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새 와서야 이제 정말 성경을 단단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전에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그랬지만 이젠 정말 내 자신의 생각으로 성경을 단단히. 다른 이들보고도 보라고 그래야겠다. 무교회 사람들이 제일 성경에 열심이고, 기성교회 분들은 교직자는 어떤지 모르지만 일반 신도들은 아마 그렇지 못한 모양인데, 그런 식으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시국을 볼수록 생각은 성서로 귀착된다.
이런 시국에서 내게 있는 것으로 조언을 한다면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이다. 그리고 성경을 자세히 보라. 그러면 조금 뭐 이렇게 방향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수가 많지 않아도 괜찮다. 본래 많지 않은 법이다. 그런 점에서는 노자 공부 한 것이 참 좋은 일이다. 한둘이라도 좋으니 세상에 말려들지 않고 이기고 나가느냐가 문제. 그러면 그 정신은 면면이 살아남아 이어질 것이다. 사람은 참 말을 하고 가야지.(중략)
이 세상이 하나님 없이 과연 우연인가? 그렇다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다 우연이니 인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폭력주의로 가는 문명일수록 “네가 왜 내게 대해서 이러느냐?” 할 때에 “우연히 그런다……” 하면서 자꾸 난폭하게 군다면 말이 되겠는가? 우연히 오는 폭력이니까 아무 항변도 못할 거이다. 할 말이 없어진다. 모든 것이 우연이니까. 그러니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우연으로 과연 이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가? 이걸 가지고 인류를 이끌어갈 수 없는 건 분명하다.
결국 인간은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생각하려면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는 생각은 안된다. 생각하는 사람이면 그걸 안다. 무슨 바른 생각이 나오려면 안정 안하곤 안된다. 마음이 흥분해서 분한 생각, 좋은 생각, 미운 생각 가지곤 안돼. 그건 벌써『중용』에서 공자님이 다 말씀하셨어. “사람이 너무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이 있어도 마음이 올바르게 못 되고, 너무 슬퍼도 안되고, 너무 분해도 안되고……” 이렇게 몇 가지 조건을 들었어. 그래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야 돼. 『대학』의 8조목이라는데도 이런 말이 있어요. “마음이 평안해져 야 생각을 차분히 하고, 차분히 생각해야 무엇이 얻어진다.” 사람이 본래 그런 건데, 그래서 자라서 이 정도 되니까, 요거 뭐 웬만치 됐다고 우쭐해서 이제 뭐 하나님 없어도 산다 하는 식으로 되어버렸어. 이런 태도로 돼서 예까지 온 거니까, 이런 점을 믿는 사람인 다음엔 단단히 생각해야 돼.
그래 이 대목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는 말인데, 왜냐하면 싸움에 지고 이기고는 인간은 모른다. 그건 우리 힘대로만 되지 않는다. 살고 죽고도 임의대로 안된다 그 말이에요. 감히 누가 내게 모든 계획을 디 세워서 이즈 자신 있다고 그럴 수 있을까? 그러니까 승패는 우리가 알 수 없단 말이 옳은 말이고, 우리는 다만 우리의 할 책임을 다하는 건 데, 죽겠는지 살겠는진 모르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은 내가 한 자국은 후세 사람이 그걸 판단할 터인데, 그것만이 남지. 그러니까 목숨이 있는 동안까지 내가 결정할 일은, 내가 내 몸가짐을 어찌할 거냐? 내가 어느 방향에 설 거냐? 그것만은 해야 돼요.
지금까지 아직 평안한 것 같으니까 이럴까 저럴까 두리번거리지만, 또 정부에 기대보기도 하고 그러지만, 이제 정말, 가령 핵전쟁이 터진다 그럽시다. 그때에도 정부 쳐다보고 있겠어요? 그때에는 어쩔 수 없이 나는 내가 내 문제를 결정할 수밖에 없지. 내가 결정할 때에는 그럼 어떻게 하느냐. 그땐 하나님 상댈 안할 수가 없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지만 내 마음에 생각을 한다고 할 때에는 대상이 저기에 계시지. 내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간에 저기 맞부딪치는 벽이 하나님이신데 그건 무시할 수 없지 않아요?
