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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새 씨알학당’ 부산 인문학강좌 3강
글쓴이 : 바보새 날짜 : 2012-07-04 (수) 16:06 조회 : 2421

‘바보새 씨알학당’ 부산 인문학강좌 3강

6월 28일 -3강: <한국역사>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썼는가? 
                     김성수 『함석헌평전』 저자

33.12.31-34.1.4 강연 / 34.2-35.12 『성서조선』 연재
사실은 나보다는 큰 객관적인 존재요, 나는 사실보다는 참된 주관적 삶이다.
그 둘이 하나가 되어야 살림이다. 그것을 하는 것이 사색(생각)이다. p.30

자아(나)에 철저하지 못한 믿음은 돌짝밭에 떨어진 씨요, 역사의 이해 없는 믿음은 가시덤불에 난 곡식이다. p.31

나는 나다 하면서도 또 자기를 의미(보람) 있는 전체 속에서 발견하고야 안심입명을 하지, 그렇지 않고는 못 산다. p.32

석가요ㅡ 예수요 하는 위대한 종교의 스승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그때의 제도를 전적으로 깨뜨리고 나서는 혁명가들이었다... 위대한 전도자로서 역사에 대해 무관심 했던 사람은 없다. 그들은 다 시대의 부르짖음을 듣고 일어나는 산 혼들이다. p.37

보통말로(객관) 하면 역사요, 종교적인 말로(주관) 하면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 역사의 아들이라 하나 다른 말이 아니다. pp.37-38

사명은 진리를 현대 속에 살리는데 있다. 진리의 주장을 날카로운 역사비판으로 시작하여야 한다. 그것을 위하여 깊은 역사 지식을 가져야 한다. p.38

주관의 렌즈를 통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실이란 없다. p.42

씨알은 해석의 역사, 뜻의 역사를 요구한다. 한권의 씨알의 역사를 써낸 후에야 그의 책임은 다해지는 것이다.(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에 대항하여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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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페인(1737-1809)은 Common Sense『상식』을 통해 미국 식민지인들이 당시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 할 것인지의 여부가 결정되기 전 미국 독립의 강력한 이론적 정당성, 정신적 확신, 논리적 불가피성의 근거를 제공해 주고 식민지 미국인들의 시기진작. 1776년 7월 4일의 <미국독립선언문>은 『상식』에서 페인이 주장한 내용을 대부분 수용. 『상식』은 미국 독립을 촉발시켰을 뿐만 아니라 세계 민주주의의 주요 문헌이 됨. 어려운 철학적 표현이나 이해하기 힘든 라틴어 문구를 인용하지 않고 일반 씨알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는 페인의 쉬운 문체가 식민지 미국인들의 독립의식과 궁극적 독립에 막대한 공헌. 당시 다른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라틴어와 철학 등을 이용해 어려운 글쓰기를 한 것과 대조적. Paine은 씨알을 설득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성경을 많이 인용.

- 함석헌도 성경을 비유로 <한국역사> 집필. 함석헌 추종자도 어려운 문자나 개념보다는 쉬운 글과 말로서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 예수역시 문맹자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쉽고 평이한 말로 씨알들과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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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목적이 옳을 뿐 아니라 수단도 옳아야 한다. 성경은 인간을 역사에 대한 도덕적 책임자로 본다. 사람에게는 자기가 원하고 원치 않고 간에 도덕적 책임이 지워졌다. pp.60-61

사람을 도덕적 책임자로 봄으로 역사가 도덕적인 의미 활동으로 된다. 그저 문화의 발달이 아니라 도덕적 발달이다. 그저 진화가 아니라 도덕적 향상이다. 성경으로 인하여 우리는 역사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진다. 이 나라를 도덕적으로 향상시킬 책임을 진다. p.63 - 그래서 나는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을 반대한다.

나를 잃어버린 죄. 자기를 잃어버리고(자아상실) 찾으려(자아발견-완성) 하지 않은 것. 바로 이것 때문에 실패다. => 삼국시대, 고려, 조선의 실패. p.183

모든 것이 내개, 자기에게. 불교도 유교도 그 나 찾음을 가르친 것이다. 나 하나(독립, 통일)를 잃어버리면 모든 귀한 이, 어진 이의 말도 거짓이 될 뿐이다. 우리 고난의 역사의 근본원인은 나를 깊이 파지 않은데 있다. p.185

정말 민심을 하나로 하는 것은 어떤 위대한 국민적 이상을 주는 일이다. p.212

무엇 때문에 수난인가? 그 잃어버린 정신 때문이다. 수레의 가장 중요한 것이 축이듯이, 역사에 가장 요긴한 것도 민족정신이요, 국민이상이다. 역사도 정신이 빠지면 아무리 정치를 하고 모든 문화 활동을 하여도 어지러울 뿐이다. 그러므로 수난이다. p.247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이 자아를 잃어버렸다는 일, 자기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이 일리 백가지 병, 백가지 폐해의 근본원인이 된다. 나를 잊었기 때문에 이상이 없고 자유가 없다. 민족적 큰 이상이 없기 때문에 대동단결이 안 된다. p.297

독창적인 연구가 없어서...학문의 자기화를 몰랐다. p.348

한국(자기)을 연구한다 함은 죽은 과거의 고분을 캐는 고고학이 아니다. 한국의 개성을 앎이요, 그 개성을 가지고 자라나는 역사의 현재에 대하여 가지는 사명을 깨달음이다. pp.355-356

본래 우리의 잘못은 자유(민주주주의)와 (남북)통일을 모른데 있다.
자기를 깊이 파지 않은 데 있다. p.426

속에 씨알이 여물었으면 하나(통일)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이다.
못 영글었으면 두 개의 죽은 깍지다(분단). p.427

죄가 무슨 죄냐? 나를 버린 것이 죄요, 뜻을 찾지 않은 것이 죄다. 나를 버린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요, 뜻을 찾지 않은 것이 생명을 찾지 않은 것이다. 자아에 충실하게 하기 위하여 이보다 더 심한 고난이라도 받아야 한다. 우리의 바탈(자아)을 드러내기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 굳센 의지가 자아가 되고 고결한 혼을 다듬어내기 위하여 불같은 고난이 필요하다. p.465

