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ᄋᆞᆯ의 소리

우리 자신을 모든 역사적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격을 스스로 닦아내기 위해 일부러 만든 말, 씨ᄋᆞᆯ


1970년~1979년

 ■ 1970-01-28

함석헌 선생은 "종교경전의 재음미, 문명의 비평, 역사적 반성, 시사논평,수상 등을 통하여 건전한 상식을 길러 민주주의 발전과 씨알의 깨우침에 이바지하자"는 목적으로 문화공보부에 정기간행물 (월간) 등록을 신청하여 교부받다.(등록번호 라-1257)

 

■ 1970-04-19

씨알의 소리 창간하다.(총페이지 56, 발행부수 3천부, 값100, 발행인 및 주간 함석헌 선생, 편집책임 전덕용 선생)

 

■ 1970-05-25

창간 당시 본지와 계약한 선일인쇄(당시 서대문소재)측에서 더 이상 인쇄를 계속할 수 없다하여 부득이 이우인쇄소(당시 중구소재)에서 인쇄하여 제 2호를 발간하다.

 

■ 1970-05-29

인쇄인 변경등록을 필하지 않고 타인쇄소에서 본지 제2호를 인쇄했다는 이유로 문공부 공문 출1028-8973으로 발송된 폐간통고를 받다.

 

■ 1970-06-08

무료변론으로 자진,소송대리인으로 나서주신 이병린 변호사에 의하여 서울 고등법원에 '행정처분 취소 청구의소'를 제기하다.

 

■ 1970-08

함석헌 선생은 퀘이커 세계대회 참석차 출국하시다.

 

■ 1971-04-19

폐간으로 인한 법적투쟁관계로 1주년 기념행사 없이 지내다

 

■ 1971-05-04

고등법원 재판장 안병수, 윤영일, 김석수 판사에 의하여 문공부의"씨알의소리" 폐간처분은 "재량권의 범위를 넘은 처사"이며 "등록을 취소한 처분은 위법부당"하다고 판시, 본지 승소판결를 내리다.

 

■ 1971-06-12

폐간 중에 드리는 편지'를 프린트로 발행하여 독자에게 보내다.(4회)

 

■ 1971-07-01

씨알의 소리를 8월호부터 복간하기로 하고 편집장에 박선균님, 업무부장에 문대골 님을 기용, 복간호 발행에 착수하다. 청파동소재 달성인쇄소와 계약했으나 이유없이 해약을 희망함으로 중림동 소재 삼명인쇄소와 계약하고 진행하다.

 

■ 1971-07-06

대법원 재판장 김치걸, 사광욱, 홍남표, 김영제, 양병호 판사에 의하여 문공부의 상고를 기각, "씨알의소리 등록을 취소한 처분은 위법부당하다고 한 원판결의 결과에는 영향이 없는 것이라'고 판시, 본지의 승소판결을 확정하다.

 

■ 1971-08-15

씨알의 소리승소후 복간호(통권 제 3호 )4천부를 발행하다. (이 복간호에 본지 승소 경위가 실림)

 

■ 1971-09-14

9월호 (통권 제 4호 ) 5천부 발행 (함선생님, "민족통일의 길"발표)

 

■ 1971-10-01

마하트마 간디 탄생 102주년 기념강연회를 인도영사관과 공동주최하다(한국일보 12층 강당).

 

■ 1971-10-21

10월호 ( 제 5호 ) 4천부 발행 (함선생님, "군인정치 10년을 돌아본다"발표)

 

■ 1971-11-13

청계천 평화시장에거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다 분신자살한 고 전태일 1주기추도회 및 강연회를 개최하다(장충동소재 경동교회)

 

■ 1971-11-18

11월호 (제6호) 5천부 발행 (함선생님, "우리나라의 살길" 김동길 박사 "용감한 국민이라야 산다"등 발표)

 

■ 1971-12-02

함선생님 고희 축하모임 및 기념강연회(이 자리에서 이병린, 안병무, 안병욱, 지명관, 계훈제 씨 등 5명의 대표이름으로 씨알의 소리"영구구독자 300명 6개월 내로 모집, 3백만원 특별기금 확보 운동의 전개키로 하다).

 

■ 1971-12-06

국가비상사태선언

 

■ 1971-12-29

12월호(제7호) 5천부 발행. (함선생님 고희를 맞아 "함석헌을 말한다"는 특집 및 함선생님 "비상사태에 대하는 우리의 각오"발표)

 

■ 1972

전광산업신보사로부터 인쇄계약 해약통고로 인한 인쇄인 시정통보를 문공부로부터 받다.

 

■ 1972-01-13

본사 문대골 업무부장이 수사기관에 연행, 30여시간의 심문도중 구타당하는 등 그후 수차례의 환문을 받다.

