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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함석헌의 역사관 / 김경재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바보새 작성일16-07-18 17:26 조회72회 댓글0건

본문

2002년 12.7(토) 늦은 5시  종로 5가 한국교회 백주년기념관 4층
함석헌의 역사관 / 김경재


 
함석헌의 역사이해
-‘나선형 진보사관’에 대한 한 신학적 조명-


(1) 들어가는 말: 논제의 목표

  이 글은 신천(信天) 함석헌 선생의 역사이해의 한 단면을 파악해보려는 것이다. 특히 그의 방대하고 중층적인 역사이해의 여러 가지 요소와 측면들 중에서 그의 역사철학의 독특한 특징으로 보이는 ‘나선형 진보사관’이 함의하는 바를 신학적 입장에서 조명하고 그 의미를 21세기 시작점에서 되새김하려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 속에서 신천옹의 독특한 모습은 종교사상가, 종교시인, 문필 언론인, 고전연구가, 민권운동가, 비폭력 평화운동가등 다양한 모습이 있지만, 학문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공헌은 역사철학자로서의 공헌이다. 함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고전으로까지 평가받게 될만한 작품이 된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할 것이다. 그가 동경고등사범학교 유학시절(1924-1929) ‘역사’를 주전공으로 공부했기에 역사학에 대한 기초 토대 위에, 그의 뜨거운 민족애, 그의 정직한 과학정신, 독실한 기독교 신앙, 그리고 그만이 해 낼수 있는 깊고 고독한 사색이 한데 어우려저서 만들어진 불휴의 명작이기 때문이다.

그 책이 단행본으로 출판된 1950년대 이후, 한국의 수많은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에게 미친 영향력에 있어서, 그 책과 비교할 만한 한국인이 손으로 쓴 책이 드물 것이다. 그 책 속에 담겨진 탐구되어야 할 다양한 주제들 중에서, 함선생의 독특한 역사관을 중점적으로 조명하려는데, 특히 다음의 3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역사를 ‘뜻의 실현과정’으로 파악하는 함선생의 ‘종교사관’에서 성서적 요소와 동양사 상과의 지평융합의 문제.

2. 역사과정을 생명창발적 나선운동과정으로 비유하는 나선형 진보사관이 지닌 상징적 의미문제

3. 역사과정을 ‘하나님-역사-씨알’의 불가분리적 통전성에서 파악할 때, 역사담지자의 고 난의 의미와 신정론 문제 .

(2) 역사는 “뜻의 실현과정” 인가 ‘하나’로서의 ‘진리’가 밝혀져가는 ‘이해의 과정’ 인가?

  우리가 아는 대로 함선생의 명저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3단계의 중요한 간행단계가 있다. 첫째, 맨 첨 활자로 간행은 “성서조선 동기집회(聖書朝鮮冬期集會)에서 신앙동지들 앞에서 이야기 한 내용이 김교신 주관하는 <성서조선>에 1934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주제로 연재한 것이다. 여러번 일제당국의 검열,삭제,인쇄금지를 당한 문제의 글이었는지라 맨 첨 활자화된 분량은 200자원고지 800장 분량이었다고 지명관은 밝히고 있다. 일제말기에 이 책의 ‘고난사관’이 문제가 되어 함선생은 옥고를 치루게 된다 둘째 간행은 해방후, “일제시대에 쓴 바로 쓰지 못하였던 글귀를 고쳐서 썼을 뿐, 내용은 별로 다름이 없었다”라고 저자가 말하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둘째판 이라 부른 책 서문에서(1950.3.28일자) 저자는 이렇게 쓴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이라는 제목의 귀절이 일반 사람에게는 걸림이 될듯하니 빼면 어 떤가 하는 의견이 잠깐 나왔으나 그것은 사슴에게서 뿔을 자르는 것 같아 그대로 두기 로 하였다. 이 글이 이글 되는 까닭은 성경에 있다. 쓴 사람의 생각으로는 성경적 입장 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다. 똑바 른 말로는 역사철학은 성경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양에도 없고 동양에도 없다. 역사 는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이 성경의 자리에서만 될 수 있다.

셋째 간행본은 일제말 서대문 향무소 감옥생활 1년을 겪으면서,“생각을 파는 동안에 사상의 태두리는 조금 넓어지고 깊어지고 조금 더 멀리 내다보이는”자리에로 확장 심화되어 오다가 특히 6.25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함석헌의 믿음, 사관, 실재관이 “아주 결정적으로 달라지게 된”결과 이다.

