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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ᄋᆞᆯ들의 소식“함석헌 붓 꺾은 전두환, <씨알의소리>가 남았다면...” [인터뷰 ] 2

<씨알의소리>로 말한다면 내가 제일 오래도록 맡아서 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선생님께 매료됐다기 보다, 나는 선생님을 절대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선균이는 나와 같아서'라고 선생님이 말하시는 걸 듣고 내가 어떻게 선생님과 같다는 말씀인가를 생각했지만, 선생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인간은 없다'는 명제처럼 함석헌에게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목사님이 본 함석헌의 한계는 무엇이었는지?
”두 가지만 말하겠다. 첫째는 너무 조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지 조직적이지 않다는 점이 장점이면서도 단점이라고 생각된다. '조직 아닌 조직을 가져라' 하시는 말씀이 옳은 말씀이지만, 그 점에서 선생님의 실패는 의미 있는 실패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된 점도 있다. 예를 들어 지난 1957년에 함석헌 선생님이 천안의 씨알농장 일만 이천 평을 기증받으신 것으로 알려졌지만, 내용은 전혀 기증이 되지 않았다. 정만수 장로가 선생님 앞으로 등기를 해드리겠다는데도, 선생님은 아무 이름으로 있으면 어떠냐 하시면서 법적으로 정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거기서 십여 년 간을 희생 봉사한 동지들의 땀방울을 건지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세상은 바꿔지지 않는다”
- 20세기를 살다 간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 일이, 왜 21세기 오늘을 사는 후진들, 젊은이들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이런 문제는 나 같은 사람이 답변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지만, 하나만 말씀드린다면, 함석헌의 삶과 사상은 아주 혁명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함석헌은 종교에서 말하는 회개나 깨달음의 세계를 지나서 인간의 근본적이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세상은 바꿔지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의 삶과 사상은 오고 오는 어느 세상에서도 절대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 함석헌이 좁게는 한국역사, 크게는 세계역사에 남긴 유산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내 생각은 이렇다. 함 선생님이 남기 유산은 한 마디로 말해서 씨알사상이나 씨알정신이라고 본다. 선생님은 살아 생전에는 사상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상보다는 '정신'이란 말을 더 좋아하시고, '바통'이란 말씀을 의미 있게 강조하셨다. 1976년 4월호 <씨알의소리>에 '누가 이 참의 바통을 받을 것인가?'라는 함선생님의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나는 이제 죽을 날이 가까웠기 때문에 요새는 그 생각만 한다. 바통, 아무래도 넘겨줘야 하잖아? 한 바퀴 다 달리고 마지막이 가까워지면 저 사람이 보기 쉽게 바통을 내 들어야 한다. 나도 변변치 않은 거지만 '바통이 이거라고 분명히 볼까' 하고 지금 이 말을 한다... 그러니까 뛰기는 실컷 뛰었다가 바통 넘겨주지 못하면 소용없고, 저 사람도 아무리 뛴다 해도 바통 받아 쥐지 않고 뛰면 소용이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네가 받아라... 지금 내 마음에도 조금 분명해지니까 자주 이러는 거야요... 나는 이거 흔들었으니까 생각 있는 사람 바짝 붙잡아요!'


그래서 함 선생님이 남기신 유산이 뭐냐? 바통이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씨알정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려면 한이 없지만 간단하게 말한다면 선생님이 남기신 말씀 중에 '살림살이' 12가지와 '우리가 내세우는 것' 8가지, 그리고 선생님의 전집 속에 씨알정신이 녹아져 들어있다고 본다.”
- 지난 1970년대 함석헌의 영향을 받고 함께 따르던 이 땅의 지식인들 중에서 오늘 날에는 오히려 이념적으로 정반대쪽에 서게 된 분 들이 꽤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게 되었다고 보시는지?
”그것은 함석헌의 씨알사상이나 정신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깨닫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해보면 모두가 함석헌을 존경한다, 잘 안다 하지만 존경하는 것은 몰라도 잘 안다든 것은 수박 겉핥기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함석헌의 씨알사상이나 정신에 철저했다면 잘못될 수가 없다.”

