “우리가 이제 다 나가 죽읍시다” 하는데 이제 어떡하지? 저거 다 나가 죽자는데 어떡하지? 난 그런 용기 없는데. 그런데 그런 말 했던 자들은 언제 도망갔는지 다 도망가고 없었어. 생각이 좀 생겼다면. 거 내가 차마 그렇게 도망갈 수는 없지 않아? 그래 나는 머뭇머뭇하고 마지막까지 있어보았는데.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이걸 보고 생각나는 이 있죠? 예수님, 여기서 배워가지고 하셨구만, 그럴 거야 아마. “남이 오른 뺨 때리면 왼쪽 뺨까지 대라.” 밑천 없이 된 것이 아니야. 여기서 있은 것이지. 본래가 그런 거예요.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다. 주 야훼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어 차돌처럼 내 얼굴빛 변치 않는다.” 내가 얼굴이 차돌 같다, 저 놈의 얼굴이 돌 같다 하면 큰 욕이에요. 그런데 뭣이 와도 낯빛이 안 변해. 정보부에 가자고 그러면 그래도 붉은 기가 슬쩍 올라오지. 하, 상당히 겪었노라고 해도, 적어도 잠깐 조금 이랬다가 가라앉는 거지. 이제는 비교적 괜찮아요. 괜찮지만, 그거 이젠 내가 부끄러울 것도 없어. 거 아무려면 잘났겠어요? 그런데 사람이란 그렇게 어려워. 그러나 그래도 그렇게 그걸 참고 해 보면 그 담엔 그렇지 않게 돼요.
“아이구 내가 한 것이 아니지, 하나님이 참 그런 걸 주셨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다. 주 야훼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 조금도 부끄러울 게 없어. 차돌처럼 내 얼굴빛 변치 않는다.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줄 알고 있다.” 아, 무서운 말이야.
 
“하나님께서 나의 죄없음을 알아주시고 옆에 계시는데 누가 나를 걸어 송사하랴.” 여기 8절 이후는「로마서」8장에 있는 바울의 얘기에도 있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누가 나를 송사할 자가 있느냐.” 그게 다 여기서 나갔어. “누가 나를 걸어 송사하랴? 법정으로 가자. 누가 나와 시비를 가리려느냐? 겨루어보자.” 아주 건방진 것 같아요. “주 야훼께서 이렇게 나를 도와주시는데 누가 감히 나를 그르다고 하느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 아까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잔도 끌 줄 모르는” 사람이 이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거 아주 겁쟁이라면 겁쟁이고, 맘이 약하다면 약한 여자같은 사람인데, 여자보다도 더한 사람인데 “누가 나를 감히 그르다고 하느냐? 그들은 모두 낡은 옷처럼 좀이 쓸어 삭아 떨어질 것이다.”
힘있는 영혼을 위하여
 
53장까지 했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없으니 그만둡시다. 다른 건 다 몰라도 53장에 있는 것, 그게 없으면 성경이 다 없는데 뭐.
여기까지는 이스라엘 민족을 두고 하는 것처럼 보여요. 알 수가 없어요. 이건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도 이것이 어느 개인을 두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민족을 두고 하는 말인지 몰라. 개인이라면 개인이지. 물론 여기 “내가 이스라엘을 뽑았다” 할 때는 민족전체를 두고 하는 말로 보이지만, 이게 53장에 가서는 그 주석 놓은 사람도 이건 정말 어느 특정의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그러지 않아요? 예수님의 생애를 우리는 이해하기가 쉬워요. 어쩜 예수가 사실로 나타나서 보여주셨지만 그런데 그러면 우리가 놀랄 것도 없어. 미안한 말이지만, 예수님이 어쩌면 여기 있는 이것을 몸으로 실현하셨을까. 그대로 예수의 일생을 보 고 쓰기나 한 것처럼 그렇게 돼 있지 않아요? 이런 놀라운 문학이 도대체 어디 있나?
 
