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발길에 차여서 산 함석헌 선생님의 삶

언론에 비친 함석헌

관련자료사랑으로 폭압에 맞선 ‘씨알 사상’…그는 독재 시절 청년의 희망이었다ㅡ‘들사람 얼’ 함석헌

‘들사람 얼’ 함석헌 

                                   

김언호는 1982년부터 ‘함석헌 전집’을 만들면서 서울 도봉구에 있는 함석헌 선생의 집을 자주 찾았다. 함 선생은 정원에서 꽃과 나무를 돌보다 김언호를 맞이하곤 했다.  김언호 제공

김언호는 1982년부터 ‘함석헌 전집’을 만들면서 서울 도봉구에 있는 함석헌 선생의 집을 자주 찾았다. 함 선생은 정원에서 꽃과 나무를 돌보다 김언호를 맞이하곤 했다.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 못한다.” 

함석헌 선생은 1961년 ‘사상계’ 7월호에 발표한 ‘5·16을 어떻게 볼까’를 통해 5·16 군사쿠데타를 통렬히 비판했다. 박정희 군부는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통치를 시작했다. 탱크와 총검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거리와 관공서를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군인은 혁명 못한다”는 글을 써
5·16 군사쿠데타를 통렬히 비판
60년대·70년대 엄혹한 시절에
이 나라 청년들에게 큰 울림  

 

“그때(4·19)는 맨주먹으로 일어났다. 이번엔 칼을 뽑았다. 그때는 믿은 것이 정의의 법칙, 양심의 도리였지만 이번에 믿은 것은 연알(총알)과 화약이다. 그때는 민중이 감격했지만 이번엔 감격이 없다. 그때는 대낮에 내놓고 행진했지만 이번엔 밤중에 몰래 했다.”  

나는 그해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사상계’의 이 글을 읽고 놀랐지만,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은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선생을 어떻게 하지는 못했다. 고교 시절 ‘사상계’를 열심히 읽었다. 함석헌 선생의 글은 줄쳐 가면서 읽었다. 3학년 봄에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교내 독후감 대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내게는 이제 믿는 자만이 뽑혀 천국 혹은 극락세계에 가서, 캄캄한 지옥 속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굽어보면서 즐거워하는 그런 따위 종교에 흥미를 가지지 못한다. 나는 예수나 석가의 종교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엄혹한 시대에 함석헌 선생은 이 나라 청년들의 희망이었다. 선생의 글과 말씀을 읽고 경청함으로써 삶의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선생은 1970년 4월 ‘씨알의 소리’ 창간호에 ‘썩어지는 씨알이라야 산다’를 발표한다.  

“4·19는 정치가 아닙니다. 민족적인 서사시입니다. 5·16은 전혀 다릅니다. 일본 제국주의 사상을 거쳐서 오는 군국주의 내림입니다. 해방 이후 창설된 우리 군대도 그 족보가 일본 군대에 가 닿습니다.” 

1976년 출판사를 시작한 나는 1980년, 그 ‘서울의 봄’부터 선생의 전집 작업에 나섰다. 선생이 1970년부터 발행하던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회가 전집의 편집위원이 되었다. ‘씨알의 소리’는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1980년 폐간당했다.  

1981년 연초에 선생께 세배하러 갔다. 탁자 위에 전두환이 새해 선물로 보낸 홍삼이 놓여 있었다. 선생은 그걸 들고 온 비서실장에게 “작년 것도 저기 있는데…”라고 했다. 전두환은 그 전해에도 홍삼을 보냈다. 선생은 그걸 누구에게 주기도 그렇고 버리지도 못해 선반 위에 얹어놓았던 것이다.

 

■ 전집 작업을 하게 돼 행복했다  

                  

1980년대 초반의 함석헌 선생 모습.  김언호 제공

1980년대 초반의 함석헌 선생 모습.

                  

1982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함석헌 전집은 1988년 전 20권으로 일단락되는데, 나는 도봉산을 올려다보는 쌍문동 댁을 수시로 찾았다. 한 시대에 우뚝 서는 사상가를 뵙고 그 책을 만들게 되어 행복했다. 

1983년 3월17일, 편집위원들과 함께 선생의 조촐한 생신잔치를 해드렸다. 하루 일식하는 선생을 모시려면 이른 점심이라야 했다. 그날 생일점심 때 선생께 간청해 노래를 듣기도 했다. ‘고향의 봄’을 부르셨다. 두고 온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였을 것이다.  

1977년 3월17일, 선생의 77회 생신을 맞아 서울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선생의 말씀을 듣는 집회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경찰에 의해 강당은 폐쇄됐다.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날 늦은 오후 우리는 흥사단 강당 밖 한길에서 말씀을 들었다.  