집요하고도 철저했던 탄압... '자유냐? 죽음이냐?'
- 19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 아래서 언론의 마지막 보루였던 <씨알의소리>가 어떻게 탄압을 받았으며, 어떻게 저항을 했는지?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면?
”탄압의 역사를 말한다면 시간이 모자랄 것이지만, 떠오르는 몇 가지만 말해 보겠다. 당시 '씨알의소리사'는 함 선생님 자택 안쪽에 조그만 사무실이 있었는데, 정보부 담당자와 기무사 담당자 그리고 용산서 담당형사가 수시로 드나들었다. 원효로 4가 70번지 선생님 댁 대문은 항상 열려 있었고 누구든지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막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씨알의소리> 탄압은 집요하고도 철저했다.
첫 번째로 기억되는 일은 1971년 10월호 <씨알의소리>에 함 선생님의 글 '군인정치 10년을 돌아본다'가 실렸는데, 이글은 지금 읽어도 눈을 뗄 수 없는 명문인 동시에 당시 군사정권의 폐부를 찌르는 글이었다. 표지 상단에는 '싸우자! 죽자! 다시 살자!'라는 구호가 있다. 이 책이 출판되어 간신히 독자들에게는 발송은 되었으나 시중 서점에 나간 것은 감쪽같이 모두 증발해 버렸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정보부가 모두 사갔다는 말이 돌았다.
다음으로 1971년 12월호 <씨알의소리>가 나왔을 때 동아일보 광고란에 '자유냐? 죽음이냐?'라는 제목으로 <씨알의소리> 광고를 냈다. '자유냐? 죽음이냐?'는 따로 글을 쓴 것이 아니고, 미국의 독립혁명 지도자 헨리 패트릭(Henry Patrick)의 연설문 제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이 광고가 나간 후 그 때 같이 일하던 문대골 업무부장이 잡혀갔다. 그때 문 부장은 선생님 같이 한복을 입고 다녔다. 그래서 나는 보이지 않았고, 문 부장이 뚜렷했기 때문에 잡혀갔다. 그는 일주일 이상 말로 다할 수 없는 수난을 받았다. 그때 만일 문 부장이 '자유냐? 죽음이냐? 는 자신이 기획한 것이 아니고 박선균이 한 것이라'고 했다면 내가 오늘 이렇게 멀쩡하게 인터뷰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생각을 할 적마다 문 부장께 감사하고 있다(문대골 목사는 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이다).그리고 1972년 4월호 <씨알의소리>는 창간 2주년 기념호였다. 여기에 함 선생의 '같이살기 운동을 일으키자'는 글과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지의 수난사' 등 중요한 글들이 많았다. 당시 비밀리에 인쇄를 마치고 청계천 어느 제본소에서 제본을 하고 있는데, 직원으로 있던 박상희씨가 전화로 문대골 부장이 제본 중 연행되어 갔고, 제본을 못하고 압수 상태에 있다는 연락을 했다.
그 때 마침 장준하 선생이 사무실에 계셔서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장 선생님과 같이 택시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장 선생이 현장에 도착하면서 “어느 놈이 <씨알의소리>를 압수 하느냐?” 소리 지르니까 형사들이 비실비실 달아나 버렸다. 장 선생님은 나에게 말하기를 '아무래도 제본을 제대로 하기는 어려우니 일단 용달차에 그대로 싣고 우리 집으로 옮기자' 해서 당시 사시던 동대문 부근으로 인쇄만 된 <씨알의소리>를 옮겼다. 그 후 장 선생님 가족이 총동원되어서 접지만 하고 <씨알의소리>를 재단도 못한 채 독자들에게 발송한 적이 있다. 수난의 잡지 그대로다.
이야기가 좀 길어지지만 한두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다. 1973년 3월호 이야기다. 함 선생님은 여기에 '참 지도자의 모습'이라는 대 논설문을 쓰셨다. 한 가지 미리 알려드리는 것은 1973년부터는 장준하 선생이 중간에서 <씨알의소리> 문제로 정보부와 협상을 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탄압 속에 비밀 인쇄를 계속하는 것도 어렵고, 정보부에서도 우리가 최대한 협조를 할 터이니 <씨알의소리>를 인쇄하기 전 한 번만 보게 해 달라는 것이다.
여기서 함 선생님도 검열을 받으면서 <씨알의소리>를 계속내야 하는가? 고민하셨지만, 장 선생님께 일단 협상을 맡기기로 했다. 편집위원들과도 상의를 한 끝에 정보부와 싸우면서라도 <씨알의소리>를 내는 것이, 아예 없애는 것보다는 낫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 구체적 일은 편집장인 나에게 떨어졌다. 결국은 <씨알의소리>의 인쇄소는 대광인쇄소로 결정 되었고, <씨알의소리>가 발행되기 전 정보부가 먼저 한번 보고 문제가 있는 구절은 협상을 통해 하기로 결정이 난 것이다.
이런 때 함 선생님의 '참 지도자의 모습'이란 글이 나왔다. 당시 정보부 담당자는 김영균이라는 사람이었다. 김영균은 어느 날 나를 만나 선생님의 글에 붉은 줄을 새빨갛게 칠해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이 글은 각하를 겨냥한 글이기 때문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전 면삭제가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면 삭제라면 협상이 아니지 않느냐? 했지만 김영균은 이것은 자기 선에서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때 언뜻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어서 김영균에게 '지도자란 말이 문제라면 목자라고 하면 어떻겠는가?' 했더니 그도 생각하더니 그것은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문제는 함 선생님이 승낙하실 지가 의문이었다.
함 선생님도 씁쓰레 하시더니, 결국 지도자가 목자로 바뀌어서 나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 명설교집에 함 선생님의 이 글 '참 목자의 모습'이 들어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