함선생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고 붙인 본래 책 이름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세 번째로 고쳐내는 수정증보판 서문에서 매우 중요한 다음 같은 말씀을 했다.

그랬기 때문에 내 역사에 대한 사회의 요구가 차차 늘어가서 1961년에 그 셋째판을 내 려 할 때에 나는 크게 수정을 하기로 하였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생각은 변할 리가 없지만, 내게는 이제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타 나는 그 형식은 그 민족을 따라 그 시대를 따라 가지가지요, 그 밝히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알짬되는 참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 곁드려서 내 태도를 결 정하게 한 것은 세계주의와 과학주의 이다. 세계는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국가주의를 내쫒아야 한다는 것이요, 독단적인 태도를 버리고 어디까지 이성(理性)을 존 중하는 자리에 서서 과학과 종교가 충돌되는 듯한 때는 과학편을 들어 그것을 살려주고 신앙은 그 과학 위에 서서도 성립이 될 수 있는 보다 높은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다.

1950년 둘째판을 내던 때의 서문과 10년 뒤 1961년 셋째판을 내던 때의 서문에서 저자가 밝히는 사관은 격세지감이 있을 정도로 큰 것이다. 어떤 점이 달라졌는가, 그 달라진 의미가 무엇인가를 좀더 깊이 심사숙고해보는 일이 이 글 첫째테마의 과제이다.

첫째, 함석헌의 종교관이 확대심화되었다. ‘성서조선 동기집회’에서 그의 조선역사에 대한 처음 생각을 신앙동지들에게 도란도란 이야기 할 때 곧 ‘오산시절’의 함석헌의 신앙은 크게말하면 전통기독교 신앙의 태두리요, 좀더 구체적으로는 그의 고백대로 “ 아직 우찌무라(內村)의 ‘무교회신앙’을 믿고있었지 내 종교를 가지지 못하였다”. 셋째판에서 보이는 변화의 의미는 함석헌이 ‘무교회신앙’태두리를 완전히 벗어남과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전통적 기독교의 독단적 계시종교의 제약 태두리를 벗어남을 의미한다.

둘째, 함석헌은 세계문명사와 우주정신의 진화사에서 국가주의를 넘어서서서 세계주의, 우주적 보편주의에로까지 의식의 문명사적 전환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이 때 과학과 종교의 화해 및 통전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셋째, 그의 역사철학이 종파사나 계급사관, 유물사관이나 유심사관, 실증사관이나 민족사관, 유럽중심 또는 제3세계중심의 특정문명을 중심으로삼는 문명사관을 넘어서서, “뜻으로 본”이라는 말로 바꾸었을 때, 단순한 용어 변화이거나 보다 광범한 독자층을 겨냥한 기술상의 용어채택이 아니다. 뜻은 ‘만인의 종교’라고 까지 말한다.

하나님을 못믿겠다면 아니믿어도 좋지만 ‘뜻’도 아니믿을 수는 없지 않으냐? 긍정해도 뜻은 살아있고 부정해도 뜻은 살아있다. 져서도 뜻만 있으면 되고, 이겨서도 뜻이 없 으면 아니된다. 그래서 뜻이라고 한 것이다. 이야말로 만인의 종교다. 뜻이라면 뜻이고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고 생명이라해도 좋고 역사라해도 좋고 그저 하나라 해도 좋다. 그 자리에서 우리역사를 보자는 것이다.

이상에서 논자가 지적한 세가지 의미심장한 변화가 지닌 의미는 함석헌 사상과 그의 역사철학을 이해하는데 집고 넘어가지 않으면 아니되는 중요한 해석학적 전회의 문제가 된다. 독자는 여기에서 다소 혼란스럽게 된다. 함석헌은 초기에 지녔던 그의 사관의 등뼈요 ‘사슴의 뿔’이라고 본 ‘성서적 사관’ 곧 “시간을 인격적으로 본다”는 말과 “뜻으로 역사를 본다”는 말 사이에 과연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의 물음이다.

