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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새 씨알학당’ 부산 인문학강좌 2강
글쓴이 : 바보새 날짜 : 2012-07-04 (수) 15:56 조회 : 2248

‘바보새 씨알학당’ 부산 인문학강좌 2강

6월 21일 -2강: <한국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누구인가? 
                     최정윤(씨알사상연구원 연구위원)

<들어가는 글>

평범한 교사는 설명을 하고 훌륭한 교사는 시범을 보이고 위대한 교사는 혼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함석헌(1901~1989)은 위대한 교사입니다. 그것도 100년에 한번 나오기도 힘든 위대한 교사입니다. 의사 장기려는 함석헌의 사상은 500년 뒤에나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말로 그를 평가했고, 풍류신학자 유동식은 불교 천년에 원효가 있고 유교 오백년에 율곡이 있다면 기독교 100년에는 함석헌이 있다는 말로 그를 평가하였습니다. 역사학자들 가운데도 천관우는 함석헌을 당대의 첫째가는 역사가라 하였고, 노명식은 함석헌과 토인비를 비교하면서 역사의 의미를 역사 바깥에서 구했다는 점에 있어서 세계 역사학계에서도 선구적 위치를 점한다고 보았습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그런 함석헌의 생각이 온전히 녹아 들어있는 함석헌 정신의 결정체입니다. 이 책은 단순히 우리의 역사를 백화점식, 나열식으로 열거한 역사서는 아닙니다. 철저히 민중의 입장, 씨의 입장에 서서 역사의 주관과 객관을 모두 뛰어 넘어 우주적 차원, 생명적 차원, 전체의 자리, 진리의 자리에서 씌어진 역사철학서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체를 절대의 세계에서는 신이요, 상대의 세계에서는 씨 곧 민중으로 설정합니다. 절대의 세계와 상대의 세계, 이 두 세계의 팽팽한 긴장을 알아야만 올바른 역사책을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책에는 드러난 차원의 역사와 숨은 차원의 역사가 맞물리면서 나타납니다. 드러난 차원에서는 민중이 주인공이요, 숨은 차원에서는 하나님, 곧 절대자가 주인공입니다. 다만 함석헌은 이 숨은 차원을 과감히 뜯어서 열어 제치고 드러난 차원과의 합일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역사학자들은 함석헌의 이러한 점을 간과하고 그를 평가하곤 합니다. 함석헌의 용어로 말한다면 뜻의 세계라는 것은 표면의 현상의 세계를 ‘뜯어봐야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뜻’이라는 것입니다. 현상 세계를 뜯고 그 속을 열어 젖혀보면 현상 너머의 의미의 세계가 ‘피어오르고, 솟아오르고, 뿜어져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의 세계를 알고 나면 미래를 위해 지금 현재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은 ‘역사는 예언’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쓸 당시 함석헌은 마치 니체(1844~1900)가 ‘짜라투스트라’를 통해 서구문명 즉 기독교문명을 통렬히 비판하고, 새로운 세기를 예언했던 것처럼 함석헌 역시 우리 민족이 처한 고난의 역사를 통해 예언자의 심정으로 한 편의 묵시록을 써내려갔던 것입니다. 따라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역사철학서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편의 예언서인 것입니다. 함석헌은 말합니다. “예언 아니고 역사는 없다”

