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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장편 극시 ‘흰 손’의 신학적 해설-김경재
글쓴이 : 바보새 날짜 : 2011-06-30 (목) 16:21 조회 : 2960

함석헌의 장편 극시 ‘흰 손’의 신학적 해설
김경재
씨알사상연구회,2011.3.26



함석헌의 장편 극시 ‘흰 손’의 신학적 해설

                                             
[1] 들어가는 말

 올해(2011년)는 ‘시인으로서의 함석헌’을 탐구하고자 하는 열망이 일어난 해로서 함선생 탄생 110주년을 기념한 기념강연에서 고은선생의 주제강연 ‘함석헌의 시’가 그 시발점이 된다. 이 글에서는 함석헌의 장편 극시(劇詩) ‘흰 손’에 대하여 어설프나마 신학적 해설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는 작품으로서 시(詩) 그 자체가 독자들에게 필요충분한 말을 건내는 것이며, 굳이 군더기같은 해설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설픈 작품해설은  도리혀 작품이 지닌 생동감과 진의를 손상시킬 위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이 남긴 시작품 중에서 비교적 후기에 낳은 작품 ‘흰손’(1952년 작품)은 몇가지 점에서 해설이 필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함석헌의 시작활동(詩作活動)은 ‘신의주 학생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신의주경찰서 유치장에서 50일간 갇혀있는동안 어머니를 그리워하면 쓴 시모음집 「쉰날」(1946)에서 시작해서 한국동란이 터진후 1950년대 초반에 끝난다.  ‘흰 손’(1952)이나 ‘대선언’(1953)은 함석헌 사상전회(思想轉回)가 일어나던 시기에 쓰여진 마지막 시기의 작품이다. 그래서, 그 작품은 함석헌 사상탐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둘째, 작품 ‘흰 손’은 그가 오랜기간 인연의 끈을 맺고왔던 정통기독교의 신앙체계로부터 탈출을 선언하는 결정적 사건의 선언서로서 신앙적  ‘메니페스토’(manifesto) 같은 성격을 지닌다. 그 선언문의 핵심테마는 소위 정통적 ‘속죄론’의 이해를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흰 손’은 신학적 장편시로서 논설문 같은 성격을 지닌다. 그래서 약간의 신학적 해설이 이 시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다.
 셋째, 오늘 한국 기독교의 무력함, 타락현상,  종교의 형식주의, 윤리적 이중성, 개신교의 물상화, 종교의 속화가 ‘속죄론’의 오해로부터 기인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 기독교가 함석헌을 바르게 이해하고 자신을 스스로 개혁함으로서 소생하기 위해서는 작품 ‘흰손’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작품 ‘흰 손’은  시의 장르별 구분에 의하면 서정시(抒情詩), 서사시(敍事詩), 그리고  극시(劇詩) 중에서 ‘극시’에 속한다. 함석헌의 종교시  ‘흰 손’은 웅대한 스케일과 길이를 가진 장편극시로서, 음악과 행위를 곁드려 무대에 올린다면 위대한 ‘연극’(演劇) 대본으로서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극이 시작되고 끝나는 서막(prologue)과 종막(epilogue)을 포함하여 4행시(四行詩)로서 1문단을 구성하면서 전체가 111문단이요 시행(詩行)으로서는 무려 444행에 이르는 웅대한 장편극시 이다. 극의 본론 부분을 연극무대에 올려  막간처리로 구별 한다면 큰 주제변화를 따라 5막(五幕, 5Acts)으로 구별 할수 있으며, 그 장편시가 지닌 사상의 심오함 면에서 무대에 연극으로 올린 쉑스피어의 ‘햄릿’ 연극작품에 비교할만한 위대한 극시(劇詩)라고 보아야 한다.   

[2] ‘흰 손’의 신학적 해설: prologue, main 5 Acts, epilogue

  1. 서막(prologue)

  작가 자신이 4행시 2문단으로서 서막임을 분명하게 표식하여 주었다. 서막은 길이가 짧지만 중요한 점을 말한다.
   
내 맘의 벗아, 영원한 길 동무야, / 가림 없는 말 가림없이 받을 너 참 맘아, /
   옷깃을 헤치고 오라, / 내 꿈을 노래하리라.

   내 꿈을 꾸었노라. / 가는 해 채 가기 전, 오는 해 채 오기 전, / 잠도 아닌
   꿈도 아닌 황홀경에서 / 무서운 꿈을 꾸었노라.


[해설] 작가는 이 장편 극시를 쓰면서 시를 읽어줄 대상을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맘의 벗, 영원한 길동무, 기탄 없이 진심으로 속말을 하면 다 들어줄 참 된 맘을 가진 친구를 생각하면서 이 시를 노래한다. 이야기 내용인즉 ‘꿈’이라고 하는데, 밤꿈이 아니라 낮꿈을 말한다. 묵은해가 지나고 새해가 이르기 전 비몽사몽간에 잠시 종교적 환상을 보았을 수도 있고, 평소 골돌히 생각하던 주제를 위한 서론적 수사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황홀경 속에서 무서운 꿈’이란 표현은 종교학적 측면에서 볼 때, 어떤 ‘거룩체험’을 한것이 틀림없다. 독일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 1869-1937)가 그의 고전적 명저「성스러움의 의미:Das Heilige」에서 천착해낸 성스러운 실재의 체험, 거룩하고 신비한 누멘적인 것(the Numinous) 체험의 특징은 ‘황홀감정과 동시에 병존하는 두렵고 떨리는 신비감정’(mysterium fascinosum et mysterium tremendum) 이다  루돌프 오토(길희성역), 「聖스러움의 意味」참조,(분도출판사, 1991)
 작가가 스스로 말하기를 ‘활홀경에서 무서운 끔을 꾸었노라’라고 말하는 것은 이 장편극시가 일상적 이성상태를 넘어선 체험을 했음을 암시한다.

