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ᄋᆞᆯ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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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호 씨알시론) 암살을 사살하라! ―위대한 시민의식으로 무장된 전사가 되자(오세훈, 편집위원)

씨ᄋᆞᆯ
2025-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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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ᄋᆞᆯ 시론


암살을 사살하라!
―위대한 시민의식으로 무장된 전사가 되자



오세훈(편집위원)




  생명존엄 윤리와 사상, 그 높이와 깊이, 넓이가 무한해야

  크든 작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생명을 경시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가질 않습니다. 가톨릭교회가 낙태 문제를 대하는 수준으로, 하늘 높은 생명존엄사상까지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들이 왜 그토록 사실상 불가능한 높이의 윤리의식을 강조하고, 많은 신도들은 그걸 실천하면서 사는지, 그에 더하여 글로벌 기후환경 위기에 대해서도 당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실천윤리를 조용하게 수행하고 있는지,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특별한 경지의 근거인 예수를 존경합니다. 그 가르침과 온몸 온맘에 배어 있는 그 문화에 찬동합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본받고 살고 있습니다.

  최근 소위 ‘12·3 비상계엄’이라는 초현실적인 사변이 벌어졌습니다. 국회의 계엄해제 결의 이후, 윤석열 일당의 치밀하고 잔혹한 내용 일색의 사전 계획이 다양한 소스들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거대하고 치명적인 산사태를 방불케 합니다. 그 무시무시한 현실 앞에서 저도 벗들과 다름없이 소름 끼치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글을 쓰는 일조차 걱정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요즈음 저는, 내 나라가 바스라지기 쉬운 마른 잎사귀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실은 내남없이 이기적이고, 탐욕적입니다. 사악합니다. 달콤한 유혹 앞에서 누구든 무너집니다. 이 특징들의 총합이 연약함입니다. ‘그분은 예외!’라고 칭송받는 어느 지도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 양반 역시 긴 세월 동안 이 태생적 전제조건들과 싸우다가 어느 순간에 장대높이뛰기에 성공한 존재일 것입니다. 그분조차 언제든 야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리더의 저열함은 더러운 정치의 전제조건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 보면, “사람을 죽이는 놈은 언제나 비겁한 놈이다. 제 가진 지위에 자신(自信)을 가지지 못한 자가 늘 신경과민으로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하는 문장이 나옵니다. 남이(南怡, 1441~1468) 장군의 죽음에 대한 역사적 의미부여를 저렇게 한 것입니다. 100년 가까운 과거의 어록인데, 오늘 이 나라의 정치현실에 딱 들어맞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예언자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과 세상에 대하여 보편성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역량은, 큰 사건 앞에서 비범한 혜안을 내고 결정적이고 농축적인 통찰을 제시합니다. 풀잎에 맺힌 아침이슬 같은 그 말 또는 글은 그가 살아온 삶에 비례하여 짙고 깊고 높습니다. 크게 널리 아우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생명력을 갖습니다.

  고3 때, 국어책에 나왔던 장군의 시 한 편을 기억합니다.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넘칩니다.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의 돌들은 칼을 갈아 없애고
豆滿江波飮馬無 두만강 물은 말에게 먹여 없애리라
南兒二十未平國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  훗날 누가 나를 대장부라고 부르겠는가


간신은 이 시의 세 번째 연에 나오는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으로 바꾸었습니다. 오랑캐와 왜적들이 침략하여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그 난리를 평정하는 것은 장수의 임무입니다. 그 시대의 장군들이 지니고 살아야 하는 수칙 같은 것이었습니다. 젊은 장수가 ‘그게 아니외다’, 반론하며 해명할 틈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그 ‘큰 시(詩)’의 한 음절을 바꾸면 역적이 되는 시대도, 간신배의 ‘사악한 보고’를 받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를 죽여버린 소수 고관대작들의 더러운 가슴도 저주받았어야 마땅합니다. 간신도 고관대작도 천수를 누리고, 만인의 문상을 받아먹고 꽃상여를 탔습니다.

  남이는 17세에 무과(武科)에 장원급제하고, 여진족과 이시애의 난을 제압했습니다. 세조의 총애를 받아 약관 스물 넘어 병조판서를 맡을 정도로 출중한 무신(武臣)이었습니다. 이씨조선 500년은 옳은 길로 꼿꼿하게 걸어가면서 임금이나 조정을 향하여 바른 말을 하는 유능한 인재들을 불편해 했습니다. 그는 머지않아 주류의 ‘큰 다마’들에게 차갑게 질시를 받게 됩니다. 예정된 코스였습니다. 그 의인은 이내 ‘나쁜 놈’으로 조작됩니다. 곧이어 간신배 하나가 ‘모함(謀陷) 콘티’ 최종본을 상납합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투쟁단이 윤석열 대통령 구속 등을 촉구하며 트랙터 상경 시위에 나섰다가 서울 서초구 남태령에서 28시간 이상 대치를 이어가고 있던 모습. 12월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남태령 인근에서 시민들이 경찰을 향해 “차 빼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제공: 2024년 12월 22일, 이호 작가