역사를 바라보는 함석헌의 시각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상호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것들을 결합해내는 탁월한 능력입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가 ‘비둘기같이 순결하게, 뱀처럼 지혜롭게’라고 한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옥시모론(oximoron)이라고도 하는데,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면, <한국역사> ‘넷째판에 붙이는 말’에 보면 함석헌이 공자의 ‘술이부작’이란 말을 인용하면서 역사란 ‘철학이 아니라 과학이다’ 라고 하고 이어서 동시에 역사란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다’ 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그렇다-아니다’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논리여야만 역사의 드러난 차원과 숨은 차원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절대의 세계와 상대의 세계의 파악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함석헌이 이 책을 쓰던 시기와 배경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1930년대 회자되던 학자들 중에는 조선 3대 천재라 해서 단재 신채호(1880~1936년), 육당 최남선(1890~1957년), 춘원 이광수(1892~1950년)를 꼽았는데 이들의 주 활동무대는 경성(지금의 서울)이었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개벽>지 등 당시의 유력 언론에 연재기사들을 쓰면서 필명을 떨치고 인구에 회자되던 학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함석헌의 위치는 고작 시골 오산의 중학교 역사교사요, 그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1934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22회 연재했던 <성서조선>지는 전국의 독자라고 해봐야 300명 남짓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함석헌은 당시의 주류(?) 역사학계에서 보면 변방 즉 주변부에 불과한 역사가요, 지식인이었고, 함석헌 자신이 밝혔듯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역사적 사료와 고증의 빈곤을 감수하며 “자료라고는 중등학교 교과서와 보통 돌아다니는 몇 권의 참고서를 가지고” 썼던 상황에서 나온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식민지 조선에서 조차 주변부 지식인이었다는 것이 함석헌으로 하여금 철저한 비판적 시각에서 이른바 ‘춘추필법’으로 엄정하고 단호하게 우리 역사를 서술한 점에 대해서 후세의 사가들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세종을 ‘하늘이 낸 임금’이라 하면서도 ‘다만 한 조각 자유의 정신이 없기 때문’이라며 세종 대의 문화를 함석헌은 ‘완전히 낙제’라 하고, ‘단종의 비극’이 그것의 반증이라 합니다. 흔히 태평성대라는 성종 대는 ‘회칠한 무덤’이라 평가합니다. 그러므로 연산군의 등장은 역사의 필연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동학이나 기독교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고 일제 치하의 소위 독립운동을 했다는 ‘지사’들에 대한 평가 역시 매정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씨알’이라는 단어의 사용에 있어서도 살펴볼만한 점이 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 그 사용용례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고 특히, 민중의 탄생을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시기부터 본다는 점은 작금의 역사학계의 견해와는 다르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활약했던 이순신과 임경업, 의병들의 항쟁에서 ‘씨’이란 용어를 씁니다. 특히, 이순신을 ‘연꽃’으로, 임경업을 ‘새싹’으로, 의병항쟁을 “씨의 외침”으로 표현한 것은 주목할 점입니다. 기독교의 수용 이후 개화기와 일제 식민지 시기의 서술에서는 다시 ‘씨’이란 용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함석헌은 기독교나 동학이 ‘종교혁명’의 단계까지 나가지 못한 것에 대한 진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내 ‘민중을 깨우는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해방을 다룬 부분에서 ‘씨’은 20회가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아까 니체에 대해 말했는데,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 자신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몇몇 사람은 사후에야 태어나는 법이다. 언젠가는 내가 이해하는 삶과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기관들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겸손한 함석헌은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 때는 오고 있음을 우리 모두는 실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언제 민중을 건지시렵니까?
언제야 당신은 민중을 건지시렵니까?
오 불상히 보시는 하나님 언젭니까?
왕들이나 귀족들이 아니라 백성입니다!
옥좌나 왕관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들은 당신 가슴의 꽃, 오 하나님
풀처럼 시들게 맙소서 그들을
그 맡은 것이라군 그늘진 날 뿐
하나님 민중을 건집소

죄는 언제나 죄만 낳겠습니까?
힘은 언제나 센 놈만 돕겠습니까?
그것이 당신 뜻이겠습니까? 오 아버지
사람이 악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구
당신 산이 말합니다.

아니라구 당신 하늘이
사람의 흐린 날이 맑아져야 합니다
한숨대신 노래가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 민중을 건집소셔!

언제야 당신은 민중을 건지시렵니까?
오 불상히 보시는 하나님 언젭니까?
민중입니다 . 주님 민중입니다
옥좌나 왕관이 아니고 사람입니다!

하나님 민중을 건집소셔 당신 것입니다.
당신의 천사같이 아름다운 당신 외 아들
죄악에서 압박에서 절망에서
하나님이여 민중을 건집소셔!

함석헌 미발표 유고시 (1947년 월남 직후로 추정)
*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는 우리 역사의 주인공으로 씨(67회), 민중(160회), 국민(70회), 백성(30회) 기타 인민, 평민, 시민, 민, 민심 등의 단어가 사용되었다.


<본론; 뜻으로 본 한국역사 깊이 읽기-씨알, 민중 단어의 사용례를 중심으로>

넷째 판에 붙이는 글
고난의 역사, 역사는 첫머리에서 나중 끝까지 고난인가, 역사가 고난이요 고난이 역사인가? 속만 아니라 겉까지도, 뜻만 아니라 그 나타내는 말까지도 고난이어야 하는 것인가? 이 씨의 역사를 나는 고난이라 하였고 그 고난의 모습을 그려보자는 것이 이 조그마한 책인데,....이제 와서 보면 내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이 말씀은 전쟁 중에 설어서 낳았던 임경업 모양으로 환난 속에 밴 그 임의 씨알이었다.(15쪽)
* 씨알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다.

제1부 새로 고쳐 쓰는 역사

2. 사관

뜻과 해석
얼마나 많은 역사가들이 공정한, 객관적인, 과학적인 역사를 쓰려다가 죽은 뼈다귀의 이름만을 적어놓고 말았나! 그것이 역사, 적어도 산 역사를 지어가는 씨이 살기 위해, 그 역사를 짓는 힘을 얻기 위해 읽고 싶어하는 역사는 아니다.....사실의 자세한 기록은 전문가의 일이다. 그들의 역사는 사실의 역사, 기술의 역사, 연구의 역사다. 그러나 씨은 그것보다도 해석의 역사, 뜻의 역사를 요구한다. 세계의 밑을 흐르고 있는 정신을 붙잡게 해주는, 어떤 분명한 주장을 가지는, 말씀을 가지는 역사를 요구한다. 그리고 전문가의 사명은 마지막에 한 권의 씨의 역사를 쓰는 데 있다. 바다같이 넓은 연구가 있어도, 산같이 쌓인 사료가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증으로 그 일이 다 되고, 보고로 그 보람이 다 되는 것같이 생각하는 역사가는 마치 식량을 곳간 안에 쌓아만 두는, 혹은 식품으로 요리하지 않은 그대로를 식탁 위에 가져오는 어리석은 요리사와 같다. 왜 그렇게 씨에 대해 무정한가? 요리사를 둔 것은 주인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닌가? 전문 역사가를 둔 것은 씨의 먹을 역사를 마련해주기 위하여서다. 한 권의 씨의 역사를 써낸 후에야 그의 책임은 다해지는 것이다. 역사가의 자격은 그 기억에 있지 않고 판단에 있다.(43쪽)

* 씨알은 세계의 밑을 흐르고 있는 정신을 붙잡게 해주는, 뜻의 역사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역사가의 사명은 마지막에 한 권의 씨알의 역사를 쓰는 데 있다.