함석헌의 역사철학이 성어거스틴이 말하는 신의 목적론적 시대경륜론이나 기독교의 종말론적 목적사관과 같은 교리적 역사신학이거나, 초월적 인격신의 일방적인 역사섭리나 예정조화설 따위같은 견해를 철저하게 거절한다. 그렇지만, 하나님, 생명, 하나, 역사를 모두 ‘뜻’이라는 개념과 공명하거나 상응하는 의미로서 파악할 때, 과연 함석헌의 역사철학은 성경적, 히브리적, 기독교적 실재관을 완전히 벗어나서 자유하게 되었는가 묻게 된다. 왜냐하면 ‘성서적 입장에서’라는 어휘를 ‘뜻’이라는 어휘로 바꾸더라도 ‘뜻’이란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지향성’ 과 ‘실현과정’을 중시하는 ‘열려진 실재관’, 아직 완결되지 않은 우주와 지구생명과 인간본질이해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좁게 인간의 단위문명사를 볼 때나, 한 사회 공동체 및 인간개인의 삶의 활동을 볼 때는, 가치와 의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함석헌의 말대로“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존재 전체, 실재 전체라는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보면, 노장사상이나 신유학이나 힌두교와 불교사상에서 ‘실재’(Reality)는 자기완결적인 연원한 실재로서 아직 실현되지 아니한 미래지평과 과제를 지닌 그 무엇이 아니다. 힌두교, 불교, 신유학, 노장철학의 실재관에서 보면 ‘실재’는 완전한 원이나 구형(球形)처럼 그 자체가 이미 자기완결적인 온전함 안에서의 ‘역동적 충만’일 뿐이다. 물론 그 사상체계에서도 실재는 정태적(靜態的)인 실재가 아니고 무한히 역동적인 생명창출의 동태적(動態的) 실재관을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적 성경적 실재관과 위에서 언급한 고등 종교철학 사상세계와의 결정적 차이점은 역동적, 동태적 실재과정을 꿰뚫는 ‘뜻’이 있다고 보는 견해에서 나타난다. 다른 말로하면, 히브리적 성경적 실재관은 ‘시간’이라는 실재를 ‘순환’이나 ‘영원한 현재성’에서 파악하는 것과 구별되는 관점, 곧 시간의 ‘불가역성’(不可逆性)을 핵으로 하기 때문에, 역사적 삶의 유일회적 성격과 우주생명이 보다 더 높아지고 깊어간다는 ‘새로움의 창발적 과정’으로 이해는 나선형의 운동으로 파악하는 함석헌의 독특한 사관이 가능한 것이다. 힌두교, 화엄철학, 주염계의 태극도설이나 주역 속에서 생명은 충일하는 창발사건으로 파악될 수 있지만, 함석헌에서 처럼 ‘나선형의 목적 지향적 기하학적 모형’으로서 이미지 화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함석헌의 역사이해가 <뜻으로 본 한국역사> 속에서 탈 기독교화 했다고 하지만, 그의 역사이해의 근간에는 ‘뜻’이라는 주제를 통해 성경적 역사이해의 핵심적 본질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보다 종파적 교파적 제한성을 돌파한 형태로 심화된 것으로 이해된다. 도리혀 동양사상과의 심층적 만남을 통해 단순한 아날로그형의 , 단순직선형의, 공간적 실재차원이 시간적 실재 속에서 해소되어버린 시간중심형의 역사이해가 지양(止揚)되어 생명창발적 사건들이 나선형으로 발전해간다는 독특한 이해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3) 함석헌의 역사이해에서 생명창발적 나선형의 입체기하학 모델이 지닌 상징성

  함석헌의 종교이해와 역사이해가 한점에서 만나면서, 그의 사상이 현대 서구사상에서 최첨단의 과정철학이라 일컫는 알프레드 노드 화이트헤드나 떼이야르 샤르뎅의 사상과 너무나 흡사한 이해를 만들어 냈다. 원형반복적 또는 영원회귀의 역사관으로 표상되는 고대 아시아적 종교들의 원형(圓形) 모델과 셈족계종교 특히 기독교의 알파와 오메가 두점을 잇는 선형(線形)모델이 한데 어울려 통전되면, ‘되풀이하면서도 자란다’는 나선형(螺旋形) 모델의 역사관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함석헌의 역사이해에서 둘째번의 파격적 이해가 여기에 나타난다.