위대한 문명의 창시자인 애굽은 왜 멸망하였나? 다시 더할 수 없이 힘이 세던 로마는 왜 망해 없어졌나? 그 사명을 잃었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마음이 사명감을 잃어버리면 망하고 만다. 반대로 아직도 바라는 이상이 있고, 자부하는 사명이 있으면 결코 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명의 자각이야말로 재생의 원동력이다. p.472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은 뒤집어 놓으면 자기를 아는 것이 지식, 지혜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아 속에 계시기 때문이다. p.487

하나님은 영원한 자기발전, 자기교육이라 할 수 있다.
역사는 곧 민족의 자기교육이다. p.488

자기를 잊은 반항은 망하는 반항이다.
자기를 잊은 힘은 짐승의 힘이지 사람의 힘이 아니다. p.494

앞으로의 역사는 점점 더 지성(정신, 도덕)의 역사가 될 것이다.
칼을 꺽고 생각을 깊이하자. p.496

나를 찾음(독립/통일/지역분열의 일치)

『성서조선』 중에서

33.12.31 저녁 7시부터 함석헌 씨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제 1강. 역사 이해, 사관과 성서적 사관, 세계사의 윤곽 등 제항에 걸쳐 만 3시간의 연속 강연이었으나 강사와 청중이 모두 일순간을 보낸 것처럼 시간의 흐름을 애석하였다. 조선역사 반만년에 역사도 길었거니와 사가도 많았다. 마는 조선 역사 반만년에 사관을 준 이가 없었다. 이날에 ‘전인미답(全人未踏)’의 영역에 일보를 내디디어 반만년사의 사관을 제시하였건만 2천만 중에 이것을 들은 자 20명 미만이고, 이것을 읽을자 200인 에 미급하니 무슨 췌언(贅言, 쓸데없는 군더더기 말)을 첨서 할 필요가 있으랴. 오직 일이 기이함을 심비(心碑)에 명기할 뿐이었다.

34.1.1. 오후 7시부터 조선역사의 제 2강으로 단군사에서 신라통일까지의 대강을 듣다. 고구려의 말년이 마치 장년의 졸도와 같은 비장한 전사였다는 장에 이르러서는 졸부라도 주먹에 땀을 쥐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학교로부터 20년 가까운 교육을 받았어도 1시간의 조선사를 배울 수 없었던 신세를 한하여 왔으나 이제 조선 제일의 조선사. 따라서 세계 제일의 조선역사 강좌에 참석할 수 있는 기운을 두려움으로써 감사하다. 조선을 이렇게 보는 자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 까닭이다.

.....기독교의 빛이 반도를 비춘지 반세기에 비로소 반도의 진상을 드러냈도다. 반만년에 감추어 있던 오의(奧義: 깊은 뜻)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사론(史論)은 어찌 했든지 성서에 비추어 볼 때에 반도의 반만년사라는 것이 전 세계와 또 전 우주적 상관에 있어서 이렇게도 의의가 있구나. 이렇게도 줄기가 있구나 하는 것을 밝히 깨닫게 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34.1.2. 오후 7시 조선사 3강. 단종애사의 일절(자규시, 子規詩: 단종이 유배된 자신의 처지를 소쩍새<자규, 두견>에 빗대어 읊은 노래)

一自冤禽出帝宮(일자원금출제궁) : 스스로 원한 맺힌 새가 되어 궁궐을 떠난 후
孤身隻影碧山中(고신척영벽산중) : 몸은 푸른 산중 외 그림자 되었다
假眠夜夜眠無假(가면야야면무가) : 밤마다 선잠이고, 잠자려 해도 선잠도 못 이루고
窮恨年年恨不窮(궁한년년한불궁) : 해마다 한을 삭이려도 한은 끝이 없구나
聲斷曉岑殘月白(성단효잠잔월백) : 두견새소리 멎었는데, 새벽봉우리에 잔월은 희고
血流春谷落花紅(혈류춘곡낙화홍) : 피 흐른 봄 골짜기엔 붉은 꽃잎 떨어진다
天聾尙未聞哀訴(천롱상미문애소) : 하늘은 귀 먹어 내 슬픈 하소연을 듣지 못하고
何奈愁人耳獨聰(하나수인이독총) : 어찌하여 시름 많은 사람만이 귀로 홀로 들어야 하나
이라는데 이르러 하늘이 상금(尙今, 이제까지) 애소(哀訴)를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벌써 들은 것이라. 이조 500년의 고난사는 그 증거라고 들을 때에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의 일생도 그렇거니와 나라의 역사는 어길 수 없이 하나님의 심판의 기록이다.

34.1.3. 밤 9시 20분부터 함석헌씨의 조선역사 결론을 듣다. 고난의 역사를 걸머진 조선 백성에게도 조선 및 세계사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 무겁게 지고 가는 짐에도 의의가 있고 그 짐을 잘지고 참아가는 중에 백성은 정화되고 사람은 생각하는 자가 되어서 깊이와 무게를 가하게 되면 예전 조상들의 특색이었던 ‘인(仁)’ 에 의하여 나중 영원한 문 앞에 서는 나사로가 될 것을 지시 받아 우리의 위로와 소망이 적지 않았다. 우리의 소원으로 말하라면 이번 4회에 걸쳐 들은 조선역사의 정수를 액화하여 이 약으로써 2천 3백대의 주사를 놓아주었으면 고갈하였던 초목이 회춘의 영을 누리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은 기쁨을 이 강산 위에 볼 것이다.

34.1.5. 지방 독자로부터 집회(함석헌 역사 강의 관련)의 상세한 기록을 보고하기를 요청함이 간절..... 함석헌씨의 조선역사... 친필로 된 원고를 금월 호부터 연속 게재하기로....

34.5.17 목포 독자 “함석헌 선생의 조선역사는 더욱 새 진리의 세계로 끌어감을 느끼나이다.” ‘함선생의 조선역사를 그 진가대로 참으로 인식함은 필경 후대 사함들의 임무인가 싶다... 만일 기독교 전래 50년 만에 기독교적 견지에서 본 조선역사를 쓴 사람이 출현치 않았다면 그는 얼마나 적적한 일이었을까.’

34.10.21 함선생의 조선역사를 읽고 평하는 이의 말에 ”그것은 문사의 필체로 된 글도 아니요, 또한 소위 사가의 사료를 안배 한 문서도 아니요, 실상 현대문으로 쓰인 예언서 이니라“라고. 필경 가장깊이 음미한 이의 고백일 것이다.

