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구원의 꿈
―씨알이 새 저녁에 꾸는―
일대변화
인류는 지금 일대변화 중에 있다. 지금만 아니라 근본적인 의미에서 우주는 영원한 변화의 과정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전 어느 때 보다도 그 변화가 심하기 때문에 전에 없는 변화라고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일대변화라고 한다.
[중략]
고민하는 국가
[중략]
지금은 국가주의가 그 모순을 드러내는 시대다. 이것을 말할 때는 편이상 나라와 국가를 구별해서 말한다. 나라는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운명공동체이고, 거기 대해 국가는 어떤 권력구조가 법적으로 그 나라를 대표하려 하는 것이다. 물론 이상은 그 둘이 일치하는 것이지만, 실지에 있어 정말 나라노릇을 하는 국가는 없다. 이름은 나라지만 그것은 어느 집단이 힘으로 그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일대변화의 위기는 이러한 적응을 잘하지 못하는데서 온다. 선진, 후진할 것 없이 문명에 급격한 변화가 왔기 때문에 인간의 생활은 벌써 국가를 넘어서 인격, 종교, 지난날의 역사적 모든 차별을 넘어서, 하나로 세계적이 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이 됐는데, 그래서 벌써 사실로는 많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정치만은 지배집단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비교적 후진적인 감정에 호소해 가면서 옛날의 국가 기구를 그냥 지켜 가려 한다.
[중략]
새 宗敎改革
나는 이차대전이 일어날 때부터 종교는 다시 개혁된다는 생각을 해 온다. 왜 그런가? 인류를 이 문명의 위기에서 건지려면 종교의 힘으로 할 수밖에 없는데 지금 있는 기성종교가 도저히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왜 못한단 말인가? 한마디로 정치와 너무 깊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30년 전 당시의 내 기분으로는 “야합”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종교는 본래 우주의 근본이신 지극히 높은 영(靈)을 섬김으로 사회를 영화(靈化)시키잔 것이지 정치를 섬기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워에서 나는 국가주의라고 했지만 더 분명히 말한다면 대국주의 혹은 국가지상주의, 그보다도 더 분명하게 하려면 정치주의 혹은 정부주의라 해야 할 것이다. 운명공동체로서의 나라는 자연적으로 있는 것, 더 깊이 말한다면 지극히 높은 우주적인 의지의 발로에 의해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국가적인 데까지 발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략]
구원은 자아에서 부터다, 스스로 믿으면 살고 또 남을 살릴 수 있지만 믿지 않으면 망하는 수밖에 없다. 믿음은 의지요 결정이다. 도전하는 것이 믿음이다. 신은 감상주의자는 아니요, 자기가 감상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감상주의 안에는 구원이 없다. 마음은 작은 것이지만, 혼은 마음보다도 더 작은 것이지만, 작다 못해 이(夷)요, 희(希)요, 미(微)라 할 수밖에 없고 현(玄)이라 묘(妙)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감히 우주악(宇宙惡)에 대해 “아니”할 수 있는 것은 혼이요 믿음이다.
그저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자기를 부정할 수 있어야, 적어도 부정하려고 노력해야 믿음이다. 자기가 죽어야, 완전히 죽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죽을 수 있기 위해 진지한 기도를 올려야, 믿음이다. 만일 개인에 있어서 죽음에 의해 사는 것이 진리라면 나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도덕에 두 가지가 있을 리(理)는 없기 때문이다.
빛은 東方에서
역사에 되풀이란 것은 없다.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은 스케일이 너무 작아서 그런 것이었다. 자전하는 지구를 타고 해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좀 컸으니 좀 더 크게 봐야 할 것이다. 태양의 궤도만 해도 아니 뵈는데 은하의 궤도, 더구나 대우주의 궤도가 뵈겠는가? 영에 이르면 궤도 아닌 궤도지.
그러니 되풀이는 아닌 되풀이의 자리에서 옛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말이 있어 이르되 “빛은 동방에서”라 그랬지, 그것이 무슨 소리 일까? 눈이 열린 사람은 뵈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이요 귀가 열린 사람은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법이다.
[중략]
그런 의미에서 작금(昨今)에 우리가 당하고 있는 문제는 매우 의미 깊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이번 UN에서 당하는 문제, 세계적으로 한국이 문제의 초점이 돼가는 문제, 그런 것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중략]
수난의 여왕의 꿈
나는 우리나라를 수난의 여왕이라, 역사의 행길에 앉은 늙은 갈보라 하는데, 그러한 수난자 수욕자의 심정으로서 생각할 때 하나의 꿈이 있다. 그것은 이차대전을 겪고 난 직후에 꾼 것이다. 아직도 그 시대는 완전히 지나가지 않았으니 그 꿈은 아직 품고 있을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그것은 동남아의 연방을 한번 제창해 봤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정치를 알지도 못하고 좋아도 아니하는 나이니, 이것을 하나의 정치적 기도(企圖)로 하는 말은 아니요, 다만 하나의 환상처럼 생각해 보는 일이다.
