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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새문명, 씨알사상-김경재
글쓴이 : 바보새 날짜 : 2011-06-30 (목) 17:21 조회 : 2996
역사, 새문명, 씨알사상
김경재
씨알의 소리  214호, 2010.12.15




역사 ․ 새문명 ․ 씨알사상 이 강연 원고는 (사)함석헌 기념사업회 부설 <씨알사상연구원>이 매주 금요일 저녁(7시-8시30분), 마포구 서교동소재 함석헌 기념관에서 실시한  ‘바보새 씨알학당’ 제1기 시민강좌 (2010.9.10-12.03, 총 12회)의 마지막 종강모임에서의   발제자료이다.  

       역사, 새문명, 씨알사상
- 역사와 인류의 미래를 전망한 씨알사상의 토대-

[1] 정리와 공부평가

마지막 12회차 공부목표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총체적으로 회광반조(廻光返照)하면서 씨알사상의 기조가 거기에 이미 배아로서 내재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지향하는  씨알사상이 오늘의 역사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하고 새문명의 여명을 알리는 닭울음소리(鷄鳴聲)로서 갖는 의미를 요약해보려는 것이다.

첫째,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한국인들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적 실재’란 어떤 성격의 것인가? 한마디로 말하여 독자로 하여금 심층적 차원에서 ‘역사의식’을 갖게한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책 내용전체가 모두 합하여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제1부를 온통 역사의 본질문제와 사관문제에 지면을 할애하여 ‘역사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생각하도록 독자들을 일깨운다. 역사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그것이 다름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인간본질에 대한 물음이요, 더 나아가서 ‘삶이란 무엇이며,  진리란 무엇인가?’등의 모든 문제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만다.
  <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역사의 본질을 설명하되 독특한 ‘사관’을 독자에게 제시함으로서 인생 ․ 역사 ․ 문명 ․ 진리(하나님) ․ 도덕성 ․ 주체적 책임성 ․ 사람다움의 뜻을 모두 한줄에 꿰어 생각하도록 촉구 하였다. 그동안 피상적인 역사이해의 여러 가지 유형들 예들면 연대기적 역사서술, 왕조사적 통치경험 기록으로서의 역사서술, 유물․유심적 변증법적 역사이해, 자연순환론적 역사관, 다윈적 사회진화론의 약육강식론, ‘역사’를 묻지 않고 ‘역사성’만을 묻기로 작정한 실존주의 역사이해등을 모두 비판적으로 넘어서서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역사적 실재성’을  직시하도록 하였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말하는 역사적 존재로서 사람의 참모습은 저자의 <맘>이라는 시 첫문단과 마지막문단에서 시라는 문학적 형식을 빌어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시 인용해 음미해본다.
  
맘은 꽃 / 골짜기 피는 난( 蘭) / 썩어진 흙을 먹고자라 / 맑은 향(香)을 토해 .
  ..................
  맘은 씨알 / 꽃이 떨어져 여무는 씨의 여무진 알 /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
  또 온갖 형상의 어머니.


