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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새 씨알학당’ 부산 인문학강좌 5강
글쓴이 : 바보새 날짜 : 2012-08-07 (화) 15:12 조회 : 2382

‘바보새 씨알학당’ 부산 인문학강좌 5강

7월12일-5강[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함석헌의 정의론 
김희헌 (한신대 연구교수)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함석헌의 정의론

 

1. 서론 : ‘신앙과 정의’의 문제

오늘의 세계는 정의를 갈구하고 있다. 5억 명이 굶주리고 있고, 10억 명이 극심한 가난 속에 살고 있으며, 해마다 4천만 명이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다. 15억 명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10억 명이 문맹상태에 있으며, 20억 명이 깨끗한 물을 먹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이름으로 전쟁이 조장되고, 자유의 이름으로 공동선을 지키기 위한 책임이 회피되고, 개인의 존엄성이란 이름으로 상류계급의 약탈적 특권이 용인되고 있다. 이른바, 세계를 뒤덮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질서는 제도 구축을 넘어, 가치/문화를 타락시킴으로써 인류문명의 이상까지 갉아먹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소득, 여가, 그리고 안전이 더 이상 향상될 필요가 없는” 상위 1% 사람들의 존엄과 자유를 옹호하는 일을 마음껏 진행하는 신자유주의의 불의(不義)한 질서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단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상징적 투쟁이 되고 있는 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의 거리농성이 1,500일을 넘어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대처는 매우 미미한 현실이다. 삶이 벼랑 끝에 몰려있는 이런 비극적 상황에서 정의를 향한 탄식과 몸부림이 하늘에 사무치고 있지만, 실상, 정의로운 사회의 제도적 안전망이 될 공공의 협의체(social common)는 기업이윤, 사유재산, 가족 가치, 개인의 존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지속적으로 해체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때, 생명과 평화의 이상을 간직한 기독교 교회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호소와 항거를 보면서, 그 회사의 대표이사로 있는 이가 자기교회의 성공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신실한(?) 종교인이라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필자의 이런 놀라움이 단지 개인적 신앙과 기업의 윤리에 대한 혼동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한국교회와 신앙인의 현주소에 대한 느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인가? 함석헌은 1927년 [성서조선] 창간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눈물로 양식 삼아가며 북만(北滿)으로 들어가는 형제의 손을 붙잡고 이 말로써 전송할 이가 몇인가. 벗은 허리를 꼬부리고 모욕을 옷 삼아 현해탄을 건너가는 자매를 보고 이 말로써 진정한 위로를 드릴 이가 과연 몇인가. 없다,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 안에 새 생명이 창조된 이를 제하고는.... 실로 이 가르침을 그대로 믿기에는 우리 현실문제는 너무 절박한 듯하다. 너무나도 명백한 듯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체하고 복음을 믿기는 너무나도 무지한 듯하다.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인 듯하다. 너무나도 고집인 듯하다. 이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은 너무나도 개인 중심적이요 너무나도 고식적이요 너무나도 동포애가 없는 듯하다.”

함석헌은 위의 글에서 정의를 향한 기독교 신앙의 각성을 요청한 바 있는데, 이는 오늘날 더욱 유념해야 할 주제이다.

이 글은 기독교신학의 관점에서 ‘신앙과 정의’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함석헌의 정의론을 다루고자 한다. 이 주제는 한국교회가 정의 신앙이 실종된 종교현실을 살고 있기 때문에 시급히 요청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연구의 어려움이 확연한 주제이기도 하다. 우선, 함석헌이 “정의”에 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에, 근거자료로 삼을 만한 문헌의 빈약함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다. 자신의 삶을 정의의 예언자처럼 보냈던 그가 정의론을 구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매우 특이하다. 그러나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전체적으로 보면, 그가 얼마나 정의를 갈구하고 있으며, 정의를 이룰 근원적인 방식이 어디에 있는지 깊이 관심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의 이러한 갈망과 관심을 오늘날 정치철학적 맥락에서 전개되는 정의 담론과 직접적으로 대비시키는 작업은 또 다른 어려움을 맞는다. 그의 사상은 우주의 무게를 싣고 문명사적 직관을 바퀴로 삼아 굴러가는 거대한 수레와 같다. 따라서 함석헌의 정의론을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정의 담론의 틀에 곧장 집어넣을 수 없다. 그의 정의론이 정치철학의 정의론과 구별되는 지점은 문명의 질곡에 대처하는 방식의 차이에 있다. 일반적으로 정치철학의 정의론은 불평등이 만들어낸 ‘고난을 해결’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안에 관심하지만, 함석헌은 도리어 ‘고난의 뜻’을 묻는다. “우리는 고생하러 났다.” “고난은 뜻이 있다.” 이런 종교적 물음은 정치철학의 관심과는 분명 다르다. 그 물음은 ‘고난 해결’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인 방식에 대한 물음이다.