앞을 내다볼 때 가장 걱정되는 것은 중국의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다. 지금 중국은 공산 국가요 아직 세계는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의 긴장 속에 있지만 나는 공산주의는 그리 두렵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하나의 사상인데 사상은 아무리 험악하다 하더라도 멀지 않아 변하는 날이 올 것이다. 두려운 것은 민족감정 혹 국가주의적 횡포다 그것은 좀해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세계 여러 약소민족을 괴롭히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들의 국가주의다. 국가라는 이름 아래 민중을 완전히 그 수단으로 삼고 지배하려는 생각이다. 그 점에서는 두 진영이 일반이다. 그런데 중국은 이제 강력한 폭력 밑에 통이 됐고 남들은 거의 바닥이 난 천연자원을 풍부히 가지고 있고 그동안 오래 서구세력에 눌렸던 반감(反感)은 불길같이 솟으려 하기 때문에, 그것이 큰 나라로 강해질 때 주위에 대한 그 교만과 횡포가 얼마나 할까? 지나간 긴 역사에 비추어 보아 거의 확실한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 턱 밑에 있는 우리 운명은 어떤 것일까? 그래서 그것을 일찍이 곤륜산에서 내리 구르는 바위 앞에 놓인 달걀로 비유했던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한다면 남북이 이렇게 갈라져 싸우는 이 민족은 참 어리석은 민족이다. 예로부터 생각 있는 선인들이 우리의 소량(少量)과 천식(淺識)을 걱정해 지적해 오지만, 참말 새삼 걱정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세력을 힘과 꾀로 당해낼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우리의 살길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탈민족주의 탈국가주의의 앞장을 서야한다는 것이다. 신강, 서장, 귀주, 운남, 만주가 다 중국 지배하에 있고 세계평화는 있을 수 없다. 소련도 미국도 인도도 일본도 다 걱정 아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 중국이 그 누구보다도 무서운 것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이상대로 한다면 세계가 한 나라 되고 그 다음 각 지역별로 자치하는 공동체가 생겨나는 것이지만,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전 우선 그 중간과정으로 몇 개의 연방이 있어서 마치 미합중국 모양으로 대소에 관계없이 한 표의 권을 가지고 연합해 나가야 할 것인데, 그 중에 우리에게 관계되는 것은 동남아의 군소국이 그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중국을 해방시키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앞날을 생각하면, 일대변화의 날을 생각하면, 지금의 대국일수록 해방이 필요한 노예 나라요, 약소국일수록 유리한 자리에 있는데, 그런 중에서도 중국이 가장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짐을 베껴주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인도주의요 또 우리의 살길이다. 그런데 그것을 앞장서는 데는 우리를 내놓고 더 적격자가 없을 것이다. 왜냐? 우리의 역사적 희생자로서의 경력이 그 자격을 준다. 돌아온 탕자처럼 영예자가 어디 있나?
창세기에 의하면 천지 만물 창조가 있으려 할 때 하나님의 영이 깊은 혼돈 위에 운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깊고 캄캄한 혼돈이 지상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역사위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수난의 여왕의 가슴 아닐까? 어둠과 슬픔의 심연이지만 영광과 기쁨과 사랑의 창조는 거기서만 쏟아져 나올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운동할 필요가 있다. 그 운동이란 암탉이 그 알을 품듯 도둑이 큰일을 저지르려 골똘히 생각하고 있듯 예술가가 영감을 얻으려 할 때 얼빠진 사람처럼 앉아있듯 앉아있는 태도다. 그 보다도 바가바드기타의 그림은 더 좋다. 거기는 자연은 자궁이요 우주의 영은 아버지어서 그 자궁 속에 수정을 할 때에 만물은 창조되어 나온다고 했다. 참 아름다운 그림 아닌가? 가장 미운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을 낳고 가장 더러운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것의 자궁이 된다. 그럼 이 역사의 행길에 앉은 노창녀는 새 시대의 아들을 배기 위해 앉은 것 아닌가? 다만 그 가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주적인 압력을 가지고 충만(充滿)시키도록 그 속을 진공으로 비워야 한다.
그것이 곧 일대변화, 역사적 “우로 돌아 앞으로 가”이다. 세계 구원의 첫 발걸음이다.
동정녀 아닌 동정녀, 거러지 갈보야 일어나 모든 권력주의, 물질주의의 욕뵘에서 네 자신을 씻고 준비하라. “너를 죄주는 자가 다 어디 갔느냐? 나도 너를 죄주지 않는다.”