역사는 영원의 층계를 올라가는 운동이다. 영원의 미완성이다. 하나님도 죽은 완성이라기 보다 차라리 영원의 미완성이라 하는 것이 참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바퀴가 구르는 것이다. ........ 그러므로 역사의 시대 는 되풀이 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또 우리가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한의 바퀴를 돌고 있다. 그것은 아마 한번만의 바퀴일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운동은 차라리 수레바퀴나

나선의 운동으로 비유하는 것이 좋다. 수레의 바퀴는 밤낮 제자리를 돈 것 같건만 결코 제자리가 아니라 나간 것이요, 나사는 늘 제 구멍을 돌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올라가 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 근본생각은 영원히 앞으로 나가는 혹은 위로 올라가는 단 한 번의 운동, 곧 뜻을 이루기 위한 자람이라는 것이지 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아무도 본자가 없고 볼 수도 없는 그 영원의 바퀴를 이 인생의 일생으로 비유하여 보는 수밖에 없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생명의 운동을 세가지로 총괄하여 설명한 바 있다. 모든 존재하는것들 특히 생명있는 것들은 자기중심을 가지려는 원형적 ‘자기통전운동’(self-integration movement)을 하며, 인간 생명단계에 이르러 생명통전운동은 인격의식, 도덕의식으로 영글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 특히 생명있는 것들은 앞을 향하여 전진하려는 ‘자기창조운동’(self-creation movement)을 하는데 인간생명단계에 이르러 생명의 자기창조운동은 문화를 창조한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 특히 생명있는 것들은 대각선적 비상운동으로서 ‘자기초월운동’(self-transcendence movement)을 하는데 인간생명단계에 이르러 생명의 자기초월운동은 종교 또는 영성체험으로 나타난다.

위에서 인용한 함석헌의 역사이해는 현대서구 기독교 사상가 폴 틸리히, 떼이야르 샤르뎅, 알프레드 화잇드헤드가 이해하는 바와 너무나 흡사하다. 특히 화이트헤드와 떼이야르 샤르뎅으로 대표되는 과정사상의 실재관과 공명을 한다. 사실 한국에서 함석헌의 역사이해가 진화론과 지평웅합을 이루면서도, 우주만물의 변화가 무수하게 반복되는 ‘원형반복적 영원회귀 과정’이 아니라, “영원히 앞으로 나가는 혹은 위로 올라가는 단 한번의 운동”이라고 보는 것은 지극히 과정사상적 실재관인 것이다. “단 한번의 운동”이라고 함석헌이 강조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역사는 반복하지 않는다. 단 한번의 과정으로서 ‘뜻’을 실현해가는 창발적 운동이 있다는 생각은 여전히 기독교적이다.

떼이야르 샤르뎅이 우주생명의 진화과정, 지구생명의 진화과정은 “의식-복잡화 법칙”(law of complexity-consciousness)에 따라서 실재(reality)의 외면기구(外面機構,Without)의 구조와 조직이 점점 더 복잡화해가는데 상응하여 실재의 내면기구(內面機構, Whthin)의 심화는 더욱 가속화 해가면서, 지구 진화단계는 지질권형성 단계, 생명권형성 단계, 정신권 형성단계를 거쳐 이제 막 영성권 형성단계로 집입해들어 갔다고 보는데, 한국의 사상가 중에서 함석헌은 아마 가장 먼저 떼이야르 진화론적 유기체 철학에 접하여, 평소 자발적으로 그 사색의 심화과정에서 스스로 이룬 ‘나선형의 역사이해’를 과학적 사상가들에 의해 더욱 확신을 더하여 갔을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기독교 사상가 폴 틸리히와 떼이야르 샤르뎅의 실재관을 함석헌의 역사이해에서 찾아볼수 있거니와, 특히 함석헌의 역사이해에 대한 기하학적 모델이 ‘나선형의 진보사관’이라고 말 할 수 있으므로, 자연 속에 나타나는 나선형의 구도에 대한 이해를 좀더 깊이 살피기로 한다. 마이클 슈나이더(Michael Schneid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나선형은 움직이는 에너지가 가장 순수하게 표현된 형태이다. 에너지를 스스로 움직이도 록 내버려두면 그것은 어디서나 나선형을 이룬다. 우주는 나선형으로 움직이고 변하며, 절대로 직선으로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는다. 나선형은 움직이는 원자들과 대기의 경로로 서 나타나며, 분자와 광물 속에서, 흐르는 물의 형태로, 식물과 동물과 인간과 외부 우주 의 몸으로 나타난다. 나선형의 우주적 통일성은 모든 창조물을 통합한다.... 자연에서 나 선형의 역할은 변환에 있다. 이와 비슷하게, 신화와 종교에서 나선형은 영적변환과 신비 적 변환의 경로이다. .... 자연의 나선형의 세 원리는 우주의 건설에 대한 자신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나선형은 자기누적을 통해 성장한다. 모든 나선형은 ‘조용한 눈’을 가지고 있다. 반대되는 것끼리 충돌하면 나선형의 균형으로 귀결된다.

