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 의로운 기상… 4·19혁명도 주도했다
당시 주역들 만남 통해 밝혀진 ‘그날의 진실’ 본지 최초 공개
숭일고·광주고·조대부고 등 앞장… 경찰 총탄에 당당히 맞서
| 1960년 4월 19일 오전 9시 30분께 광주고 정문 앞에서 학생 시위대와 경찰이 맞서는 모습. 광주 4·19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역사적 순간으로 기록된다. /4·19혁명광주고교공로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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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과 4·19]
일제강점기 때 3·1운동에 버금가는 만세운동으로 기록된 ‘학생독립운동’의 주역, 광주 학생들의 의로운 기상은 1960년 ‘4·19혁명’ 때도 여전했다.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폭압에 맞서 학생과 시민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4·19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내며 대한민국 시민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다.
이러한 4·19의 시발점은 실종 고교생(김주열)의 변사체가 발견된 경남 마산과 4천여명의 고려대생들이 분기탱천한 서울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역사를 더듬어보면 의향(義鄕) 광주 역시 이에 못지 않았다. 이를 증명하듯 1960년 당시 광주의 고교생들이 최근 한 자리에 모여 ‘광주 4·19혁명 이름없는 별들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연찬회를 갖고, 당시를 회상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이에 본지는 학생운동 주역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1960년 광주의 4·19혁명을 재구성했다. <편집자註>
◇ 함석헌 선생 시국강연 = 자유당 정권의 폭정이 극에 달하던 1960년 2월, 광주 YMCA 2층에서는 함석헌 선생의 시국강연회가 있었다. 당시 강연을 듣기 위해 몰려든 시민은 YMCA건물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 거리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날 강연장의 청소와 좌석 배치, 청강 안내, 장내 질서 유지 등은 신명식 Hi-Y광주시연맹 회장과 김선담, 이병열, 정원채 등 각 학교 Hi-Y, Y-ten 임원들이 자원봉사를 맡아 매끄럽게 진행하는 바람에 강연회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함석헌 선생은 광주 강연에서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이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를 부정하게 치르려고 획책한다며, 신랄하게 비판하고 광주시민들이 독재타도에 앞장서 줄 것을 당부했다.
◇ 부정선거 규탄 사전모의 = 함석헌 선생의 시국강연으로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민주주의 수호에 대한 의지가 더욱 높아진 가운데 1960년 3월 5일 광주 YMCA 2층에서 광주YMCA 김천배 총무의 도움을 받아 광주 Hi-Y연맹회장과 광주 Hi-Y 임원진, 광주일고 대표 권공영, 광주숭일고 대표 김귤근, 조대부고 대표 신우식·이명진·이삼균, 광주상고 대표 신동철·김종철·선번남·채무남, 광주여고 대표 성희자·윤수자, 성빈여숙 대표 김선자, 전남여고 대표 서군강 등은 자유당의 부정선거 획책을 규탄하는 궐기대회를 갖기로 결의하고, 세부 행동은 각 학교별로 계획을 세워 실시하면서 다른 학교와 련락해 동조하기로 사전 모의했다. 마침내 3월 15일 정오, 부정선거 중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광주 금남로 민주당사 앞에서 시작돼 전남도청을 향해 진군하는데 3월 5일 사전모의에 참여했던 신명식, 이병열, 신우식 등 고교생들이 선봉에 섰다.
◇ 2차 사전모의 및 실행 = 1960년 4월 15일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의 처참한 소식을 대한YMCA 간사 이남주(후에 광주YMCA 총무)로부터 전해듣고 광주YMCA와 YWCA 지도자들에게 보고했다. 이어 이틀 뒤, 4월 17일 신명식 조대부고 학생회장을 필두로 광주고 Hi-Y(김선담·정원채·이병열·신양현·이채용·이해균·박철환 등) 임원들과 숭일고, 조대부고, 광주상고, 전남여고, 광주여고, 성빈여숙 대표들이 광주학생의 기개를 살려 봉기하기로 결의했으며, 먼저 봉기한 학교를 따라 즉각 궐기하기로 사전 모의했다.