맘을 식물 난초에 비유하여 노래했지만, 이것은 고도의 예술적 상상력과 철학적 사유 집중력이 응축된 함석헌 씨알사상의 진주와 같은 시구절이다. 골짜기에 피는 난초 한그루는  유기물질이 된 흙속에 뿌리내리지 않고서는 그 존립자체가 불가능하고, 잎을 펴고 꽃을 피우고 향기를 발하는 모든 생명체로서 활동기능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사실을 사람에  적용하여 말한다면 “인간은 역사에 의해 영향받으며 만들어져가는 존재이다”라는 말이다. 특히 역사전통의 귀중한 유산과 삶의 고귀한 희생자들과 문화의 가치와 의미에 의해서 조성되었고 형성되어가는 존재라는 말이다. 이 사실을 진지하게 알면 알수록 그는 사람이 되고, 그것을 모르거나 부인하면 짐승이 된다. 자기인생 자기혼자 잘나서 잘 먹고 출세한줄 아는 인간은, 정신년령이 유아기상태이거나 아직 유인원단계의 한 짐승일 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줄여말하면  나의 인간으로서의 존재  자체가 역사적 실재의 산물이라는 말이다. 앞선 역사의 선열들의 희생봉사에 덕입고 빚지고 산다는 살고 있다는 자각이다.
 사람은 역사적 존재라고 말할 때, 함석헌은 역사에 의해  양육되고 결정되는 피동성만을 자각하라고 일깨우는 것이 아니다. 또다른 면 곧 “사람은 역사를 창조하는 역사 창조적 존재이다”라는 진실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한국역사의  지난날 모든 영광과 고난과 죄악과 긍지가 내 몸 안에 DNA처럼 내장되어있고, 나는 그것을 미래적으로 새로움을 더해서  창조적으로 발현․발전시켜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깨달음이 사람됨이요, 그것을 망각함은 사람됨의 결격이다. 나 개인의 실존이나, 특정한  시대의 주체적 자각의식이란 위에서 인용한 마지막 시의 문단 “맘은 씨알,...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또 온갖 형상의 어머니”라는 구절 속에 압축되어 있다.  
 현재 우리사회의 교육철학, 도덕교육, 정치철학, 그리고 심지어 종교활동마져도 함석헌이 말하는 ‘역사의식’의 부재 때문에, 온갖 이기주의와 동물왕국의 무한경쟁론이 판을 치고 있다. ‘역사의식’의 부재는 곧 인간성 망실의 첫걸음이다. <뜻으로 본 한국 역사>의 제1차적 의미와 그 항구적 가치는  바로 독자로 하여금 ‘역사의식’을 갖게하는 힘에 있다.

둘째,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역사를 짓고, 역사에 의해 지음받지만, 그 중에서도 궁극적으로 역사를 짊어지고 가는 ‘역사담지자, 역사주인’은 한 사회공동체의  바닥사람들, 민중, 씨알들이라는 씨알사관을 주장한다. 그 결과, 국가주의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하고, 낡아빠진 국가지상주의 정치이념을 극복해야 새문명시대에 들어간다고 본다.

 이 둘째 명제는 원론적이거나 당위적인 명제라기 보다는 매우 현실적이고 사실적 명제라고 본다. 엘리뜨중심의 역사관을 가진  지식인 눈에는  말도 되지 않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여겨질 것이다.  모든 사건을  신불(神佛)의 전능한 섭리경륜이라고 믿고 초월자에 의존하는 종교인들에게는 오만한 인본주의 생각이라고 매도할 것이다. 과학적 사적 유물론을 신봉하는 맑스주의자들에게는 공상적 유토피아니즘이라 여길 것이다. 그리고, “정치는 현실이다”라고 확신하는 집권당으로서는 재야인사들의 민중선동적 포퓰리즘정도로 밖엔 평가하질 않을 것이다.
 민중(씨알)이 ‘역사의 궁극적 담지자’란 말뜻은  일단은 역사에 대한  권리주장이라기 보다는 ‘불편한 진실’로서의 책임자각이요 고난을 각오하는 어머니같은 맘가짐이다. 구체적 삶이란 어떻게 이뤄져가는가? 세계적 금융기관들의 금융자산을 관리하는 최고로 영리한 금융기관 종사자들이나,  무기상들이나, 석유재벌들이나, 자기들의 정치활동으로 국민들을 먹이고 살리는줄 착각하는 오만한 정치인들의  권력중독증이 구체적 삶을 이루어가는 것 아니다.  구체적 삶이란  먹거리를 생산하고, 공산품을 제조하고, 운반교류하고, 전쟁나면 맨먼저 일선에서 목숨바쳐 공동체를 지키고, 아기들을 낳고 양육하는 무수한 보통사람들에 의해 ‘나라’ 가 이뤄지는 것이다.
 ‘국가’라는 추상적 실체가 구체적이고도 현실적 국가실체인 민중과 씨알들을 통치대상이나 구제대상으로 여기는 국가권위주의 망령에 대하여 함석헌은 싸웠다. 함석헌은  민족, 겨레, 그리고 ‘국민의 국가’로서 잠정적 국가기능을 인정한 분이지만, ‘국가주의’ 시대가 지났다고 확신하는 세계주의자였다. 러시아 국가만 아니라 오늘날  이상스러울 만치 톨스토이 서거 100주년 기념행사가 세계 여러나라에서 잠잠한 이유는 그만큼 우리시대가 역사의 퇴행 곧 2차대전 종전 직후보다도 세계의식이  후퇴되었고,  강화된 국가주의 발로시대에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등  강대국가들이나 한국사회가  톨스토이나 함석헌의 반제국 ․ 비폭력 ․ 반국가지상주의 신념을 좋아할리 없다.
 ‘역사의 주체는 씨알(민중)이다’는 신념은 씨알(민중)은 역사의 퇴행과 비인간화에로 치닫는 타락에 대한  ‘궁극적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드리는 용기를 내포한다. 참 어머니는 집안 자식들중 어느 한 자식의 타락과 죄책을 난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잘 못먹이고, 잘 못가르치고, 어미 죄가 많아서 저 아이가 그런 것이니,  모두 내탓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독재자를 막지 못한 것도 백성책임이요, 사이비 정치가를 잘못 선택한 것도 민중책임이다.  씨알들의 생명을 담보로하여 전쟁놀이를 예사로 주장독려하는  ‘전쟁불사론자들’을 남북한 사회에서 양산해낸 것도  궁극적으론 씨알(민중) 책임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한마디로 울부짖기를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고 말 한 것이다. 함석헌이 우리민족에게 “깊이 생각하는 힘을 길어야 한다”고 누차 강조한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씨알들에게 민족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되 민족주의에 빠지지 말 것, 세계주의 시각을 지닐 것을 가르쳤고, 나라를 사랑하고 충성하되 국가주의 망령에 빠지지 말 것을 가르쳤다.  힘을 기르고 강하게 훈련하되 무력적 ․ 물질적 힘이 아니라  정신적 ․ 도덕적 힘을 길러야 할 것을 강조하셨다.