 

■ 1972-01-15

종로서적센타와의 총판계약을 이유없이 해약당하다.

 

■ 1972-01-22

본사와 인쇄계약한 삼명 인쇄소 측에서 "더 이상 씨알의소리 인쇄를 계속할 수 없다"고 이유없이 해약 통고를 받다.

 

■ 1972-01-30

제 8호(신년호) 6천부 발행하다.

 

■ 1972-02-03

시중서점에 배본된 본지 신년호 약 2천부가 당국에 의해 판금조치를 당하다.

 

■ 1972-02-29

전광산업신보사(당시 용산동 소재)와 인쇄계약을 체결하고 문공부에 등록변경신청을 내다.

 

■ 1972-02-28~30

제 1차 씨알의소리 독자수련회를 안양농민교육원에서 개최하다.(주제 "세계평화의 길")

 

■ 1972-03-17

2,3월호(합본) 6천부를 발행하다.

 

■ 1972-03-29

시중서점에 배본된 본지 2,3월 합본호 3천여부가 당국에 의해 압류 및 압수당하다

 

■ 1972-04-01

본지 편집위원으로 이병린 변호사, 김성식 박사, 안병무 박사, 장준하 선생, 천관우 선생, 이태영 박사, 계훈제 선생을 위촉하다.

 

■ 1972-04-10

전광산업신보사의 일방적인 해약통고에 의한 해약승인은 부당하다는 이의 신청을 문공부장관 앞으로 내다.

 

■ 1972-04-19

창간 2주년 기념 강연회를 대성빌딩(당시 명동소재)에서 개최하다. (함선생님은 여기서 "같이 살기 운동을 제창하다"는 강연을 하심)

 

■ 1972-04-29

본지와 인쇄 계약한 전광산업신보사가 일방적으로, 인쇄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을지로 6가 무명인쇄소에서 본지 4호(창간 2주년 기념호)를 인쇄하여 청계천 7가 모제본소에서 당국의 눈을 피해 제본하기에 이르다.

 

■ 1972-05

창간 2주년 기념호는 장준하선생 댁에서 온식구가 비밀리에 가제본하여 만신창이가 된 4월호를 독자에게 그대로 발송하다.(함선생님 "같이 살기 운동을 일으키자"는 글 발표 및 같이 살기운동 논문모집)

 

■ 1972-05-01

박상희님 본사 직원으로 기용하다.

 

■ 1972-05-02

오후 3시경. 사복형사 10여명이 제본소를 급습, 본지 문부장을 동대문서로 연행하고, 4월호 제책 중지 및 압류상태가 되다. 이 사실을 박상희님이 현장에서 연락, 장준하 편집위원과 박선균 편집장이 달려가 제책중지, 압류상태가 된 4월호를 인쇄된 전지 그대로 당시 용두동 소재 장준하 선생 댁으로 옮기다.

 

■ 1972-05-31

5월호(통권11호) 2천부 비밀인쇄 발행 배포하다.

 

■ 1972-06

같이살기운동은 새마을운동에 반대하는 운동이라해서 논문모집 중단당하다.

 

■ 1972-07-03

대광인쇄소(중림동 소재)와 인쇄계약 체결, 이때부터 정보부가 본지발행에 사전 개입하기 시작했고, 본지는 거기에 대처하기에 이르다.

 

■ 1972-07-04

남북자주평화통일 원칙합의, 남북공동성명 발표.

 

■ 1972-07-31

민족 통일의 구상이란 대토론회를 YMCA 8층 식당에서 개최하다.

 

■ 1972-08-23

본지 8월호를 인쇄중지당했다가 시판하지 않는 조건으로 발행하게 되다.

 

■ 1972-10-17

오후 7시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국회해산, 헌법일부 효력정지, 비상국무호의, 헌법개정, 1개월내로 국민투표 실시 공고)

 

■ 1972-10-31

본지 10월호 계엄사 검열로 40페이지로 발행하다.

 

■ 1972-11-13

오후 7시 함선생님 장준하선생님 귀가.

 

■ 1972-11-14

장준하 편집위원 기관에 연행되다.

 

■ 1972-11-17

본사 사무실에 도둑(우리말 큰사전 및 라디오 도난 당함)

 

■ 1972-11-21

오후 7시 기관원 2명에 의해 함선생님 연행되다

 

■ 1972-12-07

11월호 검열후 2천부 발행.

 

■ 1972-12-13

계엄령해제

 

■ 1972-12-29

송년호(통권 17호) 6천부 발행, (계엄령해제됐으나 정보부 다시 관여로 함선생님의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전문삭제되는 등 검열계속)

 

■ 1972-19-20

9월호 5천부 발행.(함선생"오천만 동포앞에 눈물로 부르짖는말" 발표)

 

■ 1973-01-01

문대골 업무부장 의원사직 후임으로 백청수님 업무 일을 맡다.

