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ᄋᆞᆯ의 소리

우리 자신을 모든 역사적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격을 스스로 닦아내기 위해 일부러 만든 말, 씨ᄋᆞ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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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호 새롭게 읽는 씨알의소리) 비약(飛躍)의 새해 - 함석헌, 이수호(교열/편집)

씨ᄋᆞᆯ
2025-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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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읽는 《씨ᄋᆞᆯ의소리》-4


비약(飛躍)의 새해*



함석헌

교열·편집: 이수호(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


  우리의 유일한 살길

  새해가 됐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신가 했습니다마는 우리는 그전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은 생각으로 이 물음과 축복을 서로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어려운 때를 만났습니다. 우리나라 형편을 생각한다면 마치 길을 가다가 뒤에는 사나운 짐승이 따라오는데 앞으로 건널 수 없는 큰 강이 걸린 것과 같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죽습니다. 건너 가다가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나는 이 글을 쓰려 책상 앞에 앉으며 생각이란 것을 처음 해보는 양, 이게 무슨 세상이냐, 인생이란 것이 무엇이냐, 나라란 것은 무엇이냐고 몇 번이고 스스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낙심은 절대 해서는 아니 된다는 나로서도 한 가닥 슬픈 생각이 드는 것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저 강을 건너야 합니다. 이 시대의 저 사나운 물을 건너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살길입니다. 

  이야기를 하나 하랍니까? 언제 들은, 잔나비 무리가 냇물을 건너는 이야기입니다. 잔나비의 한 떼가 사나운 짐승에게 쫓겨 가다가 큰 냇물에 다다랐습니다. 넓고 물살이 빨라 도저히 건널 수 없었습니다. 당황한 잔나비란 놈들은 냇가에 섰는 큰 나무 아래 모여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떠들더니 그중 가장 나이 들어 뵈는 놈이 일어서 뭐라뭐라 하니 여러 놈들이 차차 떠들기를 그쳤습니다. 그러더니 그중 가장 튼튼해 뵈는 한 놈이 그 나무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올라가서 그 시내 위로 걸쳐진 높은 가지로 추어 올라갔습니다. 그러고는 한 팔로 그 가지를 단단히 붙잡은 후 한 팔을 내려뜨리고 매달렸습니다. 그 다음 또 한 놈이 기어 올라가 그 첫 놈을 톱아 내려가 제 한 손으로 그놈의 손을 잡고 다른 한 팔을 내려뜨리고 매달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셋째 놈, 넷째 놈 차례차례 해서 다 올라가 매달린 다음 맨 나중에 튼튼한 한 놈이 올라가서 맨 끝에 내려가 매달렸습니다. 이리해서 잔나비의 한 그넷줄이 높은 가지에서 거의 물에 닿을 정도로 매달리게 됐습니다.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맨 밑의 큰 놈이 나무통을 박차서 그네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줄이 물 위로 나갔다 나무 밑으로 돌아왔을 때 그놈은 한번 더 힘 있게 박찼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번, 세 번 거듭하는 동안 잔나비의 줄은 점점 더 넓은 폭으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줄이 최대한의 폭으로 흔들려 저 건너편 언덕 위에 갔을 때 마지막 놈은 재빨리 거기 서 있는 나무의 한 가지를 붙잡았습니다. 그런 다음 건너편에 있는 맨 처음 놈이 제가 잡았던 가지를 놓고 내려와 모든 잔나비는 서로서로 이끌어 이쪽 언덕으로 올라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리해서 잔나비란 놈들은 하나하나로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냇물을 건너서 전체가 다 살아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잔나비에게 배우지 않으렵니까? 

  

  잔나비에게 배우는 지혜

  첫째, 단체 행동입니다. 개개의 잔나비가 저만 먼저 살겠다고 따로따로 떨어져 나갔다면 다 죽었을 것입니다. 자유는 전체에 있습니다. 종살이는 이기주의의 결과입니다. 압박자가 씨ᄋᆞᆯ을 잡으려 할 때는 언제나 한알따기로 합니다. 한 사람을 종으로 잡아갈 때 그것이 곧 전체인 줄 알아야 합니다. 잔나비도 그렇습니다마는 인간은 더구나도 하나에 삽니다. 살아도 하나 죽어도 하나입니다. 하나를 살리려면 전체가 동원돼야 하고 전체를 살리려면 하나하나가 살아야 합니다. 사나운 짐승이 따라오는 이쪽 언덕에 나 혼자 도망가면 살 것 같지만 결국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다 죽고 맙니다. 여러분은 스탈린이 제 동무를 차례차례 죽이던 것을 알지요. 하나 돼야만, 같이 죽기를 각오해야만 살길이 나옵니다. 전체는 언제나 개개의 총합계보다 큽니다. 살리는 지혜도 힘도 전체에 있습니다. 알알이 도는 것은 씨ᄋᆞᆯ이 아닙니다.

  

   둘째, 높은 원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잔나비들이 아무리 손과 손을 단단히 잡았더라도 높은 나무 없으면 그 냇물을 건너뛸 수 없습니다. 우리 이 시대의 극복은 비약으로만, 날아 건너뜀으로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걸어서가 아닙니다. 건너뜀입니다. 참 의미의 혁명입니다. 나는 요사이 역사와 인생을 처음서부터 고쳐 생각해야겠다는 생각을 자꾸 합니다. 간디가 혁명은 근본원리에 다시 돌아감이라 한 것은 이 의미인 줄 압니다. 건너뛰려면 이 언덕 저 언덕을 다 굽어볼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가야 하듯이 낡은 시대에서 새 시대로 건너가려면 그 둘을 다 뛰어넘은 제3의 자리에 가서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근본원리를 찾는 태도로만 됩니다.

