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사상 연구
함석헌의 비폭력 저항사―6
‘비폭력평화’에 마침표를 찍은 함 선생님
박선균
전 편집주간

7·4 남북공동성명 뒤에 숨겨진 유신헌법
1972년 7월 4일 남북한 당국이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한 역사적인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1971년 11월부터 1972년 3월까지 대한적십자사 정홍진과 북한적십자사 김덕현을 실무자로 하여 판문점에서 비밀접촉을 가졌다. 이 접촉의 성과를 바탕으로 1972년 5월 초 이후락 정보부장의 평양 방문과 5월과 6월 사이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김영주를 대신하여 박성철 제2부수상의 서울 방문이 실현되어 남북 간의 정치적 의견 교환이 처음 이루어졌다. 6월 29일 이후락과 김영주는 그동안의 회합 내용에 합의 서명하고 7월 4일 마침내 서울과 평양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이 성명은 통일의 원칙으로,
*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 사상과 이념 및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고 밝힘으로써,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공식 천명하였다.
남북한이 분단 27년 만에 처음으로 합의한 3대 원칙은 이후 남북 간에 이뤄진 모든 접촉과 대화의 기본지침이 되었다.(시사상식 사전, 제공처: 박문각)
위와 같은 성명을 발표하고서도 북한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남한은 거기에 따른 후속 조치는 전무할 뿐 아니라, 상상할 수도 없는 유신체제를 계획하고 있었다. 일반 시민이나 함석헌 선생님까지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통일이 앞당겨질 가능성으로, 상당히 고무된 듯한 모습이 없지 않았다.
《씨ᄋᆞᆯ의소리》 1972년 8월호에 장준하 선생이 중심이 되어 ‘민족통일의 구상’이란 대토론회를 종로 YMCA 8층에서 가졌다. 1부 사회는 장준하, 2부 사회는 안병무가 맡았다. 여기에는 천관우 선우휘 양호민 김용준 김동길 유희세 법정 계훈제 백기완 외에 젊은이로 김도현 최혜성 등 총 14명이 참석했다. 그리고 함 선생님은 〈민족 노선의 반성과 새 진로〉라는 주제강연을 하셨다. 그런데 이 8월호는 처음 대광인쇄소에서 인쇄를 시작했으나 정부 당국에 의해 인쇄 중지를 당했다가 시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발행하여 정기독자들에게만 보내진 일이 있다.
그리고 9월호 《씨ᄋᆞᆯ의소리》에는 함 선생님의 〈오천만 동포 앞에 눈물로 부르짖는 말〉과 장준하 선생의 〈민족주의자의 길〉이 글이 실리고, 장준하 선생이 보관하고 있던 백범 김구 선생의 사진을 표지 2면 전체에 실었다. 함석헌 선생님은 김구 선생의 폭력 노선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북한과도 평화통일로 가는 마당에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느닷없이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내용이었다. ‘국회해산→헌법 일부 효력 정지→비상국무회의→헌법개정→1개월 내 국민투표’를 발표했다. 이른바 선거도 투표도 없는 박정희 1인 영구집권으로 가는 유신헌법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국민투표를 했지만, 계엄령 하에 반대 세력을 묶어놓고 하나마나한 것이 되었다.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민족통일의 꿈에 부풀었던 일은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리고 공포 분위기로 세상은 캄캄해지고 말았다.
중앙정보부 검열 담당자와 싸움
중앙정보부를 대표한 김영균이라는 검열자의 이름이 물론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와 나는 《씨ᄋᆞᆯ의소리》가 나올 때마다 마주앉았다. 마주앉을 때 김영균은 이미 《씨ᄋᆞᆯ의소리》 원고에 붉은 줄을 쳐 가지고 왔다.
정보부가 주목하는 것은 네 가지, 1)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비판 2) 중앙정보부에 대한 비판 3) 체제에 대한 비판 4) 군인에 대한 비판이었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탠다면 과격한 표현은 모두 깎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혁명, 압력, 독재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처음에는 양보하는 척하다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들의 마수가 뻗쳐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함 선생님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쓴 ‘놈’이라든지 ‘악독’이란 말은 고쳐도 좋지만 “대통령이나 정보부나 유신체제를 왜 비판할 수 없느냐? 나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군사정권은 반대한다.” 하는 입장은 추호의 변함없이 단호하셨다. 필자는 김영균이 붉은 줄을 쳐온 원고를 보고 나름대로 어느 정도 수정하기도 했지만 지나치다 싶으면 함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함 선생님은 1973년 3월호에 〈참 지도자의 모습〉이란 글을 발표하셨다. 200자 원고지로 70매가 넘는 큰 논설이라 할 수 있는 글이었다. 필자는 그 글을 받자마자 직감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란 말이 한마디도 없었지만, “참 지도자” 자체가 대통령을 겨냥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위험하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그대로 인쇄소에 넘겼다. 교정지가 나오자마자 김영균으로부터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만나자마자 김영균은 교정지를 새빨갛게 줄을 쳐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이번 함 선생님 글은 각하를 겨냥하고 쓰신 글이기 때문에 전면 삭제가 불가피하다.” 했다. 필자는 “전면 삭제라면 약속이 틀리지 않는가? 이대로 함 선생님께 말씀드리면 분노하실 터인데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균은 “아무래도 이번 글은 어렵다.” 하는 말만 되풀이했다.