셋째,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동터오는 새로운 ‘하나의 세계질서’에 대한 비젼을 제시하는 책이요,  새로운 문명질서의 출현을 꿈꾸는 유토피아 주장서적이다. 옛 문명시대가 끝났다는 분명한 자각을 가지라고 독려하는 문명비판서이다. 현실모순의 일부분을 수정개조하면서 땜질하려는  ‘방법론’  탐구에 삶의 열정을 탕진하지 말라는 것이다. 차라리  지구촌삶의 질서를  지금까지와는 전혀다르고 또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는 의지와 확신을 갖고 과감한 ‘진리’ 탐구에  매진하라고 생각이 젊은이를 부르는 ‘소리’이다.

우리가 12주에 걸쳐 이 책의 집필동기와 목적, 역사를 보는 눈과 서술방법 등을 살려본 결과  알수 있듯이, 이 문제의 책은 세상이 흔히 말하는  ‘엄밀한 학(wissenschsft)으로서의 역사책’이 아니다. 저자 자신이 그런 목적으로 이 책을 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차라리 고대 BC.8-7 세기 무렵 헬라문명시대 호머의 ‘문학적 서사시’(일이아데와 오딧세이) 혹은 BC. 6-5세기 유대나라 예언자들 예레미아와 이사야의 ‘예언적 서사시’와 동질의 특성을 지닌 독특한 책이다.
 우리가 공부한 이 책은 실증적 역사학을 목적으로한 역사책이 아니고, 역사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꿰뚫으면서 현실문제를 이해하도록 하는 역사적 서사시에 가깝다. 이 책 안에는 시인의 직관, 예언자적 영감, 묵시가의 비젼,  유림 선비적 도덕판단, 영적 신비가의 상상력등이 총동원 된다. 그러나 호머의 서사시와, 예레미아 이사야의 예언서가 소설같은  픽션(fiction)이 아니고 일정부분은 신화에, 일정부분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서사시였듯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도 그렇다. 저자의 말을 다시한번 듣는 것이 필요하겠다:

