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ᄋᆞᆯ의 소리

우리 자신을 모든 역사적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격을 스스로 닦아내기 위해 일부러 만든 말, 씨ᄋᆞᆯ

씨ᄋᆞᆯ의 소리 보기

(297호 씨알시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다시 읽다(오세훈 편집위원)

씨ᄋᆞᆯ
2025-10-03
조회수 94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다시 읽다



오세훈

편집위원

95e19249b3d7b.jpg



  들어가며

  최근 나는 잉게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책을 다시 읽었다. 처음 본 건 20대 초반이었으니 그새 45년이나 지났다. 그 시절 나는 몇 차롄가, 책을 읽는 동안 온몸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었다. 이 고전은 정신적으로는 물론이고, 신체적으로도 나에게 특별한 현상을 일으킨 책들 가운데 하나였다.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청년들이 바른말 좀 하고, 세상이 걱정스러워 열변을 토하며 토론하고, 그 내용을 정리하여 글을 쓰고, 인쇄하여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넘겨받은 자는 그것을 다중이 유동하는 거리에 뿌렸다. 이어서 사형선고를 받고, 항소할 기회도 없이 곧바로 단두대에 눕혀지고 곧바로 목이 잘렸다.

  히틀러와 그 패거리의 폭압과 살육에 맞서 비폭력으로 저항했던 순수한 영혼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주동자라 할 수 있는 한스 숄은 그때 ‘백장미’라는 스페인 소설을 읽고 있었다. 그들이 6회에 걸쳐서 뿌린 전단지의 제호가 ‘백장미’였다. 그들의 정의롭고 다정한 인간미와 맑고 순수한 영혼을 상징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역사는 그들을 ‘백장미단’이라고 부른다. 


  여섯 송이 백장미의 역사

  나치는 1941년 유럽인의 ‘유전자 보호’를 명분으로 장애인과 정신질환자를 안락사시키는 정책을 실행했다. 뮌헨대학 의대생 한스 숄(1918~1943)과 철학도 조피 숄(1921~1943)은 남매였다. 아버지 로버트 숄(1891~1973)은 나치에 반대하는 행정가로, 자녀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아들과 딸이 그 무렵 나치의 반인륜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했던 가톨릭교회의 아우구스트 폰 갈렌(August Von Galen, 1878~1946) 주교의 설교문을 읽고 비밀리에 복사해서 캠퍼스 내에 뿌렸다. 1941년 7~8월경, 반나치 저항운동의 시작이었다. 

  그 움직임에 동조한 소수의 동지들이 있었다. 그들은 수시로 모여서 토론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전단을 제작 살포하거나, 벽에 구호를 써서 나치의 전쟁범죄(특히 폴란드와 동부전선서의 유태인 학살과 반인륜적 폭력)를 고발했다. 


  우리는 침묵하지 않는다. 우리는 당신의 나쁜 양심이다. 백장미단은 당신을 평화롭게 놔주지 않을 것이다.

  히틀러 군대가 폴란드를 점령한 이래, 30만 명의 유대인들이 잔혹하게 학살되었다. 독일인들은 잠에 취하여 나치의 범죄를 조장한 셈이다. 양심에 꺼릴 것이 없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모두가 유죄! 유죄! 유죄다!

  이제 들고 일어나 복수하고, 속죄하고, 가해자들을 처단하여 새 유럽을 건설하자. 독일 젊은이들이 들고 일어나 복수와 속죄를 함께 하며 가해자들을 짓밟고 새로운 정신적 유럽을 찾지 못한다면 독일의 이름은 영원히 훼손될 것이다.

―백장미단의 여섯 번째 전단, 마지막 메시지.


  ‘백장미들’은 그들의 마지막 메시지가 된 이 전단을 대학 본관에 살포했다. 숄 남매와 혈맹 크리스토프 프롭스트는 이내 경비원에게 적발되어 게슈타포(나치 비밀경찰)에 넘겨졌다. 1943년 2월 18일이었다. 4일 동안 ‘악마의 심문’을 당했다. 그 가운데 숄 남매는 다행히도 인민법정에 회부되기 전날, 부모와 5분간 면회를 했다. 가족은 서로 말없이 바라보며 누구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담담하게 격려하고 절제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영화 〈조피의 마지막 날들〉의 그 장면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다.