필자는 생각 끝에 한 생각이 떠올라 김영균에게 말했다. “지도자란 말이 문제라면 ‘목자’로 바꾸면 어떤가?” 김영균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거 괜찮겠다.” 했다. 문제는 함 선생님이 받아들이실지가 문제였다. 필자는 선생님을 만나 말씀드렸다. “‘참 지도자’란 말은 대통령을 지목한 것이기 때문에 도저히 나갈 수가 없다고 하는데 ‘참 목자’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함 선생님은 잠깐 생각하시더니 씁쓸한 표정을 지으시며 마침내 허락하시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은 〈참 지도자의 모습〉이 〈참 목자의 모습〉으로 바뀌어 내게 되었다. 그런데 또 하나 예상 밖의 일은 “한국 기독교 선교 90주년 기념 설교집”에 1번으로 함 선생님의 〈참 목자의 모습〉이 들어가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그 후 1973년 10월호까지 정보부와 글자 한 자를 가지고 “된다”, “안 된다” 싸움을 하면서 7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정보부에서 전면 삭제된 원고가 함 선생님 원고 2편, 장준하·천관우·이태영·김동길·이병린 변호사의 글과 변찬린 님의 글까지, 모두 8편의 글이 보관되어 있었다.
필자는 편집장으로서 전면 삭제된 글을 어떻게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이것을 전부 합하면 한 권 분량이 될 것이기 때문에 결단을 내렸다.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각오하고 책을 내버렸다. 1973년 11월호가 바로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서풍의 소리/함석헌
우리는 왜 이래야 합니까?/함석헌
민족외교의 나아갈 길/장준하
언론인이 본 오늘의 언론자유/천관우
야당 집 마누라/이태영
고언삼장(苦言三章)/김동길
산에 부치는 글/변찬린
치자의 법과 피치자의 법/이병린
위의 글 외에 표 2면에 시국선언문이 들어가 있었다. 함석헌·김재준·법정·천관우·계훈제·김지하·정수일·이재오·조향록·강기철·김숭경·박삼세·이호철·지학순·홍남순 등 15명의 이름으로 발표한 선언문이다.
[……] 현 정권이 독재정치, 공포정치로 국민의 양심과 일상생활을 더 없이 위축하고 우방 각국의 신뢰와 친선관계는 극도로 실추되어 대한민국은 내외로 최악의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
인권과 민권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의 기치 아래 민족의 총역량을 집결하는 것만이 끝내 이 땅에 뿌리박고 살아가야 할 우리 민족의 간절한 소망이요, 당면한 내외의 이 난국을 타개하는 우리나라 단 하나의 활로이다. 현 정권은 이 중대한 현실을 직시하여 무엇보다도 민주적 제 질서를 시급히 회복하라. 그것은 결코 어떤 미봉으로 될 일이 아니요, 민주체제를 근저에서 재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 [……]
필자는 이 모든 글을 11월호로 편집해서 인쇄에 들어갈 때, 그동안 《씨ᄋᆞᆯ의소리》를 인쇄해주던 대광인쇄소가 아닌 다른 인쇄소에서 비밀리에 인쇄를 했다. 인쇄했지만, 인쇄소 이름도 모른다. 모두 ‘씨ᄋᆞᆯ의소리사 대표 함석헌’만을 밝혔다. 그리고 12월 3일 독자들에게 긴급발송까지 끝마칠 수 있었다. 필자는 이제야말로 그 무서운 정보부에 끌려가 그동안 맛보지 못했던 고초를 당할 것으로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보부에서 무슨 생각이 났는지 앞서 삭제하겠다던 《씨ᄋᆞᆯ의소리》를 대폭 완화하겠다는 통고를 해왔다. 그 후 김영균이 왔다. 인쇄된 《씨ᄋᆞᆯ의소리》를 보자 해서 한 권을 보여줬더니, 그 책을 들고 씁쓰레 웃으면서 “몰아서 냈구만!” 했다. 그래서 내 말이 “문제가 됩니까?”했더니, “요새는 다 언론자유가 있는데 괜찮겠지요.”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가 바로 폭풍전야 같은 고요함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비밀 인쇄를 해서 독자에게 발송까지 모두 끝난 다음 한 달이 채 못 되어, 19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되었다.
“유신헌법 부정, 개정요구, 비판 및 반체제활동 엄단 등 위반자는 징역 15년 이하”라는 무서운 발표가 나왔다. 단 지금까지 한 일은 모두 불문에 부친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찔함을 느꼈다. 그때 어쩌면 그렇게 타이밍이 맞을 수 있었던가. 그때 만일 인쇄가 늦고 발송이 늦었다면, 나야말로 속된 말로 골로갔을지도 모른다.
전두환은 함석헌의 입을 봉하고 붓을 꺾었다
마침내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탄에 천하무적의 박정희도 끝나는 날이 오고 말았다. 박정희가 쓰러지자 이제는 민주화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군부세력의 뿌리는 깊었다.