2. 제1막(Act 1): 사랑, 공의, 거룩한 이의 보좌 앞에서

제1막에 해당하는 내용은 4행시 5문단으로 구성된 영광의 보좌에 대한 비젼을 말하는 부분이다. 제1막은 첫문단 첫사행시 글귀 “영원의 문이 열리었더라”에서 시작하여 제5문단 끝 사행시구절 “부끄럼 없이 제대로를 드러내는 어린 맘이로구나” 까지의 내용이다. 그 중 일부를  인용해 본다.

   
한결같이 보시는 사랑에, / 한 끝같이 다스리시는 의에, / 무서운 기쁨은
   제 맘의 얻은 것, /  받는 제맘에 따라 받아진 것.

   천사야 그 거룩을 노래하자, / 성도야 그 사랑을 찬양하자, / 만물이 우리
   아버지 앞에 빨가숭이로구나 / 부끄럼없이 제대로를 드러내는 어린 맘이구나.


땅위의 삶 여정중에, 참을 한자에겐 영원한 생명을 주고 거짓을 한자에겐 영원한 사망을 준다는  마지막 대심판의 장면을 벌려놓지만, 대심판관을 인정사정없는 무서운 염라대왕이거나 들풀처럼 연약한 인생의 살아온 과거사를 꼬치꼬치 따지고 밝혀내어 상벌주는 ‘대심문관’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그 신비한 거룩하신 이는 오직 사랑과 공의를 속성으로 하여  영원한 빛에 거하시는 거룩하신 이라는 것이다. 최후법정에서  죄와 벌, 영생과 죽음의 갈림은 영혼 스스로 자신의 됨됨에 따라 피 할수 없이 받아지고 느껴지고 얻어지는 결과라는 것이다. 만물은 여름날 냇가에서 빨가벗고 노는 아이들처럼   그 부모들 눈 앞에 훤히 부끄러운 곳도 다 드러나는 것이라는 말이다.
 하수도의 퀴퀴한 어둠을 좆아하는 들쥐는 밝은 광명의 빛 그자체가 스스로의 눈에는 고통이고 눈이 부셔서, 자꾸 어둔 곳을 찾아 몰려가듯이, 사후세계 지옥도 그와 같은 원리이다. 지옥은 인과응보를 끝까지 주장하는 전능자가 그분의 의로움 때문에 ‘만들어 놓은 불붙는 형벌장소’가 아니다. 천국이란 성도들을 위한 특별시상식 특석장소가 아니다. 각생명의 진실함과 사랑을 이 땅에서 수행한 연습량에 어울리는 만큼의 각 영혼의 분깃따라 배정받는 결과일 뿐이다. 배정받는다고 말하지만 스스로 찾아가서 자리잡은 것이다. 지구상 인구중, 예수만을 잘 믿는 선민들만 들어가는 곳이 천국이라고 믿는 정통적 보수 그리스도교도들의 좁아 비틀어진 인색한 이기적 심성에 작가는 간접적으로 일침을 가한다.

3. 제3막 (Act.3) : 집단무리신앙의 판에 박은 표지신앙

 제3막은 본론 제6문단에서 시작하여 제15문단까지 내용에 해당한다. 첫 문장은 “그 앞을 홀로나오지 못하고 떼지어 오는자들은 누구냐”로부터 시작되고 마치는 문장은 “애쓸수록 마치 해진 그물 서로 당기는 듯 해, 당길 수록 생명의 산 생선 점점 빠져나갔네”로서 끝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문단을 몇곳 인용해 보면 아래와 같다.

   
어깨는 걸었건만 / 한 손은 아니로구나. /  걸음은 맞추건만 / 한 발은 아니로구나.
     
    입은 제각기인데 / 말은 왜 한 말을 하느냐?/ 한 말은 한다면서 /눈치는 왜 서로
    다르냐?
     ..............
    머리 위에 빛 가리워 날리는 큰 기(旗) / 금으로 수놓은 거룩한 부호 보좌의 빛
    다투려 하고, / 한가지 그림 판에 찍어내어 손에 손에 들고 흔드는 표지 / 나부끼는
    그 모양 늦은 봄 흩날리는 꽃인 듯 하구나.
     ............
     “죽을 죄인들 아무 공로 없사오나 / 우리 주 예수 흘린 피 믿습니다. /  모든 죄
      대속해 주심 힘 입어 / 의롭다 해주심 얻을 줄 알고 옵니다.”