34.10.22 본 호 함선생의 조선역사가 8면에 달하므로 지시대로 2회에 분재할까 하였으나 끊으면 피가 나올 듯하여 3분의 1의 지면을 그대로 드리었고...

34.12.16 중학 시대에 공산주의 학생의 두령으로 지목받아 이 학교 저 학교로 쫓겨 다니던 청년으로부터 ”함석헌씨의 조선역사는 일찍 학교시대에는 듣지도 못한 새로운 취미를 끄집어내고야 맙니다. 계속하여 읽어 보았으면 합니다.“ 함선생의 조선역사가 ‘일찍 학교 시대에는 듣지도 못하던 것이라’ 고 함은 허심 평탄한 마음을 소유한 조선인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간취(看取, 보아서 알아차리게)되어야 할 일이다. 오직 교파심에 경화된 마음만이 진주를 보아도 돌덩이라고 멸시 할 뿐이다.

34.12.29 인천에서(부득이한 사정으로 집회 중도에 퇴거한 형제) “제일 저의 기억에 아직 사라지지 않는 것은 함선생님의 역사 뒷자리에는 생명의 주님께서 앉으신 것을 극히 평화로운 안색으로 증거 하시는 광경이외다.”

35.1.4 “대학강의를 하는 데가 대학이라면 오류동 일주간은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최적 최고의 역사학 강좌였다. 작년에 저와 같은 조선역사를 배웠고, 이번에 이와 같은 세계역사를 들었으니, 우리가 두려워함을 금치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각기 재간대로 금 다섯 냥, 두 냥, 한 냥을 주신 주께서 후일에 돌아와 임치하였던 것을 찾으실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우주역사의 운행에 관하여 이처럼 명료한 의의를 중명 받은 후에도 오히려 타면(惰眠, 게으름을 피우며 잠만 잠)을 탐할진대 저는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인 까닭이다.

35.3.10 오후에 함석헌형의 원고(수난의 500년<2>)를 받아 읽고 울다. 함형 엽서에 가로되 “평안하십니까. 잡지는 늘 그렇게 말썽이 많아서 염려됩니다. 내일 원고 오늘 발송하였습니다. 이번은 참 신고(辛苦, 어려운 일을 당하여 몹시 애쓰고 고생함)하였습니다. 이번 시대가 시대니 만큼 1개월을 두고 쓴 것이 겨우 그것입니다 .고쳐 시작하기를 아마 20차례나 하여서 되었는데 다 써놓고 보니 맘에 매우 아니 듭니다. 수사(修史, 역사를 엮고 가다듬음)의 일이 어려움을 점점 느낍니다. 왜 시작 했던고 하는 생각이 납니다.”

35.3.31 전남 우수영 단신에 “함선생님의 조선역사는 ‘마침내 어찌 될 것 인고’ 하고 호를 기다리던 저에게 3월호에서 요동 없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아아, 변할 수 없는 섭리를 보여 준 예언입니다.”

35.4.5 천만의외에 소위 위험사상을 가졌다는 청년으로부터. “성조지는 반갑게 받아 ‘역사’공부를 합니다. 「수난의 500」을 읽고 의인의 피 흔적을 슬퍼하는 동시에 의분강개의 주먹이 쥐어지는 것은 어디다 내 던질는지.”

35.4.24 “함선생님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에서 깨치고 얻은 것이 많사오며...”

35.5.30 인쇄소에 가서 교정. 함형의 조선역사 수난의 500년(제4회 임진란이 부분)을 교정하면서 자주 눈물을 씻으니, 인탁(隣卓, 옆자리)에서 교정하는 이들이 나를 기이히 보는 모양이나 할 수 없다. 의주까지 피난하면서도 동인 서인의 당쟁만 일삼고, 하나님이 주신 시련의 찬스를 헛되게 유실한 우리조상들의 뿌리 깊은 죄악을 책망 받음은 나의 아침에 지은 죄를 저녁에 견책함과 추호도 다른 것이 없다. 이 망한 백성의 병원(病原)을 깊이 타진하여 그 뇌척수에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투사하려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가있게 된 것이요, 이 강한 빛에 비추어 알고 보니 눈물이다. 출판 허가되는 시각으로 인쇄하기를 부탁하고서 발송하는 날에 지우의 기쁨이 클 것을 상상하면서 활인동으로 향하다.

35.6.6 용산경찰서로부터 성서조선지에 연재하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필자인 함석헌 씨의 주소를 가리키라고 전화 있었다.

35.6.17 성조 77호를 다시 편집하여 제출하다. 조선역사는 제목도 둘 수 없이 된 까닭이다.

35.6.19 함형 단신 여하. “글월 지금 받자왔습니다. 평강을 빕니다. 역사가 불게재되는것 무엇이 불온하다는지요. 혹 들으셨으면 가급 자세히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금후 그처럼 어려울 형편이면 조선역사 내기를 중지함이 좋겠습니다. 그것을 희생하고라도 성조는 서야하겠습니다. 이번 호분도 오늘 발송은 하였는데 보시고 조금이라도 염려되는 점이 있으면 아예 그만두십시오. 금번도 횟수가 너무 길어지고 하여 가급 간단히 쓰려던 것이 임경업에 잡히어 턱없이 길어져서 ‘500년’은 마칠 예정이던 것이 그리되었습니다. 문구가 문제라면 얼마든지 고치겠으나, 사상이 문제라면 부득이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이기만 하면 주는 타 방법으로라도 하게 하시겠지요. 이만.”

35.8.3 영남소식에 “조선역사를 쓰시는 함선생님의 노력을 진심으로 치사불이(致詞不已, 치하해 마지않음) 하나이다. 참으로 우리독자에게 무상의 유익을 끼치고 계십니다. 나는 우리 함선생 위에 주의축복이 풍성하시옵기를 기구불이(祈求不已) 하나이다.”

35.8.5 함형단신에 “보내신 가쇄(假刷) 받아 보았습니다. 신문보도에 의하면 그 뒤로는 수난이 심한 모양이온데 얼마나 놀라시고 괴로우십니까. 연년(年年)이 이렇게 오는 재난도 재난이려니와 이를 당하는 사람의 몸은 도리어 그것으로 무감각해지나 봅니다.”