함석헌은 정의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지혜와 교훈을 준다. 그것을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의”를 “신앙”과 연결시키고자 한다. 어쩌면 이 작업은 함석헌이 “먼저 그 의를 구하라”라는 글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을 상술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정의, 정의’한다. 그러나 그들의 부르짖는 정의란 어떤 것인가. 열강의 정의, 윤리학자의 정의, 무력으로 보장하는 정의, 약자의 것을 빼앗는 구실을 공급하는 정의, 강당에서만 부르짖는 정의, 이는 결국 백주에 횡행하는 가면의 유령이다. 신의 정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맘을 다스리는 정의, 태양소(太陽素)를 받들고 전 우주를 고이는 정의, 죄에서 생령(生靈)을 구하기 위하여 죄 없는 자로 대신 희생이 되게 하는 정의, 영원의 생명을 주는 정의, 이에 의하여 서매 창성치 않는 자 없고, 이에 그르치매 거꾸러지지 않을 자가 없는 반석이다.”

 

 

2. 정의론의 역사와 그 철학적 딜레마가 주는 문제의식

 

1) 서구 정의론의 역사에서 도출되는 정의 주제

정의담론을 전개하기 위한 기본 문제의식을 간추리기 위해,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크게 보면 두 가지이다. 그 첫 번째는 서구 정의 개념의 역사에서 오늘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정의론의 중심주제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실로 정의 개념에 관한 서구철학의 역사는 길다. 이 역사를 제대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서구철학사에 끊임없는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고전적 지혜의 원천인 그리스 철학(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검토는 이 글의 관심범위를 넘는 것 같다. 대신 서구문명의 주요 변곡점을 예시한 플라톤의 [유티프로, Euthyphro]에서 출발해보도록 하자.

플라톤은 이 글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어떤 사람이 경건한 것은 그가 신[궁극적 존재]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가 경건하기 때문에 신의 사랑을 받는 것인가?” 이 질문은 궁극적 가치에 관한 직관적 확신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묻는 물음이다. 만일 이 물음에 정의라는 개념을 대입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정의로운 것은 신이 명령한 것을 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신이 어떤 것을 정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것을 명령하는가?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정의론의 궁극적 토대가 무엇인지, 즉 우리가 정의롭다고 느끼는 것이 종교적 충실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적 계약을 이행하는 행위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요소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서구문명은 이 문제를 둘러싼 사유의 색조가 변함으로써 정신문명의 대변화를 겪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세 철학/신학의 특징을 잘 대변했던 안셀롬은 신을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로 이해했다. 존재와 가치의 궁극적 준거점을 신에게서 찾고, 따라서 정의를 신의 뜻에 부합되는 행위로 본 것이다. 정의의 척도를 신에게 둔 이 중세적 사유는, 궁극과 전체를 아우르는 (신으로 상징되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열망을 옹호하는 정신적 고상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잡다한 개체적 관심을 상대화시킨 정신적 습관으로 말미암아 정의는 매우 폭력적이거나 나르시시즘적인 행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종교적/세속적 신의 대변자들은 정의의 수호자가 되었고, 이 수호자들(종교/세속 권력)이 베푼 정의는 신의 뜻(에 기초한 미덕)을 행한다는 나르시시즘적인 신념을 통과하면서 현실에서는 폭력이 되고 말았다. 나르시시즘에 기초한 이 중세적 폭력에 대한 항거로 등장한 것이 근대의 주체였다.