     
   제3막의 중심주제는 개인 인격의 주체적 고백과 책임적 참여신앙 없이, 제도적 종교전통과 교리신조를 묵종하는 위험을 고발한다. 종교적 ‘군중집회’에서 집단적 종교심 발로를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사이비 신앙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이비 신앙의 특징은 항상 ‘떼를 지어 다니는 신앙인’이라는 점이다. 신앙인으로서 홀로서기를 두려워하며, 무리속에서 안심을 하고, 숫자가 많은 집단집회이니까 진리와 은혜가 보장된다고 착각한다. 마치 좋은 물건을 싼값에 파는 백화점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상업원리가 종교영역에도 적용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신앙형태이다.
  항상 떼를 지어 종교집회 갖기를 즐기며, 항상 금빛으로 수놓아진 큰 깃발을 앞세우는 것을 선호한다. 북한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의 인민대회에서 보듯이 일사불란한 구호외치기나 작은 깃대를 흔들어 대듯이, 종교집회에서도  한 소리로 목청껒 외치는 구호와 손에 들고 흔드는 표지가  다양하지 않고  판에찍어 만든  것같이 한결같이 동일반복형이다. 언듯 겉모양만을 듣거나 보면, 거기엔 제법 장엄한 합창이 들리고 열정적 ‘아멘응답’이 한목소리로 강당을 가득채워 스스로 집단적 최면상태에로라도 빠져들만한 열광적 대중의 호응이 있다.
특히 “죄인 위해 대신죽은 예수피로 대속받고 의롭다함 받음을 믿습니다”라는  ‘대속교리 신앙고백’이 반복되는 음악의 주악상(leitmotif) 처럼 계속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겉으로 보면 열광적이라고 할만큼 뜨겁고 열정적인 집단적 종교집회 속에서, 진정한 조화가 아닌 ‘동이불화’(同而不和)하는 불협화음을 듣고, 믿음을 강조하면서도 종교행사 실적으로서 절대자의 칭찬과 자신의 구원을 보장받으려는 듯한 불안한 다짐을 그 안에서 느낀다. 그러나,  살아있는 물고기는 해어진 그물을 탈출하여 바다에로 해엄쳐 나아가듯이, 살아있는 생명적 신앙인은 기계적 조직체를  닮은  집단적 단체종교를 빠져나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제3막의 핵심은 무엇을 말하려는가? 신앙이란 모름지기 한사람 한사람의 전인적 인격으로서 자각과 책임과 참여와 진지성을 가지고 어디까지나 주체적이면서 가장 내면적인 지순(至純)한 정신사건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의 열기 속에서 몰려다니거나, 전승된 교리를 똑같은 형태로 반복적으로  복송한다거나, 습관화된 종교의례(宗敎儀禮)에 관습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신앙의 타락형태요 물상화형태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4. 제4막(Act. 4) : 영이요 참이신 주인이 ‘흰손’을 나무람하고 산 피를 가저오라 하심

  제4막은 본격적인 재판관 임금님의 추상같은 사건검사와 논고를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 재판관은 생명의 주인이요 피고는 ‘속죄교리신앙 갖고 온 신도들’이다. 제4막은 본문 제16문단부터 시작하여  제41문단까지 계속된다.  중요한 논고와 피고의 변명을 묘사한 문단을 음미해보자.

  
“나는 영이로다, 참이로다, / 생명이로다, 인격이로다. / 내게 오는자 참으로 오라, /
   영으로 오라, 자유로 오라./ 맘을 다 뜻을 다 성품을 다한 사랑으로 오라.”
    .......
    “ 피는 들었다면서 / 네 손이 희구나. / 네 입술이 / 그늘에 시드는 나뭇잎 같구나.”
    .......
    “방울 바울 참이 들어, / 방울 방울 사랑이 사무쳐, / 영글고 영근 생명의 구슬 /  
     한 알을 땅에 버려둘 길 없어,”
     “ 그 한 방울만 들고 오면 / 그 피 귀여운 값에 / 가지고 온 그 맘 또한 구슬같이
     귀여워, / 깋ㄹ이 살려 내 안에 둔다 함 아니냐? ”
    .......
    “너는 꼭 십자가 신앙 판에 박아 다량 생산해 / 제 각기 제 병 들어 제각기 고민하는 /
     하다많은 영혼 한꺼번에 거지려 / 마술의 부작(符作)처럼 삼키게 하려느냐?”

    “ 이놈들아 내 아들의 피를 가지고 와, / 너 위해 흘린 내 아들의 피,영원한 산 피, /
     짐승의 피도 안된다  했거든 / 하물며 그림가지고 될 일이냐?”  


   제 4막의 중심주제는 영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참 인격이신 절대자는 영과 진리안에서, 자유한 인격자로서, 맘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오는 자 만을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작가는 제4막을 시작하면서 특히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수가샘터에서 예수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한 말을 맘속에 각성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 할 지니라”(요한복음 4:23-24). 작가 함석헌은 인용한 요한복음의 성경구절을 기독교신앙의 알짬이라고 본다. 최고봉의 진리파지라고 본다. 이스라엘 고난의 신앙 2,000년 역사가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 정련되어 예수입을 통해서 그렇게 순수하게 정화되고 영화되었다고 본다.
 작가의 기독교 신앙 이해가 그러하기 때문에, 순수하게 ‘영과 진리 안에서’가 아닌 형식주의, 전통주의, 권위주의, 집단주의, 교리주의, 외형주의, 성전중심주의, 기복신앙을 모두 참종교의 변질이요 타락이요 생동하던 신앙이 이미 죽어 경직화된 표현이라고 본다. 죽은 시체는  곧바로 경직되기 때문이다.  제4막에서 재판관의 추궁을 면밀히 검토하면, 작가는 예수가 흘린 피로서 상징되는 ‘보혈의 피 한방울 한방울’안에 담긴 지고지순한 참, 사랑, 공의, 생명의 힘이 놀랍게도 죄인의 심령을 치유하는 능력, 죄를 속량하는 힘, 사람을 거듭나게하는 생명력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한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 산피를 뜨거운 그대로 방울방울 두손으로써  뜨거운 가슴으로 받는 진실한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재판관의 호령을 통해 “이 놈들아 내 아들의 피를 가지고 와! 너 위해 흘린 내 아들의 산피, 영원한 산피!”라고 울부짖는다. 그런데 현실기독교 대중종교화된 기독교의 실상은 ‘뜨거운 예수의 산피’는 없고 ‘붉은 물감으로 그려놓은 부작을 삼키게하는 마술종교’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부작(符作)은 부적(符籍)의 변용형태 어휘인데, 민간신앙에서 흔히 보듯이 악귀잡신을 쫒기위해 붉은 색으로 글자나 모양을 그린 신부(神符)를 말한다.
 왜 작가는 현실기독교에 대하여 그렇게 혹독한 비판을 하는가? ‘부적’을 그려 몸에 지니거나 대문 기둥 문설주에 붙이는 사람은 그 ‘부적’ 자체가 신령한 잡귀쫒는 힘이 있다고 믿어서 그리하는 것이지, 본인자신의 내면적 변화나 도덕적이고 인격적 결단이 동반되는 행위를 굳이 하려고는 않는다. 현대 기독교의 대분분의 위기는 ‘십자가 대속교리신앙’이 민간신앙의  ‘부적’ 기능처럼 변질되어서, 예수의 십자가 피로서 상징되는 진실, 진리에의 순명, 자기희생의 사랑, 뜨거운 용서와 관용은 없이 붉은 물감으로 판에 찍은 십자가모형의 부적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을 사려고 하는 파렴치한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독설도 지독한 독설이지만, 그렇게 아프게 비판하지 않고서는 이미 양심이 마비된 현실기독교를 살려낼 길이  없다고 보는 작가의 절박한 심정 때문이다.