  영웅과 간신

  남이 장군은 요절했습니다. 거열형(車裂刑)이었지요. 가장이 이렇게 능지처참(凌遲處斬)을 당하면, 유족은 뼈 한 조각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부인은 함께 처형되었고, 첩 둘은 노비로 전락하여 끌려갔습니다. 후손들은 고인의 손때가 가장 짙게 묻은 책이든 활이든 그 어느 것이든 묻어 놓고 봉분(封墳)을 돋우어, 세월 좋아질 때까지 눈치보며 성묘했습니다. 세조의 아들 예종은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남이에게 살의를 느낄 정도로 심하게 질투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왕이 된 바로 그날,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부하의 부하가 일하는 자리로 좌천시켰습니다. 임금의 비위 맞추는 일에 9단인 ‘노회한(老獪漢)’들이 벌인 짓이었습니다.

  장군의 죄목은 궁궐 안을 배회하는 허다한 공주들 가운데 가장 예쁜 처자와의 ‘간통설’, 새로운 인물이 나타난다는 ‘혜성설’과 ‘역모설’이었습니다. 잔인하고 불의하지만, 실은 그다지 충격 받을 일도 아닙니다. 남이 장군의 비극은 시대와 대륙을 초월하여 정치의 대표적인 속성이기도 합니다. 고려시대에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전통적인’ 정적 제거 아이템이었습니다. 물론 신라시대에도 있었을 겁니다. 일본에도 있었을 것이고요. 저 남태평양 군도의 어느 섬나라에도, 바이킹족의 후예들이 사는 저 북구라파 그린란드 어느 부족국가에도 이 악성 정치는 하나의 환경으로 자리잡은 채 폭염과 혹한 마냥 기승을 부렸을 겁니다.

  남이를 죽이는 일의 주모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신숙주(申叔舟, 1417~1475)와 연산군에게 부관참시를 당한 한명회(韓明澮, 1415~1487)였습니다. 둘 다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간신 짓으로 한성판윤과 병조판서까지 올라간 유자광(柳子光, 1439~1512)이 ‘깍두기’였습니다. 훗날 남이의 혼령이 유자광의 꿈에 나타나서 칼로 눈을 도려냈다고 합니다. 그 후로 이 악인은 장님이 되었고, 죽는 날까지 악업(惡業)의 댓가를 톡톡히 치르며 연명하다가 지옥으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부관참시까지 당하고, 자식들 모두 참형에 처해졌다는 속설도 전해집니다. 억울하게 죽은 영웅들의 원혼(冤魂)은 이렇게 착한 씨ᄋᆞᆯ들에게 전해져서 대를 이어 해원(解冤)굿을 벌임으로써 우리의 일상 속에 자리잡습니다. 그리하여 천도(薦度)된 것처럼 친근하게 함께 하는 것입니다.


  씨ᄋᆞᆯ들은 개돼지떼가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의 상층부는 가장 질 낮은 놈들이 백 가지 위선과 망동을 일삼는 현장입니다. 그것들은 기층민중, 즉 씨ᄋᆞᆯ들을 ‘개돼지’로 여기면서도 언제나 당당합니다. 주제에 맞지 않게 큰 명함을 들고 다니면서 그저 속절없이 거들먹거리다가, 세월 다 보내고 끝에 가서는 벼랑으로 떨어집니다. 영화 속에서든, 모래바람 몰아치는 길고 먼 인생길에서든, 나쁜 놈들은 ‘법과 원칙에 따라서’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칙을 섞어서 더 강력하게 응징해야 합니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가 늘 시원하게 끝나는 것은 현실이 언제나 그 반대이기 때문에, 그래서 늘 절망하는 거대한 무리를 그렇게 위로하는 것입니다. 오늘, 그 예술이 절망을 넘지 못하고 끝내 자살할 가능성이 높은 다수의 씨ᄋᆞᆯ들을 구하는 위대한 선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탄 전야에, 임진왜란 때 조선왕조 최악의 임금 선조(宣祖, 1552~1608)가 제 눈앞에 떠올랐습니다. 혼자만 살려고 수도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하면서 그 자가 벌인 작태들과 발언들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싶게 합니다. 추격하는 왜군들을 따돌리기 위하여 임진강에서 타고온 배를 돌려보내지 않고 불태웠습니다. 그로 인하여 강을 건너려고 기다리던 한 무리의 피난민들이 적군들에게 살해당했지요. 개성을 지나갈 때, 성난 씨ᄋᆞᆯ들이 임금의 가마행렬에 돌을 던졌습니다. 벗님들! 너무나 착한 씨ᄋᆞᆯ들 아닙니까? 평양에서는 평양성을 사수하겠다고 약속하고는 밤늦게 아무도 몰래 의주로 도망쳤습니다.

  내빼는 길에 폭우가 내렸습니다. 가마꾼들이 행보를 멈추었습니다. 그래도 그 자는 그저 빨리 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엎드려 등을 대주지 않는 것은 불충하다”고 통탄하며 주민들을 꾸짖었습니다. 충장공 김덕령을 고문하여 죽였습니다. 충무공 이순신도 죽이려 하다가 실패했습니다. 선조의 그 더러운 정치는 장장 41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조선의 멸망은 물론, 오늘, 우리 앞에 펼쳐지는 이 참화(慘禍)도 500년 전, 그 더러운 정치의 ‘찌끄레기’라고 주장하면 지나친 언사일까요?