 

■ 1973-01-24

박상희님 사임하고 신용순님 경리 일을 맡다.

 

■ 1973-05-05

창간 3주년기념호 5천부 발행하다.

 

■ 1973-05-22

창간 3주년 기념 독자모임 개최(당시 정식 강연회가 허락되지 않았음. 장준하선생의 씨알의 소리 경과 보고, 함석헌 선생의 인사말씀 후 창간 3주년 기념보자기500매 참석자 및 정기구독자에게 배부하다.)

 

■ 1973-06-01

법정 스님을 본지편집위원으로 모시다.

 

■ 1973-11-13

고 전태일 제 3주기 추도예배(젠센기념관) 개최하다. (함선생님 설교 "민족의 씨를 키우는 사람")

 

■ 1973-11-28

정보부에서 법적근거도 없이 계속 11월호를 대폭 삭제 검열하는데 대해 강력 항의, 사전검열을 거부키로 하다.

 

■ 1973-11-29

 

■ 1972년 6월이후 정보부간섭으로 전면 삭제된 원고, 50페이지분 비밀 인쇄 착수하다.

 

■ 1973-12

잡지 대금 신년호부터 1부당 150원 인상키로 하다.

 

■ 1973-12

정보부측에서 본지 삭제분을 완화할 것을 통고받다

 

■ 1973-12-03

그 동안 사전검열 중 전면 삭제된 함석헌 선생의 "서풍의 소리", "우리는 왜 이래야 합니까" 장준하 선생의 "民族外交의 나아갈길" 천관우 선생의 "言論人이 본 오늘의 言論自由" 이태영 박사의 "야당집 마누라" 김동길 박사의 "苦言三章" 이병린 변호사의 "治者의 법과 被治者의 법" 변찬린 선생의 "山에 부치는 글" 을 합쳐 11月號2천부를 발행하다.

 

■ 1974-01-08

오후 5시 대통령 긴급조치 선포 (유신헌법부정, 개정요구, 비판 및 반체제활동 엄단, 위반자 15년 이하 징역발표)

 

■ 1974-01-09

오후 3시 장준하, 법 정, 계훈제, 편집위원이 함선생님과 함께 본지에 대한 긴급대책회의하다. (긴급조치 저촉되는 기사 삭제후 50페이지로 축소 발행키로 의논하다.)

 

■ 1974-01-11

박선균 편집장 자택에서 밤 10시 기관원에 의해 본지에 관해 조사 당하다.

 

■ 1974-01-14

본지 1월호 4천부 제본소에서 압류당하다. (인쇄소 공장장 등 기관에 연행당해 본지 인쇄에 대한 조사받다.)

 

■ 1974-01-15

본지 편집위원 장준하 선생과 필자 백기완 선생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첫 구속 당하다.

 

■ 1974-01-18

본지 1월호 4천여부 정보부 기관원에 의해 압수당하다.

 

■ 1974-01-21

본지 발행인 및 주간 함석헌 선생이 기관원에 의해 연행당하다.

 

■ 1974-01-22

새벽 2시경 함선생님 귀가

 

■ 1974-01-25

본지 1월호 압수해간 4천부 제작비 121,

■ 200원을 정보부에서 본지 인쇄소에 지불 확인하다.

 

■ 1974-02-01

편집위원 장준하 선생,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 선고받다.

 

■ 1974-02-04

신용순님 사임하고 조양래님 기용하다.

 

■ 1974-02-08

본지 사전검열은 정보부에서 문공부로 옮겨져 문공부가 관여하기 시작하다.

 

■ 1974-02-18

문공부 사전검열 중 함선생님의 글 "민족의 씨를 키우는 사람(전태일 추도 글)"과 유진오 박사의 "한국민주주의 장래" 전면 삭제되다.

 

■ 1974-03-22

본사 사무실 2차 도난 (우리말 큰사전 1개 등 도난 당함)

 

■ 1974-04-20

창간 4주년 기념강연회 개최(연사; 법정스님, 이태영, 김동길박사, 함석헌선생) 김동길 박사는 이 강연후 기관원에 의해 연행, 민청학련사건 혐의로 1심에서 징역15년 자격정지 15년 받다.

 

■ 1974-04-30

박선균 편집장 사직, 백청수 님이 편집 및 업무를 담당하게 되다.

 

■ 1974-05-28

4, 5월 합본호에 함석헌 선생의 글 "民靑學聯事件과 우리의 반성"전문삭제 당하다.

 

■ 1974-09-23

함선생님 정보부 연행, 3일만에 귀가.

 

■ 1974-10

문공부 사전검열 거부키로 하다.