근대는 존재하는 모든 것과 그것들이 지닌 가치에 대한 판단의 토대를 ‘생각하는 주체’ (Cogito)에서 찾았다. 근대가 깊어갈수록 미덕(정의)에 호소하는 것, 그리고 그 토대가 된 안셀름과 같은 신(神) 이해는 합리적 논증이기보다는 행복과 자유를 추구하는 주체에 대한 심판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되었다. 대신, 고대 그리스의 단자론(atomism)이 부활한 근대의 과학에 의해 주도된 근대문명은 개체의 자유와 평등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근대 초기, 아직 유신론적 이상이 사라지지 않았을 때 신은 자연법의 흔적으로 남아있었지만, 정의는 자연법의 직접적 실행이기보다는 이성적 주체 간의 사회적 ‘계약’으로 이해되었다. 이제 정의는 (과거에 신으로 표현되었던) 궁극적 이상의 실현이기보다는, 에고이즘의 요소를 피하기 힘든 ‘거래’라는 요소를 갖게 되었다. 근대 후기에 유신론적 잔상이 근대정신에서 사라졌을 때, 정의는 선험적이기보다는 인간의 창조물로 이해되었고, 미덕이나 가치보다는 결과에 집중하는 공리주의와 실증주의 이외의 대안은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신의 흔적이 사라질수록, 궁극적 준거점을 잃은 (탈)근대정신은 자신이 키워낸 자유와 평등의 이상이 자기(에고이즘) 안에 갇히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야만 하는 힘겨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앞에서 유티프로의 딜레마를 둘러싼 중세와 근대라는 서양문명의 거대한 변화를 살펴봤지만, 이 글이 보다 직접적으로 관심하는 것은 역사적 관찰 자체가 아니라, 그 딜레마가 지시하고 있는 정신적 타락에 대한 경고이다. 오늘날 정의담론이 철학의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중세적ㆍ근대적 구태로 얼룩진 정신지체를 극복하는 문제이다. 정의가 중세에는 “나르시시즘의 증여-공간”에서, 근대에는 “합리적 에고이즘의 교환-공간”에서 움직여왔다면, 여전히 오늘날에도 “호의가 에고이즘과 사통하고 선의가 나르시시즘의 미끼로 전락하는 세속”에서 정의를 어떻게 말할/세울 수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정의라는) 선험적 미덕에 취한 중세적 유아론과 개인적 욕망의 균등한 거래나 보다 큰 행복에 관한 산술적 계산으로 전락해 가는 근대적 유아론을 극복하고, 개인과 공동체가 상생하는 공동선(共同善)의 가능성을 정의의 이름으로 확보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근대 후기 신의 죽음 이후 담론의 준거점을 상실해 간 철학이 상대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똬리를 틀어버린 이 시대에, 우리는 진리주장의 상대화와 이것이 초래하는 정의담론의 허무화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 정의 담론의 철학적 딜레마가 남긴 정의 주제

포스트모던 시대로 지칭되는 오늘날, 정의담론 구성에서 고려할 두 번째 문제는 모든 철학 자체가 갖고 가장 큰 어려움이라 할 수 있는 ‘척도 자체에 관한 측정 (measuring the measure)’의 문제이다. 이를 질문으로 하자면 이렇다. 모두가 정의를 갈망하고 있지만, 과연 누가(who) 정의가 무엇인지(what)를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을 어떻게(how) 마련할 수 있는가? 한스 켈젠은 이익이 충돌할 때 각 이익이 가진 가치를 서열화할 수 있는 “합리적 인식이라는 수단”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한 바 있다. 이것은 단순히 측정의 준거점 마련의 어려움에 관한 토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옳다고(정의롭다고) 믿는 믿음이 합리적일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정의담론의 어려움은 정의가 균등하고 공정한 존재상태(state of being)에 관한 것을 넘어서, 품성의 미덕(virtue of trait)이라는 정신적 힘에 관한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분배적(distributive) 정의와 보복적(retributive) 정의와 회복적(restorative) 정의에서, 정의 주장은 서로 다른 변수들을 몫으로 갖고 있으며, 또한 이 서로 다른 정의담론의 환경에서 그 몫의 비례치를 산출하는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어떤 때에는 (분배적 정의나 보복적 정의에서는) 균등의 룰이 더 큰 미덕이 될 수 있으나, 어떤 때에는 (회복적 정의에서는) 은총/사랑의 룰이 더 큰 미덕이 되곤 한다. 그리고 그것을 미덕이라고 믿는 믿음에 대한 합리적 판단은 상황인식, 문명의식의 성숙정도, 사랑의 능력 등에 의해서 좌우된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모든 정의 주장의 합리성을 측량하는 작업에는 엄격한 공평의 잣대와 보다 유연한 은총의 잣대를 모두 필요로 한다. 그리고 정의담론이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은총의 잣대를 보다 유연하게 하는 정신의 힘과 가치를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쩌면 그것이 개체적이고 부족적인 욕망으로부터 공동체적이고 세계우주적인 갈망으로 나아가는 인류정신의 진화를 설명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성경의 정의 개념과 몰트만이 시도한 정의 신학에 대한 평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본성을 정의로 보는 구절은 최소한 50회 이상이다. 구약성경에서 정의를 지칭하는 단어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엄격하고 공정한 판결로서의 정의를 가리키는 미슈파트(mišpāt)이다. 이 단어는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에 대해 보응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규율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 평형상태 유지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회개를 동반한 회복을 지향한다. 다른 하나는 공감어린 의로운 행위로서의 정의를 가리키는 세다카(sĕdāqāh)이다. 여기서 정의는 공동체와 개인의 평안을 회복시키는 은총의 행위로 이해된다. 신약에서 정의에 해당하는 말은 디카이오수네(dikaiosunē)로서, 그것은 “의(로움)” 또는 “의롭게 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속성으로서의 정의를 가리키기도 하고, 신앙(pistis)의 본질로서 요청되는 정의를 가리키기도 한다.