5. 제5막(Act. 5):독립인격에 대속(代贖)은 불가능한 것,오직 하나됨(at-one-ment)의 길 뿐

제5막은 장편 극시 ‘희손’의 클라이막스를 이루는 장면을 연출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함석헌 작가가 이해하는 대속(代贖, atonement)란 그 본질이 무엇이며, 어떤경우에만 가능한지를 설파하는 대목이다. 본극 문단 제42문단에서부터 시작해서 78문단에 이르기까지 그 중요한 대사가 이어져 가고 있다. 먼저 해당되는 극시 내용중 가장 중요한 대목만을 몇군데 인용한 곳을 음미해보자.   

“ 이놈들아 갈보리에 흘렸던 피 / 그 피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 너 위해 네몸 위에,      네 혼 위에, 흘려 / 네 피 된 산 피말이지.”

 “ 네 만일 그 피 마셨다면야, / ( 왜, 내 살 먹어라 내 피 마셔라 않더냐?) / 그러면야
   지금 그 피 네 속에 있을 것 아니냐? / 네 살에, 뼈에, 혼에, 얼에 뱄을 것 아니냐?”
  ...............
 “피는 한 방울 아니 묻고 표지만 든 흰 손, / 아니 흘려서 아니 묻었구나, / 네 피 흘릴
  맘 한 방울 없어 /  그저 남더러 대신 흘러 달래살고 싶더냐 ? ”

 .............

“ 대속(代贖)이라 ! /  둘도 없는 네 인격에 대신을 뉘 하느냐 ? / 내게 진 빚 나 모르게
 너 혼자 줄치면 / 그 청장(淸帳)을  내 안다더냐 ?”

“ 힘은 아니들이고 빌어 삶, / 생각은 아니하고 ‘더라’만 외는 빎, / 이름을 빌 망정 /
 삶을 어찌 빌 수 있느냐?”

..........

“ 너 살고 싶으냐? / 대들어라, 부닥쳐라./ 인격의 부닥침 있기 전에 / 대속이 무슨 대속이냐?”

..........

“그의 죽음 네 죽음 되고 / 그의 삶 네 삶이 되기 위해 / 부닥쳐라,  알몸으로 알몸에
대들어라 ! / 벌거벗은 영으로 그 바위에 돌격을 해라 ! ”

..........

“네가 나를 믿거든 내 뜻을 온전히 이루라. / 내 내 뜻을 ‘그’의 안에 말해 세상에
보냈노라. / 네 내 아들 믿거든 그가 되라. / 그가 죽었으면 너도 죽어라.”  


 제5막의 극중 대사는, 숨 쉴 사이도 주지않고 재판관의 준엄한 문책으로 채워진다. 종종 이따끔씩 피고인의 자기방어와 변명이 끼어들지만, 대부분의 대사가 재핀관의 추상같은 논고(論告) 내용이다. 그래서, 순수한 문학적 수사적 기교나  운율을 갖춘 산문시 형태를 찾아보기 어려울만치 시(詩)로서 갖춰야 할 문학적 기교를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작가 자신이 1953년 첫 번째 이 시집(詩集)  출간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라 할 테면 하고 말테면 말고, 그것은 내게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내 맘에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님 앞에다 바칠 뿐이다.” 「수평선 넘어」, 머리글 (1953), (한길사, 1983)
사실, 이 ‘흰 손’이라는 장편극시는 반드시 무대에 올려서, 장엄한 배경음악과 무대 위 설치된 소품들이나 배역자들의 독특한 복장의 다양성과 함께, 재판정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두려움과 절망감에 떠는 배우들의 몸짓으로 말해지거나 칸타타(cantata)의 성악곡으로 전개되어야 재맛이 날 작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호세아서등 위대한 구약성경의 예언서들이 장편극시 ‘흰 손’ 처럼 , 문학형식상으로 보면 동일한 시문학 형태로 선포되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왜 작가는 굳이 운율도 맞지않고 수사법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한편의 ‘속죄론’이라는 신학논문을 써내놓으면 될 것을, 이렇게 장편극시로 말하려 했을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한국에서는 최초로 1971년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성서학자들이 합동하여 성서공동번역위원회‘가 구성되고 「공동번역본」을 간행하였다.  이 번역본을 참조하여보면 예언서를 비롯한 구약성경의 많은 내용이 운율을 갖춘 시문학형태임을 알수 있다.  