35.9.10 함형 내신에 “역사는 금후 남은 것이 「생활에 나타난 고민상」「고난의 의미」「역사가 지시하는 우리의 사명」등 3장이 남았습니다. 3회로 마쳐 금년 중에 다 되었으면 좋겠는데 어찌 될지요.”

35.9.21 호남에서 “더욱이 77호에 있어야 할 「수난의 500년(5)」이 빠진 때는 이 한독자의 마음이 주필의 마음에야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9월호에서 끊어지지 않아야 할 조선역사가 성서조선지에 연재하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글과 같이 끊어진 것을 당면 하올 때 무한이 우는 것도 작은 위로가 되지 못하였삽고, 곁에서 보던 아내의 ‘배우는 사람이 그런데 가르치는 이의 마음이야 오죽하리까’ 하는 말도 위로되지 못하였습니다. 똑바로 떼어 제본을 하여 놓고 재독을시작하면서 ‘너는 정말 조선의 행진을 그린 책이므로 조선의 그것과 같이 출세하기가 그렇게 어렵구나’ 하였습니다.”

35.10.11 함북 “성조지 중에서 함선생님의 역사를 제일로, 그 후 성서통신의 또 선생님의 바늘로 찌르는 듯한 말씀 등을 가장 감명적으로 읽습니다.”

35.10.22 동계집회에는 예와 같이 함형께 다부분을 기대한다. 자우들은 만난(萬難)을 물리치고라도 이 찬스를 놓치지 말라. 조선역사를 듣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말고 기독교사를 들을 기회를 버리지 말라.

35.11.7 만주소식 일절에 “사실 집에 나와 보니 금하(今夏) 수재로 한 알의 곡식을 얻지 못한 고로 강냉이를 사다가 그대로 삶아 먹고 근근 연명은 하오며, 그나마도 겨울은 가까워 오는데 옷이 이미 떨어지고 양식을 구할 길도 어렵게 되니 답답함이 여간 아니외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열 번 스무 번 되풀이해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성조지에 실린 함선생님의 본 절 강의를 읽고서야 위안을 얻었나이다.”

35.12.8 출판독촉여하. “귀사에서 발간하는 성서조선 지상에 연재하옵던 함석헌 선생께서 집필하던「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여기 M씨에게서 빌려 봤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단행본으로 출판하지 않으시렵니까. 꼭 좀 알려 주십시오. 그 책을 단행본으로 출판하시면 꼭 한권 사겠습니다. 미안하지만 좀 알려 주시기를 절망하나이다.” 첫째로 출판 비용이 문제다. 그러나 함선생이 집필한 대로 전문을 인쇄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아무것을 팔아서라도 출판하련마는.

35.12.12 “금월호 성조도 받던 날 밤에 첫면으로부터 표지의 광고까지 한숨에 다 독파하였나이다. 자자구구(字字句句)에 어느 것이 생명 아닌 것이 없고 읽어 갈수록 눈물, 감탄, 회개, 소망 등으로 크게 부흥되었나이다. 마는 한 가지 섭섭한 일은 함선생 역사의 기재(記載)가 없어서요.”

36.8.15 “함선생님의 역사는 초범인(超凡人)하여 선지자적, 예언자적 색체를 포함한 것 같으며, 그것을 읽을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자는 대단히 불행한자라고 생각합니다.”

36.8 ‘인간주의의 최고부’인 교회정신, 교권자들을 폭격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만 전도하시다가 나중에 ‘자기가 육탄이 되어서’ 십자가 위에 죽으신 것이라는 함석헌군의 설명을 읽음에 미쳐서 비로소 다년간 적체했던 것까지 일시에 삭아 내려간 감을 느꼈다....이 함석헌군의 견해는 틀림없이 백척간두(百尺竿頭, 몹시 어렵고 위태로운 지경)에 경진일보(更進一步, 다시 한걸음 나아감)한 것이라고 본다. 창견(創見, 처음으로 생각해낸 의견)이다.... 한줄기의 광명이 비추이지 않나.

36.9.25 백두 산록에서 격무에 종사하는 형제의 단신 일절에 “성조지는 함선생님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가 시작된 호수부터 새로 척송(擲送, 보냄)하여 주시옵소서. 대금도 그 호부터 가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37.1.19 경남 통신에 “실로 지난 집회에서 만복하였습니다. 소화력의 약함을 한탄합니다. 함선생님의 탁견, 선생님의 열정!”

37.5.13 “윤독 중이던 역사호는 추심(推尋, 찾아내어 가지거나 받아냄) 부송하오며, 읽지 못한 이곳 친구들은 희생당한 셈입니다. 특히 조선역사의 단행본이 출판되기를 절망합니다. 출판비의 일부는 저도 분담할 뜻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합본도 만들 수 있거니와 출판준비 중의 조선역사도 우리의 공동사업으로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 것이 기쁘다.

37.7.5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역사다운 역사를 읽지 못한 소생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운 사실같이 생각되나이다. 희망 잃은 조선청년에게도 오히려 내일의 조선을 꿈꿀 수 있음을 느꼈나이다.”

37.10.4 함형의 세계역사만 주문하는 이가 있어 찾아내어 보니, 벌써 전후 17호에 이르렀음을 발견하고 놀라다. 그 주문서 여하. “특히『성서조선』지에 실린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를 며칠 본 후 이후에는 항상 『성서조선』을 구독할 마음은 간절하였사오나 여러 가지 사정에 얽매여 차일피일 지내온 것이 지금 와서는 만시지탄(晩時之歎, 기회를 놓쳐 뒤늦었음을 안타까워하는 탄식)을 금키 어렵습니다. 선생님, 처음으로 미안한 말씀이옵지만, 성서적 입장 역사호만 대금 인환(引換, 서로 맞바꿈)편으로 발송하여 주실 수 없겠는지요.”

37.11.10 영남서 모씨 내방, 함선생의 조선역사호 전부를 구한다고 하나 반 이상 품절되어서 응치 못하다. 그 조선역사와 세계역사에 나타나는 사관에 대하여 진심 찬동을 표하며 조선풍토의 향취 나는 기독교의 싹이 『성조』지에서 성장할 것을 누누이 증언하면서 퇴거.