성경의 정의개념이 인간의 덕성(virtue)이나 사회개혁 프로그램의 차원보다는 하나님(그리스도)의 본성(nature)이나 열정(pathos)과 결부시킨 것은 의미심장하다. 성경의 신앙공동체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본성을 정의로 삼았다는 것은, 그 종교가 부족성(tribalism)을 뛰어넘어 세계종교로서의 보편성, 다시 말해 인류의 궁극적 지향점을 향해 정초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분명히 시내산 계약에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그 부족주의적 잔상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구원을 소속집단(이스라엘)의 ‘귀속성’에서가 아니라 ‘정의’에서 찾게 된 것은 예언자들이 등장함으로써 가능해졌다. 이제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게 된다 (이사야 1:27). 성경의 신앙공동체가 단순히 인과응보의 룰을 넘어서 피조물 전체를 변혁하고 치유하는 하나님의 본성을 대변하는 개념으로 정의를 잡았다는 것은 정의담론을 구성하는 작업에서 가르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종교와 정치, 신앙과 윤리, 영성과 사회개혁이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지시한다.

기독교 신학자 가운데 최근 J. 몰트만은 강력한 정의신학을 제창한 바 있다. 2009년 5월 한국을 방문하여 발표한 논문, “하나님의 이름은 정의이다 : 악의 희생자와 가해자를 위한 하나님의 정의”는 기독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를 정의의 관점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에, 중세의 고해성사든 개신교의 칭의론(죄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상)이든, 죄와 악행의 희생자들을 위한 신학적 해석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이 가해자의 죄를 사면하는 점에만 관심함으로써 가해자의 실제 행위가 낳은 피해현실을 외면하고, 용서의 언약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해함으로써 믿음을 수동적인 차원에 머물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회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정의로 이해할 수 있는 신학을 구성하는 것에서 찾는다. 즉 하나님의 정의는 권선징악의 정의(justitia distributiva)가 아니라, 창조적인 정의, 다시 말해 “구원하는 정의”(시31:1)요, “악의 희생자들을 치유하고 일으켜 세우는 정의”요, 그 정의의 목표는 “영혼구원, 개인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라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 역시 가해자의 죄를 대신 진 “대속의 그리스도”일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연대의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포괄하는 그리스도론을 제창함으로써, 그는 피해자의 희생과 고난이 하나님 나라라는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전망 안에서 해결될 수 있는 길을 열고자 했다.

몰트만이 정의라는 개념을 통해서 가해자 중심의 기독교 전통신학을 비판하고 희생자의 고통에 참여할 것을 촉구한 것은, 오늘날 정의 신학에서 매우 진전된 논의를 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준다. 그의 정의 신학은 기독교 대중 신앙이 지닌 한계를 밝히는데 매우 유용하다. 분명히 그는 자신의 초창기 저작인 『희망의 신학 (1964)』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1972』에서부터 정치해방신학의 관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지배자 중심의 사유체계에 갇힌 서구기독교 신학에 생기를 불어넣어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서구신학의 전통적인 (철학적) 세계관과 완전히 결별하지 않음으로써, 보다 더 진취적인 정의 신학을 구축하고자 하는 (한국신학의) 흐름과 대립관계에 놓이게 되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몰트만과 안병무 사이의 오래된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몰트만은 민중(씨)의 자기초월/자기구원을 주장하는 안병무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 적이 있다. 그의 민중신학은 “‘연대의 기독론’에 일방적으로 의존하여, 민중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대속의 기독론’이 없다.” 그러나 “만일 대속의 기독론이 없다면, 민중의 고난/희생은 증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난 받는 민중이 세상을 구원한다면, 그 민중은 누구에 의해서 구원을 받겠는가?” 안병무는 이에 대해 서구신학의 근본문제인 신학적 이원론(주-객 도식)을 지적하였는데, 이 문제가 몰트만의 정의신학에서도 연장되고 있다. 몰트만이 비록 희생자를 위한 참여의 신학을 말했지만, 그 신학의 근본구도는 여전히 칼빈의 형벌대속적 그리스도론이다. 따라서 불의를 행한 가해자이든 그 희생자이든 모두 정의의 ‘객체’로 남게 되고, 오직 정의의 ‘주체’는 하나님(대속의 그리스도)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정의의 주체이다’라는 아름다운 신학적 명제는 보다 엄밀하게 해석될 필요가 있다. 그 명제가 지닌 종교적 고백의 차원과 (역사적 실제에 관한) 형이상학적 해석의 차원이 혼동되는 곳에서 기독교 신학의 난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몰트만의) 서구신학이 희생자의 고난에 참여하는 신앙을 말하고 있지만, 그 논의가 결국 신학적 나르시시즘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도 그 명제를 종교적 고백의 차원이 아닌 형이상학적 해석의 차원으로 끌고 가기 때문에 발생한다. 만일 주-객 도식의 형이상학으로 고난의 궁극적 상징인 십자가를 해석한다면, 성부의 새디즘과 성자의 마조히즘이 교차할 뿐 그 고난의 신학적 의미는 완전히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안병무 역시 ‘대속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적 차원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안병무는 대속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불의에서 회복된) 기억이라는 선험성을 지닌 신앙공동체가 종교적 희망으로 품고 있는 믿음의 문제이지, 민중현실 속의 불의와 죄악을 해결할 보증이 되는 방편적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역사적 실제 속에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 일어나는 민중이다. 따라서 신학에서 주객도식의 극복이 중요하다. ‘정의의 주체인 하나님’에 관한 믿음을 보존하되, 정의의 또 다른 ‘주체’인 민중(씨)을 말할 수 있는 신학적 세계관 위에서 우리의 정의 신학을 전개해가야 한다.