 제5막의 중심주제는 소위 말하는 ‘대속론’ 혹은 ‘속죄론’의 근본 뜻을 밝히고, 변질되고 종교상업주의에로 속화 되어버린 현대 기독교의 사이비 속죄신앙을 비판하는 것이다. 속죄나 대속은 영어단어로서 ‘atonment'( at * one * ment)라고 한다는 것은 본래 속죟은 대속의 의미를 잘 나타내고 있으며, 이점을 작가는 제5막의 몇군데 시문단 속에서 거듭거듭 갈파하고 있다. 구약모세종교에서나 이슬람교가 성행하는 오늘날 중동종교에서나, 소나 양을 기르는 목푹이 생업인지라, 그들의 종교적 의례가 짐승을 잡아 그 피를 제물로 바치는 형태를 자연히 띄게되었다. 그 상징성의 근본은 “생명은  피에 있다”고  생각하는 집단적 무의식의 바탕에서,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야 한다”는 동일보상원리가 그 기초인 것이다.
 인간이 살인을 하거나, 큰 죄를 범하면 죄값을 치뤄야하는  공공사회의 법률적 배상개념이 연장되어,  신앞에서 지은 죄값을 치루기 위해 ‘죄값의 대등한 보상원리’에 따른다면 하나밖에 없는 인간생명이 ‘대속물’로서 죽여야하고 죽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을  상징하는 표징으로서 ‘희생제물’ 이라는 종교적 의례장치가 생긴 것이다. 흔히 가축희생제사제도가 신의 노여움을 달래는 공물로서 기능이라고만 생각하는 계몽주의 후예들이 ‘제물’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셈이다.
 갈릴리의 예수가 당시 로마제국의 사형법 집행  방법중에는 가장 치욕적이고 고통스런 ‘십자가 처형’으로 죽은 이후, 그를 스승과 메시야로서 알고 따르던 제자공동체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되 왜 스승 예수가 ‘십자가 처형에 이르는 죽음의 길’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결하고 돌파하면서 받아들였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직 속죄론이라는 교리로서 발전해가기 전, 사도들의 서신속에서 중요한 점은 예수의 죽음안에서 옛시대가 끝나고 새시대가 열렸다는 것, 예수의 죽음과 함께 자신들의 옛삶도 죽었다는 것, 예수가 십자가의 극한적 죽음방식 중에서도 보여준 진리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과 증언, 사랑의 용서, 진실에의 순명, 권력과 악마와의 타협이나 야합의 거절  속에서 역설적으로 죽음도 건드리지 못하는 생명과 진리의 승리를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생명과 진리’에 접붙임 받아서 그들도 ‘죽어도 죽지않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예수의 ‘십자가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예수닮기, 예수살기’의 생명운동을 로마제국의 박해속에서도 영웅적으로 펼쳐나갔다. 그것이 본래 초대기독교의 모습이었다.
  줄여말하자면, 작가가 오늘 중요한 인용문단에서 누누이 강조한바 처럼, 죄값의  ‘대속’은 인격적 존재인 한 원리상 불가능한 것이며, ‘대속교리’를 맘으로 받아드리고 인과응보적 법정개념으로서 수용한다고 해서 죄가 부채원장기록부(淸帳)에서 말소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주인이 승인하지도 않고 동의한바 없는데, 부채원장부에다가 주인도 모르게 붉은 잉크로 줄쳐서 갚은 것처럼 표식해 놓아도 아무 소용없고 자기기만(自己欺瞞) 행위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작가의 확신에 의하면 대속론은 ‘대속’이라는 영문글자가 그 근본 말뿌리를 통하여 말해주는 것처럼, 예수생명과 믿는 신자생명의 ‘하나되는 그 때, 그 장소, 그 사건’ 안에서만 그 효능이 발휘되는 묘한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예수생명, 예수 인격, 예수의 뜨거운 피속에 젖어들고 부딪혀서 새 사람으로서 재탄생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한 이치를 사도바울이 그의 갈라디아 편지속에서 잘 갈파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작가의 이러한 ‘속죄’ 이해가  도덕주의적인 입장에 선 윤리적 영웅주의라고 비난 할 사람이 있겠지만, 그렇게 보면 작가를 오해하는 것이다. 도리혀, 너무나 감상주의적인 한국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피공로와 대신죽은 큰 사랑’에 감동하여 눈물흘리고 감격해하는 것은 냉냉한 것보다는 좋지만, 그 감동과 감격의 진정성이 믿을만 하다면, 일생동안 그의 삶자체가 자기의 생명부채 전부를 대신 갚아준 분의 부탁대로 살아야 할텐데,  입으로 하는 감격 ‘아멘’ 소리가 그 사람 인격중심에까지, 그 사람 생명바탈 핵심에까지 붉은 피로 젖어들지 않은 증거를 보여줄 뿐이므로 진정성을 신뢰하기 어렵다. 작가는 예수의 피를 받는 그릇은 대속교리를 고백하는 신자의 ‘양심의 터에서 염통을 쪼갠 그릇’에 받아야 하는데, 교리를 승인하는 머리통그릇이나, 아멘소리 너무쉽게 자동적으로 연발하는 입술그릇 이나, 쉽게 뜨거워 졌다가도 쉽게 식어버리는 감정그릇에 담으려 하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6. 제6막(Act.6): 숫자와 크기로서 으시대는 교회를 아는바 없다하시는 하나님

제6막의 주제는 ‘교회란 무엇인가?’이다. 본문 제79문단부터 시작해서 91문단까지 내용의 핵심이 교회이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 교회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교회를 대비시킨다. 화강암과  대리석석으로 지은 건물과 종교조직체로서 교회와 인격의 지성소에 세운 교회를 대비시킨다. 교회연합운동을 통해서 집단적 교세를 과시하는 힘숭배교회와 한 사람 한사람 마음 속에 세워지는 단독교회를 대비시킨다. 성직자 중심의 교도권을 주장하는 전통교회와 만인이 사제라고 선언하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교회관을 대비시킨다. 중요한 4행시 문단을 몇군데 음미해보자.  

 
“그의 십자가 바라만 보느냐? / 인생에게 지기 명하는 십자가의 명령 아니냐? / 시체를
   뜯어먹는 독수리 심산(深山)에 숨듯 / 교회당의 탑 속에 숨어, 죽은 예수 이용해 먹지말라.”
   