제2부 올라오는 역사 내려가는 역사

10. 풀무 속의 삼국시대
뽑힌 세 후보
위대하려면 민중 전체를 잡아야 한다. 민중을 잡는 것은 정신이요, 뜻이다. 민중은 뜻을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뜻이 있는 것을 보면 몸도 마음도 다 바친다. 민중은 위대해지고 싶어하는 것이다. 위대함을 한번 보면 절대 숭배한다. 그리고 민중이 몸과 마음을 바치고 나서는 날, 못할 것이 무엇일까? 주몽이 위대한 것은 민중에게 뜻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요, 고구려가 위대한 것은 그 민중이 위대한 국민적 이상에 가슴이 부풀고 타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라고 하면 그저 싸움이나 잘하는 나라로만 생각하면 잘못이다.(161쪽)
* 민중은 뜻을 찾는 자들이요, 그러므로 뜻이 있는 것을 보면 몸도 마음도 다 바친다.

12. 궁예 * 왕건이 그린 나라

남아 있는 민중의 감정
첫 번째 밀물은 왕건이 나라를 세우던 때다. 신라 마지막에 정치의 썩음이 극도에 이르러 백성의 뜻은 풀어지고, 사회는 어지러움에 빠졌다. 그리하여 동양식 말로, 영웅이 한번 나설 때였다. 그것은 곧 다른 말이 아니고 민중의 가슴이 새 시대를 기다려 설렌다는 말이다. 밀물 때라니 다른 것 아니요, 민중의 가슴이 스스로 깨려고 흥분이 되어감을 말하는 것이다. 영웅이 출마한다고 하지만 말을 타는 것이 아니라 민중을 타야, 민중의 가슴속 설레는 감정의 물결을 잡아타야만 정말 영웅이다.....한때는 속여도 역사는 못 속인다. 개인은 속여도 민중은 못 속인다. 속이고 억지로 하였던 일은 언제 가서든 뜯어고치고야 마는 것이 역사다. 후백제, 후고구려 하는 것은 민중을 잡아타는 한 수단이다. 민중의 가슴속에 아직 망한 나라의 원한이 깃들여 있는 것을 알므로 그것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감정은 남아 있어도 민중의 살림은 이제는 하나다......그럼 역사의 갈 길을 결정하는 것은 감정이냐? 실제 살림이냐? 민중은 나중에는 실살림의 욕구에 복종하고 마는 것이다. 이해관계가 일을 결정하고 만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민중은 이해에 따라 움직이지만, 또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당장 보면 그런 것 같지만, 정말 민중의 길을 결정하는 것은 뜻이다. 역사의 어려움은 민중의 이해와 감정이 일치되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 그것에 맞추어, 반대되는 두 다리가 앞으로 나아가듯, 민중으로 하여금 전진을 하게 하는 것은 뜻의 제시다. 그것을 해주는 것이 참 지도자요, 참 영웅이다......민중은 잘 흥분하지만 감정으로만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민중은 이해에 매달리지만 경제법칙으로만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민중은 사람이다. 뜻을 찾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뜻이 있음을 볼 때에는 현실과 관념이 갈라진 것을 합해 몸과 마음을 잊고 뜻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다. 그것이 혁명이요, 그것이 새 나라 세움이다.(187~188쪽)
* 민중은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지만, 정말 민중의 길을 결정하는 것은 뜻이다.

왕건의 큰 조선 생각
그것은 그때 일반 민중의 생각이었다. 그랬으므로 왕건이 그것을 내세웠고 그만큼 민중을 알아주었으므로 민중을 따라감으로 그만큼이라도 성공한 것이다. 영웅은 다른 것이 아니요, 민중과 하나됨이다.....그러기에 국민이 자기를 잊었다 하지만, 예나 이제나 민중은 결코 자기를 잊지 않는다. 특권계급은 언제나 자기네 이익을 위하여 민중을 속여 압박자에게 팔고 자기네는 그 값으로 영화를 누리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 어느 시대나 민족을 파는 것은 권력계급이다. 민족을 팔지 않고 권력은 안 생긴다. 민중은 자기를 아니 팔기 때문에 권력이 없다. 언제나 권력은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을 팔 듯 민중을 속여 대적에게 팔고야만 생기는 것이다.(192~193쪽)
* 영웅은 다른 것이 아니요, 민중과 하나됨이다. 민중은 결코 자기를 잊지 않는다.