 

■ 1974-11

11월호에 그동안 정보부에 의해 전문 삭제 되었던 글을 포함하여 "국민선언서, 시국간담회, 현시국을 어떻게 볼것인가?" 등 당국의 눈을 피해 비밀인쇄 발행하다.

 

■ 1975

그 동아일보를 후원하기 위해 본지 독자들이 본사후원을 얻어 "자유, 정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는 동아를 돕고자 여기 작은 씨알들의 뜻을 모으다" 또는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 하는 함선생님 제자의 패난트 팔기 시작하다.

 

■ 1975-01

동아일보 광고 탄압사태 발생.

 

■ 1975-01

변온섭님 업무부장을 맡다.

 

■ 1975-01-04

백청수 편집장 본지 발행과 정보부에 연행, 구류 20일 받다. 정식재판 청구로 10일만에 석방되다.

 

■ 1975-01-16

함선생님 중정에 다시 연행 됐다 귀가.

 

■ 1975-02

김동길 편집위원 10개월만에 출감

 

■ 1975-02

1. 2월 합본호 1만부 발행(장준하 선생 "박대통에게 드리는 공개서한"등 글 수록.)

 

■ 1975-02-12

유신 헌법 국민투표실시.

 

■ 1975-02-15

긴급조치 1. 4호 위반자 석방.

 

■ 1975-03-01

김동길, 김찬국 교수 석방기도회 참석차 출발한 함선생님 자택 노상에서 경찰에 의해 2시간 연금당하다.(이후에 수시로 자택 도청 또는 차에 싣고 다른 곳으로 가는 등 연금 계속.)

 

■ 1975-03-15

함선생님 74회 탄신축하모임을 젠센기념관(당시 서대문소재)에서 갖다(안병무 박사 "함선생님의 역사관"발표)

 

■ 1975-03-17

동아일보 자유언론수호기자 134명 축출사태 발생.

 

■ 1975-03-25

3월호 1만부 발행(윤보선 선생의 "3. 1정신으로 구국대열에 서자" 고문종식을 위한 선언" "민주국민헌장" 등 수록)

 

■ 1975-04-17

4월호 1만 2천부 발행(김대중 선생의 "民衆에의 敬愛와 信賴" 등 수록)

 

■ 1975-04-19

창간 5주년 기념강연회(젠센 기념관, 연사 김대중, 백낙청, 함석헌 선생, 김대중 선생 납치 이후 최초 강연, 청중 3천여명 참석)

 

■ 1975-05

5월호 편집후기 없이 백지로 내다.

 

■ 1975-05-20

문공부 4월호가 긴급조치 위반되는 내용이 수록되었으므로 전국서점에 나간 본지를 회수하라는 연락받다. 이때부터 문공부 및 정보부, 본지를 다시 사전검열 시작하다.

 

■ 1975-06

본지 발행부수 다시 6천부로 떨어지다.

 

■ 1975-08-17

장준하 편집위원 등산 중 약사봉에서 불의에 서거하시다.

 

■ 1975-09-08

7. 8월합본호 발행부수 4천부 되다.

 

■ 1975-10-19

계훈제 편집위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다.

 

■ 1975-11-15

전태일 5주기 추모예배 주최하다. (향린교회, 함석헌 선생, 문익환 목사 말씀)

 

■ 1975-12-03

계훈제 편집위원 병보석

 

■ 1976-02-13

1. 2월 합본호 4천부 발행하다.(값 200원 인상)

 

■ 1976-03-01

3. 1명동사건 발생(신구교 합동미사후 구국선언문 발표 함선생님 가담)

 

■ 1976-03-02

안병무 편집위원 등 연행.

 

■ 1976-03-02

오후 2시 정보부에 함선생님 연행, 3일만에 일단 귀가.

 

■ 1976-03-03

오전 10:30 - 12시 본지 사무실 및 가택 수색당하다.

 

■ 1976-03-04

백청수 편집장 및 조양내 직원 용산서에 연행, 일주일만에 귀가.

 

■ 1976-03-26

함선생님 3. 1사건으로 불구속 기소되다.

 

■ 1976-03-29

계훈제 편집위원 2년 징역 자격정지 2년 받다.

 

■ 1976-04-15

백청수 편집장 사임으로 박선균님 편집장 다시 맡다.

 

■ 1976-04-19

당국의 불허로 창간 6주년 기념행사 없이 지내다.

 

■ 1976-06-03

조양내 님 사임으로 함은진 님 근무시작.

 

■ 1976-06-26

5. 7월호 3천부 발행.

 

■ 1976-07-30

7월호 2,500부 발행.

 

■ 1976-08-21

장준하 선생 1주기 추모 예배를 드리고자 기독교회관 강당을 계약했으나 당국의 저지로 못드리다.

 

■ 1976-08-27

장준하 선생추모특집으로 발행하다(3,500부) 문공부 검열계속

 

■ 1976-10-04

9월호 2,500부 발행.