당시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은 이제 자기들 세상이 오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전두환이 나타난 것이다. 전두환은 박정희를 뺨칠 정도로 세상을 더 무섭게 만들었다. 박정희 정권 때는 《씨ᄋᆞᆯ의소리》를 검열을 하면서도 없애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두환은 정권을 잡자마자 사전통고나 한마디 예고도 없이, 170여 개 잡지와 함께 《씨ᄋᆞᆯ의소리》를 단칼에 잘라버리고 신문에 폐간 통고를 내버린 것이다. 그 후 전두환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8년간 한 손에 쥐고 권력을 휘둘렀다.
함 선생님은 《씨ᄋᆞᆯ의소리》가 한마디 통고도 없이 없어진 일로 말미암아, 그동안 독자들에게 받은 구독료를 돌려주겠다 하셨다. 그러나 구독료를 돌려받으려는 독자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씨ᄋᆞᆯ의소리》는 통권 95호를 끝으로 독자들에게 한마디 작별 인사도 없이 1980년 7월호로 마감하게 되었다.
전두환 집권 8년 기간은 함 선생님 생의 마지막 시간인데, 선생님은 글을 쓰실 잡지도 없고 말씀을 하실 모임이나 단체에 초청을 받아도 함 선생님은 불허였다. 이 생각을 하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다.
1979년 11월 24일, 박정희가 죽은 지 1개월쯤 되는 때였다. YWCA 위장 결혼 사건이 터졌다. 그 현장에 함 선생님, 안병무 박사, 필자도 참여하였다. 그 일로 함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민주 인사들이 정보부에 끌려갔다. 필자도 태평로 특수수사대라는 곳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20일 구류처분을 받았는데, 정식 재판을 청구하여 13일 만에 석방된 일이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함께 끌려갔던 학생이 내게 “저 박선균을 족치면 함석헌에게서 무엇이 나올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을 수사관에게 들었다면서 조심하라고 했다. 나는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1980년 4월, 《씨ᄋᆞᆯ의소리》 창간 10주년을 맞아 전국 강연 준비를 하고 있었다. 4월 18일 서울 강연을 기점으로 부산·전주·광주를 1차로 하고, 제주·청주·원주·대전·춘천까지 2차로 계획을 세웠다. 계획은 순조롭게 되어 5월 17일 제주 강연까지 마치고, 함 선생님은 독자를 따라 서귀포로 가셨을 때다. 필자는 강사인 서남동 교수와 여관에 들어가 잠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12시가 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형사들이 와서 서 교수를 잡아갔다. 비상계엄령이 제주까지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씨ᄋᆞᆯ의소리》를 못 내게 될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전두환 집권 8년은 문자 그대로 암흑시대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박정희 시대가 끝났으니 이제는 그와 같은 시대는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나갔던 마귀가 일곱 마귀를 데리고 들어와서 그 사람 형편이 더 나빠졌다는 성경 말씀처럼, 전두환 시대는 “박정희는 저리 가라”였다.
박정희가 만들어놓은 유신헌법은 그대로 전두환에게로 넘어왔다. 이름도 몰랐던 하나회의 전두환이 등장하여 12·12쿠데타를 거쳐 박정희가 가지고 있던 모든 권력이 전두환의 손에 넘어갔다. 전두환은 한 일 중에 대표적인 것이 악랄하기 그지없는 삼청교육대를 만든 것이다.
‘1980년 8월 4일,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 및 계엄 포고령 제19호에 의한 삼청 5호 계획에 따라 설치된 군대식 정치범 수용소’, 이것이 곧 삼청교육대이다. 전과자, 폭력배 등을 조사하는 것이 목적인 듯했지만, 아니었다. 첫 목표는 2만여 명으로 됐지만, 군경 합동으로 영장 없이 검거된 시민들의 수는 6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여기에 끌려간 이들은 ‘극강한 훈련과 가혹 행위로 지옥 같은 고통’을 당했다 한다. 얼마가 죽고 얼마가 병신이 되고 살았는지 기록도 확실치 않다.
‘비폭력 평화주의’에 마침표를 찍은 함 선생님
이런 현실에서 함 선생님 상황은 어떠했는가? 물론 여러 차례 정보부에 끌려가셨으나, 선생님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우리는 앞에서 말한 대로 서울에서 창간 10주년 행사를 1차, 제2차로 제주도까지는 마쳤으나, 비상계엄령 확대로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집회, 모든 행사는 불허였다. 특히 함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목받고 있었다. 오직 명동의 노자 모임만은 막지 않았다. 숨통만 열어주는 듯했다.
그러나 함 선생님은 초조하거나 불안한 모습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노자·장자 모임을 비롯하여 성서 모임에서도 언제나 한결같으셨다. 선생님의 입을 봉하고 붓을 꺾었다고 해도 선생님은 언제나 흔들림이 없었고 평화로웠다. 화를 내시거나 한숨을 쉬는 일은 보지 못했다. 누가 오든지 만나주시고 심지어 정보과 형사까지도 차별하는 일이 없었다. 동네 어린이들도 불러서 함께 노래도 부르고 선물도 주시는 것을 봤다. 편지도 오는 것마다 꼭꼭 읽으시고 꼭 답장을 쓰시는 것을 목격했다.
