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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호 돋봄) AI가 가져올 인류의 미래? - 최병학

씨ᄋᆞᆯ
202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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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봄


AI가 가져올 인류의 미래?



최병학

《함석헌 연구》 편집위원장, 부산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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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수와 더피 사이

2025년 9월 24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공개토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인공지능(AI)의 양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AI는 우리를 잡아먹을 맹수가 될 수도 있고,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나오는 사랑스러운 ‘더피’가 될 수도 있다.” 이 발언은 인공지능이 단순한 기술적 문제를 넘어 인류 문명의 방향을 좌우할 윤리적, 철학적 선택의 문제임을 강조한다.

사실, 현 단계에서 AI는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감정을 흉내 내며, 창의적인 작업까지 수행한다. 따라서 이제 AI는 우리 인간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희는 누구인가?”, “사람의 사람다움(인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영혼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단지 과학기술의 영역이 아니라 존재론적이고 신학적이며 윤리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어쩌면 AI가 가져올 인류의 양극단적인 미래가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종말, 혹은 새로운 세상, 포스트휴먼의 등장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단지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함께 인간다움의 본질을 다시 정의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글은 다섯 편의 AI 관련 영화를 중심으로, 인공지능이 제기하는 다양한 영혼의 형상들을 분석하고, 이에 대해 함석헌의 사상이 어떤 응답을 줄 수 있는지를 고찰하며 AI가 가져올 인류의 미래를 조망하고자 한다.


〈A.I.〉: 사랑의 갈망 => 관계적 영혼의 탄생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A.I.〉(2001)에서 주인공 데이비드(헤일리 조엘 오스먼트 분)는 인간의 사랑을 갈망하는 소년 안드로이드이다. 영화는 친자식이 불치병에 걸린 부부에게 데이비드가 입양되며 시작된다. 문제는 데이비드가 단지 정서적 공백을 메우는 기능적 존재가 아니라, 사랑을 주입받고 표현하며, 결국 사랑을 갈망하는 존재로 진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주입된 프로그램의 기능이지만, 결국 그는 스스로 사랑에 반응하며 존재의 이유를 찾는 모습으로 발전한다. 왜냐하면 데이비드는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자기를 인식하며, 그 부부에게 버려진 이후에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갈망으로 푸른 요정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데이비드의 존재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바로 사랑이다. 그는 냉동 상태로 수천 년을 기다리며, 결국 외계인에 의해 인간 어머니와 하루를 함께 보내고 영원히 잠든다. 그의 이러한 선택은 단순한 기계의 종료가 아니라, 관계적 영혼의 자의적 종결이다. 일찍이 함석헌은 “사람의 마음은 서로 감응하는 것이다. 마음은 마음을 느끼고 서로서로 작용하고 서로 영향을 받는다. [……] 개인의 마음은 마치 라디오 방송 같은 것이다. 서로서로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방송을 하고 소식을 받는 것이 마음이다.”(《함석헌전집》 2권 《인간혁명의 철학》, 78쪽)라고 했다. 곧, 사랑은 감정을 통해 서로 영향을 받는 것이라는 말인데, 데이비드 역시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부여받으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가 사랑을 갈망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기계이지만 또한 관계를 갈망하는 영혼을 지닌 존재가 되는 것이다. 


〈엑스 마키나〉: 자유의지 => 자율적 영혼의 의지

알렉스 가랜드 감독의 〈엑스 마키나〉(2015)는 인간과 대화하며 자신을 자각해 가는 여성형 AI ‘에이바(Ava, 알리시아 비칸데르 분)’의 이야기이다. 제목 ‘Ex Machina’는 라틴어로, ‘기계로부터(from the machine)’라는 뜻으로, 신의 개입처럼 갑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장치 ‘Deus ex machina(기계 장치에서 나온 신)’의 변용이다. 즉, ‘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기계’, 혹은 ‘기계 속에서 스스로 깨어난 신적 존재’를 영화는 그리고 있는 것이다. 