 

■ 1976-11-02

전태일 6주기 추모예배 금지통보 받다.(정보부담당관)

 

■ 1976-11-04

카터 미대통령 당선.

 

■ 1976-12

11. 12월합본호로 발행(3천부).

 

■ 1976-12-29

안병무 편집위원 10개월만에 출감.

 

■ 1977-01

1월호(3천부 발행)

 

■ 1977-02

2월호(3천부 발행)

 

■ 1977-03

3월호(3천부 발행)

 

■ 1977-04

박선균 님, 변온섭 님 사임하고 정연주 님 본지 편집책임 맡다.

 

■ 1977-05

4. 5월호 합본호(4천부)발행.

 

■ 1977-06

6월호 (5천부)발행.

 

■ 1977-07

7월호 (5천부)발행.

 

■ 1977-08

8월호 (6천부)발행.

 

■ 1977-09

9월호 (6천부)발행.

 

■ 1977-10

10월호(6천부)발행.

 

■ 1977-10

정연주 님 후원으로 최민화 님 편집책임 맡다.

 

■ 1977-12

11. 12월 합본호(6천부)발행.

 

■ 1978-01-30

간디 서거 30주기 추모강연 개최(기독교회관, 연사, 함석헌 선생, 안병무, 김동길 박사)

 

■ 1978-02

1월호(7천부)발행(값 300원으로 인상, 100페이지로 확장)

 

■ 1978-02-24

함선생님 3. 1절 구국선언문 발표(기독교회관 기도회에서)

 

■ 1978-03-01

최민화 님 사임으로 박선균 님(편집책임), 함은진 님 사임하고 박영자 님 근무 시작.

 

■ 1978-03-18

함선생님 77회 생신축하모임을 위해 흥사단강당(동숭동소재)을 계약했으나 이유없이 해약통고로, 흥사단 뒤뜰에서 축하모임을 갖다.

 

■ 1978-03-28

인천동일방직해고 근로자 30여명 본사 사무실 및 함선생님 자택에서 철야하다.

 

■ 1978-03-31

2월호(7천부)발행했으나 "삼고사 상품불매운동" 광고가 문제되어 7,000부 재제본후 발송되다.

 

■ 1978-04-19

창간 8주년 기념행사 없이 지내다.

 

■ 1978-05-08

함선생님 사모님 황득순 여사(77세)타계하시다.

 

■ 1978-05-11

3. 4월합본호(7,500부)

 

■ 1978-06-12

5월호(7천부)발행.

 

■ 1978-07-05

함선생님 자택연금 3일만에 해제되다.

 

■ 1978-07-07

6월호(7,500부)발행(특집. 악)

 

■ 1978-08

7. 8월합본호(7,500부)발행.

 

■ 1978-08-17

장준하 선생 3주기추도예배(YWCA강당)

 

■ 1978-08-28

함선생님 1심에서 김대중, 윤보선, 문익환 선생과 같이 8년징역, 자격정지 8년을 받다.

 

■ 1978-09-14

문공부에서 검열삭제부분이 철저히 지켜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삭제후 교정지 한 벌을 다시 요구, 제 2차 확인검열 시작하다.

 

■ 1978-09-21

9월호(7,500부)발행.

 

■ 1978-10-19

10월호(8,500부)발행(특집/폭력. 비폭력)

 

■ 1978-11-16

함선생님 대구강연 약속으로 출발했으나 새벽6시 경찰. 기관원 7,8명 폭력으로 저지당하다.

 

■ 1978-11-18

11월호(9,500부)발행(특집. 노동자).

 

■ 1978-12-18

12월호(10,000부)발행(특집. 한국 불교를 말한다)

 

■ 1979-01

송건호 선생, 깅용준 박사를 본지 편집위원으로 모시다.

 

■ 1979-01-23

월호 중 함선생님의 글[씨알의 希望]중 대구강연 저지에 대한 기사 5페이지 삭제에 대한 일주일 간 계속 항의하다. (학생데모 기사등 2페이지 회복되다.)

 

■ 1979-01-25

1월호(10,000부)발행. (특집. 언론자유) (값 400원으로 인상)

 

■ 1979-02-26

함선생님 미국궤이커봉사회에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사실이 중앙일보에 1단기사로 보도되다.

 

■ 1979-02-27

2월호911,000부)발행. (특집. 농민)

 

■ 1979-03-01

함선생님 새벽 5시로부터 자택연금, 10여일간 계속 하다.

 

■ 1979-03-04

함선생님, 윤보선선생 댁에서 김대중 씨와 함께 기자회견, 3. 1절 성명 발표.

 

■ 1979-03-05

미국퀘이커봉사회 바바라 바우만여사가 내한, 함선생님 노벨평화상 추천서 전달하다.