위에서 말한대로 나선형은 첫째 특징으로서 ‘자기누적을 통한 성장’ 이라는 자연과 생명체의 원리를 기하학적 모형으로 나타내 보인다. 함석헌의 역사이해에서 역사는 단순한 반복이거나, 일방적 직선행로가 아니라 “되풀이와 자람”이라는 운동을 한다고 강조하는 바가 그것이다. “그것(역사)은 어디까지나 산(生) 것이기 때문에 그 운동은 그저 되풀이 되풀이 끝없이 하는 운동이 아니요, 자람이다. 생명은 진화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데, 역사에 있어서 “되풀이와 자람” 즉 ‘자기누적을 통한 성장’은 기계적인 물리화학적 에너지의 축적이 아니라, 역사의 과정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는 역사의 의미, 뜻, 의지를 ‘해석’을 통해서 오늘에 재생시키며 그 의미와 뜻을 확장 심화해가는 일이라는데 인간적 삶으로서의 특징이 있다. 흔히 우리주위에서 발견되는 나선형의 자연과 생명현상을 예로들면, 수양의 뿔, 앵무조개껍질이 성장, 엄지손가락의 지문무늬, 물의 소용돌이, 양배추의 자람, 은하성군의 소용돌이, 달팽이 집, 척추동물 태아의 꾸부린 자세등등은 모두 ‘자기누적과 자기재생’을 반복하면서 되풀이되면서 자람이라는 모습을 보인다. 함석헌의 역사이해도 그렇다.

나선형의 둘째 특징으로서 모든 나선형의 운동체는 ‘태풍의 눈’의 예처럼 ‘고요한 눈’ 또는 ‘텅빈 공간, 또는 움직이지 않은 균형과 조화의 중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태풍의 고요한 눈처럼 격렬한 대기의 소용돌이가 그 주위에 휘몰아 치지만 태풍의 중심, 태풍의눈 그자체는 믿을 수 없으리만큼 고요하고 평온하다. 그러나, 이 ‘고요한 중심, 빈공간’은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연과 생명운동이 균형을 이루며, 중심을 지니며, 변화하면서도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게 하는 ‘존재무게의 중심’이다. 이 자리는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거룩한 지성소이며, 영혼의 심처이며, 하나님의 임재 자리이다. 역사를 소용돌이치면서 회전하는 나선형의 태풍운동에 비유할 때, 하나님과 깨어있는 영혼은 태풍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 복판에 있다.

나선형의 셋째 특징으로서 모든 나서형의 모양은 반대되는 것끼리 충돌할 때 나타나는 모습이라는 점이다. 원운동하려는 존재자들(생명체)의 자기통전 운동과 새로운 것을 창출하려는 전진형의 직선운동이 긴장갈등을 이룰 때, 생명의 자기초월운동이라고 부르는 대각선적방향의 나선운동이 발생한다는 것을 틸리히의 신학적 존재론에서 살핀바 있다. 그처럼, 운동과 정지, 음과 양, 사랑과 증오, 개체와 전체, 내면적인 것과 외면적인 것, 물질과 정신, 남성적인것과 여성적인 것 등 등 상호 대조되거나 긴장되는 두 원리가 부딪힐 때 나선형으로 나타난다.

한마디로말해서 “나선형은 저항을 통한 성장과 변환의 징후이다”. 함석헌의 나선형으 진보사관이 헤겔류의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발전론’과차이가 나는 점은, 바로 역사속의 모순들과 ‘부정성’(negativity)이 “이성의 간계”에 의해서 변증법적으로 지양되는 것이 아니라, 씨알들의 주체적 저항과 불의에 맞섬의 행동 즉 고난을 정면돌파하는 거룩한 자기희생을 치루고서만 역사는 한단계씩 더 깊고 넓은 ‘황금나선형의 원둘레’ 나이테를 그려내면서 전진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4) 하나님-역사-씨알의 불가분리성과 역사담지자의 고난과 신정론문제