함석헌, 씨알의 소리 1976. 1,2 50호
세계 구원의 꿈
―씨알이 새 저녁에 꾸는―
일대변화
인류는 지금 일대변화 중에 있다. 지금만 아니라 근본적인 의미에서 우주는 영원한 변화의 과정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전 어느 때 보다도 그 변화가 심하기 때문에 전에 없는 변화라고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일대변화라고 한다.
[중략]
고민하는 국가
[중략]
지금은 국가주의가 그 모순을 드러내는 시대다. 이것을 말할 때는 편이상 나라와 국가를 구별해서 말한다. 나라는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운명공동체이고, 거기 대해 국가는 어떤 권력구조가 법적으로 그 나라를 대표하려 하는 것이다. 물론 이상은 그 둘이 일치하는 것이지만, 실지에 있어 정말 나라노릇을 하는 국가는 없다. 이름은 나라지만 그것은 어느 집단이 힘으로 그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일대변화의 위기는 이러한 적응을 잘하지 못하는데서 온다. 선진, 후진할 것 없이 문명에 급격한 변화가 왔기 때문에 인간의 생활은 벌써 국가를 넘어서 인격, 종교, 지난날의 역사적 모든 차별을 넘어서, 하나로 세계적이 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이 됐는데, 그래서 벌써 사실로는 많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정치만은 지배집단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비교적 후진적인 감정에 호소해 가면서 옛날의 국가 기구를 그냥 지켜 가려 한다.
[중략]
새 宗敎改革
나는 이차대전이 일어날 때부터 종교는 다시 개혁된다는 생각을 해 온다. 왜 그런가? 인류를 이 문명의 위기에서 건지려면 종교의 힘으로 할 수밖에 없는데 지금 있는 기성종교가 도저히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왜 못한단 말인가? 한마디로 정치와 너무 깊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30년 전 당시의 내 기분으로는 “야합”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종교는 본래 우주의 근본이신 지극히 높은 영(靈)을 섬김으로 사회를 영화(靈化)시키잔 것이지 정치를 섬기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워에서 나는 국가주의라고 했지만 더 분명히 말한다면 대국주의 혹은 국가지상주의, 그보다도 더 분명하게 하려면 정치주의 혹은 정부주의라 해야 할 것이다. 운명공동체로서의 나라는 자연적으로 있는 것, 더 깊이 말한다면 지극히 높은 우주적인 의지의 발로에 의해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국가적인 데까지 발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략]
구원은 자아에서 부터다, 스스로 믿으면 살고 또 남을 살릴 수 있지만 믿지 않으면 망하는 수밖에 없다. 믿음은 의지요 결정이다. 도전하는 것이 믿음이다. 신은 감상주의자는 아니요, 자기가 감상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감상주의 안에는 구원이 없다. 마음은 작은 것이지만, 혼은 마음보다도 더 작은 것이지만, 작다 못해 이(夷)요, 희(希)요, 미(微)라 할 수밖에 없고 현(玄)이라 묘(妙)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감히 우주악(宇宙惡)에 대해 “아니”할 수 있는 것은 혼이요 믿음이다.
그저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자기를 부정할 수 있어야, 적어도 부정하려고 노력해야 믿음이다. 자기가 죽어야, 완전히 죽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죽을 수 있기 위해 진지한 기도를 올려야, 믿음이다. 만일 개인에 있어서 죽음에 의해 사는 것이 진리라면 나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도덕에 두 가지가 있을 리(理)는 없기 때문이다.
빛은 東方에서
역사에 되풀이란 것은 없다.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은 스케일이 너무 작아서 그런 것이었다. 자전하는 지구를 타고 해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좀 컸으니 좀 더 크게 봐야 할 것이다. 태양의 궤도만 해도 아니 뵈는데 은하의 궤도, 더구나 대우주의 궤도가 뵈겠는가? 영에 이르면 궤도 아닌 궤도지.
그러니 되풀이는 아닌 되풀이의 자리에서 옛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말이 있어 이르되 “빛은 동방에서”라 그랬지, 그것이 무슨 소리 일까? 눈이 열린 사람은 뵈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이요 귀가 열린 사람은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법이다.
[중략]
그런 의미에서 작금(昨今)에 우리가 당하고 있는 문제는 매우 의미 깊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이번 UN에서 당하는 문제, 세계적으로 한국이 문제의 초점이 돼가는 문제, 그런 것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중략]
수난의 여왕의 꿈
나는 우리나라를 수난의 여왕이라, 역사의 행길에 앉은 늙은 갈보라 하는데, 그러한 수난자 수욕자의 심정으로서 생각할 때 하나의 꿈이 있다. 그것은 이차대전을 겪고 난 직후에 꾼 것이다. 아직도 그 시대는 완전히 지나가지 않았으니 그 꿈은 아직 품고 있을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그것은 동남아의 연방을 한번 제창해 봤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정치를 알지도 못하고 좋아도 아니하는 나이니, 이것을 하나의 정치적 기도(企圖)로 하는 말은 아니요, 다만 하나의 환상처럼 생각해 보는 일이다.