14. 고려자기 속에 숨은 빛

국민 이상의 죽음
국민적 이상이 죽은 다음 있을 것은 내란밖에 없다. 나라를 통일하는 것은 칼도 아니요, 법도 아니요, 이른바 인정(仁政)도 아니다. 민중은 언제나 비참한 존재요, 불평이 늘 있다. 아무리 법을 공평하게 하고 은혜를 고루 입힌다 하여도 천하의 입을 다 틀어막지는 못한다. 정말 민심을 하나로 하는 것은 어떤 위대한 국민적 이상을 주는 일이다. 사람은 의기에 느끼는 물건이라, 배부른 민중은 말을 아니 들어도 위대를 본 민중은 죽으면서도 나선다. 그러므로 국민적 이상, 민족적 사명, 세계사적 정신은 중요하다는 것이다.(212쪽)
* 민심을 하나로 하는 것은 위대한 국민적 이상을 주는 일이다.

16. 최영과 이성계
삼국 재조(再造)
한 번 이름이 높아지고 민중의 떠받듦이 있으면 아니 그렇던 마음도 흐려진다. 민중의 절함이 자기를 보고 한 것은 아니요, 자기 뒤에 서 있는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을 보고 한 것이건만, 거짓을 좋아하는 사탄은 언제나 그럴 때에는 "너다, 너다, 그 절을 받아라" 한다. 그럴 때야말로, "물러가라, 사탄아, 홀로 님, 너희 하나님을 섬기라 했느니라!" 하여야 하는 것인데, 그래야만 정말 민중의 대표자인데, 민중의 대표자라야만 하나님의 대표자인데, 그것이 참 어렵다.(234쪽)
* 민중의 대표자라야만 하나님의 대표자이다.

제3부 났느냐 났느냐 났느냐

18. 중축이 부러진 역사
덕 없이 세운 나라
씨알이란 언제나 공정한 비판을 한다. 가진 것도, 세력도 학문도 없으니 공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해의 달램에 속기 쉬우므로 역사상에 남은 민중의 행동은 공정치 못하고 잘못된 것이 많으나, 옳고 그르고의 판단만은 늘 바로 하기 때문에 그것이 전설로 내려온다. 전설은 역사도 아니요, 전기도 아니요, 반대다. 전설은 민중의 것이다. 소유도 지위도 없고, 다스림과 억누름만 받는 민중은 신화, 전설 없이는 못 산다. 저들은 혹은 사랑방에서, 혹은 느티나무 밑에서, 혹은 술집에서 떠들어대는 그 이야기 속에서 풀지 못하였던 분을 풀고, 뜻 두고 못 이루었던 소원을 이루어본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늘 참이 있다.....굴복한 것은 민중임에는 틀림없지만, 굴복 아니하고 전설을 만들어내는 것은 역사적 씨알이다. 그것이 장차 역사의 주인이 된다.(248~249쪽)
* 신화와 전설을 만들어내는 것은 역사의 주인인 민중, 씨이다.

19. 쓸데없어진 세종의 다스림
한글
가다가 이따금씩 이 하수도 같은 역사의 흐름 위에 연꽃 같은 마음들이 나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하늘이 하는 일이겠지. 씨알이 죽지 않는 증거겠지. 세종이 어질기도 하지만, 이것이 씨의 요구인 것을 어찌하나? 역사의 명령인 것을 어찌하나? 임금질을 하고 벼슬아치 노릇을 해먹으려면 이제는 민중을 가르치지 않고는 할 수가 없게끔 역사의 행진이 거기까지 온 것이다...... 정음을 지은 것은 민족 자각운동의 싹틈이다. 민중이 제 눈을 얻었다. 오천 년 역사를 가지는 민족이 지금부터 겨우 오백 년 전에 와서야 눈을 떴다는 것은, 자기 해방의 자분것을 얻었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얼마나 참혹하고 부끄러운 일인가? 그러면 이때까지는 소경의 역사 아닌가? 그러므로 고난의 역사다. 씨알은 어느 역사에서나 참혹한 존재지만, 이 씨알 같은 것이 어디 또 있느냐? 이것은 먹이를 아니 주고 짜먹는 염소다. 짜먹다 못해 피가 나왔다. 그래도 짜먹었다. 마지막에 죽는 날 가서야 잘못인 줄 알지만 그때는 짜먹던 놈, 저도 죽었다. 건축을 만드는 토대같이 그저 압박받는 것으로만 그 존재의 뜻을 다하는 것이 이 씨알이다....민중이 저를 알려면 자아를 들여다보아야 하며, 자아를 표현해야 하는데, 이날까지 그들은 자기를 들여다 볼 여유도 없었고, 따라서 자기 표현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오기를 4천 년이다. 길고 긴 세월이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왔다...... 탯집 속의 어린애가 자라서 열 달이 되면 모체의 압박을 느끼는 모양으로, 그리하여 발버둥을 치는 모양으로, 그리하여 그 어머니가 죽기로 악을 써 몰아내는 모양으로, 민중의 탄생도 그렇다. 이때까지 그 압박, 그 학대, 그 약탈, 그 짓밟음을 당하면서도 그런 줄도 모르고 자라난 민중이 이제는 그것을 느끼는 때가 왔고, 그것을 알아보고 싶은 때가 왔다. 이제 눈을 뜰 때가 왔다. 왜? 지금까지도 고난이지만 이 앞이야말로 정말 고난이다. 탯집 속의 답답함보다는 이 세상의 답답함이 정말 답답함이듯이, 그러므로 이제 본격적인 고난으로 들어가려는 이때에 그 수난이 무의미에 그치지 않기 위하여 제 수난의 꼴을 똑똑히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게 되었다.(257~258쪽)
* 민중의 탄생, 민족적 자각운동의 싹틈, 자아에 눈을 뜨다.