37.11.17 엽서에 “『성서조선』에 게재하였던 함석헌 선생 저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단행본으로 발행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발행하였는지, 안 하였는지, 또 발행하였으면 책대는 얼마인지. 아직 발행하지 않았으면 예정 책대는 얼마이며 언제나 발행될지 하교하소서.”라고. 금년 내로 발행하려던 계획은 틀렸으므로 내년 하기경까지는 되도록 힘쓰겠다고 답하다.

38.8.18 “『성조』115호에 실린 함선생님 글은 글 중의 글이요, 신앙중의 신앙이로소이다. 숙독하여 외우고자 합니다. 000 선생님께서도 참 좋다고 누차 말씀하시더이다. 75호는 누가 읽고자 하시는지 사고자 한다면 10원이라도 불매할 것이오나, 잠깐 빌리라면 빌려 드릴 수는 있습니다.” 운운. 생명이 넘치는 문장을 쓴 이도 확실히 은총으로 된 일인 것은 물론이지마는 글월을 진가를 음미하여 문장 저편의 생활까지 투시하는 이도 쉽지 않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경박한 세대에 있어서는 이를 맛보기가 마치 새벽달과 같이 드물다.

38.10.5 독자소식에 “『성조』지는 감사한 가운데 봉독했습니다. 모 학우로부터 조선역사를 빌려서 읽었사온데 한 벌 문하생도 가지고 싶사와 그 책을 빌려 베낄 작정까지 했사옵던 바 이번 호에 그같이 발표하시오니 감사 지극하외다. 지급히 조선역사호를 있는 대로 한 벌 하송해 주옵소서.”

38.10.7 전문학교 학생으로부터 학우 간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차례로 돌려가면서 읽을뿐더러 필사(筆寫)하는 중이라는 보고오다. 대부분 품절된 오늘엔 가장 현명한 방책일 것이다.

38.10.26 “.. 함선생님의 말씀은 우리들께 큰힘을 주었습니다.... 함선생님의 기도에 자연히 눈물까지 흘리게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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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13 밤 사이에 만설이 풍족하게 산야를 덮었다. 봉우리라 골짜길 할 것 없이, 초가라 기와집이라 양옥이라 할 것 없이 균일하게 넉넉하게 쌓인 눈이 하나님의 은총을 연상케 함이 크다. (보편주의, 평등주의)

함석헌이 <조선역사>를 <한국역사>로 고쳐 쓰던 1961년 겨울. 기독교사상가 함석헌이 서울근교에 흔한 개신교기도원이나 서울시내 지인사무실보다는, 고려의 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이 보존되어있는 합천해인사를, “바꿔 사건”의 산실(産室)로 선정한 것도 그저 우연은 아닐 것이다. 해인사경내를 거닐며 그는 불교와 기독교, 동양과 서양, 도시와 산골 등의 주제를 놓고 여러 생각의 나래를 펼쳤을 것이다. 그러다가 때는 겨울이니 한나절 눈이 내렸을 것이다.

그때 경내구석구석 조용히 떨어지던 눈을 가만히 응시하며 통찰력과 감수성이 남다른 함석헌이 갑자기 이런 영감을 받지 않았을까? “눈은 어디든지 내린다. 더러운 곳이라고 피하지도 않고 깨끗한 곳이라고 더 내리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해가 악인과 선인에게 다 같이 비치게 하시고 의인과 불의한 인간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이런 단순하고 평범한 자연현상의 원리에서, 함석헌은 편파적 보다는 보편적, 배타적 보다는 포용적 사랑의 원리, 우주근본의 원리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 사색과 깨달음을 겪은 후에 함석헌은, 기독교 색채가 강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독교적 입장을 떠나 우리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한국역사>를 생산해냈다. <한국역사>는 <조선역사>에 비해 기독교의 보편성을 강화해 나간 함석헌의 사상적 흐름을 엿볼 수 있다. <한국역사>는 그래서 비록 함석헌의 사관이 기독교역사관에서 출발했지만 궁극에는 어느 한 종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편-총체적사유의 지평선에 다다른 그의 정신여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산의 정상을 올라간 등산객이 아래를 내다보며 고백하는, “정상에 오르는 길이 내가 온 길만 있는 것이 아니구나.”는 깨달음과도 일치한다. 그러니 인류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구도자는, “결국 모든 종교는 그 근본에서는 하나.”라는 함석헌의 결론과 일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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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31 『조선문예인감』 중에 ‘문필가주소록’이란 것이 있는데 그 안에는 화가, 극작가, 배우, 한글학자, 음악가, 조각가, 철학가. 박물 연구가, 불교 연구가, 의사, 과학자, 야담가, 역사가 등 별 것이 디 있는데,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를 쓴 함석헌이라는 명자(名字)는 볼 수 없으니 이것이 하나님이 감추어 두신 증거가 아니고 무엇일까. 소에겐 닭이, 범에겐 종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거니와, 경향(京鄕) 서점과 화신 점두(店頭)에까지 「성조」지를 벌여 놓았으되 못 보는 이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양.

39.5.27 함형 내신을 읽고 또 한 번 머리털 끝까지 곧추섬을 느끼다.

39.6.2 “함석헌 씨의 논문은 논리와 역사적 의미를 천명한 명논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00중학의 00선생도 0부 원한다고 하니 대금은 후에 보내겠습니다. 우선 0책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운운. 과연 예상대로 겉읽지 않음에 탄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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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일본의 한국강점은 서구의 제3세계 강점과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 유럽의 아프리카 정복은 힘과 문화의 강자와 약자간의 일방적 케이오 게임이었다면, 일본의 한국강점은 다르다. 한일관계는 오히려 전통적으로는 한국이 큰형으로서 일본을 문화적으로 ‘개화’ 시켜주었던 관계였다.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 영향으로 서구문명의 주도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근세의 과정에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뿐이다. 마치 마당쇠에게 오히려 사지를 결박당한 주인신세처럼. 이 말은 일본이 한국을 식민화 시키는 일이 유럽이 아프리카를 식민화시키는 일 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는 말이다.

문화의 힘이 없는 무력으로 만의 정복은 결코 오래가지 못할 뿐 아니라 실패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 준다. 그러니 일본의 한국강점은 일본 측에서도 골칫덩어리였다. 무력 외엔 한국을 정신문화적으로 굴복시킬 수 없었던 일본은 그래서 제갈공명이 맹획을 7번 사로잡아 7번을 놓아주니 그때서야 복종했다는 교훈의 실천이 무엇보다도 절실했을 것이다.