그런데, 그때엔 옳고 그르고가 문제가 돼. 죽고 아니 죽고는 그건 뭐 내 임의대로 되지 않는 거니까 건 할 수가 없는 거고. 사람이 죽는 순간에도 바른 건 바른대로 알고 죽어야지 하는,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일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는, 내 몸은 죽었어도 내 혼은 사는 거고, 혼이 살아 있으면 또 그건 영원히 그담엔 사는 거고. 그걸 가르쳐주는 것이 이 성경인데, 성경말고 다른 데서는, 정치 교과서에서는 그걸 배울 수가 없어요. 그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어쩌면 사람들이 전부를 차지해서 온통, 우리가 주장하니까 누구도 종교가도 다 내 말을 들어라, 예술가도 내 말을 들어라 그럴 수가 있어요? 그 사람들은 미련하니까 그런다 하더라도, 그럼 생각 있는 나도, “그럼 할 수 없지” 이러고만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답답한 거는 내나 누구나 용기가 나야지! 생각은 있지만 솟구치는, 솟아나는 힘이 아니고는 힘을 억지로 내는 수는 없단 말이야. 억지로 낸다고 하는 힘 일수록 그건 참 노릇을 못하고 말아요.
그러니까 나오는 건 ‘견의불위무용’(見義不爲無勇)이라, 옳은 일을 보고도 하지 않는 건 용기가 없어 그러는 것이요, 용기는 솟구쳐 나와야 하지 억지로 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없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라면 참 기도하는 것밖엔 없는데, 이때까지 내가 체험해 아는 바로는 내게 달린게 아니라 힘은 성경에서 얻는데, 이성경은 전에 계시던 선생님들한테서 전해지던 진리를 통해 아는데 선생님은 이 선생 저 선생이 아니라 특별히 내가 사람 되는 일에 대해서 “이분이 그래도 내 신생님이다” 하는 그런 분은 다 있지 않소? 완전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이 아무개한테서 사람 되기를 대충은 배웠소……” 그런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아요? 여럿은 몰라도.
또 그런 선생님이 계시다 그런다면, 적어도 그의 말이라면 언제나 그걸 잊을 수가 없고 일부러 힘을 써서 그걸 잊어서는 안되는 건데, 그렇다면 우리가 이 책(성경)을 빼놓고 어딜 가서 그 말씀을 구하겠어요.
노자도 있고 장자도 있고 그러긴 하지만, 내가 정말 내 주님으로 택한다면 그래 장박사님을 두 번이나 울게 만든 소리가 그 소리지만 “내가 늘상 노자도 좋아하고 장자도 좋아하지만, 내 주님이라고 하는 데서야 예수님 내놓고 달리 있을 수가 있겠나?” 장박사님 그 동안에 얼마나 마음에 걱정하셨는지 두 번씩이나 눈물을 홀리셨단 말이야 그러니 사람이라는게 그런거요.
이제 참 점점 더 시대가 어려워 가는데, 그러니까 그럴수록 안정된 마음에서야만 돼. 들뜬다는 게 뭔고 하니 밖의 세력에, 외세에 노는 거요. 기뻐도 무서워도 다 외세야. 내가 턱 내 마음의 주인이 안되고는 내가 안정 못해요.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 된다는 건 하나님을 내 속에 맞아들이는 것, 그러면 자연히 내 속에 “하나님! 내가 모르겠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이젠 하나님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고 마음을 그렇게 가지게 돼요! 하나님이 누구신지 몰라도 괜찮아. 모르는 게 마땅한 거요. 하나님을 알아서 믿는 게 아니라 모르니까 믿는 거지! 천년 가도 만년 가도 누군질 모르겠는데, 모르는 인데, 모르니까 믿는 거지. 다 만 내가, 우리가 짐작하고 알긴 이 세상이 온통 이러고 있을진대 그이야말로 참이요 사랑이지, 부족이 없겠지. 그이는 누구 편드는 일이 없고 낯을 봐서 하는 게 없는 이겠지 우리 생각으로 올린 찬사가 기껏 그거야.