26. 첫 번째 환난
하나님이 보낸 사람
나는 그를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 믿으므로 그를 생각하며 감격의 눈물을 못 금한다. 그는 하나님이 이 백성을 위하여, 이 망할 민족, 이 짓밟힌 씨을 살리기 위하여 세운 사람이었다. 전쟁의 더러운 진흙 위에 우연히 떨어진 한 송이 연꽃이 아니요, 깊고 깊은 그 진창 밑에 살아 있는 뿌리에서 나온 연꽃이었다. 그에게서 이 민족의 면목만 아니라, 그 사명이 구원되었고, 그로 인하여 이 씨의 재지가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양심이 드러난 것이다. 더구나 그의 마지막을 보고 우리는 그가 하나님이 세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층 더 가지게 된다.(313~314쪽)
* 이순신은 이 땅의 짓밟힌 씨을 살리기 위해 깊고 깊은 그 진창 밑, 뿌리에서 나온 연꽃 같은 사람이다.

민중의 반항

여기 대하여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역시 씨알이었다. 마지막에 믿을 것은 씨알밖에는 없다. 대신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돌아가는데 씨알들은 맨주먹을 가지고 나라를 건지려는 운동을 일으켰다.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이다. 물론 의병이래야 빛나는 전적을 낼 수는 없고, 한갓 푸른 피를 거친 들 위에 쏟았을 뿐이다. 그러나 밟혀서 꿈틀거리는 버러지의 고민같이, 습격을 받으면 반드시 대적을 쏘고 죽는 꿀벌의 반항같이, 이것은 그들이 살았노라는, 살겠다는 생활의식, 생존권의 주장을 나타낸 것이라는 데서 의미가 크다. 몇백 년 두고 예의지방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에 팔려 쓸데없는 허식과 구구한 소절의 무거운 짐을 지느라 뻐가 빠지고 의기가 상실된 이 씨알도 이 강한 자극을 받고는, 혼수상태에서 의식을 회복하려는 중병인처럼, 한 소리 높이 부르짖은 것이다....씨알의 외침이다. 부딪치는 사나운 물결 속에 우뚝 서 있는 큰 바위같이, 이 어지러운 사회에서 그들은 밑에 있는 생명의 화산맥을 드러내는 것이다.(317~318쪽)
* 의병 운동-맨주먹 씨알의 생존권적 외침이었다.

30. 기독교의 들어옴
새 종교의 요구
한 시대가 새로워지려면 결국 기적이 일어나야만 한다. 기적을 행하는 것은 외물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하는 정신만이다. 그러므로 결국 종교 문제다. 유럽의 신생운동이 종교 혁신에 이르러 가지고야 참 신생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의 종교는 어떠하였느냐 하면 불교에서도 유교에서도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제 깬다는 것은 씨이 깨는 것이므로 요구되는 것은 씨의 종교다. 그런데 유교도 불교도 다 씨의 종교는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완전히 씨을 떠나 특권층의 것이 되어버렸고, 그 특권층과 함께 썩었으므로 도저히 씨의 가슴을 흔들 힘이 없었다. 씨이 구하는 것은 곧 새 양심이다. 두 종교가 다 특권층에 붙음으로써 씨의 양심을 마비시켜 버렸다. 그러므로 그때의 형식으로 굳어진 유교 교리나 고루한 선비의 유교 사상을 가지고는 아무리 뒤집고 고쳐보아도 씨을 흔드는 새것은 나올 수 없었다.....무슨 논(論), 무슨 설이 아니라 씨의 가슴에 한 가지로 드나드는 새 신념, 새 원기, 새 생명이 필요한데 그것을 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새벽 공기가 밖으로부터 들어와 온 집안 사람을 불러일으켜 새날의 활동을 시작시키듯이 어디선가 새 종교가 와야 하였다. 단군조선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 숭배의 옛 종교로였다. 기자조선이 일어난 것은 새로 들어온 유교로였다. 삼국시대 문화는 불교로였다. 이제 이 모든 종교가 다 썩어버렸다. 씨을 건질 새 종교는 그럼 어디서 올까?(357~358쪽)
* 씨알의 가슴에 새 신념, 새 원기, 새 생명을 넣어 줄 새 종교는 시대적 요구다.