여기서 비로소 우리가 함석헌의 정의론을 다룰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한 것 같다. 하나님과 씨이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고, 정의의 주체인 하나님이 씨을 정의의 객체로 전락시키지 않고 도리어 주체로 세우는 신학적 구도가 함석헌의 사상에서 꽃피고 있다. 함석헌의 신앙에서, 정의의 주체인 씨이 깨어 일어나 죄악의 사슬을 끊을 때 드러나는 (다시 말해, 현실에서 화육하는) 장면이 “정의의 태양(말4:2)”이신 하나님의 성육신, 즉 그리스도의 등장이다. 다시 말해, 씨이 스스로 일어나 죄악의 사슬을 끊어낼 때 확인되는 장면이 바로 대속의 그리스도의 등장이다. 씨()는 “지나간 것의 결과인 동시에 장차 올 것의 원인”이다. 역사 속에 등장했던 대속의 그리스도는 씨에 담겨있고, 그 씨이 또 새 생명을 잉태함으로써 (불의와 죽음을 씻겨내는) 대속의 그리스도(독생자)가 또 다시 역사에 화육한다는 것이 함석헌의 믿음이다.

 

 

4. 함석헌의 정의론

 

1) 정의의 주체인 씨/민중

정의 담론이 지닌 근본적인 딜레마에 대한 함석헌의 직접적인 대답은 씨에 관한 그의 근본적인 신념에서 솟아난다. 모두가 정의를 갈망하고 있지만, 과연 정의가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은 어떻게 마련되는가? 함석헌은 ‘씨이 정의의 주체’라고 대답한다. 따라서 불의와 정의를 구분하는 기준은 씨의 지혜로(자리에서) 분별되고, 죄악을 씻어내고 정의를 세울 힘은 오직 씨로부터 나온다.

함석헌의 사유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씨에 대한 끝없는 신뢰와 씨이 지닌 궁극성을 밝히려는 종교적 사유에 있다. 정의담론이 합리성(진리성)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씨에 대한 이해/태도에서 찾아진다. 함석헌이 씨을 신뢰한다는 말은, 우선 고난당하는 씨의 삶의 자리에서 주장될 때 정의가 비로소 참된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다.

“민중은 사회의 바닥이다. 바닥이므로 타락이요 고상이요 따로 있을 여지가 없다. 타락인줄 알지도 못하는 것이 민중이다. 또 타락이라 해도 좋다. 이 세상이 발전이라면 다 좋아하지만 타락하지 않고 되는 발전이 어디 있다더냐? 역사는 발전하기 위해 타락한다. 가지 끝의 아름다운 열매가 새 숲이 되려면 떨어져야지, 타락해야지.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려면 하나님이 마구간에서 탄생하고, 세리와 갈보의 친구가 돼야하고, 구더기 같은 민중에게 넘겨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함석헌의 사상에서 씨의 궁극성에 대한 신뢰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다른 표현이다. 이제껏 서구신학의 세계관에서 신과 세계(씨)를 구별하고자 했던 거룩한 종교적 열정은 이 둘의 이원론적 분리로 말미암아 형이상학적 왜곡을 피하기 힘들었다. 전통신학은 초자연주의적 이원론이란 극단을 달렸고, 이에 대한 반동은 범신론과 무신론이라는 일원론적 극단을 달렸다. 동양의 범신론적 사유를 기독교 신앙 안의 초월주의로 재구성한 함석헌은 자신의 사상을 범재신론(paentheism)의 대통합적 사유로 피워냈다. 함석헌은 씨이 씨일 수 있음을 씨 자체의 존재론적 충분성에서 찾지 않고, “무엇이려는” 하나님 즉, ‘뜻’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창조/구속활동에 씨 스스로 참 생명을 피워냄으로써 가능한 것으로 봤다. 씨에 대한 신뢰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였던 것이다. 이것이 그가 참 씨 예수를 이해한 방식이었다.