어느 날인지 확실치 않으나 필자는 한신대의 김재준 박사 말씀을 들은 일이 있다. 정보부에 여러 사람이 끌려가서 조사를 받고 있는데, “언제쯤 나가게 될 것인가?”를 의논하면서 사람들이 답답해하고 있었다. 그때 함 선생님이 그 소리를 들으시고 “아니, 나가려고 들어왔소?” 했다는 것이다. 그 말씀을 듣고 누구도 대답을 못 했다 한다.
함 선생님은 “일단 끌려 왔으면 여기에 있을 생각을 해야지, 나갈 이야기를 한다고 나가지는 것도 아니고, 점점 더 어려워질 터인데 어쩔 것인가?” 하셨다. 오랜 경험에서 나온 말씀이 아닌가 생각된다.
함 선생님은 일제강점 기간에 2년이 넘는 옥살이를 하셨고, 북한 공산 치하에서도, 자유당 정부에서도 투옥을 당하셨다. 그 후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끌려다니셨지만, 그것으로 인해 어떤 불안이나 어떤 두려움도 없이 항상 조용하고 평화로운 자세를 잃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감옥 생활 속에서도 노자·장자·공자·맹자만이 아니라 성경은 물론 불경도 《무량수경(無量壽經)》,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열반경(涅槃經)》, 《금강경(金剛經)》을 읽으면서, 근본에 있어서 기독교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하셨다. 편안한 자리가 아닌 옥살이를 하면서도, 성현들의 참과 사랑과 평화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셨다고 볼 수 있다.
마침내 1987년 6·10 대행진 이후 6·29 항복선언이 나왔던 바로 그날, 선생님은 황달 증세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셨다. 7월 13일 담도 종양 절제 수술을 네 시간에 걸쳐 받으셨고 한 달 후에 경과가 좋아서 퇴원하셨지만, 그때부터 1988년 8월까지 일곱 번이나 입퇴원을 반복하셨다. 퇴원 중에는 강의나 대담 요구가 있으면 거부하지 않으셨다. 횟수를 보면 강연이 21회, 강의가 13회, 대담이 4회로 무려 38회나 된다. 병상에서 김영호 교수와 가진 대담까지 합하면 40회가 넘는다.
선생님이 더 오래 사실 수도 있는데 무리한 일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었으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선생님은 너무도 진지하셨고, 생의 마지막을 정리하시는 듯,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는 듯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그 수많은 말씀 중에 ‘전두환’이란 이름은 한번도 거론하지 않았다. 무서워서 거론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물론 언론자유가 있고 《씨ᄋᆞᆯ의소리》가 살았다면 그냥 계실 선생님이 아니었다.
시간은 흘러서 6·29선언 이후 마침내 3김을 포함하여 정치활동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군인정치는 물러가고 민주화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니었다. 두 김씨(김대중·김영삼)가 연합만 했더라면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를 이기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는 것을 세상이 다 알고도 남았다.
어느 날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함 선생님이 퇴원하여 쌍문동 집에 계실 때였다. 김영삼 쪽 대표가 선생님을 찾아왔다. 함 선생님이 김대중 씨를 지지한다는 팸플릿이 나온 것을 봤는데, “사실입니까?” 하고 물었다.
함 선생님: “나는 지지한 일이 없다.”
질문자: “그러면 선생님이 김대중 씨 지지한 일이 없다고 팸플릿에 올려도 되겠습니까?”
함 선생님: “그건 그럴 수는 없다.”
함 선생님은 당시 누구를 지지하고 안 하고가 문제 아니라, 두 사람 중 하나가 양보하기를 바랐지만, 두 김씨는 서로 자기가 되는 줄 알았다. 그 후 뚜껑을 열어보니 두 김씨는 어디 가고 노태우가 당선이 되었다. 두 김씨는 정치 초년생 노태우에게 당하고 말았다.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는 88서울올림픽(1988. 9. 17.~10. 2.)이 열리게 된 때였다. 함 선생님은 돌이킬 수 없는 생의 마지막 때가 불과 5개월도 남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서울대병원 12층 108호실에서 투병하고 계셨다, 이때 88올림픽 서울평화대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선생님은 일어나 나가시기가 어려웠지만, 아프신 몸을 이끌고 기꺼이 평화대회에 나가 참석하셨다. 이것을 가지고 노태우를 지지한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그것은 너무도 함 선생님을 모르는 소리였다. 선생님은 평화를 위해서는 이러고 저러고를 따질 것 없다 하시고, 그 대회장에 나가셔서 마지막 평화대회에 마침표를 찍으신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함 선생님은 평화를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신 모습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함 선생님의 비폭력평화는 이제 우리 씨ᄋᆞᆯ에게 넘어왔다. 함 선생님이 우리에게 넘겨주신 씨ᄋᆞᆯ의 바통은 크게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첫째는 비폭력평화 정신을 일으키는 일이고, 둘째는 같이살기운동을 실천하는 일이다. 이것을 연구하고 몸으로 실행에 옮기는 일이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소 늦기는 했지만 함석헌기념사업회가 같이살기운동을 위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한국과 세계의 미래를 위해 아주 희망찬 일이라 보여진다.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말고 이겨나가기를 빈다.
