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발길에 차여서 산 함석헌 선생님의 삶

언론에 비친 함석헌

관련자료“함석헌에게 노자·장자는 군사독재 맞서는 저항문학이었죠”

“함석헌에게 노자·장자는 군사독재 맞서는 저항문학이었죠”


 

                                 




“함석헌에게 노자·장자는 군사독재 맞서는 저항문학이었죠”

 

 

【짬】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전호근 교수

 

전호근 교수는 “함석헌 선생은 노자의 짧은 문장을 주로 장자의 이야기를 끌어와 풀었다. 텍스트 해석의 자유도가 높은 것도 선생이 노자를 사랑한 이유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생의 고전’으로 <논어>를 꼽았다. “<도덕경>은 짧아서, <장자>는 문학적 표현이 다양해 어렵다고 해요. 반면 <논어>는 쉬워서 어렵다고 하죠.” 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전호근 교수는 “함석헌 선생은 노자의 짧은 문장을 주로 장자의 이야기를 끌어와 풀었다. 텍스트 해석의 자유도가 높은 것도 선생이 노자를 사랑한 이유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생의 고전’으로 <논어>를 꼽았다. “<도덕경>은 짧아서, <장자>는 문학적 표현이 다양해 어렵다고 해요. 반면 <논어>는 쉬워서 어렵다고 하죠.” 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이 몇 십 년의 더러운 정치 속에서도 내가 살아올 수 있는 것은 날마다 노자·장자와 대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함석헌 저작집 24> 중에서)  

 

   

전호근(58)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가 5년 전 펴낸 <한국철학사>(메멘토)에 나오는 함석헌(1901~1989) 선생의 고백이다. 전 교수는 원효 이래 1300년 한국 지성사를 정리한 이 책에서 함석헌과 그의 스승 유영모 그리고 생태운동가 장일순 선생을 ‘한국의 현대 철학자 6명’에 포함시켰다. 강단 철학자 중엔 박종홍 전 서울대 교수가 유일하다. 이 저작은 또 한살림 운동의 창시자인 장일순 선생을 한국 철학사에 편입한 첫 책이기도 하다. “유대칠 선생이 쓴 <대한민국 철학사>를 포함해 최근 장일순을 철학적으로 조명한 연구가 나오고 있어요. 여기에 제가 조금은 기여했다는 생각을 해요.”

 

오는 30일 함석헌기념사업회가 여는 씨알학당 정기 강좌에서 ‘함석헌과 노장사상’을 주제로 강의하는 전 교수를 13일 경기 수원 경희대 국제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났다.

 

그가 대중강의 녹취록을 풀어낸 <한국 철학사>는 스테디셀러다. 초판 2천부가 일주일 만에 나갔고 지금껏 1만권 가까이 팔렸다. “지금도 잘 나가요. 작년엔 국방부에서 400여권을 한꺼번에 주문했어요. 군인들 대상으로 강의도 했어요. 세상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성균관대 유학과 81학번인 그가 함석헌 연구에 뛰어든 시기는 90년대 후반이다. “16세기 성리학 연구로 97년에 모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학회 활동을 할 때였어요. 2002년엔 민예총 문예 아카데미에서 유영모, 함석헌, 장일순을 묶어 강의도 했고요.” 

 

<씨알의 소리>를 창간해 박정희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운 함석헌은 스승 유영모의 뒤를 이어 와이엠시에이(YMCA) 연경반에서 30년 가까이 성서와 동양 고전 강의를 했다. “함석헌은 늘 당시 시대상을 끌어와 고전을 이야기했어요. 최치원의 <토황소격문>처럼 지배자 편에서 쓴 글을 가지고도 박정희 군사 독재를 비판했을 정도죠. 그의 고전 읽기엔 늘 한국의 현실 문제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요. 제가 한국 철학사에 함석헌을 포함시킨 이유죠.”