“예수는 어떻게 알았던가. 씨의 자리에 서기 때문이었다. 씨은 씨이기 때문에 자연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믿게 되어 있다. 믿는 것이 씨이다. 하나님과 씨은 한 실오리의 두 끝과 같다. 위에서는 하나님이요, 아래서는 씨이다. 씨 중에서도 참 씨이 예수였다.”

함석헌이 씨을 정의의 주체로 삼고, 정의를 이룰 힘이 오직 고난을 뚫고 생명을 피우는 씨로부터 생겨난다고 주장한 것은, 오늘 우리가 정의담론을 전개하고자 하는 근본이유를 설명해준다. 그것은 이 인류가 보다 나은 미래문명을 말하기 위해 정의에 호소하는 것이요, 그 호소가 실제적일 수 있는 방도를 찾기 위해 씨에 집중하는 것이다. 함석헌의 대표저작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결국 밝히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세계역사 전체가, 인류의 가는 길 그 근본이 본래 고난이라 깨달았을 때 여태껏 학대받은 계집종으로만 알았던 그가 그야말로 가시면류관의 여왕임을 알았다.”

 

2) 종교적 정의론 : 정의와 신앙

씨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얽혀있는 함석헌의 사상에서, 정의론은 신앙과 결부된 종교적 특성을 지닌다. 함석헌에게 정의는 이기적 욕망의 절묘한 분배로 도출되는 근대적 가능성도 아니요, 나르시시즘적 호의로 표현되는 중세적 가능성도 아니며, 그런 유아론적 몰락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채 상대주의의 뜰을 배회하는 탈근대의 진솔함만도 아니다. 정의를 이룰 참된 힘은 오직 신앙의 힘이다. 그는 정신의 타락을 막는 힘의 근원을 신앙에서 찾는다.

함석헌에게 ‘신앙’은 특정한 믿음의 체계(belief system)에 대한 배타적 헌신일 수는 없다. 그에게 신앙이란 “생명의 버릇” 또는 “정신의 숨 쉼”이다. 생명을 피우는 씨의 이 버릇은 한편으로는 전체를 아우르며 보편적 가치를 궁극적으로 열망하는 정신적 고상함을 지닌 중세적 포괄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의 회의를 모두 끌어안은 지성을 옹호하는 근대적 합리성을 자기 진화의 열매로 삼아 생긴 버릇이다. 이 버릇은 끝을 “따져 올라가면 믿음에 이르는” 철학을 갖기까지, 또한 “반드시 철학을 나오게” 하는 믿음을 갖기까지 멈추지 않는 버릇이다. 씨은 이 버릇으로 절대(자)를 찾는 참된 종교정신을 길러낸다. 이런 의미에서, 함석헌이 본 씨의 참 지혜는 ‘하나님 모심’에 있다.

씨이 하나님을 모셨다는 것은 정의를 향한 믿음의 싸움을 발진시켰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함석헌에게 신앙이란 싸움이요, 이 싸움은 종교이자 혁명이다. 따라서 체제모순을 마음공부로 해결하려는 것은 거짓 종교의 현혹이요, 역사의 잔혹함을 체제모순의 해결에서만 찾는 것은 거짓 혁명의 현혹이다. 믿음이란 “선과 악이 싸우는 역사의 싸움터에서 그리스도 편에 서서 생명을 걸고 싸우는 일”이요, 그 싸움은 “인생의 의무와 역사의 뜻”을 깨달은 씨의 장성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함석헌의 종교적 정의론에서 강조된 신앙은 죄악의 현실과 맞서기 위한 정의로운 힘이요, 구조악과 제도의 끝없는 겁박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길러진 긍지요, 씨(민중)이 스스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조직적으로 싸우게 하는 지혜이다. 함석헌의 종교적 정의론이 마침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종교와 혁명의 통일이다. “혁명이 종교요, 종교가 혁명이다. 나라를 고치면 혁명이요, 나를 고치면 종교다. 종교는 아낙이요, 혁명은 바깥이다.”