31. 다시 거꾸러짐
지친 민족
정치가 비교적 바로되는 사회면 이 중류계급이 발달하고, 학정이 심하면 그것이 없어지고 따라서 민중이 극도로 피폐에 빠져 나라가 온통 망하게 된다.... 같은 동양의 옛 사회로서 일본은 새 문명을 받아 혁명하는 데 성공을 하고 우리는 못하여 망구의 슬픔을 당하게 된 것은, 그들은 덕천막부 3백 년에 튼튼한 중산계급을 발달시킬 수 있었고, 우리는 임진, 병자 두 난리에 나라가 여지없이 파괴를 당하였는데, 지배자인 양반계급이 조금도 그것을 거름 주어 북돋아 줄 생각은 아니하고 짜먹기만 했기 때문에 그만 사회의 근본 밑힘이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허탈해진 민중은 반항조차도 못한다. 그러나 민중이 그렇게 되면 그것을 짜 먹고 살던 지배계급도 망하고야 만다....그랬기 때문에 옛날 지사라던 사람들도 다 넘어가고, 지도자라는 사람들도 다 타협하고, 지식인도 다 팔려버리고 말았다. 교육자는 학생을 보고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고 아는 거짓말을 하고, 종교가는 교인들을 보고 일본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짐짓 짓는 죄로 인도하고 있었다. 순 조선대로 남아 견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식하고 못난 씨이었다.(384~385쪽)
* 순 조선대로 남아 견딘 것은 무식하고 못난 씨이었다.

32. 해방
도둑같이 온 해방
만일 그들이 그렇게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 시대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었다면, 왜 8월 14일까지 그렇게도 겸손하게 복종을 하고 있었던가? 그때에 한 마디라도 미리 말하여 민중을 위로하고 용기를 가다듬어 준 것이 있다면 이제 와서 새삼스러이 선전을 하지 않아도 민중이 지도자로 모셨을 것이다....이 해방은 우리가 자고 있을 때, 도둑같이 왔다. 도둑같이 왔으면 주인 없는 해방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은 씨의 것이다.(394~395쪽)
* 8.15해방의 주인은 당연히 이 땅의 씨의 것이다.

하늘이 준 떡
루즈벨트와 스탈린이 밀담을 해서 작정하게 한 것은 낡은 것의 간섭 방해를 피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그 밀회에 참여한 사람이 없는 한 아무도 관계된 자는 없다. 관계된 자가 있다면 이따가 그것을 받을 주인인 씨뿐이다. 가난하고 무지한 민중이다. 가난한 까닭에 세력이 없고, 세력이 없어 학문도 못하였고 출세도 못하였고, 마음이 못생긴 까닭에 일본 국민 노릇도 못하였고, 변할 줄도 전향할 줄도 몰랐고, 외국으로 도망갈 용기도 없고, 시세를 맞추는 재주도 없어서, 큰 뜻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한국을 못 놓았고, 타고난 그대로 한국 버릇을 못 놓고 한국 땅을 못 떠나고 한국 냄새를 못 버리고 한국 마음을 못 잊고, 한국의 고난과 욕을 못 피하고, 죽어도 한국의 흙으로 죽을 수 밖에 없다 하고 있었던 그 씨이다. 만일 그들이 아니었다면 그들을 통해 '한국'이란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해방이 가 붙을 곳이 없지 않은가?...가난하지만 가난하니 땅에 붙고 하늘만 바라보는 것이요, 무지하지만 무지하니 살아 있는 것이다. 살아 하늘만 바라는 민, 씨이 있으니 정치요 국가요 자리요 감투지, 그 하나만 없으면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보면 36년간 지켰다면 이 스스로 지키는 줄 모르고 지킨 이 씨만이 지킨 것이요, 싸웠다면 그 그저 죽지 못해 견뎌온 씨만이 싸워온 것이다. 누가 감히 지도를 했노라고 그 공과 덕을 횡령할 놈이 없지 않은가? 하나님이 그것을 하시기 때문에, 혹 다른 말로 하면, 역사의 사실이 그렇기 때문에, 그 공과 덕을 아무 데도 빼앗기지 않게 하려고 비밀리에 꾸며, 마른하늘에 벼락같이 씨의 머리위에 직접 떨어진 것이다.....그런데 이제 그 해방은 우리가 투쟁한 결과라 하여 씨은 정말 끝까지 무지 가난한 것으로 대접하고, 받았던 선물을 그 손에서 빼앗으니 이 데모크라시 시대라는 이 시대에 이것이 무슨 일인가? 이런 어리석은, 이런 통분한, 이런 무섭고 치떨리는 일이 어디 있을까?(396~397쪽)
* 민, 민중, 씨알의 해방이 강탈당하다.

감사 * 감격
왜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을까? 그 까닭 중 하나는 위에서 말한 대로 진정한 씨의 해방이 되기
위해서다. 그 다음의 또 하나는 씨의 마음이 하나님에게로 향하기 위해서다....공정하게 사실을 사실로 보는 한 이것을 인적 노력에 돌릴 수 없고 부득이 하늘에 돌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해야만 아무도 그 고역을 치르고 나오는 민중을 속일 수 없고, 따라서 그들이 오는 시대의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때 민중의 마음에서 나올 것은 감사밖에 없다. 이 감사의 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인생의 첫걸음이다.(399~400쪽)
* 해방이 하늘에서 떨어진 이유는 진정한 씨의 해방이 되기 위해서다. 또 하나는 씨의 마음이 하나님에게로 향하기 위해서다.