 

왜 ‘함석헌과 노장사상’일까? “함석헌은 일제 강점기에는 성서를, 해방 후 군사 독재 시절엔 노자와 장자를 읽으며 버텼다고 했어요. 선생은 현실 도피나 은둔으로 읽기 쉬운 노자 <도덕경>이나 <장자>를 저항의 철학, 저항의 문학으로 읽었어요. 그 시절에 그렇게 읽는 분은 선생뿐이었어요.”

 

노장사상의 핵심은 무위자연이다. 인위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이상이라고 여긴다. 이런 사유가 어떻게 저항의 철학이 되나? “장자는 전쟁과 폭력의 시대에 낮잠이나 자겠다고 했는데 함석헌은 이도 저항이라고 풀어요. 장자와 동시대 인물인 맹자는 자신의 시대를 두고 ‘짐승을 끌어와 사람을 잡아먹는 시대’라고 했어요. 전쟁과 폭력의 시대란 거죠. 이런 시절에 낮잠 자는 행위는 총칼을 들지 않겠다는 거죠. <도덕경>이나 <장자>, <논어> 어딜 봐도 전쟁을 정당화하는 대목은 없어요. <도덕경>에서는 전쟁은 불길한 일이라고 했죠. 함석헌은 노장을 읽으며 모든 씨알이 편하게 살 수 있는 공정한 세상을 말했어요. 저도 노장은 저항 문학이라고 생각해요.”

 

 



오는 30일 씨알학당 정기강좌 ‘강의’  

 

90년대 후반부터 함석헌 사상 연구

 

 

5년 전 낸 ‘한국철학사’ 스테디셀러 

 

 원효·유영모·함석헌 등 30여명 조명 

 

‘한살림 창시자’ 장일순 철학사 편입 

 

“한국철학 핵심은 ‘통합과 화해’ 추구” 

 

성리학 연구로 성균관대 박사학위

 

 

 

함석헌 선생이 1975년 대중 강의를 하고 있다. 사진 들소리닷컴
함석헌 선생이 1975년 대중 강의를 하고 있다. 사진 들소리닷컴

 

 

그는 함석헌에게 노장사상은 박정희 정권의 기만성을 폭로하는 강력한 무기였다고도 했다. “함석헌은 노자 전체를 기존 통념에 대한 안티테제(반대 의견)로 규정해 이를 독재정권의 지배논리를 비판하는 안티테제로 재해석했죠. 이게 가능했던 것은 <도덕경>이 기존 가르침에 대한 비판을 담은 역설과 반언(反言)으로 가득 차 있어서죠. 선생은 박정희 독재정권이 걸핏하면 민족중흥, 경제발전, 충효 따위의 가치를 강조했지만 실제는 그런 가치를 내세워 지배논리를 강화하고 국민의 자유를 구속했으며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데 이용했다고 비판했어요. 예컨대 노자 79장의 ‘천도무친 상여선인(天道無親 常與善人)’을 두고 이렇게 말해요. ‘하늘은 친한 사람을 따로 두지 않고 늘 착한 사람을 도와준다는 말이에요. 백성을 다스리는 성인도 마찬가지예요. 이 나라의 주권을 대신하는 이라면 적어도 국민에 대해 어른 애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꼭 같은 맘으로 대해야 그게 대통령 자격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는 친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 돼. 그건 장자도 마찬가지예요. 성인무친(聖人無親)이라. 성인은 누구를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박정희씨한테 곱게 뵈었던 사람들 많지만 그중에 심성이 평안한 사람 하나라도 있나 보시오. 하나도 없지 않아요?’” 