  “ 내 교회 바리느냐고? / 내 교회를 네 보느냐? / 세운 날 없는 내 교회 / 무너질 날은 있을
    소냐?.
  
  “ 성하고 쇠하는 교회 / 그것은 내교회 아니요 너희 인간의 교회니라. / 너희 세운 너히 교회
   나 기다릴 것 없이 / 너희가 스스로 헐고야 마느니라.”

   ...............

  “ 내 교회 너희 안에 있음 선언한 것이 / 벌써 언제냐? / 둘은 설 수  없는 인격의 시온산
   끊어진 꼭대기에 / 나는 내 말씀 내리는 교회를 세우노라. ”

  “ 여럿이 깃발들고 / ‘우리 교회, 우리교회’ / 수로서 나를 엎누를 터이냐? / 나는 투쟁에
   못견디는 너희의 지배자와는 다르다.”

  ...................

  “전체의 가시 숲 에 올빼미처럼 숨어 / 부끄런 몸을 감추려는 놈들, / 책임없는 외침으로
   없는 기세 올려보는 / 이 개성 없는  비겁한 놈들.”

  “ 보아라 이 나라에선 개체가 전체다. / ‘우리 교회’의 단체교섭은 소용이 없다. / 들어라,
    오늘은 영원의 현재, / 역사적 전통의 특전은 벌써 빈말뿐이다.”


 
 작가 함석헌이 그가 비슷한 시기 1950년대 초기에 쓴 또다른 장시 ‘대선언’ 속에서 비록 정통개신교와 내촌감삼이 시작한 무교회주의 신앙마져 넘어서겠다고 선언하지만, 신앙은 개인 인격의 지성소에서 이뤄지는 절대사건이라는 책임적 단독자 신앙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여전히 시인은, 제도적 기관조직체로서 교회관이나  단체로서 ‘회중교회론’엔 반대입장을 견지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집단화는 신앙의 핵심인 인격성의 약화를 초래하고 ‘회중교회’(會衆敎會) 또한 예배장소에 모이는 회중들의 숫자를 가지고 교세를 판가름하며, 심지어 그 회중집단의 숫자힘으로서 정치권력을 지배하려는 경향성을 갖게되기 때문이다.
 작가의 전통교회 비판론이 핵심은 ‘성직제도’에 있다. ‘거룩한 전통’을 귀중하게 강조하면서 ‘구원이 신비와 능력’을 관리 보존하는 전문가 집단으로서 ‘성직자 그룹’은 언제나 개인양심의 신앙보다는 교회이 ‘교도권’(敎導權)에 복종하기를 강조한다. 교황, 주교단, 추기경, 신부, 목사등이 존엄한 개인적 인격신앙의 지성소까지 간섭하려드는 시대가 이미 역사적으로 이미 지났음을 선언한다. “교회당의 탑 속에 숨어, 죽은 예수 이용해 먹지 말라!”는 고발은 평신도에게보다는 성직자라는 종교직업인들에게 주는 말이다. 신앙세계에서는  ‘과거전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원이 현재로서 오늘”이 중요하다고 작가는 강조한다.
 함석헌이 ‘인격적 개인주의’는 그의 사상을 압축총괄하는 은유적 단어 ‘씨’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모든 ‘씨들’은 단독자로서 존재한다. 그래서 씨사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단체, 회중, 사귀임, 어울림, 더불어 삶의 방식에 서툴거나  사교성이 결여된 자기주장과 개상이 유달리 강한 유아독존적 개체주의자가 되기 쉽다.
  그러나, 개체의 인격성은 혼자서 형성되는 타고난 인간성품이 아니다. 사귀임을 통한 다른 개채인 ‘당신과의 소통과 사귀임’을 통해서만 ‘인격적 단독자’로서 가능하게 된다. 함석헌은 그 사실을 “씨를 메기자는 것이 숲이요, 쑾을 이루자는 것이 씨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1983), 28쪽.
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오늘의 ‘흔 손’에선, “보아라 이나라에선 개체가 전체다”라고 표현한다. 중요한 것은 ‘이 나라에선’이라는 단서조건이다. 작각 말하는 ‘이 나라’는 곧 땅 위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요, 본래적인 의미에서 영적 교회이다.      

7. 제7막(Act.7): 은혜안에서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을 강조한 바울을 변호함

  제7막은 장편 극시 ‘흰 손’이 화두로 내건 ‘속죄론’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속죄론’의  주창자로서 후세사람들이 책임을 돌리는 사도바울의 진의를 밝히고  바울을 바르게 변호함으로써 갈파하려 한다.  그래서 흔히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도리”를 가르침으로서 ‘행함’의 불필요성을 강조하게 되어버린 기독교 교회사의 착각을 해부해 낸다.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삶을 몸으로 살고간 위대한 그리스도의 종 바울을 변호한다.  제7막은 본문 문단 제92문단에서부터 107문단까지, 그러니까 에필로그 바로 앞문단까지 계속된다. 중요한 몇문단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하, 아이, / 아니야 우리가 바울한테 속았어, / 행함으로 아니요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니 나도 그랬지. / 그저 얻는 것이니 복음인 줄만 알았지.”

  “이 놈아, / 네 놈이 바울을 속였지, / 그래 바울이 너를 속였느냐? / 이 바울을 봐라 !”

  “이 욕 먹소, 매 맞고, 터지고, / 쫒겨다니고, 사슬지고, 갇히우다가, / 마침내 목을 잘리운
     이 바울을   / 이 피투성이의 사람을.”