  5류정치, 시민불복종의 제도화로 극복하자

  우리는 지금 21세기 초반에 전통적인 폭정(暴政) 학정(虐政) 비정(秕政) 악정(惡政)을 총체적으로 뭉뚱그려놓은 5류정치의 현장에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하는 피해자로 서 있습니다. 선조와 예종, 신숙주와 한명회, 그리고 유자광은, 이 순간 용산과 여의도에 다수로 복제되어 발호(跋扈)하거나 준동(蠢動)하고 있습니다. 오백 년 전, 그 나쁜 정치가 쓰던 저 잔혹하고 사악한 수법들은 바로 오늘 다양하게 변주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분노와 공포가 만인의 급성질환이 되었습니다. 이 민족의 시련 앞에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마치 남이 장군,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충장공 김덕령 장군, 그 영웅들처럼 살다가 역사가 된 무수한 위인들로 다시 살아난 것은 실로 감격적이고 희망적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슬픔과 분노와 고통을 줄여줍니다. 우리는 감동적인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공동체입니다.

  이 아름다운 공동체는 지금 저 한 줌짜리 악질정치 패거리와 맞짱뜨고 있습니다. 100년 전, 저 만주의 비적(匪賊)떼와 다름없는 이 거악집단은 품격시민들의 비폭력 저항 앞에서 휘청거리면서도 다종다양한 술수들을 야비한 방식으로 펼치고 있습니다. 저들은 군과 경찰력, 그 공권력의 전술과 그 술수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윤석열 도당(徒黨)은 오늘의 이 참상을 저질러놓고도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죄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패거리에게 주어진 의무로서, 존재이유이기도 한 공공성은 제로도 아니고 그 이하입니다. 말 그대로 영하(零下)입니다. 그 점이 이 민족이 처한 최고의 위기 요인입니다. 윤석열로부터 큰 명함을 받은 공직자들은 예외없이 나라가 망하든 말든, 시민들이 다치든 죽든 상관할 바 아닙니다. 오직 혈안이 되어 제 살 길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능력과 애국심, 공공적 가치관 같은 덕목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제대하고 복학하여 읽었던 에리히 프롬의 ‘불복종에 관하여’가 생각납니다. 그새 40여 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원제목은 ‘On Disobedience’였습니다. 불안하게 방랑하던 청년에게 강한 영감과 정치사회적 상상력과 용기를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프롬이 단순명료하게 정의한 ‘볼족종’은 ‘양심과 신념의 이름으로 권력자에게 감히 아니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크고 작은, 이런 저런 다양한 조직에 속하여 근근이 유지하며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씨ᄋᆞᆯ들을 ‘조직인’으로 통칭합니다. 그 슬픈 신분을 벗어나서 자유를 구가하면서, 섭생도 무난하게 감당하는 개인들은 어느 사회에나 희소합니다. 매력적이지만, 대부분 그 도전은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오늘, 여의도와 광화문과 남태령에, 그리고 헌법재판소 앞에 모이는 시민들도 ‘조직인’이거나 그들의 가족입니다. 적더라도 돈이 되는 일에 시간을 써야 하는 이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예외인 사람들은 드물기도 하거니와, 그들은 대부분 생각도 다를 겁니다. 자존감 높은 그들이, 공동체가 다치거나 위축되지 않게 하려고 저 하얼빈의 그 청년처럼, 만주와 연해주의 그 스무 살 동안(童顔)의 독립군들처럼, 위대한 시민의식으로 무장된 전사가 되어 탱크와 장갑차의 전진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벗님들!

  ‘사살’ 또는 ‘암살’ 등의 용어들은 우리 정치판에서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어휘들 아닙니까? ‘지령(指令)’ 또는 ‘호령(號令)’이 난무하는 세상은 더도 덜도 말고 지옥입니다. 그 부당한 명령을 내리는 자들의 손목을 자르고, 입은 시멘트로 막아야 합니다. 북한군 복장을 한 아군이 특정 아군부대를 공격하게 하고서, 그 공격조를 북한군이라고 조작하여 발표한 다음, 북한을 공격할 명분으로 삼아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그리하여 이 무도하고 사악하고 시시한 정권을 길게 연장하겠다는 망상(妄想)의 무리를 향하여, 이렇게 점잖은 비폭력 행위가 과연 소년의 돌팔매질만큼이나 효력이 있을까요. 저의 이 글쓰기 노동이 오늘 특히, 참으로 회의적입니다. 무력감이 막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불복종 운동’을 함께 하는 남녀노소 씨ᄋᆞᆯ 동지들께 한 마디만 더하고 물러가겠습니다.


“암살을 사살하라!”

“조작을 사살하라!”

“거짓을 사살하라!”

“사살을 사살하라!”




씨ᄋᆞᆯ의소리 후원 계좌

834-01-0058-841(국민은행,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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