알게 모르게 씨ᄋᆞᆯ은 도처에서 자라고 있다.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고 시간이 언제가 될지 모르나, 씨ᄋᆞᆯ이 잠을 깨고 일어나는 때가 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낙심하거나 잠들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씨ᄋᆞᆯ의 길을 당당하게 힘차게 함께 걸어가기를 바란다.
〈함석헌의 비폭력 저항사〉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린다.

씨ᄋᆞᆯ의소리 후원 계좌
834-01-0058-841(국민은행, 함석헌기념사업회)
#박선균 #씨알의소리 #함석헌 #비폭력 #저항
함석헌 사상 연구
함석헌의 비폭력 저항사―6
‘비폭력평화’에 마침표를 찍은 함 선생님
박선균
전 편집주간
7·4 남북공동성명 뒤에 숨겨진 유신헌법
1972년 7월 4일 남북한 당국이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한 역사적인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1971년 11월부터 1972년 3월까지 대한적십자사 정홍진과 북한적십자사 김덕현을 실무자로 하여 판문점에서 비밀접촉을 가졌다. 이 접촉의 성과를 바탕으로 1972년 5월 초 이후락 정보부장의 평양 방문과 5월과 6월 사이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김영주를 대신하여 박성철 제2부수상의 서울 방문이 실현되어 남북 간의 정치적 의견 교환이 처음 이루어졌다. 6월 29일 이후락과 김영주는 그동안의 회합 내용에 합의 서명하고 7월 4일 마침내 서울과 평양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이 성명은 통일의 원칙으로,
위와 같은 성명을 발표하고서도 북한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남한은 거기에 따른 후속 조치는 전무할 뿐 아니라, 상상할 수도 없는 유신체제를 계획하고 있었다. 일반 시민이나 함석헌 선생님까지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통일이 앞당겨질 가능성으로, 상당히 고무된 듯한 모습이 없지 않았다.
《씨ᄋᆞᆯ의소리》 1972년 8월호에 장준하 선생이 중심이 되어 ‘민족통일의 구상’이란 대토론회를 종로 YMCA 8층에서 가졌다. 1부 사회는 장준하, 2부 사회는 안병무가 맡았다. 여기에는 천관우 선우휘 양호민 김용준 김동길 유희세 법정 계훈제 백기완 외에 젊은이로 김도현 최혜성 등 총 14명이 참석했다. 그리고 함 선생님은 〈민족 노선의 반성과 새 진로〉라는 주제강연을 하셨다. 그런데 이 8월호는 처음 대광인쇄소에서 인쇄를 시작했으나 정부 당국에 의해 인쇄 중지를 당했다가 시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발행하여 정기독자들에게만 보내진 일이 있다.
그리고 9월호 《씨ᄋᆞᆯ의소리》에는 함 선생님의 〈오천만 동포 앞에 눈물로 부르짖는 말〉과 장준하 선생의 〈민족주의자의 길〉이 글이 실리고, 장준하 선생이 보관하고 있던 백범 김구 선생의 사진을 표지 2면 전체에 실었다. 함석헌 선생님은 김구 선생의 폭력 노선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북한과도 평화통일로 가는 마당에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느닷없이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내용이었다. ‘국회해산→헌법 일부 효력 정지→비상국무회의→헌법개정→1개월 내 국민투표’를 발표했다. 이른바 선거도 투표도 없는 박정희 1인 영구집권으로 가는 유신헌법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국민투표를 했지만, 계엄령 하에 반대 세력을 묶어놓고 하나마나한 것이 되었다.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민족통일의 꿈에 부풀었던 일은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리고 공포 분위기로 세상은 캄캄해지고 말았다.
중앙정보부 검열 담당자와 싸움
중앙정보부를 대표한 김영균이라는 검열자의 이름이 물론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와 나는 《씨ᄋᆞᆯ의소리》가 나올 때마다 마주앉았다. 마주앉을 때 김영균은 이미 《씨ᄋᆞᆯ의소리》 원고에 붉은 줄을 쳐 가지고 왔다.
정보부가 주목하는 것은 네 가지, 1)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비판 2) 중앙정보부에 대한 비판 3) 체제에 대한 비판 4) 군인에 대한 비판이었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탠다면 과격한 표현은 모두 깎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혁명, 압력, 독재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처음에는 양보하는 척하다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들의 마수가 뻗쳐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함 선생님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쓴 ‘놈’이라든지 ‘악독’이란 말은 고쳐도 좋지만 “대통령이나 정보부나 유신체제를 왜 비판할 수 없느냐? 나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군사정권은 반대한다.” 하는 입장은 추호의 변함없이 단호하셨다. 필자는 김영균이 붉은 줄을 쳐온 원고를 보고 나름대로 어느 정도 수정하기도 했지만 지나치다 싶으면 함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함 선생님은 1973년 3월호에 〈참 지도자의 모습〉이란 글을 발표하셨다. 200자 원고지로 70매가 넘는 큰 논설이라 할 수 있는 글이었다. 필자는 그 글을 받자마자 직감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란 말이 한마디도 없었지만, “참 지도자” 자체가 대통령을 겨냥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위험하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그대로 인쇄소에 넘겼다. 교정지가 나오자마자 김영균으로부터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만나자마자 김영균은 교정지를 새빨갛게 줄을 쳐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이번 함 선생님 글은 각하를 겨냥하고 쓰신 글이기 때문에 전면 삭제가 불가피하다.” 했다. 필자는 “전면 삭제라면 약속이 틀리지 않는가? 이대로 함 선생님께 말씀드리면 분노하실 터인데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균은 “아무래도 이번 글은 어렵다.” 하는 말만 되풀이했다.
