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참의 씨를 붙잡고
가톨릭에서 내게 글을 써달라고 그러는데, 잡지가 아마『성서생활』이라 그러지요?
『성서생활』이라, ‘생활’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깊이 생각을 않고 쓰는 일이 많이 있나봐요. 거기 잘못이 있지 않나. 정부에서 많이 쓰는 거로, 툭 하면 요새 ‘질서의 생활화’라 무슨 뭐 그런 것도 있고, 그건 모든 걸 살림으로 하자 그 말인데, 그런 때 그럼 그 생활이란 것을 그렇게 절대 표준으로 할 것일까? 거기 비판이 안들어가고 그래도 좋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 뒤집어 생각해야 옳은데, 우리에게 그걸 적용하면 ‘생활의 신앙화’라 그럴 수가 혹 있겠는지 몰라요. 신앙의 생활화 혹 좋은 의미에서 그럴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생활의 신앙화’라고 그래야 옳을 건데.
사실은 왜 그런고 하니 아주 그 점에서 우리는 보통의 이 세상하고는 대립하는 거예요. 사는 태도가 그러니까 생활이라는 걸 무조건 그저 당연한 걸로 알아서 무엇이든지 ‘생활화’ 그러면, 물론 좋은 의미로 그렇게 쓰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면 잘못될 수가 있다 그 말이에요.
가령 예를 들면 신앙의 생활화라고 그럴 때,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부터 한다 그런 모양으로 신앙은 그렇게 하자 그런 의미로, 물론 그렇게 하면 좋게 들리는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 생활이라는 걸 본래 누가 만들었나? 생활이라는 건 지금 현대 사람은 다 이 문명의 사람들인데, 그러니까 이 살림이 다 동서양이 비슷하게 됐어요. 다른 점도 있지만 그저 현대적인 살림을 한다는 것인데, 그 현대적인 살림이 뭐냐. 요새 이렇게 문명했다고 해서, 그런 걸 이용해서 이렇게 깨끗하게, 살뜰하게, 유쾌하게, 별 불평이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그러면 좋은 걸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이 정말 신앙에 다 합하는 일일까? 그걸 한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그래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세상을 화평케 하러 온 거 아니다. 전쟁을 일으키러 왔다” 그러시기도 하고,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그렇게도 하셨는데, 그 불이라는 건 어떤 의미로 불을 땅에 던진다고 그러셨을까? 불이란 물론 빛도 있고 따뜻하게도 하고 그러지만 그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산 위에 세운 성이다, 등불이다” 그럴 때의 것과는 다른 것일 텐데, 불이란 아무래도 불살라버리는 것을 의미하고 계신 걸 거예요.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그 불이 붙었다면 좋을 뻔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앞으로 받을 세례가 얼마나 하다는 걸 너희는…….
세상에다 온통 불을 놓아 살라버린다는 것은 아주 전적으로 이 세상을 부인하는 건데, 그런데 현대 사람들은 아무래도 생활을 부인할 수 없지. 안 살 수야 없지 않아요? 직업이라도 있고 집이라도 한 칸 가지고 그런게 통속적인 개념에 들어가는 건데, 그런 것은 다 옛날에 믿지 않은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한 건데,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그게 잘못이다 그 말이에요. 그러면 신앙은 죽어버리고 말아요. 왜 그런고 하니 세상에서 아주 똑똑한 사람으로 제 집이나 가지고 아주 행세하면서 살아가려고 그럴려면 이 신앙 그대로 지킬 수 없지. 안되는 거예요. 오히려 믿는 사람의 생각은 사람의 살림이라는 걸 세속이라, 세속적인 살림이라 그러지 않아요? 그래 예수의 말씀은 세상을 상대적으로 두고 “이 세상은 이렇지만 너희는 이래야 한다……” 그러셨지요.
현대 사람의 특성은,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도 세상이라는 걸 무조건 긍정하고 들어가요. “아무래도 살림이야 해야 하지 않아요?” 그래요. 그 살림이라는 게 보통사람으로 하면 가정생활이라는 걸 하면서 돈도 있고, 직업을 하면서 살아가는, 내용은 각각 다르지만 살아가는 걸 위주로 하는 게 그건데, 지금 크리스천은 “그 살림은 분명히 해야지……” 그러니까 그걸 실제 하려니까, 그때는 언젠지 모르게 신앙의 깨소금 같은 맛이 약화되고 말아요. 그걸 그대로 가지곤 도저히 살림이 안되니까.
그러니까 세상에선 맞지 않게 안전율로, 아주 소수파로 소외당하는 게 당연한 걸로, 그렇게 알아야겠는데, 소외당한다고 해서 이제 그걸 도리어 “왜 우릴 소외하느냐? 우리도 같이 데리고 가야지……” 그래요. 그럴 때 그 사람들이 그럼 우리를 위해서 신앙화 해가지고 우리와 같이 한 무엇으로 들어올까? 그렇게는 아마 안될 겁니다.
잔인한 말 같지만, 이 세상의 이걸 우리 것으로 만들어서 우리 맘대로 하겠다 믿는 사람들 생각이 그건 데, 예수는 아예 그렇게 생각 안하셨어요. “내 나라는 이 땅엔 있지 않다……” 그러셨어요.
그래 예수님이 그만 혁명을 한 것처럼 돼버렸는데, 소위 혁명을 하러 온다고, 더구나 아주 정치에 혁명을 하러 왔다고 그렇게 말을 해요. 그건 너무 과한 소리지. 안될 말이오.