그래 일제시대에도 이런 걸 보면서 또 위로를 얻고 또 위로를 얻고 그랬지만, 마찬가지야. 어느 의미로는 일제시대보다도 더 어려운 시대야. 그저 기회 있는 대로 이런 걸 자꾸 읽어야 돼. 그럭하지 않고는 우리 영혼이 주려. 영혼이 살아 있지만 주리게 되면 힘을 못써요. 맹자가 그랬어. 누가 맹자보고 “선생님, 이제 그만하면 무슨 높은 지위라도 주면 맘이 좀 움직이겠습니까, 안 움직이겠습니까?” 그랬더니, “아이구 나도 이제 나이 마흔이다. 맘 안 움직인다.” “그래요? 그렇게 훌륭하십니까?” 그러니까 “야 이 사람아, 나도 내 기르는 게 있단 말이야.” “뭘 기름니까?” “내 호연지기를 잘 기르지”(我善養吾浩然之氣) 호연지기란 우리말로 하면 성령(聖靈)이에요. 하나님의 영을 내 속에 기르지. “그 호연지기라는 게 어떤 겁니까?” “지극히 크고 강해서 이걸 다 펼치면 우주 안에 가득 들어차고, 줄여서 거뒤 넣으면 내 요 맘속에 다 들어가는 것, 이런 거다.” “그것 어떻게 자라나?” “의기(義氣)를 먹고 자란다. 그것 없이는 주려버린다.” “그런 의가 무엇에서 나나?” “기운을 길러서 된다.” “영혼은 뭘로?” “내, 성령 먹고 살아.” “성령은 어디서 나왔어요” 하니까 그건 또 반대로 말이야, 영혼에서 나온 거지. 영이 있으니까 나왔지. 서로 돌아가는 노릇이야. 그래 여가가 있으면 그 설명 다시 했으면 좋겠지만, 맹자의 아주 좋은 말이야. “지일즉기동(志一則氣動)하고 기일즉지동(氣一則志動)이라.” 뜻이 통일이 돼서 지극한 자리엘 가면, 그게 이 정신인데, 내 믿는 맘이 참 철저해지면 자연히 내 정신이 움직여지는 거고, 반대로 또 기일즉지동(氣一則志動) 내가 정신통일을 열심히 하면, 맘을 이 공부를 열심히 하면 믿음이 생긴다. 우리말로 하면 그래요.
 
“지일즉기동(志一則氣動)하고 기일즉지동(氣一則志動)이라.” 하나만 알면 못써요. 내가 내 몸가짐을 똑바로 하면 몸이 옳게 된다. 서로 되는 거야. 양쪽이 다 있어야 돼. 그래 모든 이치가 다 그런 줄 알고, “이것이냐 저것이냐? 둘 중 어느 것이냐”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오. 이것도 있지만 저것도 있다. 이렇게 서로 상호작용하는 거예요. 서로 뗄 수 없는 것을 분석해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상호작용인 것을 분명히 아셔야 돼.
그러니깐 내 속에 어떻게 하면 이 산 정신이 충만할 수 있습니까? “그건 네가 믿지 않고는 안되지” “또 그럼 어떻게 하면 믿습니까?” “그건 네가 정신력을 충실시키지 않고는 안되지.” 그것이 서로, “그럼 그건 순환론입니까?” “난 그 이상 말 못한다. 네 맘에 하나님의 씨가 있으면 네가 알아들을 것이다. 알아듣고 싶은 맘이 없어 그렇지 알아듣고 싶은 맘이 있으면 그 말을 알아들을 거다.” 믿음은 뭘로 됩니까? 정신력이지. 정신력은 뭘로 됩니까? 그건 믿음으로 되지. 거 순환론인 것 같지만 그걸 알아들어야 왜. 그래야 귀가 열린 사람이야.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그거 알기 쉽게 깨쳐 말해줍시오.” “너 같은 건 하늘나라 못 들어간다” 그러기 위해 그러는 게 아니라, 그런 약(藥)이나 쓰면 깨치겠는지, 그 사람의 맘이 터지라고 하는 소리예요. “너 같은 건 못 들어간다” 하고. 어떤 사람이 어거스틴인가 보고, “천지창조하기 전에 하나님은 뭘 하고 계셨습니까?” 그러니까 “너 같은 놈 잡아넣으려고 지옥 만들고 있었다” 그랬다는 거야. 그 소리를 신학토론하면 우스운 거야. 거 무슨 소린고 하니 “저놈 맘이 한가해서, 막혀서 그러는데” 그것 맘이 열리게 되면 ‘탁’ 이렇게 돼야 양심이 이제 살아나게 돼. 그러기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양심을 깨우는 일이야. 우리나라 대통령 이 신앙이 생기면 굉장히 좋은 일 할거야. 참 그럴 거야. 그 성격! 그런데 그런 좋은 재목을 두고 한번 못써먹는단 말이냐? 그건 내 믿음이 모자라서 못 써! 안돼! 그러니 부끄럽단 말이야. 하나님 앞에 가서 내가 할 말이 없을는지 몰라. 몰라, 하나님 어떻게라도 해주실는지…… 적어도 나는 그 책임질 생각해야 돼. 너 왜 그때 낫살도 더 먹었지, 경험한 것도 많지, 그런데 너 왜 못했느냐? 그럼 뭐라고 대답을 하지 ?
이제 그런 것을 뭐 꼭 그렇다고 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참고로 들어보시라고 하는 말입니다. 먼데 있는 게 아니고 내 속에 있는 것이니까. 내 속에 변화가 못되는 것 이게 문제지, 영으로 완전히 때를 벗고 활짝 나기만 하면 모든 의문이 일시에 활짝 열려서 걱정이 없어요.
 