필자는 생각 끝에 한 생각이 떠올라 김영균에게 말했다. “지도자란 말이 문제라면 ‘목자’로 바꾸면 어떤가?” 김영균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거 괜찮겠다.” 했다. 문제는 함 선생님이 받아들이실지가 문제였다. 필자는 선생님을 만나 말씀드렸다. “‘참 지도자’란 말은 대통령을 지목한 것이기 때문에 도저히 나갈 수가 없다고 하는데 ‘참 목자’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함 선생님은 잠깐 생각하시더니 씁쓸한 표정을 지으시며 마침내 허락하시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은 〈참 지도자의 모습〉이 〈참 목자의 모습〉으로 바뀌어 내게 되었다. 그런데 또 하나 예상 밖의 일은 “한국 기독교 선교 90주년 기념 설교집”에 1번으로 함 선생님의 〈참 목자의 모습〉이 들어가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그 후 1973년 10월호까지 정보부와 글자 한 자를 가지고 “된다”, “안 된다” 싸움을 하면서 7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정보부에서 전면 삭제된 원고가 함 선생님 원고 2편, 장준하·천관우·이태영·김동길·이병린 변호사의 글과 변찬린 님의 글까지, 모두 8편의 글이 보관되어 있었다.
필자는 편집장으로서 전면 삭제된 글을 어떻게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이것을 전부 합하면 한 권 분량이 될 것이기 때문에 결단을 내렸다.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각오하고 책을 내버렸다. 1973년 11월호가 바로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위의 글 외에 표 2면에 시국선언문이 들어가 있었다. 함석헌·김재준·법정·천관우·계훈제·김지하·정수일·이재오·조향록·강기철·김숭경·박삼세·이호철·지학순·홍남순 등 15명의 이름으로 발표한 선언문이다.
필자는 이 모든 글을 11월호로 편집해서 인쇄에 들어갈 때, 그동안 《씨ᄋᆞᆯ의소리》를 인쇄해주던 대광인쇄소가 아닌 다른 인쇄소에서 비밀리에 인쇄를 했다. 인쇄했지만, 인쇄소 이름도 모른다. 모두 ‘씨ᄋᆞᆯ의소리사 대표 함석헌’만을 밝혔다. 그리고 12월 3일 독자들에게 긴급발송까지 끝마칠 수 있었다. 필자는 이제야말로 그 무서운 정보부에 끌려가 그동안 맛보지 못했던 고초를 당할 것으로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보부에서 무슨 생각이 났는지 앞서 삭제하겠다던 《씨ᄋᆞᆯ의소리》를 대폭 완화하겠다는 통고를 해왔다. 그 후 김영균이 왔다. 인쇄된 《씨ᄋᆞᆯ의소리》를 보자 해서 한 권을 보여줬더니, 그 책을 들고 씁쓰레 웃으면서 “몰아서 냈구만!” 했다. 그래서 내 말이 “문제가 됩니까?”했더니, “요새는 다 언론자유가 있는데 괜찮겠지요.”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가 바로 폭풍전야 같은 고요함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비밀 인쇄를 해서 독자에게 발송까지 모두 끝난 다음 한 달이 채 못 되어, 19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되었다.
“유신헌법 부정, 개정요구, 비판 및 반체제활동 엄단 등 위반자는 징역 15년 이하”라는 무서운 발표가 나왔다. 단 지금까지 한 일은 모두 불문에 부친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찔함을 느꼈다. 그때 어쩌면 그렇게 타이밍이 맞을 수 있었던가. 그때 만일 인쇄가 늦고 발송이 늦었다면, 나야말로 속된 말로 골로갔을지도 모른다.
전두환은 함석헌의 입을 봉하고 붓을 꺾었다
마침내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탄에 천하무적의 박정희도 끝나는 날이 오고 말았다. 박정희가 쓰러지자 이제는 민주화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군부세력의 뿌리는 깊었다.
당시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은 이제 자기들 세상이 오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전두환이 나타난 것이다. 전두환은 박정희를 뺨칠 정도로 세상을 더 무섭게 만들었다. 박정희 정권 때는 《씨ᄋᆞᆯ의소리》를 검열을 하면서도 없애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두환은 정권을 잡자마자 사전통고나 한마디 예고도 없이, 170여 개 잡지와 함께 《씨ᄋᆞᆯ의소리》를 단칼에 잘라버리고 신문에 폐간 통고를 내버린 것이다. 그 후 전두환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8년간 한 손에 쥐고 권력을 휘둘렀다.