정신적인 굴복을 받아내지 않고 무력만으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계속 억압하고 그 강요된 체제를 유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인간이란 신비한 존재는, 김구 앞에 섰던 윤봉길이나 이봉창처럼, 왜장의 열손가락을 잡고 남강에 투신했던 논개처럼, 거대한 정신을 대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선, 자신의 몸과 마음을 그저 초개(草芥)와 같이 버린다.

그래서 일제는 일왕의 명령으로 거액의 자금과 고급인력을 대대적으로 동원, 한국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싹 쓸어버리고, 조선인에게 복종을 강조하는 일본 혼을 심어주는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즉 황국신민 만들기인 정신개조 작업이다. 이러한 일제의 야심에 걸맞게, 조선사편수회가 만들어지는데, 그 구성원 대부분은 동양최고의 대학이라던 도쿄제국대학 출신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편수회를 위해 당시 일본학계의 최고두뇌들을 총동원한다. 이것은 식민지 조선을 철저히 굴복시키기 위한, 요즈음 말 많은 4대강 프로젝트보다, 더 거대하고 막강한, 일제강점기 최대국가사업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조선사료 강탈기간 중이던 1916년 1월, 중추원 산하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를 발족한다. 이 위원회는 조선인에 대한 왜곡된 역사교육을 통해 일본민족의 ‘우수함’을 고취하는 한편 조선인의 열등성, 타율성, 정체성, 사대주의성과 게으름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조선전통 민족정신이나 역사의식은 배제하였다. 그러다 학문적으로 더욱 권위 있는 기구로 만들기 위하여, 1925년 6월 일왕칙령에 의해 조선사편수회로 명칭을 바꾸고 독립된 관청으로 격상하면서 조직을 확대, 개편하였다.

그 후 총35권, 전체 2만4천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조선사>를 제작하는 데 일본정부의 막대한 자금과 최고두뇌의 역사학자가가 퍼부은 시간은 무려 16년이었다. 그 결과 1932년 일제는 마침 <조선사>를 마친다. 제작비용으로 100만 엔이라는 거액을 들여 편찬한 <조선사>는 이렇게 일왕명령으로 만들어지고 조선총독부에 의해 직접관리, 운용됐던 당시 일제의 “조선정신 죽이기”를 시도한 최대국가사업이었다. 일본은 현명하게도 조선인을 무력으로 굴종시키기 보다는 정신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하여 일제는, 1932∼1938년 식민사관에 기초한 <조선사>(37책),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20종), <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3책) 등을 간행하였다. 특히 일제는 '단군조선'을 없애려고 편찬기구 개편 때마다 한국사의 상한선을 아래로만 끌어내렸다. <조선사> 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간 앞장서서 관여했던 일본인 이마니시[今西龍]는 한국사를 왜곡·말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펼쳤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의 일환으로 이렇게 한국사를 대폭축소하고, 한민족의 역사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항상 지배를 받는 피지배의 연속이라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역사를 당쟁으로 얼룩진 부패한역사로 규정지으며 일본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필연성’을 내세운다.

이당시 일제하 국가기관의 설치, 조직 및 직무범위 등을 정한 제도인 관제(官制)를 보면 일제가 얼마나 한국사 왜곡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조선사편수회 고문에 이완용, 권중현을 앉히고 박영효·이윤용을 비롯해 일본인 거물들과 어용학자들을 위촉하였다. 위원회회장은 조선총독부 총독과 맞먹는 막강한 권력자인 정무총감이 맡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본인들을 참여시켰다. 고문·위원·간사와 편찬사무를 담당하는 수사관(修史官) 3명, 수사관보 4명, 서기 2명을 두었다.

이때 수사관 3명중엔 후일 국립서울대학교 교수를 하며 일본식민사관을 계승한 역할을 톡톡히 했던 이병도(李丙燾: 1896-1989)가 포함되어있다. 훗날 함석헌이 ‘재야사학자’로 감옥 문을 드나들며 생활고에 허덕이며 갖은 탄압과 핍박을 받는 동안, 이병도는 심지어 1960년 허정(1896-1988) 과도정부 하에서도, 문교장관 등을 지냈다. 박정희정권 하에서는 5·16민족상, 대통령표창까지 받는 등 국사학계에 미친 그의 ‘공로’가 대외에 알려졌다. 이래서 함석헌이 한국역사를 “중추, 등뼈가 부러진 역사”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뿐이 아니다. 1960년대 이병도는 학술원회장을 비롯하여 각종 대학의 명예교수를 독차지했다. 한국사 발전에 기여한 ‘빛나는 공로’로 그는 충무무공훈장, 서울시문화상, 문화훈장대한민국장, 학술원상, 국민훈장무궁화장, 인촌문화상 등등을 싹쓸이 하는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학계의 대부로 자리를 굳혔다. 그런 이유로 이병도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숨도 쉴 수 없었고, 제대로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아니 고개를 들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이병도의 정신적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일제의 조선강점이 조선을 근대화시켜주었기에, 일제의 조선지배는 오히려 축복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정신대 공창” 발언이나, “조정래의 아리랑이 광기로 가득 찬 소설”이라는 발언을 거침없이 한다. 이런 논리를 가진 사람을 우리 혈세로 꼬박꼬박 풍족한 월급과 연구비를 챙겨준다. 이것이 바로오늘 한국이 직면해있는 현주소다. 얼마나 우리들의 대한민국이 좋은 나라인가! 이런 적반하장의 소리를 하고도 당당히 한국최고의 지성이 모였다는 국립대학 교수를 하며 넉넉한 월급, 연구비를 받고, 가장 많이 팔린다는 수구재벌 일간지에 칼럼을 쓰고 있다.

정리되지 않은 과거역사는 이렇게 반드시 오늘 현실에 독이 되어서 돌아온다. 그래서 과거사정리가 필요 없는 일이 아니라 역사적인 존재인 인간에게 너무도 중요한 것이다. 역사를 경멸하는 민족은 반드시 그 역사로부터 경멸을 받는다. 잘못된 과거를 가지고 잘된 미래를 꿈꿀 수는 없다. 인간은 싫으나 좋으나, 긍부정에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역사적인 존재다. 콩 심은 곳엔 반드시 콩이 난다. 이병도를 심은 곳에는 이영훈이 나오고, 박정희가 5.16을 심은 곳에는 곧 전두환의 5.17이 나온다. 이것이 역사의 필연이다.