 사실의 자세한 기록은 전문가의 일이다. 그들의 역사는 사실(事實)의 역사, 기술(記述)의 역사, 연구의 역사다. 그러나 씨알은 그것보다도 해석의 역사, 뜻의 역사를 요구한다. 세계의 밑을  흐르고 있는, 정신을 붙잡게 해주는, 어떤 분명한 주장을 가지는, 말씀을 가지는 역사를 요구한다. (37쪽)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일제시대 고난에 신음하는 한민족에게 관점을 달리하여 역사를 봄으로써, 현실을 창조적으로 지양(止揚) 하자는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제 해방이 되고 독립국가를 이루고,  산업화를 이룬 우리시대에도 이 책이 가진 항구적 의미는 무엇일가? 이 책이 말하려는 더 높은 새문명 비젼에 있다. 우리시대에 정말 필요한 참 지식인의 사명은, 오늘날 지구촌을 움직이는 현실세계의 정치 ․ 경제 ․ 군사 ․과학이 결합된 무한경쟁을 당연시하는 소위 ‘세계화’ 이념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지구인의 집단적 체념에 대하여 <아니 ! No !>라고 말해주는 일이다.
 함석헌의 이 책이 주는  문명사적 의미는 첫째, 인간다운 얼굴을 지닌 “다른 세계질서가 가능하다!”는 멧시지이다. 둘째,  “새로운 문명패러다임의 변화 시기는 지금이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생명은 항상 전체요 하나’라는 진실을 깨닫고 ‘그에 걸맞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라는 멧시지를 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변화되기 위해서는, 케케묵은 국가주의, 무력지상주의, 경제발전 제일주의, 소비중심적 생활구조, 권위주의적이고 전통에 메인 구태의연한 종교, 물질적 환원주의에 기초한 사이비 과학종교, 반생태적 개발지상주의  등등 그 모든 것들이 ‘혁명’되어야 한다고 래디칼한 주장을 외치는 책이다. 동서문명의 창조적 융합으로서 어떤 사상이 나올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한번쯤 진지하게 함석의 씨알사상을 그 하나의 결실 사례로서 연구해야 한다.

넷째,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역사철학서이면서 신학서(종교학)요 그리고 순수 인간학 책이다. 특히 무릇 다른 역사철학서, 종교학서, 그리고 철학적 인간학 서적들과 달리, 그 모든 것의 주체적 인격자인 나자신을 ‘씨알’로서 재정위(再定位) 시키는 자기성찰의 조명등이다. 모든 허위의식과  가식적 의상(衣裳)을 벗기고 순수자아로 돌아가게하는 구원해방의 책이다.