3·15부정선거와 김주열 학생의 비참한 죽음, 4월 18일 고려대생들의 시위에 정치 깡패들을 동원하여 무참히 짖밟은 일련의 사태로 분노와 흥분이 극에 달한 4월 19일 오전 10시, 광주고 3학년 Hi-Y 정원채 학생의 비상 타종을 신호로 김선담·김이중·이병열·신양현·이채용·이해균 등이 교문을 부수고 나와 시작된 4·19 광주학생 시위는 숭일고와 조대부고 등 인근 학교로 봉기사실이 전달되면서 광주 전역에서 역사적인 4·19혁명을 이루게 됐다.
◇ 주요 기관·시설 습격 = 당시 주요 기관·시설 습격 상황을 보면 충장로파출소는 숭일고와 조대부고가 맡았고, 광주농고는 누문동파출소를, 광주고와 광주상고는 계림파출소를 습격했다. 또 광주공고와 숭일고, 조대부고 학생들이 연합해 학동파출소를 점거했으며, 양림파출소는 숭일고가 주도한 가운데 조대부고와 광주공고 학생들이 지원했다. 월산동파출소는 수피아여고와 광주고, 광주상고가 나섰으며, 동명파출소는 조대부고와 광주공고가 맡았다.
주로 광주고와 광주상고 학생들이 집결했던 광주소방서에서는 살수소방차 1대가 파괴되기도 했으며, 금남로 성결교회 앞에서는 시위를 저지하던 경찰 차량 2대가 학생들의 투석으로 파손됐다.
전남도청 옆 광주여고 4거리 도청 차고지 앞에 집결한 조대부고·광주공고·광주여고 시위대는 경찰 간부와 담판을 벌이는 대담함도 보였다. 시위대를 이끌던 신명식 조대부고 학생회장은 △마산 김주열 학생 참사사건 책임자 처벌 △폭력적인 시위진압 중지 및 구속자 석방 △3·15부정선거 원천무효 등을 주장하며, 경찰 간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 19일 저녁 학생 총궐기 = 밤 8시 30분께 모든 시위대가 광주경찰서 앞으로 집결하자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탄을 연발하며 주동자 검거에 나섰다. 하지만 학생들의 극렬한 저항으로 시위 진압에 실패하자 경찰은 밤 9시 25분께 실탄을 발사했다. 이 때문에 광주경찰서 앞과 YMCA 앞, 성결교회 앞 시위대에서는 사상자가 속출했으며, 학생과 시민들은 경찰의 총탄과 추격 속에서도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신속히 옮기면서 집회와 시위를 이어갔다. 자정 무렵 뿔뿔이 흩어졌던 각 학교 시위대는 점차 하나를 이뤄가며 거리를 누비는 시위를 강행했다.
당시 고교생 집단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은 광주고 김선담·이홍길·이병열·신양현·정원채·이채용·이해균·김이중·조병수·박화부·홍갑기·박석무, 광주공고 김영용·이의성·서자현·나종문, 광주농고 김희창·김재화·전기철·김영갑, 숭일고 김귤근·서동용·윤승웅·최영길, 광주상고 채부남·선번남·전해룡·김종철·박석남·신동철·박찬재, 조대부고 신명식·신우식·이삼균·구양술·전만기·최용주·안재근·김재성·이명진·정기수·안익현, 광주여고 신영자·윤수자·성희자·채조자·백금자, 수피아여고 정지나·백경옥·박덜례·지경례 등이다.
이들 외에 광주사범학교와 광주일고, 전남여고 등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고자 했으나 이들은 학교측의 철저한 통제로 단체행동이 어렵게 되자 개별적으로 다른 시위대에 끼여 참가했으며, 19일 밤 저녁 모든 학교가 참가한 총궐기에 분연히 나섰다.
한편, 지난 2일 광주YMCA 백제실에 모인 광주 4·19혁명 주역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장의 모습이었으나 그날의 참상과 의분을 토로할 때는 그날의 혈기가 올곧이 드러났다.
4·19혁명 공로자회 유인학 회장(전 국회의원)과 4·19민주혁명기념사업회 이병열 회장 등 1960년 당시 광주에서 학생운동을 이끈 50여 명의 주역들은 유명을 달리한 동지들을 기억하며, 암울한 시기에 젊은 혈기로 대한민국 새역사를 창조하는데 앞장섰던 공로가 이제라도 널리 알려질 수 있기를 기대했다.