사상의 빈곤
그러나 새 나라를 맡아놓고 가장 큰 불행은 정신의 혼란, 사상의 빈곤이었다. 이 민중, 이 무지하고 무질서하고 무조직하고 무표정하고 무산(無産)인 민중이 나라를 세워야 한다. 역사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반드시 있어야 할 것은 민중의 혼을 깨우쳐야 할 것이다. 해방이 될 때에 신랑을 맞는 신부 모양으로, 그 민중의 정신적 준비가 되어 있도록 했어야 할 것이다. 고유한 종교가 하려다 못하고, 유교가 하려다 못하고, 불교가 하려다 못한 것을 이제 (기독교가) 책임배턴을 쥐었으면 그들을 위해서라도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다 살아난다. 그런데 못하지 않았나?(408, 410~411쪽)
* 기독교도 민중의 혼을 깨우지 못했다.

33. 6 . 25
하나님의 시험문제
그것을 보자고 쪼갠 금이다 38선은 민족의 가슴을 쪼갠 금이다. 씨이 여물었느냐? 또 깍지만이냐? 떨리는 하나님은 손으로 쪼겠다.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 이남에 들어온 미군, 그 손에 든 소총, 기관총, 폭탄, 비행기가 그 무어냐? 하나님의 떨리는 손 아니냐? 속에 씨이 여물었으면 하나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이다. 못 영글었으면 두 개의 죽은 깍지다.(427쪽)
* 38선은 민족의 가슴을 쪼갠 금이다.

새 국민의 걸음
씨알이 깨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정권, 자유당, 4.19, 5.16, 거듭거듭 파란이 쉬지 않으나 그 가운데서도 빙하의 걸음처럼 느리기는 하지마는, 자라고 있는 것은 씨이다. 그런 파란 그 자체가 민중이 깨는 증거다. 그 과정에서 6.25는 큰 한 걸음이다....큰 눈으로 넘겨보면... 씨은 나아가고 있다. 조금 있으면 그런 낡은 시대의 찌끼들은 다 없어지고 말 것이다....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전쟁을 아니 하여야 하지만 설혹 이제 6.25보다 더 참혹한 전쟁이 난다 하여도 씨은 결코 밑지지는 않을 것이다. 망하는 것은 특권사상의 벼슬아치, 군인, 재벌일 것이다. 이렇듯이, 아기가 앓으면서도 자라고 있듯이, 실패는 하면서도 새 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민족은 아직 더 고난은 당할는지 모른다. 더 많이 당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역사의 무대에서 쫓겨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죽지 않을 자신만은 생겼다. 그것이 6.25가 끼치고 간 첫 번째 선물이다.(429~430쪽)
* 씨알의 깸, 자람, 나아감-6.25가 끼치고 간 첫 번째 선물이다.

제4부 고난에 뜻이 있다

36. 역사가 지시하는 우리의 사명
진리인의 지위
생존경쟁 철학 위에 서는 애국심은 이 앞의 세계에서는 배척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땅을 사랑함은 이른바 조국애에서가 아니다. 여기를 묵이고는 하늘나라를 임하게 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민중을 사랑함은 이른바 동포애에서가 아니다. 이 사람들을 내놓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을 잊고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백성이 제 노릇을 하여야 한다는 것은 생존권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주장이다. 한민족이 못사는 것은 온 우주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슬픔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심장 위에 이 진리의 무장이 완비되는 날 저는 새 시대의 용사다.(485쪽)
* 우리가 이 땅을 사랑함은 이른바 조국애, 동포애가 아니다. 한민족이 못사는 것은 온 우주의 아픔이요, 하나님의 슬픔이다.

37. 역사가 주는 교훈
지성의 미래
현대는 스스로 자기를 아는, 알려는 주체성을 가진 씨의 시대다. 그러므로 힘의 숭배만으로 안될 것은 뻔하다. 옛날같이 단순한 사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능(能)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 능(能)은 개인의 능이 아니라 대중의 능, 전체의 능이다. 천재가 독재를 하는 시대는 영원히 지나가고 말았다. 역사를 잘못 읽어서는 아니 된다. 중인(衆人)의 능, 전체의 능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식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로서 능보다 더 필요한 자격은 지성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먼저 필요한 것은 덕이다. 덕은 무엇이냐? 자기 속에서 전체를 체험하는 일이다....칼을 꺽고 생각을 깊이하자.(495~496쪽)
* 현대는 스스로 자기를 알고, 알려는 주체성을 가진 지성의 시대, 전체의 시대, 다중의 시대, 덕의 시대, 생각의 시대 한 마디로, 씨알의 시대다.