내가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건 아주 싹 타버렸으면 좋겠다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도대체 아주 전적으로 변화해야 된다. 다 타버리고 이 살림이라는 것이 불 속에서도 변치 않는 금처럼 아주 안타는 부분만이 남는 것, 그런 게 있어야겠는데, 이 세상이 이 현대 문명이라고 하는 게, 살라버리면 안 탈게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안 타고 남을 것이 무엇이 있을까?
이론대로 한다면, 우리가 열심히 해서, 운동을 해서 정치도 뭐도 우리 손으로 신앙적으로 하면 그러면 좋지요. 그러나 그야말로 그건 참 공상이오. 그렇게 될 리가 있나요? 이 세상에서 다수파가 될 리가 없어요. 마지막까지 소수파지. 그 점에서 만일 거기 연연해서 “에이, 그럼 차라리 죽어버리자, 우리가 이대로 살아서 뭘해요” 하겠지만, 그럼 우리가 정권을 잡는다 하자, 그럼 누가 그걸 할 사람이 있느냐? 그 사람이 가령 하나님의 뜻대로, 성령이 가르치는 그것대로 정치를 할 것 같으냐? 그럴 사람이 있을까? 소위 정치라는 걸 그렇게 할 수가 있을까? 믿는 사람이!
이제 그렇게 생각하면 분명해 지는데, 그러니까 이제야 분명해지는데 그래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 분명해지는 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는데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에 대해서 어떻하면 됩니까 물으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과 참으로 해라”,그러셨는데, 영은 알겠는데 참은 왜 참이라 그러셨을까? 참은 왜 거기다 더했을까?
그걸 늘 생각해봐요. 그런데 아무래도 알 것 같은데 좀 시원치 않아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으로 예배해라” 그건 알겠는 데, “영과 참으로 해라”는 왜 그러셨을까?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하나님께 대하는 태도는 이것인데, 하나님이 영이라면 나도 영적이에요. 여기 이 육체는 아니니까, 현상계에 있는 이건 아니니까 이거는 잊어버리고, 그래 영적이라 한 거고. 그럼 세상에서 살아야 할거니까 세상에서 사는 데는 참이 아니고는 안되는 거고. 왜냐하면 이 세상은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여긴데, 거짓으로는 안되니까. 그래 지금 생각되는 거는 그렇게 되는군요. 이런 말은 그래서 하신 것이다 라고.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우리 맘대로, 이성은 뭐냐? 기독교인이 활동을 해서 온통 세상을 우리 맘대로 해가면 되지 않습니까 할지 모르지만 그렇게는 안될 거요. 그건 망상이지. 그런 걸 바라면 자연히 세상하고 타협 안하고는 안될 거요. 그러니까 사회운동을 많이 한다는 사람도 심지어는 교회 무슨 운동을 한다는 것도, 그걸 못 면했을 거예요. 살림이라 하면 암만해도 현대적인 이 살림을 해야 되지 않아요? 그걸 신앙으로, 신앙에 의해서 좀 더 능력있게 잘해나가면 그게 크리스천인 거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예수님은 그분의 심경은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이때까지 알기를, 아예 첨부터 세상을 우리 맘대로 정치를 할 수 있으려니 그런 망상은 하지말고, 그렇하고 진리의 씨를 잡고 요것이 언제 가서 승리를 하겠는지 그건 하나님께 달린 거니까 모르고, 살아 있는 동안엔 언제나 세상과 끝까지 싸워가는 거지요. “그럼 시민 생활 하지 말랍니까?” 하겠지만, 안하는 건 아니오. 허긴 허지. 그렇지만 거기서 아주, 이렇게 자리를 얻고 이상이 실현돼서 대접받으면서 그렇게는 아마 안될 거라고 하는, 그렇게 될 줄을 처음부터 각오하면서 세상을 우리가 우리 맘대로 이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진리를 증거하는 게 목적이지요. 그러면 아마 떨어져나갈 사람이 많을 거요.
1984. 7. 22.
퀘이커 서울모임 월보14 1984.7월
저작집30; 15-145
혹 좋은 의미에서 그럴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생활의 신앙화’라고 그래야 옳을 건데.그런 모양으로 신앙은 그렇게 하자그런 의미로, 물론 그렇게 하면 좋게 들리는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 생활이라는 걸 본래 누가 만들었나? 생활이라는 건 지금 현대 사람은 다 이 문명의 사람들인데, 그러니까 이 살림이 다 동서양이 비슷하게 됐어요. 다른 점도 있지만 그저 현대적인 살림을 한다는 것인데, 그 현대적인 살림이 뭐냐. 요새 이렇게 문명했다고 해서, 그런 걸 이용해서 이렇게 깨끗하게, 살뜰하게, 유쾌하게, 별 불평이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그러면 좋은 걸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이 정말 신앙에 다 합하는 일일까? 그걸 한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그런게 통속적인 개념에 들어가는 건데, 그런 것은 다 옛날에 믿지 않은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한 건데,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그게 잘못이다 그 말이에요. 그러면 신앙은 죽어버리고 말아요. 왜 그런고 하니 세상에서 아주 똑똑한 사람으로 제 집이나 가지고 아주 행세하면서 살아가려고 그럴려면 이 신앙 그대로 지킬 수 없지. 안되는 거예요. 오히려 믿는 사람의 생각은 사람의 살림이라는 걸 세속이라, 세속적인 살림이라 그러지 않아요? 그래 예수의 말씀은 세상을 상대적으로 두고 “이 세상은 이렇지만 너희는 이래야 한다……” 그러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