/정리=김경석기자
http://www.jndn.com/article.php?aid=1541636832271195028
광주학생 의로운 기상… 4·19혁명도 주도했다
당시 주역들 만남 통해 밝혀진 ‘그날의 진실’ 본지 최초 공개
숭일고·광주고·조대부고 등 앞장… 경찰 총탄에 당당히 맞서
[광주학생과 4·19]
일제강점기 때 3·1운동에 버금가는 만세운동으로 기록된 ‘학생독립운동’의 주역, 광주 학생들의 의로운 기상은 1960년 ‘4·19혁명’ 때도 여전했다.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폭압에 맞서 학생과 시민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4·19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내며 대한민국 시민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다.
이러한 4·19의 시발점은 실종 고교생(김주열)의 변사체가 발견된 경남 마산과 4천여명의 고려대생들이 분기탱천한 서울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역사를 더듬어보면 의향(義鄕) 광주 역시 이에 못지 않았다. 이를 증명하듯 1960년 당시 광주의 고교생들이 최근 한 자리에 모여 ‘광주 4·19혁명 이름없는 별들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연찬회를 갖고, 당시를 회상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이에 본지는 학생운동 주역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1960년 광주의 4·19혁명을 재구성했다. <편집자註>
◇ 함석헌 선생 시국강연 = 자유당 정권의 폭정이 극에 달하던 1960년 2월, 광주 YMCA 2층에서는 함석헌 선생의 시국강연회가 있었다. 당시 강연을 듣기 위해 몰려든 시민은 YMCA건물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 거리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날 강연장의 청소와 좌석 배치, 청강 안내, 장내 질서 유지 등은 신명식 Hi-Y광주시연맹 회장과 김선담, 이병열, 정원채 등 각 학교 Hi-Y, Y-ten 임원들이 자원봉사를 맡아 매끄럽게 진행하는 바람에 강연회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함석헌 선생은 광주 강연에서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이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를 부정하게 치르려고 획책한다며, 신랄하게 비판하고 광주시민들이 독재타도에 앞장서 줄 것을 당부했다.
◇ 부정선거 규탄 사전모의 = 함석헌 선생의 시국강연으로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민주주의 수호에 대한 의지가 더욱 높아진 가운데 1960년 3월 5일 광주 YMCA 2층에서 광주YMCA 김천배 총무의 도움을 받아 광주 Hi-Y연맹회장과 광주 Hi-Y 임원진, 광주일고 대표 권공영, 광주숭일고 대표 김귤근, 조대부고 대표 신우식·이명진·이삼균, 광주상고 대표 신동철·김종철·선번남·채무남, 광주여고 대표 성희자·윤수자, 성빈여숙 대표 김선자, 전남여고 대표 서군강 등은 자유당의 부정선거 획책을 규탄하는 궐기대회를 갖기로 결의하고, 세부 행동은 각 학교별로 계획을 세워 실시하면서 다른 학교와 련락해 동조하기로 사전 모의했다. 마침내 3월 15일 정오, 부정선거 중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광주 금남로 민주당사 앞에서 시작돼 전남도청을 향해 진군하는데 3월 5일 사전모의에 참여했던 신명식, 이병열, 신우식 등 고교생들이 선봉에 섰다.
◇ 2차 사전모의 및 실행 = 1960년 4월 15일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의 처참한 소식을 대한YMCA 간사 이남주(후에 광주YMCA 총무)로부터 전해듣고 광주YMCA와 YWCA 지도자들에게 보고했다. 이어 이틀 뒤, 4월 17일 신명식 조대부고 학생회장을 필두로 광주고 Hi-Y(김선담·정원채·이병열·신양현·이채용·이해균·박철환 등) 임원들과 숭일고, 조대부고, 광주상고, 전남여고, 광주여고, 성빈여숙 대표들이 광주학생의 기개를 살려 봉기하기로 결의했으며, 먼저 봉기한 학교를 따라 즉각 궐기하기로 사전 모의했다.