이 문제의 책은 역사철학서로서 손색이 없는데, 특히  동양정신문화가 파악한 ‘역사적 실재에 대한 기하학적 도형인 ‘순환반복적인 원운동’의 모델과 셈족계 아브라함종교(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파악하는 역사모형인 ‘직선적 사관’을 역설적으로 융합한 ‘나선형적 상승운동’으로 비유되곤 한다. “역사의 운동은 차라리 수레바퀴나 나선의 운동으로 비유하는 것이 좋다”(57쪽)
 무릇 나선운동 혹은 나선형의 생명현상의 특징을 세가지로 압축 할 수 있다. 첫째는 ‘자기누적을 통한 성장’이라는 것이다. 함석헌은 이것을 “역사는 반복하면서 자란다”고 표현했다. ‘반복’은 똑같은 자리에서 동일한 운동의 반복이 아니다. 엄정하게 말하면 세상엔 동일한 ‘반복’이란 없다. 무언가 새로운 것의  변화가 발생한다. 비슷한 반복이 누적되면 생명현상은 창조적 변화를 일으킨다. 성장인 것이다.  짧게 보면 역사는 퇴보하기도 하고 퇴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길게 보고 크게보면  역사는  질적  성장을 겪는다.
 나선형 운동의 둘째 특징은, ‘태풍의 눈’처럼 격렬한 운동속에서도 동중정(動中靜)의 텅빈공간처럼 움직이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균형과 조화의 중심을 가진다. 영혼의 지성소이다.     셋째특징은, 저항을 통한 성장과 변환의 특징이다. 여기에서‘저항’이란 헤겔이 말하는 부정성이요, 함석헌이 말하는 고난이다. 불의에 맞서는 저항, 고난을 극복하는 자기정화, 억압에 맞서는 용기있는 데듬없이는 역사가 나선형의 성장과 변환을 이루지 않는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필자에게 가르쳐준 잊혀지지 않는 통찰은 “고난은 생명의 원리이다”라는 통찰과 “하나의 진리를 위에서 보면 하나님이요, 과정에서 보면 역사요, 맨바닥에서 보면 민중씨알 이다”라는 것이다. 역사현실을 떠나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관념적 우상숭배요, 민중의 고난현실을 떠난 종교담론과 역사철학 담론은 공허한 지식인의 사치요, 하나님과 역사를 부정하는 민중담론 또한 맹목적 정치사회학 지식이론일 뿐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씨알사상의 배아로서 이미 후일 씨알사상이 말하려는 모든 것을 씨눈처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씨알사상이라는 근원어(根源語)는 하나의 은유적 표현이지만, 단순히 씨와 알이 함의하는 생물학적 상징의미  그 이상을 거기에서 느낀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라고 말 할 때, 씨알이라는 어휘는 문장적 완전한 언어표현은 아니지만 언어는 언어이다. ‘존재’는 존재자들 같은 것이 아니라 진리 혹은 하나님에 가깝다. 집이란 은유는 집은 무한우주공간을 제한하여 구체적 생명이 살수 있는 ‘현상공간, 육화공간’이듯이 씨알은 개체이면서 전체요, 유한하고 나약한  피조물이면서 그 안에  영원자의 영이 거(居)하는 집으로 삼고 들어와 사는 유일한 생명체이다. 그래서 인간실존을 ‘현존’(現存, Dasein)이라고 철학자들은 부른다. ‘존재’가 ‘거기’에 ‘현재’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씨알의 존엄성과  유한한 제약성과 무한한 자기초월성이 있다. 그 무엇보다도, ‘씨알’이라는 언어는 나로 하여금 온갖 자기위장과 자기우상화와 자기멸시를 극복하고, 부끄럼없이 맨사람 그대로 , 순수한 나 본래모습을 되찾아야 하겠다는 ‘내면의 소리’를 듣도록 촉구한다. 거창한 소득을 바라기 전에 잃어버린 ‘자아’를 찾도록 ‘아테네 도시의 등에’ 역할을 하는 이 문제의 책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자아상실의 위험속에 헤메는 현대인들에게 “네 자신을 알라”고 말하는 소크라테스의 소리로서 여전히 작용한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예수가 자기에게 닥쳐온 고난의 짐을 회피하거나 무력적으로 받아 저항한 것이 아니라, 매우 역설적이게 그 고난(십자가의 죽음과 시련)을 적극적으로 받아 도리혀 ‘진리, 정의, 사랑’을 드러내는 계시적 전기로 삼음으로서 새인류 새문명의 구원의 길을 열어냈듯이, 예수의 자의식과 고난처리의 태도를 한민족이 주체적으로 닮아냄으로서   조선민족이 세계역사구원의 새 길을, 새 가치관을, 새 문명의 옥동자를 탄생시키는 역설적 계기로 삼자는 주장을 폈다.
  고난을 회피해야할 것, 혹은 기피해야 할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려는 ‘행복지상주의’ 철학을 버리지 않는한 함석헌의  이 책은  민족집단적 마죠키즘의 변태적 역사해석 책이라고 가혹하게 매도당할 수 있다. 마치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제1세기 지중해문화권에서 영광의 메시야와 기적을 찾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스칸달론)이요,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에게나 일반 이방인게게는 ‘어리석은 일’ 일인 것(고전1:22-25)과 마찬가지로, 삶속에 엄존하는 고난의 의미에 대한 발상법의 전환과 가치관의 혁명없이는 20세기나 21세기도 이 책은 ‘거리낌과 어리석음’이라고 조롱대상이 될 것이다.