  다음 날 모두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들은 역사에 남을 유언을 남겼다. 그 가운데 기혼자로서 자녀가 있던 두 사람의 유언을 인용한다.


  크리스토프 프롭스트(Cristoph Probst, 1919~1943)

  아마 나의 죽음이 다른 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나의 양심을 배반할 수는 없다.


  쿠르트 후버(Kurt Huber, 1893~1943)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모든 비판을 가장 끔찍한 처벌로 다루는 국가는 결국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독일 시민으로서, 독일의 교수로서, 나는 조국에 대한 자유와 명예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친다.


  세 아이와 뱃속에 들어선 생명까지, 네 아이의 아버지였던 이 젊은이가 저렇게 육중한 최후진술을 하고서 판사에게 아이들을 위해서 살려달라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나치 판사는 일언지하에 사형을 선고했다.

  쿠르트 후버는 아내와 1남 1녀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50살이었다. 25살의 한스와 22살의 조피는 24살의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와 같은 날 오전에 사형선고를 받고, 오후에 단두대에서 참수되었다. 25살의 빌리 그라프(1918~1943)는 그로부터 3개월 뒤 참수되었다. 또 그로부터 3개월 후에, 26살의 알렉산더 슈모렐(1917~1943)과 쿠르트 후버 교수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나치는 한 치의 관용과 자비도 없이 백장미단의 여섯 의인들을 처형한 뒤, 여론 조작을 대대적으로 실행했다. ‘국가와 민족, 체제를 위협한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인민들이 편들거나 모방하지 못하게 강력한 선전선동을 펼쳤다. 이는 극단적인 공포정치의 사례로 기록되었다.


  광란의 도가니, 인민법정

  실은 당시 독일에서는 백장미단 사건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실로 사소하거나 터무니없는 일로도 목숨을 앗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종청소 정책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수백만이 희생되었다. 너무나 흔한 일이었다. 증거도 근거도 없는 고소가 횡행했다. 이웃의 무고와 밀고만으로도 재판도 확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장애인과 정신질환자 보호시설 입원자들의 치료를 중단했다. 1939년부터 실시된 ‘T4 안락사 프로그램’에 따라 이유 없이, 심지어 아이들까지 비밀리에 살해했다. 나치를 반대하는 성향의 가족이나 친척이 있다는 이유로, 또는 레지스탕스와 접촉했다는 혐의만으로도 엉터리 심문 끝에 극형을 당했다.

  히틀러와 그 측근들에 관하여 농담이나 조롱하는 것만으로 사형에 처해진 사례가 부지기수다. 정치적 의도가 없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과실도 용서하지 않았다. 정권에 협조하지 않거나, 반대한다는 의심을 받으면, 머지않아 혹독한 심문 끝에 처형당할 가능성이 100이었다. 거리에서 ‘나치식 거수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도 사형에 처했다. 미운 사람들을 없애는 일이 이렇게 간편했다. 

  그 절차의 책임자는 히틀러의 재판장 롤란트 프라이슬러(Roland Freisler, 1893~1945), 광기와 폭력의 화신이었다. 그는 ‘피의 재판관(The Blood Judge)‘으로 불렸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언어폭력과 물리적 폭력으로 법정을 시종일관 광란의 도가니로 만들어놓았다.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비인간성을 보여주었고, 법정에는 공포감이 극에 달했다. 이 악귀는 전쟁이 끝나기 3개월 전, 연합군의 베를린 공습 때 인민법정에 폭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폭사했다.


  히틀러의 패배와 자결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 5월 8일, 독일 국방군 사령관 빌헬름 카이텔(Wilhelm Keitel, 1882~1946)이 베를린 인근 연합군 최고사령부(미국·영국·소련·프랑스의 대표) 앞에서 무조건 항복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 1주일 전, 도피처이자, 최고전략사령부였던 지하 벙커에서 정부였던 에바 브라운과 함께 권총으로 동반자살했다. 1945년 4월 30일이었다. 하루 전날,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히틀러는 1889년생이었으니 56살이었고, 에바는 1912년생으로 33살이었다. 