3·15부정선거와 김주열 학생의 비참한 죽음, 4월 18일 고려대생들의 시위에 정치 깡패들을 동원하여 무참히 짖밟은 일련의 사태로 분노와 흥분이 극에 달한 4월 19일 오전 10시, 광주고 3학년 Hi-Y 정원채 학생의 비상 타종을 신호로 김선담·김이중·이병열·신양현·이채용·이해균 등이 교문을 부수고 나와 시작된 4·19 광주학생 시위는 숭일고와 조대부고 등 인근 학교로 봉기사실이 전달되면서 광주 전역에서 역사적인 4·19혁명을 이루게 됐다.
◇ 주요 기관·시설 습격 = 당시 주요 기관·시설 습격 상황을 보면 충장로파출소는 숭일고와 조대부고가 맡았고, 광주농고는 누문동파출소를, 광주고와 광주상고는 계림파출소를 습격했다. 또 광주공고와 숭일고, 조대부고 학생들이 연합해 학동파출소를 점거했으며, 양림파출소는 숭일고가 주도한 가운데 조대부고와 광주공고 학생들이 지원했다. 월산동파출소는 수피아여고와 광주고, 광주상고가 나섰으며, 동명파출소는 조대부고와 광주공고가 맡았다.
주로 광주고와 광주상고 학생들이 집결했던 광주소방서에서는 살수소방차 1대가 파괴되기도 했으며, 금남로 성결교회 앞에서는 시위를 저지하던 경찰 차량 2대가 학생들의 투석으로 파손됐다.
전남도청 옆 광주여고 4거리 도청 차고지 앞에 집결한 조대부고·광주공고·광주여고 시위대는 경찰 간부와 담판을 벌이는 대담함도 보였다. 시위대를 이끌던 신명식 조대부고 학생회장은 △마산 김주열 학생 참사사건 책임자 처벌 △폭력적인 시위진압 중지 및 구속자 석방 △3·15부정선거 원천무효 등을 주장하며, 경찰 간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 19일 저녁 학생 총궐기 = 밤 8시 30분께 모든 시위대가 광주경찰서 앞으로 집결하자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탄을 연발하며 주동자 검거에 나섰다. 하지만 학생들의 극렬한 저항으로 시위 진압에 실패하자 경찰은 밤 9시 25분께 실탄을 발사했다. 이 때문에 광주경찰서 앞과 YMCA 앞, 성결교회 앞 시위대에서는 사상자가 속출했으며, 학생과 시민들은 경찰의 총탄과 추격 속에서도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신속히 옮기면서 집회와 시위를 이어갔다. 자정 무렵 뿔뿔이 흩어졌던 각 학교 시위대는 점차 하나를 이뤄가며 거리를 누비는 시위를 강행했다.
당시 고교생 집단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은 광주고 김선담·이홍길·이병열·신양현·정원채·이채용·이해균·김이중·조병수·박화부·홍갑기·박석무, 광주공고 김영용·이의성·서자현·나종문, 광주농고 김희창·김재화·전기철·김영갑, 숭일고 김귤근·서동용·윤승웅·최영길, 광주상고 채부남·선번남·전해룡·김종철·박석남·신동철·박찬재, 조대부고 신명식·신우식·이삼균·구양술·전만기·최용주·안재근·김재성·이명진·정기수·안익현, 광주여고 신영자·윤수자·성희자·채조자·백금자, 수피아여고 정지나·백경옥·박덜례·지경례 등이다.
이들 외에 광주사범학교와 광주일고, 전남여고 등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고자 했으나 이들은 학교측의 철저한 통제로 단체행동이 어렵게 되자 개별적으로 다른 시위대에 끼여 참가했으며, 19일 밤 저녁 모든 학교가 참가한 총궐기에 분연히 나섰다.
한편, 지난 2일 광주YMCA 백제실에 모인 광주 4·19혁명 주역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장의 모습이었으나 그날의 참상과 의분을 토로할 때는 그날의 혈기가 올곧이 드러났다.
4·19혁명 공로자회 유인학 회장(전 국회의원)과 4·19민주혁명기념사업회 이병열 회장 등 1960년 당시 광주에서 학생운동을 이끈 50여 명의 주역들은 유명을 달리한 동지들을 기억하며, 암울한 시기에 젊은 혈기로 대한민국 새역사를 창조하는데 앞장섰던 공로가 이제라도 널리 알려질 수 있기를 기대했다.
/정리=김경석기자
http://www.jndn.com/article.php?aid=1541636832271195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