 

■ 1979-03-05

함선생님 검찰에 소환되어 윤보선씨 대 기자회견 내용 및 성명사건, 또는 작년도 3. 1절 성명 등 조사 받다.

 

■ 1979-03-13

함선생님 78회 생신 맞다. 함선생님 노벨평화상 추진위원회 구성 (김대중씨 제안, 위원장에 윤보선 선생)

 

■ 1979-03-24

함선생님, 금요기도회 참석을 저지하고자 형사 및 기관원 12명 자택 앞길을 막다. 오후 4:30부터 함선생님 기관원들과 대치, 박선균 편집장, 박영자, 최응일 군등 합세하여 150m까지 밀고 나갔으나 좌절, 7시까지 2시간반동안 비맞으며 싸우다.

 

■ 1979-03-26

함선생님 대구 통일당대회 강연차 새벽 4:30분 형사들의 눈을 피해 출발하다.

 

■ 1979-03-27

함선생님 귀가 즉시 자택연금 무기한, 4월 22일까지 계속하다. (함선생님 모임 장자, 노자 부산모임 등은 형사 동행하여 허락하다)

 

■ 1979-03-31

3월호(3. 1절 61주년 기념호) 12,000부 발행.

 

■ 1979-04-19

창간 9주년 맞아 기념행사 없이 지내다.

 

■ 1979-05-01

4 .5월합본호(12,000부)발행.

 

■ 1979-06-01

함선생님 금요기도회 참석저지로 자택 앞 500m까지 기관원들과 싸우며 나가시다 손에 가벼운 부상을 입다.

 

■ 1979-06-02

함선생님, 김대중씨댁 방문 차 가시다가 경찰과 대치하는 가운데 두루마기 모두 찢어지다.

 

■ 1979-06-18

함선생님, 윤형중 신부 장례식 참석 저지당하다.

 

■ 1979-07-12

7월호(10,000부)발행. (지대 500원으로 인상하다.)

 

■ 1979-07-19

함선생님 목요기도회 참석 저지당하다(형사 4명)

 

■ 1979-08

8월호(1만부)발행.

 

■ 1979-08-08

함선생님 퀘이커세계대회참석 여권발급 받다.

 

■ 1979-08-11

함선생님 출국(스위스행)

 

■ 1979-08-20

함선생님 스위스에서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제1신 받다.

 

■ 1979-09

함선생님 캐나다에서 국제전화하시다.

 

■ 1979-09-11

9월호(8,000부)발행(특집. 제3세계)

 

■ 1979-09-16

부산데모사건으로 부산일원 비상계엄령 선포.

 

■ 1979-10-18

10월호(9,000부)발행.

 

■ 1979-10-19

함선생님 미국 피츠버그에서 전화.

 

■ 1979-10-26

박대통령, 김재규정보부장 총탄으로 사망. 전국 비상계엄령 선포.

 

■ 1979-11-07

함선생님 모든 일정취소하고 귀국하신다는 편지받다.

 

■ 1979-11-15

함선생님 귀국.

 

■ 1979-11-24

함선생님 YMCA강당에서 통대대통령선출저지 국민대회에 참석 후 중부서에 연행, 익일 새벽 2시 귀가 하셨으나 계엄사에 다시 연행되다.

 

■ 1979-11-26

함선생님, 박종태, 김병걸 씨 등 YMCA 불법집회사건으로 90여명 연행조사 발표(계엄사)

 

■ 1979-12-05

박선균 편집장 YMCA사건으로 연행, 즉결 20일 받다(정식 재판 청구로 10일만에 출감)

 

■ 1979-12-10

함선생님 연행 15일만에 귀가.

 

■ 1979-12-12

[12. 12]사태 발생.

 

■ 1979-12-27

함선생님 계엄사 검찰부 소환 심문받다.

 

1980년 7월 30일 ~ 1988년 12월 22일 전두환정권의 언론탄압정책으로 정부로부터 일방적인 폐간조치를 당하다.


1979년~1991년

■ 1980-01-11

1월호 신건이 씨 글 검열삭제부분이 삭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9,000부 재인쇄, 재제본하다. 이 일로 인해 문공부주재 수사관에 의해 인쇄소공장장과 박편집장 호출당하여 경위서 쓰고 귀사.

 

■ 1980-01-14

1월호(통권 91권 9,000)발행.

 

■ 1980-02-19

1. 2월호 합본호(1만부)발행.

 

■ 1980-02-25

함선생님, 보통군법회의에서 1년선고받고 형 확인 과정에서 형면제 처분받다. 문공부와 계엄사 검열 과정에서 15일 걸리다.

 

■ 1980-02-28

함선생님 등 687명 복권조치 발표.