하여간 인간사의 도덕성을 철저히 무시한 이런 위험한 괴변은 600만의 유대인학살을 정당화한 히틀러의 선전상 괴벨스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가난한 이웃집 아빠를 내가 때려죽이고, 그 집 아내와 딸을 강탈, 강간한 후, 근대화를 시켜주고, 돈을 많이 벌어다주면, 그 살인, 강탈, 강간행위가 정당화 되고 ‘축복’이 되는가? 일제식민지정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우리를 근대화시켜주고 잘 살게 해주었기 때문에 불가피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정당화 하는 것은, 곧 인간생명과 존엄성을 벌레같이 짓밟으며 히틀러, 스탈린이 거둔 소위 경제적 성공을 정당화하고 축복이었다고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우주보다 귀한 한 인간의 생명”을 도구화하고 마음대로 빼앗은 것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고, 정당화 되어서도 안 된다. 인간사회의 근본을 이루는 것은 하나도 도덕성, 둘도 도덕성, 셋도 도덕성이고, 그리고 함석헌 사상의 뿌리도 역시 도덕성이다.

하여간 위에서 살펴본, 일제의 조선사편찬위원회 설립은 곧 일제식민정책이 단순한 무력적 탄압에 머물지 않고, 그들의 고도화 된 계획과 계산에 따라, 한국사를 다시 만들려고(왜곡) 나아간 것을 의미한다.

함석헌의 고민, 시대의 고민, 그리고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이렇게 일제가 조선사편수회 프로젝트를 통해서, 일방적으로 조선정신을 말살시키는 상황에서, 식민지 지식인 함석헌은 무력감 속에서, “나는 누구이고 조선인은 누구인가?” 라는 처절한 자아발견의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민족 정체성의 위기, 자아상실의 위기가 도래 한 것이다. 자아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정체성, 정신의 파괴이고, 한 개인과 민족의 총체적 몰락이다. 아무리 용맹한 장수도 실성한 상태에선 전쟁터에서 제대로 싸울 수 없고 오합지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함석헌은 고민했을 것이다. “군사력, 무력이 약한 개인이나 민족은 과연 열등한 존재일까?” 그리고 그는 깨달았을 것이다. 사명감, 문화, 역사의식 없이는 한 민족의 자의식, 정체성이 붕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아를 상실한 지식인은 그저 혼돈과 갈등 속에서 방랑 할 수밖에 없다. 염상섭의 <만세전>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인화는 함석헌과 동시대인이다. 그는 암울한 일제무단통치하에서, 그저 자신의 공허함과 번민을 달래기 위해 일본 매소부(賣笑婦)를 찾아 희희낙락 찻집에서 시간을 보낼 뿐, 실의에 빠진 민족의 앞날을 위해 아무런 비전과 희망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 실로 연약하고 기죽은 식민지지식인의 전형을 우리는 이인화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 지식인의 책무 중 에 하나가 절망과 실의에 빠진 민중에게 희망을 주고, 그들의 권리와 입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면, 함석헌은 절망과 실의에 빠진 조선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들의 사명을 일깨워 주기위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함석헌이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 민족으로서의 자아발견을 고민하던 1930년대는, 우리에게 오늘 21세기 신자유주의와 미국일방주의 세계질서의 가치가 창궐하는 시대에 아프가니스탄과 미국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알카에다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무력으로 침공한 미 제국주의에게 아프가니스탄 민족주의자 지식인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한국의 이완용(1858-1926), 송병준(1858-1925)처럼 “애국에서 매국으로” 발 빠르게 변모하여 친일파, 친미파가 됨으로서 대동아공영권, 즉 미국의 신세계질서에 재빠르게 편입되어야, 우리민족이 잘 먹고 잘산다는 논리를 열렬히 강변하는 것일까? 아니면, 일제하 약산 김원봉(1898-1958) 이나 이동휘(1873-1935) 같은 독립 운동가들이 무력게릴라전을 펴서 ‘슈퍼파워’ 일제에 대항했듯이, “최후의 일인까지”, 총칼로, 무력으로 미 제국주의에 대항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는 이, 총에는 총인가?

역사! 금지된 단어

함석헌은 이완용의 길도 이동휘의 길도 아닌 제3의 길을 택했다. 이 제3의 길은 요즘 말로하면 기울어 가는 역사를 홀로 ‘바로세우기’였다. 그러나 일제하에서 ‘조선역사’는 곧 금지된 단어였다. 조선인이 조선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허망하고 위험한’ 꿈을 꾼다는 것은, 곧 총체적 패가망신에 가문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제의 막대한 물적, 인적지원을 받은 거대한 공룡과도 같은 조선사편수회의 35권, 2만4천 쪽, 100만 엔이라는 거액을 들여 편찬한 <조선사>! 그에 대항해, “변변한 참고서 하나 없는 시골학교” 역사교사 함석헌!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그저 파리한 염소처럼, 그 빈약한 자료를 씹고 또 씹는” 절박한 몸부림을 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나온 것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이었다. 편수회의 <조선사>와 함석헌의 <조선역사>의 싸움은 물량적, 세속적 기준으로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되는 골리앗과 다윗, 사자와 아메바, 빌라도와 예수의 싸움이었다. 아니 싸움이라기보다는 그저 ‘몸부림’이었고 꿈틀거림이었다. 당시의 세속적 눈으로 비교하자면, 무명의 예수는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권력자 빌라도와 결코 비교가 되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상대다. 그러나 2천년 역사의 용광로를 거치고 난 지금, 빌라도가 인류사에 끼친 영향은 예수의 그것과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조선사>의 하늘을 찌를 것 같던 압도적 물량공세 탓인지, 함석헌은 “이것(조선역사)은 역사책이 아니라 내 기도다.”라고 절규했다. 이 몸부림의 과정에서 함석헌은 “십자가에 달리는 한국“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패자를 위한 역사 - 못났기 때문에 잘난 씨알, “뒤로돌아 앞으로 가!”의 역사이었다. 더불어 우리민족이 세계인류 죄악의 짐을 기꺼이 질 사명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끝이 안보이던 고난 속에서도, 함석헌은 한국역사 속에 나타난 절대자의 섭리를 찾으려 했고, 그 섭리를 통해서 조선인이 결코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고난의 아들 예수”와 같이, 세계사의 모든 죄와 짐을 지고 가는, “수난의 여왕”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역사>는 한국역사를 일제의 무력사에 대항해, 정신사를 중심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어린 마음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넣어주고자 씹고 또 씹어 젖을 내보내고자 혼신의 힘으로 책을 쓴 함석헌은, 자기모멸과 절망에 빠져 신음하는 식민지 치하 씨알들에게 이렇게 희망을 북돋아 주고자 모든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한국역사를 거의 비관적으로 바라보던 씨알들에게 낙관적으로 보는 지혜와 눈을 뜨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래서 함석헌의 <조선역사>는 어두운 시대에서도 실 낫같이 가느다란 희망을 포기하지 않도록 조선사의 의미와 뜻을 밝혀주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영원의 실패라는 것은 없다. 몇 번을 실패하더라도 역사가 무의미로 끝나지 않기 위하여 항상 다시 노력할 의무가 남아 있다.” 고 강변 한 것이다. 당시 조선인이라는 존재가 경멸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있던 시대에, 함석헌은 조선인의 가능성과 자부심을 보여 줌으로서 한반도의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웅변적이고 서사적으로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마치는 말