  함석헌의 역사이해를 나선원추형(螺旋圓錐形)으로 소용돌이치고 오르는 대기 기류의 입체모형으로 비유한다면, 원추형의 맨 꼭대기에서 이 소용돌이를 보면 ‘하나님’이고, 몸체 회호리바람의 과정측명을 보면 ‘역사’이고, 흙먼지 돌개바람 일으키면서 맨밑 땅바닥을 휩쓸고 지나가는 바닥실재를 ‘씨알’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함석헌의 역사이해에서 하나님,역사, 씨알(인간)은 상호공속적 실재이다. 셋은 상호 구별되어야 하지만 서로 분리되지 못한다.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역사는 오직 한국 사람, 한국 씨알의 역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역사가 고난의 역 사라면 우리는 그 ‘우리’를 지리에서만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이 한국 사람에게서 차지않 으면 않된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찾을것이 아니라, 가슴 속에서 찾아야 한다. 하늘과 땅 은 가슴의 껍질일 뿐이요,거기 가는 길일 뿐이다.

하늘이 무한 망막한 허공에 있지 않고 땅에 와 있다. 땅 중의 땅, 흙 중의 흙이 어디냐?

네 가슴이요 내 가슴 아닌가?

함석헌의 종교적 역사철학은 통속적 섭리사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역사는 단순히 자연의 이법에 따라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신의 섭리에 따라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이뤄지고 만들어져 가야 하는 것이기에 역사란 차라리 ‘하나님, 우주, 인간’이 하께 짷아가는 융단짷기 과정이라 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양이 수놓여진 카페트를 짷는다는 것은 단순히 양모털의 원료 집적(集積)으로서만 아니된다. 단순한 기계적 북놀림 만으로서도 아니된다. 의미있는 문양이 놓여지려면 양모털이나, 씨줄 날줄 실오라기를 촘촘히 박아넣으면서 융단을 짜는 기능공의 노동행위를 넘어서 예술적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

한폭의 카페트를 짷아가는 과정을 역사라고 한다면, 양모털의 원자료는 시공적 현실재들(actual entities)이요, 수공업자는 씨알이요, 역사과정속에서 새로움과 창조성과 진선미 이데아들의 문양을 이루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일단 역할분담을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물과 기름 가르듯이 역할분담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함석헌의 생명철학에 있어서 생명은 ‘스스로하는 것’이며 ‘고난은 생명의 원리’(간디) 이기 때문에, 역사의 마지막 담지자 ‘씨알’의 고난과 영광은 곧 하나님 자신의 고난과 영광이 된다. 함석헌에 의하면 하나님의 다스리심 섭리는 “간섭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르고 보호하고 이끈다. ...하나님은 그 우주완성을 반드시 사람을 통하여 하신다.” 화잇드헤드의 말대로, “하나님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말이 진실이듯이, 세계가 하나님을 구원한다”는 말도 진실이 된다. 하나님과 인간은 역사구원의 동역자요 역사완성의 공동책임자가 된다. 하나님의 아가페 속성과 인카네이션 신앙이 빈말이 아니리 진실이라면 그렇게 말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함석헌의 역사이해에서 고난사관을 말하지만 “왜” 역사엔 고난이 있으며 “어떻게” 역사속에서 고난을 극복하여 유토피아를 실현시킬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고난의 원인엔 “왜”가 없고 고난극복에도 “어떻게”란 없다고 강조한다. 고난은 생명의 원리이기 때문에 의미있는 역사의 융단을 짷아가는데 고난없이는 불가능하다.

함석헌은 간디의 말 “고난은 생명의 한 원리다”라는 진리의 소리를 굳게 붙잡고 그 주제를 가지고 한국역사와 우주사를 꿰뚫어 재 해석한다. 고난이 왜 출현했는가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심하지 않고 고난은 생명속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를 주목한다. 고난은 생명의 피할 수 없는 한 조건임을 받아드리는 피동적 자리에서 더나아가서 고난을 정신적 삶을 낳는 용광로의 불로서 이해한다. “고난은 죄를 씻는다... 고난은 인생을 깊게 만들고 위대하게 만든다....고난은 인생을 하나님께로 이끈다”고 말한다. 특히 종교에서, 한민족의 종교생활에서 고난은 종교를 정화시킬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본다.