  그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1897년생)는 부인 마그다 괴벨스(1901년생)와 함께 총통 벙커에서 히틀러 부부가 자결한 다음 날인 5월 1일, 여섯 자녀(5녀 1남)를 모르핀과 청산가리로 독살하고 동반자살했다. 남편은 47살, 부인은 43살이었다. 괴벨스는 “아이들이 나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아이들은 12살, 11살, 9살, 8살, 6살, 4살이었다. 

  나는 제2차 세계대전의 끝을 독일의 패전이라기보다 히틀러와 그 최측근 추종세력과 나치당의 패배라고 생각한다. 독일 민중은 백장미단의 주장과 호소에 동조했거나, 마음으로만 함께 하고 행동에 옮기지 못함으로써 죄의식과 미안함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후 독일 민중들 가운데 히틀러와 나치당 핵심 위호세력은 굳이 헤아린다면 한줌에 불과한 숫자로 국한된다. 독일 정치의 극우화를 우려하지만, 관련 연구는 자신을 나치의 후계자로 자칭하며 히틀러를 추종한다고 밝히는 정통 네오나치세력이 전체 인구의 0.01%~0.05%라고 한다. 


  독일의 위대함

  뮌헨의 백장미단이 펼쳤던 위대하고 감동적인 활동과 비극적인 결말은 역사의 한 챕터로 남아서 박제화된 서사가 아니다. 독일은 국가 차원에서 공식 사과와 보상을 시작했다. 그로써 독일은 전쟁범죄를 저지른 국가의 참회와 화해에 관하여 대표적인 모범 사례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로써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존경받는 나라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1952년, 아데나워 서독 총리 주도로 이스라엘과의 ‘룩셈부르크 협정’을 맺었다. 이로써 유태인을 포함, 나치 희생자들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공식 선언했으며, 전쟁이 끝나고 나서 최초로 국가배상을 약속하고, 도의적 사과를 했다. 이어서, 독일은 룩셈부르크 협정을 바탕으로 연방보상법을 제정하여 홀로코스트 등 나치 피해자들에게 보상과 연금, 복지 혜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국가주도 전쟁범죄 인정과 배상’이다. 

  독일은 이같은 선언적 사과와 반성으로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970년,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 추모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또다시 사죄했다. 그걸로도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공개 사과와 함께 보상의 종류를 다양하게 늘려갔다. 

  독일은 국민적 차원의 ‘과거청산’ 운동과 교육, 추모, 보훈사업을 전개하고, 역사재단을 설립하여 모든 세대가 ‘부끄러움과 책임감’을 사회적 규범으로 여기고 일상화하도록 정착시켰다. 이처럼 높은 진정성과 고품위 국격의 뿌리는 생명을 말살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히틀러 세력에게 비폭력으로 저항하고 희생당한 백장미단에 닿아 있다.  


  잉게 숄

  동생들과 그 동지들의 비극은 잉게 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그가 말했다. “시대의 암흑 속에서도 침묵하지 않고, 악에 동조하지 않은 깨어 있는 소수의 용기와 희생이 결국 역사의 진보를 이끈다.” 가족과 시대의 비극을 인류 보편의 가치로 이렇게 장하게 승화시켰다. 1947년, 그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출간, 전세계에 번역되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1978년에 최초로 번역 출간되었다. 

  1953년, 그는 남편 오틀 아이허(Otl Aicher)와 함께 울름(Ulm)조형대학을 설립했다. 이 학교는 백장미단의 정신을 계승하고, 바우하우스의 전통을 이어받아 산업교육과 조형교육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캠퍼스를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 근처에 정함으로써, 역사적 상처와 저항정신을 교육이념에 반영하였다. 그 명성은 유럽에서 최고 수준이었으나, 훗날 학교운영 방식을 놓고 분열이 발생하고, 설상가상으로 지방정부의 지원이 현저하게 줄어드는 바람에 1968년에 폐교했다.