  

  셋째, 박차야 합니다. 내가 매달린 나무지만 밉기나 한 듯 사정없이 박차야 합니다. 건너뛰는 힘은 거기서만 나옵니다. 낡아가는 시대에 애착을 가지고 역사적 민족이 되는 법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번에 되지 않습니다. 모든 혁명은 결침〔波狀運動〕으로야 됩니다. 한번 나갔다가 한번 물러오는 것 같지만 그럴 때마다 가속도가 붙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법칙입니다. 다만 처음에 붙잡은 그 원리를 죽어도 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만 하면 실패를 거듭할수록 힘이 늘어갑니다. 

  

  넷째, 뭉치는 일입니다. 잡은 손을 놓쳤다가는 모든 것이 다 허사로 돌아가고 죽고 맙니다. 역사적 행동을 하는 동안은 몸과 마음의 온 힘을 손에만 모으는 것입니다. 실지로는 이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혁명의 실패는 결국 결속이 무너지는 데서 옵니다. 그러나 원숭이가 하는 것을 사람이 못한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의 사람된 점이 생각하는 데 있지만, 이 생각이 사람을 약하게 만들어서 동물보다도 못한 지경에 떨어져 배신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세상에 배신에서 더 더러운 죄악이 어디 있습니까? 

  

  다섯째, 기회를 붙잡는 것입니다. 운동이 아무리 강해져도 적당한 가지를 붙잡지 않고는 건너갈 수 없듯이 새 시대의 어느 기회를 재빠르게 붙잡고 낡은 것을 날쌔게 놓아버리는 눈과 손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잔나비가 앞뒤에 튼튼하고 익숙한 엄지들을 세웠듯이 혁명 행렬의 앞과 뒤에는 지도자가 서야 합니다.

  

  여섯째, 마지막으로 그 어느 단계에 있어서도 모험 정신 없이는 아니 됩니다. 살 생각에 겁이 나지만 겁쟁이는 못 삽니다. 삶은 자람에만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사는 재주 없습니다. 생명이란 영원한 모험입니다. 죽을 각오가 아니라 아주 죽어서만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죽기로 결심한 사람 못 죽인다

  지난번 죽음 속에 몇 달을 갇혀 있다가 놓여 나와 백만 명의 환영을 받으며 방글라데시의 수상이 된 라만의 말이 과연 명담(名談)입니다. “죽기로 결심한 사람 죽이지 못하더라.” 참 좋은 말입니다. 그 말 들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가 혁명 운동을 일으켰을 때 대통령이 돼보자는 그런 시시한 생각을 했다면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그렇게 그를 절대로 지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로지 자유를 위해 죽기로 결심했으니 능히 그만한 신뢰와 지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갇혀 있는 동안 하나의 라만 대신에 몇천만의 라만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라만에게 대통령 자리 벌어주자고 돈 받고 일어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유의 정신의 부름을 받아 자유의 정신으로 불붙은 것이지. 그러면 라만을 죽이면 방글라데시 민족 전체를 죽이는 것이 되니 아무리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아히야 칸으로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들은 그 죽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보는 데 쾌감을 느껴서 합니다. 죽기를 결심한 사람 앞에 설 때 거기서 나오는 생명의 방사선에 쏘여 그들 자신이 도리어 겁을 집어먹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기로 결심한 사람 못 죽인다는 것은 결코 하나의 시가 아니요 사실입니다. 예수도 죽지 않았나 소크라테스도 죽지 않았나 하거든 이렇게 대답해 주십시오. “죽은 자는 저를 죽인 자로 장사케 하라”고.

  

  금년 일년에 무슨 일이 있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이대로 어물어물 제 발등의 불만 끄려다가는 전체가 죽음의 골짜기로 몰려들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 가로막힌 이 강을 건너뛰어야 합니다. 거기만 자유가 있습니다. 건너뛰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보다 높은 삶을 약속하는 죽음입니다. 이쪽에서 어느 구석을 찾아 몸을 감추면 살 듯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호랑이, 승냥이는 본래 그늘진 구석에 사는 짐승이므로 그리 가는 것은 내 죽음을 마중하는 일입니다.

  방향을 잘못 잡아서는 아니 됩니다. 방향이 옳으면 어떤 모험을 하면서라도 가기만 하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정말 아는 것은 지식이 아니고 직감입니다. 직감은 생명의 주인인 ‘그’를 믿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역사는 ‘자유’에로 향한 행진입니다.


*《씨ᄋᆞᆯ의소리》를 새롭게 읽으며 드리는 말씀: 지금 여기 우리 상황에서 53년 전의 글을 새롭게 읽으려 합니다. 당시 언론들이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정권의 눈치를 보며 기사를 써야 했던 상황이었으나, 함석헌은 《씨ᄋᆞᆯ의소리》를 창간하여 정권에 맞서 바른 소리를 하고 씨ᄋᆞᆯ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습니다. 또 가로쓰기, 한글전용, 입말(구어체) 등을 본격적으로 사용하여 씨ᄋᆞᆯ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함석헌의 글을 새롭게 옮기며, 글을 썼던 당시의 시대 상황과 사건, 글에 인용한 성경 구절(개역개정판), 한문 원전 등을 함께 소개하려고 합니다. 함석헌의 편지가 지금도 우리에게 주는 울림과 공감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호의 글은 《씨ᄋᆞᆯ의소리》 1972년 1월호(통권 제8호)(3~6쪽)에 처음 실렸습니다. 당시는 박정희가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상태였고, 1월호는 발간되자 판금이 되었습니다. 작은 제목은 편집자가 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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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4-01-0058-841(국민은행,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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