함 선생님은 《씨ᄋᆞᆯ의소리》가 한마디 통고도 없이 없어진 일로 말미암아, 그동안 독자들에게 받은 구독료를 돌려주겠다 하셨다. 그러나 구독료를 돌려받으려는 독자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씨ᄋᆞᆯ의소리》는 통권 95호를 끝으로 독자들에게 한마디 작별 인사도 없이 1980년 7월호로 마감하게 되었다.
전두환 집권 8년 기간은 함 선생님 생의 마지막 시간인데, 선생님은 글을 쓰실 잡지도 없고 말씀을 하실 모임이나 단체에 초청을 받아도 함 선생님은 불허였다. 이 생각을 하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다.
1979년 11월 24일, 박정희가 죽은 지 1개월쯤 되는 때였다. YWCA 위장 결혼 사건이 터졌다. 그 현장에 함 선생님, 안병무 박사, 필자도 참여하였다. 그 일로 함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민주 인사들이 정보부에 끌려갔다. 필자도 태평로 특수수사대라는 곳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20일 구류처분을 받았는데, 정식 재판을 청구하여 13일 만에 석방된 일이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함께 끌려갔던 학생이 내게 “저 박선균을 족치면 함석헌에게서 무엇이 나올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을 수사관에게 들었다면서 조심하라고 했다. 나는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1980년 4월, 《씨ᄋᆞᆯ의소리》 창간 10주년을 맞아 전국 강연 준비를 하고 있었다. 4월 18일 서울 강연을 기점으로 부산·전주·광주를 1차로 하고, 제주·청주·원주·대전·춘천까지 2차로 계획을 세웠다. 계획은 순조롭게 되어 5월 17일 제주 강연까지 마치고, 함 선생님은 독자를 따라 서귀포로 가셨을 때다. 필자는 강사인 서남동 교수와 여관에 들어가 잠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12시가 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형사들이 와서 서 교수를 잡아갔다. 비상계엄령이 제주까지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씨ᄋᆞᆯ의소리》를 못 내게 될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전두환 집권 8년은 문자 그대로 암흑시대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박정희 시대가 끝났으니 이제는 그와 같은 시대는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나갔던 마귀가 일곱 마귀를 데리고 들어와서 그 사람 형편이 더 나빠졌다는 성경 말씀처럼, 전두환 시대는 “박정희는 저리 가라”였다.
박정희가 만들어놓은 유신헌법은 그대로 전두환에게로 넘어왔다. 이름도 몰랐던 하나회의 전두환이 등장하여 12·12쿠데타를 거쳐 박정희가 가지고 있던 모든 권력이 전두환의 손에 넘어갔다. 전두환은 한 일 중에 대표적인 것이 악랄하기 그지없는 삼청교육대를 만든 것이다.
‘1980년 8월 4일,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 및 계엄 포고령 제19호에 의한 삼청 5호 계획에 따라 설치된 군대식 정치범 수용소’, 이것이 곧 삼청교육대이다. 전과자, 폭력배 등을 조사하는 것이 목적인 듯했지만, 아니었다. 첫 목표는 2만여 명으로 됐지만, 군경 합동으로 영장 없이 검거된 시민들의 수는 6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여기에 끌려간 이들은 ‘극강한 훈련과 가혹 행위로 지옥 같은 고통’을 당했다 한다. 얼마가 죽고 얼마가 병신이 되고 살았는지 기록도 확실치 않다.
‘비폭력 평화주의’에 마침표를 찍은 함 선생님
이런 현실에서 함 선생님 상황은 어떠했는가? 물론 여러 차례 정보부에 끌려가셨으나, 선생님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우리는 앞에서 말한 대로 서울에서 창간 10주년 행사를 1차, 제2차로 제주도까지는 마쳤으나, 비상계엄령 확대로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집회, 모든 행사는 불허였다. 특히 함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목받고 있었다. 오직 명동의 노자 모임만은 막지 않았다. 숨통만 열어주는 듯했다.
그러나 함 선생님은 초조하거나 불안한 모습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노자·장자 모임을 비롯하여 성서 모임에서도 언제나 한결같으셨다. 선생님의 입을 봉하고 붓을 꺾었다고 해도 선생님은 언제나 흔들림이 없었고 평화로웠다. 화를 내시거나 한숨을 쉬는 일은 보지 못했다. 누가 오든지 만나주시고 심지어 정보과 형사까지도 차별하는 일이 없었다. 동네 어린이들도 불러서 함께 노래도 부르고 선물도 주시는 것을 봤다. 편지도 오는 것마다 꼭꼭 읽으시고 꼭 답장을 쓰시는 것을 목격했다.
어느 날인지 확실치 않으나 필자는 한신대의 김재준 박사 말씀을 들은 일이 있다. 정보부에 여러 사람이 끌려가서 조사를 받고 있는데, “언제쯤 나가게 될 것인가?”를 의논하면서 사람들이 답답해하고 있었다. 그때 함 선생님이 그 소리를 들으시고 “아니, 나가려고 들어왔소?” 했다는 것이다. 그 말씀을 듣고 누구도 대답을 못 했다 한다.