     ............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한 이 노력의 사람을 / 네가 속여 만병약으로 팔아먹으며 /
      놀고 먹다가 온 네가 아니야? / 네 흰 손 푸른 얼굴이 너를 증거하지 않느냐? ”  
 
    “내 오늘이야 내 바울을 위해 / 변명하고 분을 풀어주리라, / 싸구려 싸구려 약장수 놈들에게
     끌려 / 이십세기의 거리거리에 구경거리가 된 내 바울.”

    “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제 몸에 채워 / 영광으로 기뻐하는 그를 / 놈들이 손벽치며 잘한다
     잘한다 하면서 / 가까이만 가면 슬슬 피해 정말 구경거리를 삼았지.”

    “앞엣 것 잡으려 뒤엣 것 잊고 달리며 / 아직도 못 잡았노라 애쓰는 그 늙은 용사를 /
     놈들이 우야 우야 깃발 두르면서도 / 뛸 생각은 않으며 상타면 가로채려고 참말 바보
     대잡을 했지.”      

     ............

    “ 이 사람, 이 행함의 사람을 너는 알았느냐? / 팔아먹을 대로 팔아먹고 / 이용할 대로 다
      이용해 먹은 다음 / 이제 또 무엇을 이 순교자에게 넘겨 씌운단 말이냐?”

    “ 이 놈들, 믿음을 놀음으로 바꿔놓는 / 이 안일교도(安逸敎徒) 놈들. / 아버지 형상 몸에
      지키는 참 맘 보면 교만이라 비꼬아 몰고 / 스스로 거짓 겸손 자랑하는 너야말로
      인간주의자들.”


 작가는 ‘흰 손’ 마지막 제7막에서 널리 오해되고 폄훼된 바울의 대한 비난에 대하여 바울의 진면목을 회상케하고 바울을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입을 빌어 ‘내 바울’ 이라고 특별한 신뢰와 애정을 표하는 말로 적극 바울을 변호한다. 그동안 서구 2,000년 교회사는 바울해석의 곡해의 역사요, 근세이후는 바울의 기독교이해에  대한 비난의 역사였다. 비난의 촛점은   바울이 예수의 복음을 율법종교와 교리종교로 변질시켰고, 반유대주의와 반여성주의의 기초를 제공했으며, 불의한 권력에 복종하라고 가르친 보수적 기독교의 원흉이라고 매도하는 것이었다. 특히 구원론의 교리적 논쟁에서 ‘바른실천’(orthopraxis)을 부정하고 ‘바른교리’(orthodoxy)를 믿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쳤다는 누명을 그에게 뒤집어 씌었다.
 그러나, 현대 새로운 바울연구는 과거시대의 바울에 대한 터무니 없는 비난은 오해이거나 왜곡이라고 강조한다. 마커스 J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9김준우역), 「첫번째 바울」참조(한국기독교연구소, 2009)
물론 바울도 당시 시대의 아들로서 문화-사회적 사고방식에서 고대사회의 해석학적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의 진면목은 로마제국의 ‘힘과 황금과 군사력에 기초한 황제숭배’의 이념지배에 맞서서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진짜 메시야’라고 주장하다가 순교당한 진정한 사도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사도 바울의 속죄론이라고 여겨저왔던 ‘의인교리’(義認敎理, Doctrine of Justification)는 예수가 나의 죄를 대신해서 피흘려  죽었다는 것을 객관적 사실로서 인정하고 받아드리면 하나님은 ‘예수의 의로운 죽음의 값’을 그 교리를 인정고백하는 신도들의 생명에 ‘전가’(轉嫁)시켜주기 때문에, 죄인은 죄값을 대신 치룬 예수의 십자가 덕분에 ‘의롭다고 인정’(義認)받아 심판을 면하고 구원받는다는 교리이다.
 현대인들이 들으면 다소 신화적 종교담론처럼 들리겠지만, 안셀름이 살던 중세기 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종교개혁당시 루터가 살던 근세초기 시대문화상황을 놓고보면 다소 이해가 갈수 있다. 안셀무스의 속죄론은 ‘법정보상 만족설’이라 부르고, 루터의 그것은 ‘대속적 의의 전가설’이라고 말한다.
 현대 신학자들은  ‘의인’(義認)이 아니라 ‘의화’(義化)로서 이해하여야 바울의 속죄론을 오해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의인’은 글자그대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법정적 개념의 사실’(稱義)이 중요하지만, ‘의화’는   ‘실재로 의롭게되는 변화’가 핵심이며 사랑의 실천과 인격의 변화가 동반되는  ‘참여적인 속죄’를 강조하는 셈이다. 위와 같은 책, 13쪽. 특히 각주(脚註) 참조.

 함석헌의 생명론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말해서 “생명은 하나이다”. 내 생명, 네 생명이 현실적으로 따로 존재하고, 서로 사회생활 속에서는 책임소재를 가리면서 구별하여 살지만, 깊이보면 네죄나 내 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전체적 인격체’의 드러난 장소일 뿐이다. “생명은 하나”라는 표어가 깊은 뜻을 지닌  말이라면 “인간적 삶이란 대리적 삶이요, 대속적 삶이다”라는 말도 깊은 뜻에서 이해 않되는 일도 아니다. 나의 현재적 생명이 누리는 자유, 평등, 평화, 인간다움 등은 내가 혼자서 쟁취한 댓가로서 누리는 것이 아니다, 부모형제, 선열들, 애국지사들, 노동자와 농민들,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된 학생들과 지성인들의 무수한 ‘희생제물’ 때문에 사는 것이다. 오늘 감옥속에 갇힌 생계형 잡범들, 보건의료 혜택을 못누리고 죽어가는 사회약자들, 사회변두리에 밀려나가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책임이 온전히 그들만의 것이라고 주장못한다. 직간접으로 우리사회 구성원들이 ‘공범자’들인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시인이 이해한 속죄론의 참 뜻은 책임적 행동을 면제하거나, 힘들이지 않고 쉽게 구원얻는 다고 믿는 ‘안일교도’(安逸敎徒)들의 도피처가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과 ‘행함’은 동잔의 앞뒤관계와 같아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제1세기 후반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안에 사이비 속죄론이 횡횡하기 시작하였는데, 야고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다음같이 편지했다.
   “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ㅇ;로보건데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서 2:14-26참고)
  보수적 정통주의 신학자들이나 교회지도자들은 입만 벌리면 자신들은 ‘신본주의자’(神本主義者)요 함석헌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거나 주체적 인격책임신앙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인본주의의자’(人本主義者)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작가는 하나님아버지의 형상(창세기 1:26)을 몸에 지키면서 참 맘을 견지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자녀들이기 때문에 교리주의자들로 부터 도리혀 인본주의자들이라고 비난 받는다고 반박한다.  도리혀 ‘스스로 거짓 겸손을 자랑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인간주의자들이요 인본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진실은 자율(自律)도 아니고 타율(他律)도 아닌 그 양자의 역설적 통일이 올바른 것이다. 그것이 중용의 자리요, 중도의 자리요, 성(誠)의 자리요, 참 믿음의 자리이다.