[3] 남은 과제: 동학평가문제를 사례로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사실의 역사, 기록의 역사 쓰기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역사를 “뜻으로 보려함”에서 집필된  것이지만,  그 작품이 씌여진 시대적 상황과   기본자료의 제약성으로 인하여, 그리고 저자 함석헌의 주관적 사건의미 가치판단에서  기인하는 공정성 결여로 인하여 새겨읽고, 바로읽고, 다르게 읽어야 할 내용이 적지않게 있을 것이다.  그 대표적 한가지 사례로서 나는 함석헌의  <동학운동>의 역사읽기를 함석헌의견해와 동의할 수 없는 대표적 사례로서 들고자 한다.
  함석헌은 개정판 <제30. 기독교의 들어옴> 항목에서 19세기 후반기에 개화기 물결을 타고 들어온 프로테스탄티즘이나 그보다 100년전에 수많은 순교자를 내면서 들어온 로마 가톨릭 천주교가 역사적 과제를 맡아야 하건만, 크게보아 실패한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한국의 종교가 한국민을 건지려 한다면 세가지 과제를 해결해야하는데, 첫째는 계급주의를 깨뜨리는 일이요, 둘째는 사대사상을 쓸어버리는 일이요, 셋째는 숙명론의 미신을 없애는 일이라고 보았다.(253쪽)
 엄밀하게 보아서 가톨릭 신앙체계안에는 중세적 성직자우월주의 곧 계급주의를 청산하지 못했고, 개신교는 선교모국(宣敎母國)  특히 미에 대한 사대사상을 청산하지 못했다. 오늘의 한국 개신교 지도자들 대다수가 초기 선교사들의 희생적 봉사와 선교정신에 존경과 감사의 맘을 갖는 일하고 지금의 미국을 숭미주의자 처럼 행동하는 일하고는 엄밀하게  구별해야 할 것이다.
 개화시기에 민족을 살려내려교  일어난 민족종교로서 동학(천도교) 에 대한 함석헌의 비판적 생각은 오늘날 천도교인에게는 물론이요, <뜻으로  한국역사>를 사랑하는 애독자들에게도 이해되지 않는 기인한 생각이 드는 문제이다.  함석헌의 동학(천도교)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세가지 이유를 그의 짧은 동학(천도교)에 관한 언급에서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우리가 받아드린 종교는 우리 것이 아니라 남에게서 빌어온 종교로서 진정한 주체적 사상이 결여된 것이란 점을 든다. “종교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다 남에게서 빌어온 종교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유교가 그렇고 불교가 그렇고 기독교도 그렇다. 근래에 오다가 동학이요 천도교요 하나,  요컨대 밖에서 들어온 남의 사상을 이리따고 저리따서 섞어놓은 비빔밥이지 정말 우리의 고유사상이 아니다”(95쪽). 동학(천도교)에 대한 비판적 견해의 근거가 ‘유불선 삼교의 혼합종교’라는 비판적 견해이다.
 그러나, 인류의 사상문화사가 문명의 상호교류속에서 새로운 해석과 경험이 축적된 것이지, 민족 고유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부끄러운 것 아니다. 특히 수운의 종교체험과  해월의 그것에서 그 이전사상을 토양으로 삼으면서도   ‘창조적인 종교사상’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오해나 폄훼로 들린다.

 둘째, 함석헌의 동학평가에서 그의 관점은 한국을 새롭게 해야할 청산의 3대과제중 셋째과제인 숙명론적 미신을 극복하는 과제를 동학(천도교)가 철저히 해내는 일에 실패했다고 본다. 외래세력의 국권침략과 서양세력의 동진으로 말미암아 ‘사회가 한 번 큰 혁신을 해보려고 움직이는 때’, 동학이 일어난 것은 일단 긍정적으로 본다. 민족정신의 자각운동으로서 동학의 일어남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최제우의 참형순교를 높이 평가하지만,   동학이 가르침 속에 “많은 미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인하여 진보적이라 할 수 없었다”(261쪽)라고 평가하고 있다.
  동학운동의 초기에 미신적인요소란 무엇을 지적하는 것인지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1860-1890년대 한국민중의 민도속에 동학교를 포교하는 가운데서, 시운적 운세론(時運的 運勢論), 병을 고치고 영생무병한다는 주술적 그림을 그린 종이를 불에 태워 마시는 영부탄복(靈符炭服) 행위, 주문암송행위등을 굳이 말한다면  열거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문암송이란 표현이 다를 뿐이지 동학(천도교)의 기도행위요, 영부탄복행위는 심신일체를 강조하는 동학적 인간관에서, 보이지 않는 영적신앙의 실체를 상징화하는 종교의례적 행위로 이해하면 굳이 미신이라고 탓 할 것 없다. 더욱이 동학의 역사 시운론은  역사결정론이나 운명론과는 다른 것이고, 시대의 변화기운에 인간의 주체적 참여를 강조하는 종교이다.
  요컨대,  동학을 포함하여 외래종교인 천주교나 개신교 안에도 많이 발견되는 ‘대중교화적’  기복신앙의 잔재와 깊이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지 못한점을  비판한 점은 이해되지만, 당시 시대상황으로 보면 개신교보다 앞서서 ‘개화’에 힘썼던 종교가 동학(천도교)이요, 역사숙명론을 거절하고 주체적으로 역사를 바꾸어보려고 일어난 민중에 기초한 동학(천도교)이었다. 그런데, 그 민족종교운동이  미신적 요소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고 그 안에 미신적인 요소가 많다고 힐책하는 것은 동학(천도교)의 당시 개화운동에 앞장선 업적과 운동을 정당하게 평가 할 때, 함석헌의 동학평가는 공정성을 결여하다고 비판받을 수 있다.   