 

 ‘함석헌 노장사상’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유가의 중심 가치는 인이죠. 묵자는 유가의 인을 두고 노동자가 빠진 당신들만의 사랑 아니냐고 비판했죠. 여기에 맹자가 묵자를 비판하며 인과 의를 강조해요. 인은 친애와 사랑이고 의는 정의이죠. 노장은 유가와 묵가 둘 다 비판해요. 정의라는 가치를 내세워 개인의 헌신을 강요한다는 거죠. 유가나 묵가가 내세우는 가치는 모두 통치의 수단이고 지배자가 전유해 개인의 헌신을 강요한다는 거죠. 함석헌도 바로 이런 생각을 가지고 박정희 독재정권의 기만성을 폭로하려고 했죠.”

 

<동양철학 에세이> 저자인 김교빈 교수는 전 교수의 한문 원전 해독 능력이 한국의 동양학자 중 최고 수준이라고 평했다. 전 교수의 <한국 철학사>가 독자의 사랑을 받는 데는 고금의 방대한 한문 자료를 유려한 한국어로 번역하는 필자의 역량도 한몫했을 듯하다. “중학 시절부터 고전 읽기에 재미를 붙였어요. 대학에 갔는데 1학년 1학기부터 바로 원전 강의를 하더군요. 한문에 까막눈이라 막막했죠. 관둬야겠다는 생각마저 했어요. 2학년 1학기 때 안병주 교수 맹자 강의를 들으며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독하게 공부했어요. 그렇게 하니 길이 보이더군요. 뒤에 고전연수기관인 성균관 한림원 1기로 들어가 5년간 한우물만 팠어요. 가장 열심히 공부한 시기였죠.”

 

 

 

 

그가 9백쪽 가까운 <한국철학사>를 쓴 데는 우리 삶 속에 살아있는 한국철학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더해 이런 욕망도 있었단다. “성리학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성리학을 공리공담으로 치부하면 구체적인 게 다 빠져버려요. 저는 책에서 성리학이 망해서 조선이 망했다고 볼 수 있는 측면도 제시하고 싶었어요. 성리학이 지탱한 조선의 역사를 보자는 거죠. 사실 16세기까지 성리학은 힘을 발휘했어요. 퇴계 이황의 사대부 윤리 추구도 그렇고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백성의 삶을 생각하는 율곡 이이의 노력도요. 하지만 전쟁 뒤로 성리학은 껍데기만 남았어요. 제가 책에서 (17세기 성리학자인) 송시열을 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아쉬움이 많아서죠. 율곡 이후 성리학은 학문이라기보다는 정치공학으로 흘렀어요. 백성의 현실, 삶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정쟁의 도구로 전락했죠. 그 결과 조선도 힘을 잃어버렸어요.” 

 

1300년 한국철학사의 핵심 키워드로 전 교수는 통합과 화해를 들었다. “성리학은 성리학 중심의 흡수 통합을 추구했지만 불교 쪽 원효나 의상, 지눌 그리고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나 장일순까지 일관되게 통합과 화해를 추구했어요. 장일순 선생은 박정희도 그렇고 심지어 전두환까지 용서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 때문에 주변의 많은 분이 떠나가기도 했죠.”

 

계획은? “제 연구실 한쪽에 명말청초의 학자 왕부지의 대련 중 한 구절인 ‘육경책아개생면(六經責我開生面)’을 졸필로 써서 붙여두었죠. 육경이 저에게 새 얼굴을 달라고 한다는 뜻입니다. 유학을 전공했기에 유학의 고전 13경을 모두 번역하고 해설하는 게 꿈입니다. 지금껏 <대학>(<대학강의>)과 <논어>(<고전 함께 읽기>)를 책으로 냈을 뿐이지만 올해 안으로 <중용>이 나오고 뒤로도 작업을 이어갈 겁니다. 그리고 <한국 철학사>와 비슷한 수준으로 <중국 철학사>를 집필 중인데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어요.”

 

그는 인터뷰 끝에 “<한국 철학사>에서 북한 철학을 다루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북한 주체사상 전공자가 들어가야 했는데 빠졌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954435.html#csidxa7efb682c4959aa87ed5473e40ca616 onebyone.gif?action_id=a7efb682c4959aa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