난 도대체 이 자리에 올 때까지 근심 걱정 많았어. 아무 준비도 못하고, 그냥 갔다가 어떡하지? 나 정말이야. 실지로 그랬어. 그랬는데 그래도 안갈 수 없어서 “가지” 그러고 왔는데, 오니까 이 말대로 나와서 하는 겁니다.
요만큼한 생각이라도 내가 지금 말하고라도 “죽어도 좋다! 이제 이 말을 채 맺지 못하고 죽어도 좋다.” 기분이 그런데 말이야. 그래요. 정말 그래요. 그거 물론 더 큰게 있으면 더욱 좋지만, 크고 작고가 아니라 문제는 맘이 살았나 죽었나 거기 있어요. 그럼 내 맘이 살아만 나면 미운 사람 없어. 미운 사람 없는데 두려운 게 있겠어요? 또 두려운 게 없는데 미운 게 있겠어요?
그 자리가, 예수의 그 말씀 거짓말 아니라 그 말이야. 예수 믿는다고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거짓말하시는 분 아니시지” 그렇게 생각을 안하는데, 예수님에 대한 모욕도 그런 모욕이 어디 있어? 나는 자꾸 말할 때마다 그럽니다마는 그 사람이 불쌍해서 못 견디겠어. 이제 내가 전 생명을 걸고, 역사상으로 내려오던 약속이 이게 실현이 안되면 이게 헛말이다, 하나님의 말이 헛말이 된다, 그 순간에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모든 예언자 다 생각 했을 거예요. 옛날 모세 이래의 모든 것이 이 순간 다 내 맘에 몰킨 것 아니냐? 이제 그 책임을 졌으니, 그래서 이 세상 죄를 이렇게 지기 위해 왔다면, 그것을 그저 시적(詩的)으로 하신 말씀인 줄 아세요? 예수님 같은 이는 그거 하나하나 허투로 했을 리 없으신 분이오. 그러니까 하나 하나 이게 무슨 뜻이냐, 씹고 또 씹고 해서 자기 마음에 “그렇다! 이게 그거다!” 어느 학자에게 물어볼 것 없이, 그거다 하셨을 겁니다. 마치 내가 이 순간에 말하는 것처럼 기분이 이래서 말하리만큼 되는 자리, 그거만큼만은 아니지만 하여간 이런 정도로 이렇게 되는 데가 아니 고는 안돼! 어디 가서 물을 거 없어요. 왜? 살았냐 죽었냐는 사실 그 자체가 증거하는 거지 말이 소용없습니다.
 
 
 
친우회보 1981 여름호
저작집30; 21- 131
전집20; 11-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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