이 물량주의와 기회주의의 가치관이 팽배하는 이 시대 속에서도, 2008년 “건국 후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운동가”로 함석헌(77%)이 1위로 선정되고, 2010년 ‘동아시아 100권의 책’과 2008년 한국대학신입생을 위한 추천도서20종에도 <한국역사>는 선정된다.

심지어 경제논리만 앞세우고 시의 세계와는 멀어 보이는 ‘용산참사’와 ‘4대강 프로젝트’의 주역 이명박 대통령조차 함석헌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애송시라고 답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감히 단언 할 수 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함석헌의 사상과 그가 추구했던 가치는 씨알의 가슴을 울리고 한국역사와 더불어, 영원한 ‘씨알의 소리’로 남을 것이다.

함석헌은 한국역사를 씨알의 입장에서 썼다. 기득권자나 가진 자의 통치논리가 아닌 소외된 이웃, 서민, 소수자, 패자,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시선으로 <한국역사>를 썼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나? 함석헌의 추종자 또는 제자들조차 최소한 기득권자나 “부자의 대변자”가 아닌,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줄 모르는 서민, 씨알의 대변자, 즉 “씨알의 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주장한 것이 ‘같이살기운동’인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는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유럽인들도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유를 우리보다 더 많이 더 풍요롭게 누리고 있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정치적 자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의 문제는 다르다. 강자독식과 정글의 법칙이 횡행하고 사자가 토끼를 마음대로 죽이고 유린하는 상황을 그저 지켜보거나 내버려 두는 것이 자유민주주주의인가? 오늘 한국의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실을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함석헌이 살았던 길인가?

소위 ‘작은 정부’의 구호를 내세우며 강자가 약자를 유린할 때 ‘중립’이라는 미명하에 그저 강자의 횡포를 바라만 보는 것은 결코 함석헌이 주장한 ‘같이살기운동’의 길이 아니다. 한 달 70만 원을 받는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7개월에 7억 원을 받아도 아무런 문제를 못 느끼는 그 사람들의 양심이 살아 있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강자와 재벌들에게 유리하게 되어있는 이 사회구조에서 경제적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단연코 씨알이 추구해야 할 길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강자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앞장서는 가짜 씨알 쭉정이의 자기변명, 자기 합리화 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미국의 저명한 퀘이커 역사가 하워드 브린톤(1884-1973)은 그의 저서 『퀘이커 300년』에서 “퀘이커 신앙은 영국 종교개혁의 극좌익을 대표하는 것” 이라고 정의하였다. 이 말은 퀘이커 교도는 최소한 “파이 키우기”를 옹호하는 우파보다는 “나눔과 부의 재분배”를 강조하는 좌파에 가깝다는 말이다. 이 말은 또한 퀘이커교도는 천박한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적 가치를 내세우는 정권이나 일방주의를 내세우던 미국의 부시 정권보다는 평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힘쓰는 정부에 가까워야 한다는 뜻이다. 함석헌 추종자들 중엔 함석헌은 좌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았고 중립적 인물이었거나 현실을 초월했으며 심지어 차라리 우파에 가까웠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함석헌에 대한 평가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함석헌을 포함해 현실을 초월 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함석헌의 말과 글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를 ‘우상화’ 하는 것이고 극도로 위험한 행위다.

약자가 강자의 폭압에 의해 고통을 겪고 있는데 ‘중립’은 곧 강자에 기생한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는 비겁한 기회주의적 변명에 불과하다. 예수도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나서 나를 따르라”,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저희 것이다”,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는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기보다 어렵다“고 목숨을 걸고 가르쳤고 결국 정치권력의 손에 의해 정치범으로 몰려서 목숨을 잃었다. 이런 예수의 삶과 말은 좌파의 전형이고 그런 예수와 퀘이커신앙을 따르던 함석헌도 당연히 좌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일찍이 오산학교 시절인 1936년 함석헌은 이렇게 역설한바 있다.”우리가 정치가를 생각한다면 어떤 것을 참말 위대한 정치가라 하겠나? 내 생각으로는 사회의 억눌린 계급의 민중을 살길로 지도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상류사회를 위한 시설을 아무리 잘하고라도 하층에 짓밟히고 억눌린 민중이 있으면 국가는 위협을 느낀다. 국가의 운명은 하층민의 손에 달린 것이지 결코 상층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위정자의 재능의 척도는 하층사회에 대한 시설에 있다.“ 이런 함석헌의 글은 마치 내가 『자본론』을 읽는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함석헌은 한국역사를 짊어지고 나갈 주체로서 씨알을 꼽는다. 씨알은 감투도, 돈도, 세력도 없으나 자기가 속한 시대와 사회에 대해, 자기의 세속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기회만 있으면 준엄하고 공정한 비판의 화살을 날린다. 인간의 가치 그리고 삶의 가치가 돈이나 경제보다는 훨씬 더 위에 있는 도덕적 가치라는 것을 삶으로서 일깨워준 이상주의자! 그것이 내가 보는 함석헌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그의 삶과 사상을 함께 공부하고 생각하는 이것이, 바로 함석헌의 정신이 한국역사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생생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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