앞을 내다볼 때 가장 걱정되는 것은 중국의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다. 지금 중국은 공산 국가요 아직 세계는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의 긴장 속에 있지만 나는 공산주의는 그리 두렵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하나의 사상인데 사상은 아무리 험악하다 하더라도 멀지 않아 변하는 날이 올 것이다. 두려운 것은 민족감정 혹 국가주의적 횡포다 그것은 좀해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세계 여러 약소민족을 괴롭히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들의 국가주의다. 국가라는 이름 아래 민중을 완전히 그 수단으로 삼고 지배하려는 생각이다. 그 점에서는 두 진영이 일반이다. 그런데 중국은 이제 강력한 폭력 밑에 통이 됐고 남들은 거의 바닥이 난 천연자원을 풍부히 가지고 있고 그동안 오래 서구세력에 눌렸던 반감(反感)은 불길같이 솟으려 하기 때문에, 그것이 큰 나라로 강해질 때 주위에 대한 그 교만과 횡포가 얼마나 할까? 지나간 긴 역사에 비추어 보아 거의 확실한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 턱 밑에 있는 우리 운명은 어떤 것일까? 그래서 그것을 일찍이 곤륜산에서 내리 구르는 바위 앞에 놓인 달걀로 비유했던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한다면 남북이 이렇게 갈라져 싸우는 이 민족은 참 어리석은 민족이다. 예로부터 생각 있는 선인들이 우리의 소량(少量)과 천식(淺識)을 걱정해 지적해 오지만, 참말 새삼 걱정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세력을 힘과 꾀로 당해낼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우리의 살길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탈민족주의 탈국가주의의 앞장을 서야한다는 것이다. 신강, 서장, 귀주, 운남, 만주가 다 중국 지배하에 있고 세계평화는 있을 수 없다. 소련도 미국도 인도도 일본도 다 걱정 아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 중국이 그 누구보다도 무서운 것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이상대로 한다면 세계가 한 나라 되고 그 다음 각 지역별로 자치하는 공동체가 생겨나는 것이지만,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전 우선 그 중간과정으로 몇 개의 연방이 있어서 마치 미합중국 모양으로 대소에 관계없이 한 표의 권을 가지고 연합해 나가야 할 것인데, 그 중에 우리에게 관계되는 것은 동남아의 군소국이 그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중국을 해방시키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앞날을 생각하면, 일대변화의 날을 생각하면, 지금의 대국일수록 해방이 필요한 노예 나라요, 약소국일수록 유리한 자리에 있는데, 그런 중에서도 중국이 가장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짐을 베껴주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인도주의요 또 우리의 살길이다. 그런데 그것을 앞장서는 데는 우리를 내놓고 더 적격자가 없을 것이다. 왜냐? 우리의 역사적 희생자로서의 경력이 그 자격을 준다. 돌아온 탕자처럼 영예자가 어디 있나?
창세기에 의하면 천지 만물 창조가 있으려 할 때 하나님의 영이 깊은 혼돈 위에 운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깊고 캄캄한 혼돈이 지상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역사위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수난의 여왕의 가슴 아닐까? 어둠과 슬픔의 심연이지만 영광과 기쁨과 사랑의 창조는 거기서만 쏟아져 나올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운동할 필요가 있다. 그 운동이란 암탉이 그 알을 품듯 도둑이 큰일을 저지르려 골똘히 생각하고 있듯 예술가가 영감을 얻으려 할 때 얼빠진 사람처럼 앉아있듯 앉아있는 태도다. 그 보다도 바가바드기타의 그림은 더 좋다. 거기는 자연은 자궁이요 우주의 영은 아버지어서 그 자궁 속에 수정을 할 때에 만물은 창조되어 나온다고 했다. 참 아름다운 그림 아닌가? 가장 미운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을 낳고 가장 더러운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것의 자궁이 된다. 그럼 이 역사의 행길에 앉은 노창녀는 새 시대의 아들을 배기 위해 앉은 것 아닌가? 다만 그 가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주적인 압력을 가지고 충만(充滿)시키도록 그 속을 진공으로 비워야 한다.
그것이 곧 일대변화, 역사적 “우로 돌아 앞으로 가”이다. 세계 구원의 첫 발걸음이다.
동정녀 아닌 동정녀, 거러지 갈보야 일어나 모든 권력주의, 물질주의의 욕뵘에서 네 자신을 씻고 준비하라. “너를 죄주는 자가 다 어디 갔느냐? 나도 너를 죄주지 않는다.”
함석헌, 씨알의 소리 1976. 1,2 5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