종교와 혁명을 통일시킨 신앙에 의해 실행되는 정의는 문명의 미래를 여는 방식에 대해서 섬세하게 주목한다. 즉 정의를 이룰 힘이 어떻게 실행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영민하다는 말이다. 함석헌의 종교적 정의론은 난폭한 힘의 활용을 거부하고, 사랑(아가페)의 힘을 증진시키면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고자 한다. 함석헌은 모든 정의로운 수고가 세속의 부질없음으로 바뀌고 마는 허무함을 계속해서 직면해야만 하는 역사적 실존의 무게를 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결코 부질없는 반복으로 가만두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한다. 그것이 함석헌의 아가페 사관이요, 나선형적 역사발전관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정의로운 미래는 강건한 사랑의 힘에 의해서 열린다. 함석헌은 오늘의 시대를 가리켜 “힘의 철학”이 아닌 “사랑의 철학”이 필요한 때라고 말한다. 힘의 철학에 의존한 신앙은 절대(자)의 명령이란 이름으로 종교적 거래를 유통시키지만 그것은 실상 ‘자기보존’이라는 목적을 따라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랑의 철학에 힘입은 신앙은 절대(자)로부터 오는 빛을 따라 자기와 세계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모험’을 추동한다. 정의 역시 마찬가지이다. 힘의 철학에 사로잡힌 정의는 자기 이해관계를 넓히기 위한 주장의 수단으로 평등을 외치고,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기 위한 변명의 수단으로 자유를 말하기 쉽다. 그러나 사랑의 철학 위에 선 정의는 자기를 넘어서 자유와 평등의 보편적인 이상이 실현되기까지 멈추지 않는다. 이 보편적인 이상은 온 세계의 궁극적 평화이다.

 

3) 전체가 평화를 누리는 공동선(共同善)의 추구로서의 정의

함석헌이 추구한 정의는 종교적인 인간이 갖춰야 할 개인의 덕성이 아니다. 개체의 선악에 착안한 “권선징악은 유치한 방법”에 불과하다. 정의는 항상 전체와 연관되어 있다. 인식론적 차원에서 볼 때, 진리는 전체와 연관되어 있고, 존재론적 차원에서 볼 때 선과 악은 전체로 함께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철학의 잦은 과오는 단편적인 증거에 대해 배타적인 집중을 함으로써 생겨난 과잉주장에서 생겨난다. 성선설과 성악설, 초자연주의적 유신론과 무신론, 관념론과 유물론, 우연론과 결정론, 합리론과 경험론,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등 모든 사상의 극단은 생성하는 우주의 다양한 요소 가운데 부분적인 것만을 자기 이론체계로 받아들인 데 기인한다. 참된 진리는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요 전체를 봄으로써 분별을 이끌어내는 지혜이다. 함석헌은 “하나가 된 전체에만 진리가 있습니다. 나도 아니요, 너도 아니요, 나와 너를 초월한, 나와 너를 다 같이 낳아놓고 이끌어가는 전체 속에 하나를 이뤄서만 너 나를 다 살리는 진리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정의를 “지상명령”으로, 또는 모든 것의 토대를 이루는 “기본적인 조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전체에 있다.

또한 우리가 정의담론에서 전체를 고려해야만 하는 이유는 모든 존재가 전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과 악 역시 전체를 이루는 유기체적 관계망 속에서 발생한다. 함석헌 사상의 특징은 각 생명이 우주 전체와 관계망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점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종교영성과 정치실천의 방향을 주도한다.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죄도 인류적인 죄요, 선도 인류적인 선이다. 온 세상이 다 악해도 나 혼자 선을 행하여 하늘나라 간다던 것은 낡아빠진 종교다. 세상에 그런 더러운 맘이 어디 있나? 인류 전체가 죄를 범하지 않고 내가 죄인 됐을 리가 없고, 내가 선을 하려는 데 전체를 잊고 될 수 없다.... 악을 하여도 세계 사람이 다 하나가 되어서 하면 그것이 선일 것이다.... 하나가 참으로 하면 반드시 그것이 전체에 느껴진다.... 그 힘이 곧 성령이다.”

선악이 만일 전체와 관계되어 있다면, 정의는 개인/집단적 도덕성에서만이 아니라 전체를 위한 공동선의 추구로써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모든 문제는 전체성의 비전을 잃고 상대주의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지 않은가? 우량 개체의 힘을 찬양하는 신자유주의의 윤리도, “수량에 굴복한 추상적 평등” 이외의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무기력도 전체성의 비전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과장일까?