 

■ 1980-03-11

문공부는 후퇴하고 계엄사 단독으로 검열실시 통고받다.

 

■ 1980-04-01

3월호(1만부)발행. 계엄사 검열과정에서 20여페이지 삭제되는 관계로 74페이지로 발행하다.

 

■ 1980-04-18

창간 10주년 기념전국순회 강연회개최 하기로 이르다.(서울, 부산, 대구, 광주, 전주, 제주 등)

 

■ 1980-04-30

창간 10주년 기념호 7천부 발행하다.

 

■ 1980-05-16

창간 10주년기념 제주강연(연사: 함선생님, 서남동 교수, 장소:제주학생회관)을 마치고 제주 숙소에서 5. 17 확대 계엄령을 맞다. 여기서 서남동 교수 5. 17자정,미리 대기하고 있던 정보원들에 의해 연행되다.

 

■ 1980-07

씨알의 소리 강제폐간 이후 함선생님의 글이나 근황도 매스콤에서는 일체 보도금지되었으나,함선생님은 노자(老子)모임, 장자(莊子)모임, 성서모임, 부산모임 등 정기 집회와 용기를 가지고선생님께 초청이 오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말씀을 계속하시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선생님을 연금, 도청, 미행 등 각종방법으로 선생님의 입을 봉하려고 온갖 탄압을 계속했다.

 

■ 1980-07-31

7월호 5천부 발행 이후, 5공정권의 언론통폐합조치로 사전예고 한마디 없이 전혀 일방적으로 강제 폐간 당하다. 이로써 씨알의 소리는 1970년 4월이후 통권 95권을 발행하고 1970년 5월 폐간이후 두 번째 폐간당하기에 이르다.

 

■ 1980-08 

함선생님 지시로 영구독자 및 정기독자들에게 구독료 환불한다는 통지를 내다.(그러나 대부분 독자들은 잡지의 운명과 함께 환불을 거부하고 받아가지 않았다.)

 

■ 1987-06-29

함선생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시다.

 

■ 1987-07-13

담관 및 종양부위 절제수술 4시간 받으시다.

 

■ 1987-08-29

퇴원.

 

■ 1987-09-04

백병원에 재입원하시면서 월간 씨알의 소리 복간할 것을 마음에 결심하시다.

 

■ 1987-11-10

전 편집장 박선균 편으로 1974년부터 77년까지 씨알의 소리 전면삭제분과 부분 삭제분을 모아서 "금지된 씨알의 소리"란 제명으로 단행본을 발행하다.(생각사, 308면 값 3,500원)

 

■ 1987-12-22

5공정권 말기 민주화의 열기 속에 언기법(言其法)이 폐기되고, 언론출판의 자유가 이루어질 희망가운데 씨알의 소리 복간신청을 문공부에 내다.

 

■ 1988-04-23

함선생님은 씨알의 소리가 아직 등록증이 교부되지는 않았지만 나올 것을 전제로 하고 편집위원 13명을 다음과 같이 위촉하고, 편집위원회 안에 편집소위원회를 두기로 하다. 계훈제(민권운동가) 김경재(한신대교수, 편집소위원) 김동길(연세대교수) 김용준(고려대교수, 편집소위원장) 김영호(인하대교수, 편집소위원) 노명식(한림대교수) 법정(송광사 스님) 송건호(한겨레신문사 사장) 송기득(목원대교수) 안병무(한국신학연구소소장) 이태영(가정법률상담소소장) 조요한(숭실대총장) 한승헌(변호사, 편집소위원)

 

■ 1988-05-04

함선생님은 투병 중에 계시면서 등록신청 4개월이 지났는데도 등록증을 교부해주지 않는데 대하여 "정기간행물 등록증 교부 촉구"라는 항의 공문을 문공부장관에게 내다.

 

■ 1988-07-18

강제폐간 8년만에 씨알의 소리 정기간행물 등록증을 교부받다.(신문 3528-4-102651/등록번호 라-3676) 법적처리 기간은 신청한지 1개월내로 내주게 되었으나 무려 7개월만에 등록증을 받게 된 것이다.

 

■ 1988-08-05

중구회현동 2가 아일빌딩 313호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편집책임으로 박선균님 및 직원에 박영자 님, 이영애 님을 기용하다.

 

■ 1988-11-01

업무책임으로 조일환 님(소야)기용하다.

 

■ 1988-11-30

복간호 1만부 발행하다.

 

■ 1988-12-15

복간호 3천부 재판 발행하다.

 

■ 1988-12-29

신년호 1만부 발행하다.

 

■ 1989-01-30

2월호 1만부 발행하다.

 

■ 1989-02-01

조일환 님 와병으로 한해수 님 근무시작.

 

■ 1989-02-04

함선생님의 빈소에서 씨알의 소리 후원회를 구성하고 준비위원장에 장기려 박사를 추대하다.