이 백성에게 참 종교를 주기 위하여 고난을 받을 필요가 있다. 생명의 한단계 더 높은

진화를 가져올 새 종교를 찾아내기 위하여, 낡은 종교의 모든 미신을 뜯어치우는 고난 이 필요하다.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모든 부족신,계급신, 주의신(主義神)을 다 몰아내는,

새 믿음을 얻기 위하여 우리의 가슴에서 모든 터부, 모든 주문, 모든 마술적인 것, 모든 신화적인 것, 모든 화복주의적(禍福主義的)인 것을 다 뽑아내는 풀무같은 엄격한 핵분열 적인 고난이 있어야 한다.

함석헌이 고난을 적극적으로 받아야 한다고까지 말하는 것은 인간 개인과 민족공동체 영혼 이 자신의 본바탈을 찾아 그 순일성과 단순성에 이르기 위하여 그리하는 것이다. 고난을 참으로 극복할 힘을 얻기 위하여 고난을 받고 고난으로써 연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삶과 역사 속에서 ‘뜻’을 찾지않고 ‘이’(利) 만을 찾는 것, 이기심과 당파심에 깊이 물들어 전체와 공의를 묻지않는 것, ‘소유’에만 관심하고 ‘존재’엔 관심하지 않은 것, 채우기에만 관심하고 비우기엔 관심하지 않은 것이 죄의 본질이라고 본다. 그러한 삶의 모습이 ‘죄된 삶’ 이다.

진정한 씨알은 단순히 사회학적으로 사회계층의 맨 밑바닥에서 고생하고 천대받는 무지렁이를 두고 일컫는 말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수탈 당하고, 문화적으로 소외된 사회신분계층이라고 해서 다 씨알이 아니다. 그들은 역사의 마지막 담지자가 아니다. 씨알은 ‘씨알’이라는 메타포가 상징하듯이, 적어도 사회신분, 빈부, 교육, 남녀, 직업여하를 막론하고 씨알생명의 본바탈을 고난속에서도 지켜나가고, 자신 영혼의 순일성 단순성을 잃지않으려 노력하며, 생명의 유기체적 연대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우주의식에 성성(惺惺)하게 깨어 있어서 정상배들의 술책에 놀아나지 않으며, 마지막 무엇보다도 역사의 쓰레기를 더 이상 남에게 미뤄버릴 수 없는 자리 곧 자기가 나선형 역사의 입체적 구조물의 맨 마지막 기층 임을 자각하는 생명체를 말한다.

여기에서 씨알은 역사에 대한 진정한 주인의식과 역사에 대한 핑개없는 무한 책임의식을 지니게 된다. 이 자리에서, 신학적으로 보면 마침네 씨알은 불교적 ‘보디사트바’와 하나가 되고, 기독교적 ‘그리스도’와 일심동체(一心同體)를 이룬다. 그리고 마침네, 중세신비가 마이스터 엑하르트가 말하는바 자기생명 속에서 ‘아들의 탄생’을 경험한다. 아들의 탄생경험은 곧 예수의 이른바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는 의식의 자리에 이른다.

(5) 에필로그

 함석헌의 역사이해는 역사전체를 “뜻”의 이어받음, 뜻의 실현과정, 뜻의 추구라는 지향성을 역사관의 중심축으로 삼고있기 때문에, 그가 초기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에서 지녔던 기독교 종파주의는 초극했을지라도 여전히 성서적, 기독교적, 히브리적 요소를 깊게 간직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의 역사이해는 동서역사관의 두 전형적 모델인 원형반복적이고 회귀적인 모델(힌두교,불교, 유교, 노장철학, 고대 그리스철학)과 전통적 기독교의 직선적 시대경륜론 구원사 이해와 근대 브르죠아 서구문명의 선형적 진보사관을 동시에 부정하면서 역설적으로 통전시켜 ‘되풀이 하면서도 자란다“는 나선형의 진보사관을 확립함으로서 동서철학과 동서문명론적 실재관을 통전시키는 선구자적 사례를 나타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사이해가 헤겔적인, 또는 계급사관적인 관념론이나 유물론에 빠지지 않은 것은, 역사의 주체를 씨알로 삼고 ’고난은 생의 원리’라는 간디의 신념을 자기 종교철학의 한 주춧돌로 삼음으로써 실존적 긴장및 구체성을 우주적 보편성과 동시에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럼으로 함석헌의 역사이해의 눈은 21세기 새로운 문명의 전환기에 지구촌 문제를 “뚫어보고, 내다보고, 맞춰보고, 펴보는 능력”곧 귀중한 역사의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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