함 선생님은 “일단 끌려 왔으면 여기에 있을 생각을 해야지, 나갈 이야기를 한다고 나가지는 것도 아니고, 점점 더 어려워질 터인데 어쩔 것인가?” 하셨다. 오랜 경험에서 나온 말씀이 아닌가 생각된다.
함 선생님은 일제강점 기간에 2년이 넘는 옥살이를 하셨고, 북한 공산 치하에서도, 자유당 정부에서도 투옥을 당하셨다. 그 후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끌려다니셨지만, 그것으로 인해 어떤 불안이나 어떤 두려움도 없이 항상 조용하고 평화로운 자세를 잃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감옥 생활 속에서도 노자·장자·공자·맹자만이 아니라 성경은 물론 불경도 《무량수경(無量壽經)》,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열반경(涅槃經)》, 《금강경(金剛經)》을 읽으면서, 근본에 있어서 기독교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하셨다. 편안한 자리가 아닌 옥살이를 하면서도, 성현들의 참과 사랑과 평화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셨다고 볼 수 있다.
마침내 1987년 6·10 대행진 이후 6·29 항복선언이 나왔던 바로 그날, 선생님은 황달 증세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셨다. 7월 13일 담도 종양 절제 수술을 네 시간에 걸쳐 받으셨고 한 달 후에 경과가 좋아서 퇴원하셨지만, 그때부터 1988년 8월까지 일곱 번이나 입퇴원을 반복하셨다. 퇴원 중에는 강의나 대담 요구가 있으면 거부하지 않으셨다. 횟수를 보면 강연이 21회, 강의가 13회, 대담이 4회로 무려 38회나 된다. 병상에서 김영호 교수와 가진 대담까지 합하면 40회가 넘는다.
선생님이 더 오래 사실 수도 있는데 무리한 일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었으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선생님은 너무도 진지하셨고, 생의 마지막을 정리하시는 듯,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는 듯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그 수많은 말씀 중에 ‘전두환’이란 이름은 한번도 거론하지 않았다. 무서워서 거론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물론 언론자유가 있고 《씨ᄋᆞᆯ의소리》가 살았다면 그냥 계실 선생님이 아니었다.
시간은 흘러서 6·29선언 이후 마침내 3김을 포함하여 정치활동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군인정치는 물러가고 민주화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니었다. 두 김씨(김대중·김영삼)가 연합만 했더라면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를 이기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는 것을 세상이 다 알고도 남았다.
어느 날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함 선생님이 퇴원하여 쌍문동 집에 계실 때였다. 김영삼 쪽 대표가 선생님을 찾아왔다. 함 선생님이 김대중 씨를 지지한다는 팸플릿이 나온 것을 봤는데, “사실입니까?” 하고 물었다.
함 선생님은 당시 누구를 지지하고 안 하고가 문제 아니라, 두 사람 중 하나가 양보하기를 바랐지만, 두 김씨는 서로 자기가 되는 줄 알았다. 그 후 뚜껑을 열어보니 두 김씨는 어디 가고 노태우가 당선이 되었다. 두 김씨는 정치 초년생 노태우에게 당하고 말았다.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는 88서울올림픽(1988. 9. 17.~10. 2.)이 열리게 된 때였다. 함 선생님은 돌이킬 수 없는 생의 마지막 때가 불과 5개월도 남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서울대병원 12층 108호실에서 투병하고 계셨다, 이때 88올림픽 서울평화대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선생님은 일어나 나가시기가 어려웠지만, 아프신 몸을 이끌고 기꺼이 평화대회에 나가 참석하셨다. 이것을 가지고 노태우를 지지한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그것은 너무도 함 선생님을 모르는 소리였다. 선생님은 평화를 위해서는 이러고 저러고를 따질 것 없다 하시고, 그 대회장에 나가셔서 마지막 평화대회에 마침표를 찍으신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함 선생님은 평화를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신 모습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함 선생님의 비폭력평화는 이제 우리 씨ᄋᆞᆯ에게 넘어왔다. 함 선생님이 우리에게 넘겨주신 씨ᄋᆞᆯ의 바통은 크게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첫째는 비폭력평화 정신을 일으키는 일이고, 둘째는 같이살기운동을 실천하는 일이다. 이것을 연구하고 몸으로 실행에 옮기는 일이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소 늦기는 했지만 함석헌기념사업회가 같이살기운동을 위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한국과 세계의 미래를 위해 아주 희망찬 일이라 보여진다.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말고 이겨나가기를 빈다.
알게 모르게 씨ᄋᆞᆯ은 도처에서 자라고 있다.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고 시간이 언제가 될지 모르나, 씨ᄋᆞᆯ이 잠을 깨고 일어나는 때가 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낙심하거나 잠들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씨ᄋᆞᆯ의 길을 당당하게 힘차게 함께 걸어가기를 바란다.
〈함석헌의 비폭력 저항사〉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린다.
씨ᄋᆞᆯ의소리 후원 계좌
834-01-0058-841(국민은행, 함석헌기념사업회)
#박선균 #씨알의소리 #함석헌 #비폭력 #저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