오늘도 선생이 1970년부터 1980년까지 10년에 걸쳐 ‘씨알의 소리’ 권두에 실었던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는다. 시대와 역사와 인간을 성찰한 명문들이다.  

“흙, 씨알의 바탕인 흙이 무엇입니까. 바위가 부서진 것입니다. 바위를 부순 것이 누구입니까. 비와 바람입니다. 비와 바람은 폭력으로 바위를 부순 것 아닙니다. 부드러운 손으로 쓸고 쓸어서, 따뜻한 입김으로 불고 불어서 그것을 했습니다. 흙이야말로 평화의 산물입니다. 평화의 산물이기에 거기서 또 평화가 나옵니다. 씨가 부드러운 흙 속에 떨어질 때 거기서 노래와 춤이 나옵니다. 새로 돋아나는 싹처럼 아름답고 위대한 예술이 어디 있습니까.”  

선생이 1974년에 쓴 ‘모산야우(毛山夜雨)’를 나는 외우다시피 한다. 어린이 예찬이다. 선생은 천안과 온양 사이 조그만 마을 모산에 있는 귀화고등공민학교를 맡아 거기 아이들을 가르쳤다. 

“씨알은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의 심정을 알고 아이들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어른 정치가 아닌 아이 정치가를, 천하를 좀 둬둘 줄 아는 정치가를 좀 보내주시구려! 모산의 아이들은 아이들 중에서도 아이들입니다. 방금 캐놓은 고구마 같은 흙냄새 나는, 흙냄새 나기 때문에 하늘 냄새 나는 아이들입니다.”

 

전집 작업 위해 수시로 찾으면
늘 정원의 화초를 돌보고 계셔
꽃 가꾸는 소년 같은 큰 사상가
그분에 대한 책을 만들어 행복 

 

1983년 한여름이었다. 그날도 선생은 꽃삽으로 정원의 꽃과 나무를 돌보고 계셨다. 내게 꽃잎을 따주시면서 향기를 맡아보라 했다.  

“천리향(千里香)이란 꽃인데 벌이 십 리 밖에서 날아온다 합니다.” 

꽃을 가꾸는 소년 같은 큰 사상가! 그 정원은 늘 꽃과 나무로 무성하고 집 안은 난 향으로 가득했다. 


■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싸움  

전집 작업이 끝나갈 무렵인 1986년 8월, 안암동 한길사의 작은 강의실에 선생을 초청해 독자들과 함께 씨알과 씨알 사상을 말씀 듣는 특강을 네 차례 기획했다.  


“잃어버린 주체성을 찾으려면
잃었던 말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씨알과 씨알 사상 펼치기 위해
수난 무릅쓰고 ‘씨알의 소리’ 펴내 

 

“왜 씨알이라 하느냐? 주체성 때문입니다.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를 주장하는 것 아닙니다. 국민, 신민 하면서 몇 천 년 남의 살림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주체성을 찾기 위해, 우리의 ‘나’를 찾기 위해, 잃었던 말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씨알과 씨알 사상은 함석헌 사상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다. 그 사상을 펼치기 위해 선생은 저 1970년대에 수난을 무릅쓰고 ‘씨알의 소리’를 펴냈다.  

“우리 싸움은 드러내놓고 하는 싸움이어야 합니다. 폭력으로 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는 밤에 나타나는 게릴라가 아닙니다. 청천백일 아래 버젓이 어엿이 내놓고,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싸움입니다.”  

한길사는 전집에 이어 2009년 저작집 전 30권을 펴냈다. 2016년에는 <함석헌 선집> 전 3권과 김영호 교수의 <함석헌 사상 깊이 읽기> 전 3권을 펴냈다.  

함석헌 선생은 그 누구도 엄두 내지 못하는 글을 쓰고 말씀을 했다. 용기와 진리의 사상가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을 다시 읽는다. 

“나라를 온통 들어 잿더미, 시체더미로 만들었던 6·25 싸움이 일어난 지 여덟 돌이 되도록 우리는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역사의 뜻을 깨달은 국민은 이러고 있을 리 없다. 남한은 북한을 소련·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남이 볼 때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25는 꼭두각시의 놀음이었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았어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 될 것 없지 않은가.” 

이 글로 선생은 20일 동안 구속되었다. 선생은 1956년 ‘전쟁과 똥’이라는 글을 썼다. 