전체구원을 지향하는 함석헌의 정의론은 씨이 당하는 고난을 직시하고 역사의 뿌리에 뒤얽힌 비극에 대해 민감한 감수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역동적이다. 그는 고난을 뚫고 솟아오르는 씨의 생명운동을 마지막까지 신뢰하고 있는 데, 그것은 개체의 한계를 초월한 무한성(전체, 하나님)의 호소에 귀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씨이 씨로서 자신의 생명운동을 이어가는 것은 바로 전체이신 하나님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역시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 차원을 지닌다. 정의가 때로는 재화의 분배기술이나 정치적 이상, 또는 도덕적 열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종국적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우주적 경륜에 대한 씨의 적극적인 느낌에 기인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정의는 전체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이상적인 목적이요, 역사의 수레바퀴를 생동하게 만드는 이상적인 관계요, 그 목적을 발동시키고 그 관계를 이끌어내고자 열망하는 이상적인 상태이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이 말한 정의의 다른 이름은 평화다. 정의가 바로 설 때 출현하는 실체가 곧 평화요, 참 평화를 가늠하는 기준이 곧 정의이다.

 

함석헌의 정의론은 절대적 차원의 부름과 결부된 종교적 정의론이다. 그의 사상은 한편으로는 삶의 도리와 역사적 책임을 망각한 종교를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아론적 정신지체에 빠진 현대문명의 각성을 촉구한다. 그는 정의를 향한 외침이 상대주의의 늪에 빠진 평등과 자유로 전락하지 않도록, 씨(민중)의 생명운동에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모든 정의주장의 궁극적 합리성은 오직 민중이 당하고 있는 고난에 의미 있는 답을 제시하는 것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고난의 문제는 씨이 낡은 종교와 낡은 정치를 온존시키는 힘의 철학(강자를 위한 세계관)을 극복하여 새로운 문명을 불러오지 않고선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아가페 철학에 입각한 평화의 비전이 도래해야만 한다. 이 비전이 씨의 생명운동을 주도하게 될 때 비로소 정의가 이뤄질 것이다. 그 정의가 억압하는 강자들에게는 회개를, 눌린 약자들에게는 역사의 비극을 뚫고 일어서게 만드는 믿음을 부여할 것이다. 미래가 아닌 바로 여기서.

“이 세대의 강자들아, 너희는 재를 쓰고 통회하여야 한다. 너희는 ‘힘은 정의라’ 하면서 ‘약육강식’이라 하면서, 약한 자를 압박하고 강탈하지 않았나. 힘을 예찬하고 국가란 이름 아래 우상을 세워 피로써 제사하고 그 밑에서 난무하지 않았나. 그러나... ‘정의의 임금’은 살아서 대진동을 일으킨 줄을 알고 믿어야 한다. / 이 세대의 눌린 자들아, 너희는 강자의 철학에 속았느냐. 간사한 자의 유혹에 빠졌느냐. 왜 너희는 의심하려 하고, 자포자기 하려하고, 원망하려 하느냐. 너희의 구주, 정의의 임금은 그 오실 차를 선로에 실어놓고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맘에 그가 더디 오신다 하나, 그가 더딘 것이 아니요, 우리의 믿지 못함이다. 눈을 들어보라. 정의의 대로는 직주(直走)하는 철로같이 세계의 복판을 뚫고 환하게 열려 있지 않나. 그의 수레는 언제나 올 수 있게 준비되어 있다. 천국은 언제나 손끝에 있다. 어리석은 우리가 시간은 항상 그만인만큼 여겨, 차에 오를까 말까, 올랐다 내렸다 하는 고로 연민의 정 깊은 그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낙오될까 희생될까 하는 말에 우리의 올라타기를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고의순준(孤疑巡逡)하는 현대의 가엾은 인생들이여, 너희는 결연히 태도를 결하고 정의의 노선에 올라타라. 그러면 그 차는 지존자(至尊者)의 깃발을 날리며 즉시에 발차할 것이다. / 믿는 자야, 너는 건장하라. 눈을 크게 뜨고, 귀를 멀리 기울이라. 낮 동안의 격전에 피곤한 몸을 네가 가로누이려 껌벅이는 등잔 밑에 꿇어앉아 간구(懇求)의 손을 들려 할 때, 에덴동산의 보드라운 풀 속을 스르르 기어들던 장사(長蛇) 모양으로, 어디론지도 모르게 네 가슴속에 기어들어 ‘정의는 어디 있느냐’고, 진실한 듯이, 동정하는 듯이, 가르치는 듯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음이 몇 번씩일 것이다. 그러나 너는 굳세라, 그리하여 단연히 부르짖으라. ‘사탄아 물러가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 오시고 지체 없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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