도덕은 우리에게 있지, 그이에게 있는 것 아니에요. 사람과 사람관계에서 도덕인데 말이오, 그걸로 말을 하니까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다 그러지 하나님에게 거짓이요 참이요 그런 구별이 있을 리가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 자리가 무슨 자린지 그걸 안 찾곤 못견디는 게 사람인데, 그걸 찾는 사람은 다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훨씬 밝은 빛을 속에 가졌고, 또 일이 있을 때 용기도 냈고, 권력의 힘 앞에서 겁을 내지도 않았고, 그래서 제 할 노릇들 하고 제 할 말을 하고 갔는데. 이제 가다가 가다가 해방이라고 됐다가 몇 십년을 지내왔는데, 이 몇 십년이 이게 뭐예요?
우리가 알기는 잠깐 동안의 반짝하는 빛에, 캄캄한 밤에 잠깐 있은 번개 빛에서 앞을 환히 봤던 모양으로, 해방이 되니까 “야, 이런 세상이 있는걸 그랬군…… !” 보긴 봤거든요? 그럼, 그것을 우리가 잘하면 앞으로 걸어가는 길에 그 반짝하고 보았던 그 체험 때문에 어느 방향을 가려서 갈 수가 있지 않을까? 그때 한번 번쩍했으면 또 한 번 번쩍 못할까? 그런데 이 싸움을 하는 동안에 그런 거 다 달아나고 말았단 말이야.
그래 6.25가 터진 그날, 그 소식을 듣고도 이걸 읽고 싶어서「이사야서」30장을 같이 읽었는데, “이제라도 네가 안정하고 돌이켜서 잠잠하라. 그래야 구원이 있다.” 그래야 눈이 옳게 밝아지고 볼 걸 보고 들을 걸 듣고 그러지, 겁을 내거나 홍분해선 안된다 그러고 싶어.
지금 해방 후 근 40년을 이렇게 제 노릇 못하고, 말하는 사람 일하는 사람 다 제 노릇을 못하면서도 사회 전체 분위기는 무엇에 홀렸는지 미쳐 돌아가! 모두 정신 잃고 있어. 그러니 민족이 당초에 들떠서 양심의 판단을 못하게끔 됐어요.
그러니까 마음을 가라앉혀서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앞으론 무슨 일이 있을거냐, 이런 걸 느끼는 마음이 와야겠는데, 지금 형편은 마치 피난 차간에서 싸움하는 격이야. 그러다가 피난 차간까지 부서지면 다 죽고 말 텐데 참 어리석은 사람들이야. 앞서 잠깐 번쩍할 때 봤던 환상이 분명히 있긴 있는데 그런 것조차도 다 잊어버릴 형편이야, 이러다간.
그러니까 만일 지금이라도 날보고 하고 싶은 말을 하란다면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이사야서」30장을 읽고 지나갈까 한 것입니다.
1984. 3. 25 퀘이커서울모임 감화말씀(정리 조형균)
퀘이커서울모임 월보 7 1984. 4월
저작집30; 15- 113
그래 장박사님을 두 번이나 울게 만든 소리가 그 소리지만 “내가 늘상 노자도 좋아하고 장자도 좋아하지만, 내 주님이라고 하는 데서야 예수님 내놓고 달리 있을 수가 있겠나?” 장박사님 그 동안에 얼마나 마음에 걱정하셨는지 두 번씩이나 눈물을 홀리셨단 말이야그러니 사람이라는게 그런거요.우리 생각으로 올린 찬사가 기껏 그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