<나가는 글; 함석헌 민중론의 정수-역사의 행렬과 깃발 그리고 바닥 >
씨알이 나라 일에 참견을 한다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고, 실행하는 힘이 없고, 밤낮 죄만 되풀이 되풀이 짓고 있는 백성이 역사 짓는 데 의견을 말한다면, 이날껏 귀족주의에 닦이운, 대웅전 막새 위의 청기왓장 같은 양반 눈에는 시대의 타락으로만 뵐 것이다. 보수주의자의 눈엔 세상은 언제나 말세같이만 뵈는 법이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말세라고 탄식은 하면서도 영광의 옛날을 위해 순교는 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얻어먹으며 따라는 온다. 따라오면 또 같이 살아 주는 것이 민중이다. 민중은 말 때문에, 의견 때문에 사람을 버리지는 않는다. 말이야 무슨 말을 하거나, 생각이야 무슨 생각을 가졌거나 그것 때문에 같이 살지 못할 것은 없다는 것이 민중의 맘씨다. 말과 생각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고 죽이는 것은 학자 사상가 도덕가 특히 정치가다. 그들은 힘써 이름을 내세우고 명분을 주장하지만, 사실 그들이야말로 염치없다. 더럽다, 타락이다, 업신여기면서도 그 손에서 얻어먹고 그 행렬에 끼여 가지 않나? 말은 지도라 하지만 사실은 따라가는 것이다. 정치가가 민중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민중이 나라를 이끌어 간다.
* 정치가, 엘리트가 민중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모든 이름은 다 깃발이다. 깃발을 메는 것은 민중이요, 지도자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떤 행진에서도 깃발은 언제나 나가는 방향과 반대로 나부끼는 법이다. 민중은 깃발을 메고 나갈 뿐이요 바라고 가는 것은 아니다. 거기 무슨 글자를 썼거나 어디로 나부끼거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저 지도자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깃발이 문제기 때문에 역사의 행렬을 거꾸로 타고 앉아 있다. 그래 밤낮 잘못으로만, 반항으로만 뵈는 것이다.
* 민중은 명분과 주의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것이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저 지도자라는 사람들이다.

민중은 사회의 바닥이다. 바닥이므로 타락이요 고상이요 따로 있을 여지가 없다. 타락인 줄 알지도 못하는 것이 민중이다. 구더기를 더럽다지만 더러운 것은 구더기가 아니다. 저는 속에서 똥을 내보내면서 구더기더러 똥 속에 있다고 더럽다는 사람 저 자신이 더러운 것이지, 민중은 고를 줄도 갈 줄도 모른다. 바다 같은 것이 민중이다. 지금은 그 민중이 말을 하는 때다. 바다에 놀이 일어나 제 음악을 하는데 잘한다 못한다 할 놈이 누구냐? 이 스스로 하는 음악엔 악리(樂理)도 악보(樂譜)도 지휘도 평론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이 갈잎 하나 고이고이 띄워 간다기로서 어찌 선(善)이냐? 또 나라 하나를 온통 삼켰다기로서 어찌 악(惡)이냐? 네가 왜 민중의 바다로 더불어 하나 되지 못하느냐? 네 노래란 것이 본래 그 바다에서 배운 것임을 왜 모르느냐? 야무진 네 생명이란, 사실은 무명겁풍(無明劫風)에 불려, 하나님의 입김에 불려, 그 바다에서 떨어져 그 위에 뜬 한 방울 물뿐이요, 그 속에 이어나는 가지가지 생각이란 미묘한 광선의 굴절로 그 구면(球面)에 비치는 억만 물결과 그 소리뿐이다. 차별이 무슨 차별이요 비판이 무슨 비판이냐?
* 민중은 사회의 바닥이다. 지금은 그 민중이 말을 하는 때다. 그러므로 차별이 무슨 차별이요 비판이 무슨 비판이냐는 것이다.

-함석헌 전집 2권 <새나라 꿈틀거림> 중에서-

민중이 뭐냐? 씨알이 뭐냐? 곧 나다. 나대로 있는 사람이다. 모든 옷을 벗은 사람 곧 알 사람이다. 은 실(實), 참, real이다. 임금도 대통령도 장관도 학자도 목사도 신부도 군인도 관리도 문사도 장사꾼도 죄수도 다 알은 아니다. 실재는 아니다. 그런 것 우주 간에 없다. 그것은 다 허망한 욕심의 만신당(萬神堂) 속에 있는 우상들이다. 이것들은 그 입은 옷으로 인하여 서 있는 것들이다. 정말 있는 것은 알이며 알은 한 알뿐이다. 그것이 알 혹은 얼이다. 그 한 알이 이 끝에서는 나로 알려져 있고 저 끝에선 하나님, 하늘, 브라만으로 알려져 있다.... 민이란 곧 그러한 모든 우연적·일시적인 제한, 꾸밈을 벗고 바탈대로 있는 인격이다. 옷으로 말미암아 즉 밖에서 오는 것을 덧붙임으로 말미암아 있던 모든 우상들은 없어지고야 마는 날이 와도 이 알 사람, 알 생명은 없어지는 날이 없다. 알 사람 곧 난 대로 있는 ‘나’는 한 사람만 있어도 전체다. 그것이 민이다.
* 민중, 씨알, 민은 나대로 있는 사람, 모든 옷을 벗은 맨 사람, 바탈대로 있는 참 인격이다.
-함석헌 전집 4권 <씨알의 설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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