[3] 나가는 말: 에필로그

 ‘흰 손’ 이라는 특이한 은유적 시제(詩題)를 가지고 작가는 당시 한국 기독교계의 근본문제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속죄사상’을 간접적으로 피력하였다. 작가의 관심은 ‘속죄론’이라고 부르는 기독교의 신학적 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굳어지고 생명력이 없고 형해만 남은 교리신앙을 반복하면서 순박한 신도들을 얽어메고 지배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자기기만을 폭로하여 교리로 쇠뇌된 기독교인들을  해방시키고, 기독교 복음의 본래적 원모습을 밝히려고 하는 것이다. ‘흰 손’이라는 장편의 극시를 통해서 드러난 함석헌의 기독교이해 특징을 몇가지 열거함으로서 에필로그에 가름하고자 한다.
  첫째, 함석헌의 종교이해는 종교란 철저히 인격적 생명의 단계에 도달한 호모사피엔스의 영적반응이기 때문에, 철저히 주체적이고 실존적이며 인격참여적 사건이라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종교는 마음의 지성소 안에서 이뤄지는 인간체험현상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실증적 확실성을 담보하려고 온갖 가시적〮〮 표식들은 도리혀 종교를 타락시킨다. 거대한 예배당, 장엄한 예전의식, 단체적 신앙형태, 집단적 부흥회, 현란하고도 심원한 듯한 교리와 신학이론 체계, 그리고 철저한 성직자들의 위계질서등등은 도리혀 종교의 영성을 훼손시킨다고 본다.  
  둘째, 함석헌의 종교이해는 ‘궁극적 실재 그 자체’ 로서의 하나님은 인간이 다 알수 없지만, 인간생명의 최고발전단계 현상이 ‘인격성 자각’이기 때문에, ‘궁극적 실재’가 인격이하가 되어서는 않된다고 본는 입장이다. 기독교신관중 ‘초월적 유신론’이 현대인에겐 문제가 되어있다.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사고가 너무 많이 묻어나온다고 보기 때뮨이다. 그러나, 함석헌의 걱정은 종교가 너무나 인격적 성격이 강해서 문제인것이 아니라 도리혀 그 반대인것이 문제이다. 함석헌은 종교가 윤리적 차원과 인격적 차원의 한계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보지않기 때문에 계몽사상가인 임마누엘 칸트의 종교관을 넘어선다.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를 부정하지만 이성의 요청, 윤리적 성실성, 인격적 책임성을 충분하게 초과달성하지 않는 종교는 미신, 사이비종교, 종교기만으로 귀착된다고 본다. 기독교의 고전적 표현으로 말한다면 “계시는 이성을 무시하지 않고 ‘황홀한 이성’이 되게하며,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시킨다”.
  셋째, 함석헌의  전통적 ‘속죄론’ 비판은 생명현상 속에 엄존하는 ‘대속’의 신비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과 실천적 자기희생이 전혀없이 굳어진 교리로 전락되버린 ‘의인교리’(義認敎理)의 독소와 그 피해를 비판하는 것이다.  ‘흰 손’의 여러 곳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것처럼, 예수의 자기희생적 보혈이 ‘대속’의 현실로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신자의 생명과  예수생명과의 하나됨의 사건(atonement)이 필수 조건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참 생명과 참 인격에 부딪혀서 예수의 죽음이 자기 죽음이 되고 예수의 참 삶이 자기 삶이 되는 삶의 일치, 뜻의 일치, 의지의 일치, 고난과 비젼의 일치를 통해서만 ‘대속신앙’은 교리가 아닌 현실로 살아난다.
  한국 기독교는 함석헌을 인본주의적 이단 신앙인이라 비난하기 전에 ‘흰 손’을 진지하게 읽고 무엇이 십자가의 대속신앙인가를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밤마다 교회당의 붉은 십자가 형광등의 광신적 열광주의와 교세과시적인 대형집회를 폐기하고 스스로 절제하고 정화되어야 한다.  ‘십자군적 영성’은 전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 폭력과 야망과 군대문화적 집단공격 충동의 종교적 위장임을 깨달아야 한다. ‘십자군의 영성’(Spirituality of Crusade)과 ‘십자가의 영성’( Spirituality of Crucifixion)은 전혀 성질이 다른 이질적인 영성임을 깨달아야 한다.  ‘십자군의 영성’은  공격, 점령, 지배, 승리, 통치, 금력의 상징이지만, ‘십자가의 영성’은  비움, 겸비, 청빈, 희생, 용서, 비폭력, 진리에의 순명의 상징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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