  잉게 숄(1917~1998)은 반나치즘과 평화주의 활동가로 일생을 헌신했다. 동생들과 그 동지들의 순수한 저항정신과 죽음을 세상에 알리고, 세상이 그 뜻을 잇도록 하는 운동을 지속했다. 그는 글쓰기와 강연을 통하여 사람들이 작더라도 올바른 생각과 정신, 상식과 연민을 가지고 살도록 이끌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대중들의 마음속에는 백장미 한 송이가 피었을 것이다. 그는 아름답고 품위 있는 정원에 저항과 양심의 백장미를 심고 가꾸었다. 1998년, 80세에 6인의 동지들을 만나러 먼 길을 떠났다.


  사족(蛇足)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인민혁명당 관련자들에게 간첩, 내란음모 등의 혐의를 씌워 재판에 회부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전원에게 사형을 확정한 뒤, 18시간만에 형을 집행했다. 1943년 독일 히틀러 정권의 백장미단 사건 이후, 가장 악독한 사법살인이었다. 국제법학자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정했다. 박정희의 폭주는 1979년 10월 26일, 심복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음으로써 끝이 났다. 

  그후 전두환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1993년, 문민시대를 열었으나, 신(新)식민통치라 할 수 있는 IMF의 지배와 함께 이 땅은 소위 신자유주의의 세상이 되었다. 그 나쁜 토양에서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힘들게 이어져온 문민, 민주진보 또는 ‘비교적 양질’의 정치세력과 정치인들 가운데 상당한 수준으로 차별성을 보여주는 민주당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최악의 생존조건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유능함과 성실함으로 돌파하고 정점에 올랐다. 그로써 특히 먹고 살기 힘든 서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윤석열이 무너뜨린 나라를 바로 세우는 중이다. 윤석열은 민주주의와 경제정의, 국가안보 같은 큰 기둥들은 말할 것 없고, 장삼이사들 모두가 상식과 규범으로 여기고 살아온 규칙과 기준들을 하루아침에 다 부숴버렸다. 윤석열과 김건희, 그리고 그 일당이 저지른 내란죄와 그에 관련된 이런저런 범죄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표현대로 ‘법과 원칙에 따라’ 처벌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이재명 정부에게 당부한다.

  이 나라는 IMF 관리체제에서 벗어났지만, 그로부터 30년 동안 ‘부익부 빈익빈’이 다양하고 촘촘하게, 부자와 강자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제도화되어 왔다. 오늘 우리 씨ᄋᆞᆯ들은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작동하고 있는 거대한 정글자본주의 회전판의 가장자리에서 비틀거리며 버티고 있다. 복지 축소로 인하여 가장 먼저 쌀독이 빈 극빈층, 실직자, 장애인, 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 벼랑에 섰다. 위난을 ‘자신의 책임’이라며 떠드는 사람들과 기관들은 그 반대편 종자들이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이쯤에서 마쳐야 하니 아쉽다. 엉뚱한 결론이지만, 백장미단 사건과 인혁당 사건 같은 사법살인이나, 전사나, 산재사나, 횡사나 목숨의 가치는 차이가 없다. 정부는 모든 생명을 똑같이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

  1990년대 중반, IMF 때부터 세계 10위 경제대국 대한민국에는 폐지 줍는 노인들이 현재 15,000명 정도다. 그들은 하루 2만 원(월평균 76만 원 정도)의 수입을 위하여 부실한 리어카를 끌고 위험한 찻길로 이동한다. 참으로 아슬아슬하다.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모습이다. 하루빨리 그 ‘특수노동자’들에게 지금보다 더 안전하고 안정적인 일상을 보장해주기 바란다. 

  잘 생각해보라. 

  정책집행 효과를 그 정도로 높이 가시화할 수 있는 사례도 드물지 않은가. 크지 않은 예산을 들여서, 이룰 수 있는 좋은 정치, 차별화된 정치의 성공 사례로서도 그 상징성이 압도적이지 않은가. 나는 실은 문재인 정부 초기에 청와대의 한 수석을 통하여 이 제안을 했으나, 일언반구 응답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국민주권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제안하는 것이다. 희소식을 기대한다.



씨알의소리 구독신청


함석헌기념사업회 후원하기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