“6·25 이래 나는 전쟁과 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느 날도 우리가 전쟁 속에서 사는 것을 잊을 수 없고, 또 어디를 가도 똥 냄새 아니 나고, 똥을 아니 보고, 똥을 아니 밟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본래 전쟁이란 짐승의 일이요, 똥을 싸는 짓이다. 전쟁과 똥이 꼭 같은 것인데, 왜 똥은 피하고 전쟁은 피하려 하지 않을까. 똥은 몰래 누려 하는데, 전쟁은 드러내놓고 할까. 군인이란 사람 죽이잔 것 아닌가. 어찌 그것이 사람이며 사람의 근본일 수 있나. 이상에 불타는 젊은이들을 잡아다가, 제 동무를 죽인 일을 자랑으로 뽐낼 만큼 인간성을 잃도록 만든 것은 어떤 놈인가.”  


■ 선생은 들사람이고 들사람 얼이었다  

                  

1965년 8월14일 서울 을지로 대성빌딩에서 한일협정 비준 반대 강연 후 시위대와 함께 행진하던 함석헌 선생을 경찰들이 막아서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65년 8월14일 서울 을지로 대성빌딩에서 한일협정 비준 반대 강연 후 시위대와 함께 행진하던 함석헌 선생을 경찰들이 막아서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6월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987년 봄, 선생은 경찰의 연금을 뚫고 서울대에 가서 강연했다. 중요한 강연이나 집회가 있으면 선생은 늘 연금당했다. 학생들은 강연 전날 밤 선생을 모시고 서울대로 월담해 들어갔다. 학생회관에서 학생들과 밤을 지새웠고 이튿날 아침 선생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출현했다. 수천명의 학생들이 환호했다.  

“20년 만에 서울대에서 강연했소.”  

이 땅의 젊은이들은 늘 선생의 말씀을 듣고 싶어 했지만 군사권력은 선생을 그렇게 구금했다. 선생은 ‘들사람’이었고 ‘들사람 얼’이었다. 1959년에 발표한 ‘들사람 얼(野人精神)’은 함석헌 사상의 한 절정이다.  


“싸움은 기로 하고 얼로 하는 것”
‘들사람 얼’은 함석헌 사상의 절정
젊은이들이 늘 듣고 싶어 했던
선생님의 말씀이 그립다 

 

“사람의 삶이 싸움인 줄 모르나봐! 싸움을 주먹으로 하는 줄, 무기로 하는 줄, 꾀로 하는 줄만 알고, 기(氣)로 하고 얼로 하는 줄 모르나봐. 삶은 싸움이요, 싸움은 정신이다. 그는 자연의 사람이요, 기운의 사람이요, 직관의 사람, 독립독행의 사람, 아무것도 거리끼지 않는 사람, 다만 한 가지 천지에 사무치는 얼의 소리를 들으려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들사람이여, 옵시사! 와서 다 썩어져가는 이 가슴에 싱싱한 숨을 넣어줍시사!”  

2008년 8월15일, 색다른 음악회를 헤이리의 북하우스에서 열었다. 젊은 소리꾼 민은경에게 함석헌 선생의 ‘압록강’을 판소리로 작창하여 부르게 했다. 150여명의 관객들로부터 열띤 박수를 받았다. 1947년 어머니를 두고 고향을 떠나온 선생의 비장한 망향의 노래다.  

“고향이 뭐냐? 자연과 사람, 흙과 생각, 육과 영, 개체와 전체가 하나로 되어 있는 삶이다. 거기 나 남이 없고, 네 것 내 것이 없고, 다스림 다스림 받음이 없고, 잘나고 못남이 없고, 나라니 정치니 법이니 하는 아무것도 없고, 하나로 조화되어 스스로 하는 삶이 있을 뿐이다. 압록강에 가자. 가서 새 역사의 약속을 듣자.”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여러 행사들과 언설이 있었지만 선생은 3·1운동 그 정신을 우리 가슴에 큰 울림으로 각인시킨다.  

“3·1정신 따로 있는 것 아니다. 있다면 우주 인생을 꿰뚫는 정신이 있을 뿐이지. 해를 낳고 달을 낳고 천체를 낳고, 꽃을 웃게 하고 새를 울게 하며, 사람으로 사람이 되게 하는 그 정신이 3·1운동을 일으켰지. 3·1운동을 일으킨 것은 인간 역사를 꿰뚫는 윤리정신 그 자체다. 생명의 맨 처음이며 끄트머리요, 역사의 고갱이다. 3·1정신이 정말 있다면 3·8선이 걱정이겠느냐.”  

선생님이 그립다. 말씀을 다시 듣고 싶다. 우리의 희망 함석헌 선생님!

 

▶필자 김언호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1976년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해 현재 한길사와 한길책박물관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출판인회의와 동아시아출판인회의 회장을 지냈으며 출판도시문화재단 명예이사장이기도 하다. <책의 탄생> <책의 공화국에서>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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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1020600015&code=940100#csidx1ff2a13e84b1938a7462e8ccfa17be5 onebyone.gif?action_id=1ff2a13e84b1938a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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