  셋째, 함석헌의 동학운동에 대한 평가의 소극적 근거로서 그가 동학혁명을 “순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제폭구민(除暴救民)이라는 표어와 그 후의 전봉준의 일이 보여주는 대로 , 한개의 혁명운동이었다”(261쪽)고 본다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영적 ․ 종교적 근본혁명이라기보다는 수탈당하는 농민들이 가렴주구하는 탐관오리들에 대한 정치경제사회적 혁명운동이요, 외세에 대한 무력항쟁이라는 것이다. 전봉준의 무력봉기에 대하여 동학운동내부에서 해월최시형을 중심으로한 지도부와의  갈등이 초기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혁명방법론과 혁명시기론의 관점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 속에서 그렇게 강조하는 인간존엄성에 대한 자각, 불의에 대한 양심의 저항행동, 주체성의 강조, 역사현실에 참여적 종교, 강제적 무력동원이 아니라 자발적 의협심에 의해 일어난 민중봉기였다. 러시아나 중국의 프로레타리아트 사회혁명의 성격을 넘어서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자고 분연히 일어난 이 땅의 씨알들의 몸부림에 대한 소극적 평가는 도저히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함석헌의 비폭력주의 신념이 동학혁명운동을 ‘무력적 폭력’행위로서만 규정한다면  잘못이다. 불의의 세력에 저항 할줄 모르는 씨알은 참 씨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함석헌의 철저한 양심윤리적 잣대와 과학적 사유, 특히 비폭력적 영적 종교를 기대하는 관점에서는 동학운동에 대하여 비판 할 점이 있을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같은 동일한 책에서  묘청 ․ 임경업 ․ 홍경래의 봉기를,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역사적 속에서  민중의 뜻을 읽어내는 따뜻한 눈길을 가진 함석헌이  유독히 동학혁명에 대한 소극적 평가를 하는 것은,  그 책 전체의 균형이나 역사적 사건판단의 공정성에서 볼 때, 당시 동학에 대한 연구자료나 정보부족을 감안하더라도,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더욱이, 그가 자신의 생애전환점을  만든 기미년 3.1운동에 대한 직접적 참여사건과, 그가 존경하여 마지 않는 남강 이승훈선생이 3.1만세사건 과정에서 천도교 측과 긴밀하게 협동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함석헌의 동학(천도교)에 대한 소극적 평가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한민족 5,000년사에서 가장 빛나는 일 다시말해서  민중씨알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집단적 생명운동으로서 3.1운동을 천도교가 기독교보다 앞서서 주도했다는 사실을 생각 할 때 더욱 그러하다. 더 적극적으로 말해서, 천도교가 지닌 시천주사상, 三敬(敬天, 敬人, 敬物)사상, 생태적 생명사상, 풀뿌리 민주정치 사상등은 함석헌의 ‘씨알사상’과 깊은 사상 교류 및 상호배움 그리고 상호협동의 일거리가 상존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 속에 들어있는 문제점의 한가지를 들어 말했다. 그 반론의 의미는, 도리어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가치는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이 시대의 제약성 속에서 씌여진 책이라는 당연한 진실, 그리고 이 책은 이 땅의 씨알들에 의해서 계속 씌여져가야 할 미완고(未完稿) 책인 것이지 완성된 신성불가침의 계시적 규범적 책이 아니라는 탄력적 열린사상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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