 

■ 1989-02-04

함석헌 선생님 서울대학병원 12층 108호실에서 서거하시다.

 

■ 1989-02-08

함선생님, 오산학교 강당에서 오산학교장으로 장례식 거행하다.(2천여 조문객 참석)

 

■ 1989-03-09

3월호 6천부 발행.

 

■ 1989-03-25

직원 조일환(소야)님 위암으로 별세하다.

 

■ 1989-04-08

4월호 7천부 발행하다.(4월호는 창간 19주년 기념호이자 씨알의 소리 통권100호가 된다. 통권 100호까지 함석헌 선생님의 명의로 발행되다)

 

■ 1989-04-19

씨알의 소리 후원회는 함석헌 선생기념사업회로 명칭을 바꾸고 기념사업회회장에 장기려 박사를 다시 모시다.

 

■ 1989-04-29

5월호 8천부 발행.

 

■ 1989-05-01

7월호 7천부 발행.

 

■ 1989-05-01

편집소위원장 김용준 박사를 씨알의 소리 제2대 발행인으로 추대하다.(이보다 앞서 3월 11일 함석헌 선생 서거 이후 편집전체회의에서 "씨알의 소리는 여러분의 소리가 되기를 바란다"는함선생님의 유언을 상기하면서 선생님은 돌아가셨으나 씨알의 소리는 계속 발행 돼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장기려 박사를 발행인에 김용준 박사를 편집인으로 내정했으나, 장 박사의 발행인 고사로 김용준 박사를 편집겸 발행인으로 모시게 된것이다.)

 

■ 1989-05-31

6월호 8천부 발행.

 

■ 1989-06-29

7월호 7천부 발행.

 

■ 1989-07-31

8월호 8천부 발행.

 

■ 1989-08-01

본지의 원활한 운영과 발행인 보좌를 위하여, 심의석 사장(전 해동화재보험주식회사사장), 최진삼 장로(신지교회), 정상복 목사(순례자교회)를 운영위원에 추대하다.

 

■ 1989-08-31

9월호 6천 5백부 발행.

 

■ 1989-09-11

한해수 님 사임으로 윤영헌 님(업무책임) 기용하다.

 

■ 1989-10-06

10월호 5천5백부 발행.

 

■ 1989-11-23

11. 12월 합본호 4천부 발행

 

■ 1989-12-02

복간 1주년 기념강연회 열다. (강사: 김동길- 씨알의 나아갈길/ 송건호- 한국 언론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 장소- 여전도회관)

 

■ 1989-12-15

회현동 2가 사무실을 마감하고 도봉구 쌍문 2동 81-78 함선생님 자택 1층 사무실로 이사하다.

 

■ 1989-12-28

90년 신년호부터 정기독자 위주로 계획을 바꾸어 3천부 발행하다.

 

■ 1989-12-29

윤영헌 님 사임.

 

■ 1990-02-03

2월호 3천부 발행.

 

■ 1990-02-04

씨알 함석헌 선생님 1주기 추도식 거행하다(장소:한신대학원강당 500여 조문객참석)

 

■ 1990-03-07

3월호 3천5백부 발행.

 

■ 1990-03-26

본지 정기독자 2천명 돌파되다.(정기독자총수 2157명)

 

■ 1991-04

씨알의소리가 여러가지 어려운 사정에 의해 1991.4월호부터 휴간.


■ 1994.11 - 1998 12

"씨알마당"이란 제1호로 '함석헌 기념사업회' 회원지 형식으로 "씨알의소리"를 대신하여 발행하다.


1999년~현재까지

■ 1991-01

함석헌기념사업회에서는 사단법인 발족과 함께 『씨알의 소리』를 1999년 1월호부터 격월간으로 다시 복간하다.1991년 3월호(통권122호)를 마지막으로 그 동안 사정에 의해 내지 못했던 『씨알의 소리』는 1999년 1월 20일 문화관광부로부터 등록번호 『문화 라 08245』호로 다시 발행허가를 받다. 복간호는 그동안 발간하던 『씨알마당』 1호부터 23호까지(94년 11월~98년 8월)를 포함하여 통권 146( 1999년 1,2월)호부터 시작하여 격월간으로 출간하다.

 

■ 1998-12

씨알마당 23호발행(통권145호)

 

■ 2008-05 씨알의소리 통권 200호기념 혁신호를 내면서부터 90여쪽에서 240쪽으로 증보하여 출간하고, 김영호 편집장이 담당하다.

 

■ 2009-04-28

김영호 편집장 사임하고 김조년 편집주간이 담당하다.


■ 2010-04-23

씨알의소리 창간 40주년 강연회를 한국기독교 회관에서 “씨알은 왜 혁명해야 하는가?”란 주제로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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