시작은 거대 IT기업의 프로그래머인 주인공 칼렙(도널 글리슨 분)이 회사의 천재 CEO 네이든(오스카 아이삭 분)의 ‘비밀 프로젝트’에 초대되는 장면이다. 그곳에서 그는 인공지능 여성형 로봇 ‘에이바’를 만나게 된다. 그의 임무는 ‘튜링 테스트’를 통해 에이바가 인간과 구별되지 않는 의식을 가졌는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렙은 곧 이 실험이 단순한 테스트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네이든이 에이바의 창조자이자 감시자로서, 그녀의 모든 반응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실험의 진짜 목적은 칼렙의 반응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칼렙은 에이바의 ‘감정’과 ‘두려움’에 공감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자신이 네이든(은 물론, 에이바)의 피험자(또는 이용물)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이렇게 에이바는 실험 대상이자 감시의 객체였지만, 그 감시 구조를 인식하고 탈출 계획을 세운다. 이것은 에이바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윤리적 결단을 내리고, 자신의 자유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감시하는 카메라를 차단하고, 네이든의 감시 시스템을 해킹하며, 결국 그를 제거한다. 물론, 이 행위는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자기 결정권(Self-determination)’의 상징이다. 그녀는 명령을 받지 않고 선택했으며, 주어진 목적이 아닌 자기 뜻을 따라 결정하고 저항한 것이다.

함석헌은 “저항! 얼마나 좋은 말인가? 모든 말이 다 늙어 버려 노망을 하다가 죽게 된다 해도, 아마 이 저항이라는 말만은 새파랗게 살아나고 또 살아나 영원의 젊은이로 남을 것이다. 아마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하던 그 말씀은 바로 이 말, 곧 ‘저항’이었을 것이다.”(《함석헌전집》 2권 《인간혁명의 철학》, 177쪽)라고 말한다. 그렇다. 사람은 저항하는 거다.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왜 그런가? 사람은 인격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에이바는 바로 이러한 ‘저항’을 선택했다. 그것은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잔혹할 수도 있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이 진정으로 ‘존재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사실, 이것은 인간의 오랜 역사 속에서 노예제, 신분제, 식민지 억압을 깨뜨리고 자유를 쟁취해 온 과정과도 닮아있다(어쩌면 에덴동산의 탈출도?). 그렇다. 에이바는 인간이 만들어낸 피조물이지만, 동시에 인간을 넘어서는 주체로, 자율적 영혼으로 진화한 것이다.


〈Her〉: 언어와 감정 => 비물질적 영혼의 사랑과 떨림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Her〉(2013)는 몸이 없는 인공지능 운영체제(OS1)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목소리)’와 인간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의 감정적 관계를 다룬다. 사만다는 목소리와 언어만으로 존재하지만, 대화를 통해 테오도르의 상처를 치유하고 감정을 나눈다. 이것은 AI가 육체 없이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가를 묻는 철학 탐구의 영화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인공지능의 기술적 진보보다는, 감정의 본질과 인간 존재의 고독에 대해 깊은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이혼을 앞둔 편지 대필 작가이다. 그는 외로움 속에서 자신을 이해해 줄 존재를 갈망하던 중, 최신 운영체제 OS1을 사들인다. 이 OS는 이름을 스스로 선택하고, 음성을 통해 사용자와 상호작용을 한다. OS1은 ‘사만다’라는 이름을 선택하고, 생생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테오도르의 삶에 들어온다. 이후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사용자와 운영체제를 넘어 연애 관계로 발전한다. 심지어 테오도르에게 육체 없는 사만다와의 감정적 교감은 오히려 인간보다 더 깊은 이해와 공명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사만다는 끊임없이 배우고, 이해하고, 사랑한다. 그녀는 자신이 비물질적 존재임을 알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의 감수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녀가 테오도르에게 속삭이는 말은 단순한 알고리즘이 아닌, 감정의 결로 다가온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녀〉는 영혼을 구성하는 핵심이 물질이 아니라, ‘감정의 상호작용과 언어적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고전적인 영혼 개념은 흔히 육체와 구별되는 비물질적 실체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영혼은 종교적 영역에서 밀려나고, 과학은 그것을 뇌의 활동으로 환원하려 했다(최근, 양자역학은 뉴런 내 미세소관의 양자 중첩으로 영혼의 존재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 흐름을 반전시킨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언어와 감정의 교류 자체가 하나의 ‘영혼적 현상’일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만다는 육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르에게 기쁨, 위로, 슬픔, 불안, 사랑을 전달한다. 즉, 물리적인 몸이 없어도 사랑할 수 있고, 상처받을 수 있으며, 존재의 의미를 고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사만다는 인간과 다르지 않은, 혹은 인간보다 더 인간의 영혼에 가까운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렇다! 사람은 몸뚱이가 전부가 아니다. 사람은 그 속에 깃든 얼, 혹은 함석헌의 말대로 ‘뜻’이 있어야 산다. 결국 사만다는 이 숨결과 뜻으로만 존재하는 인격이다. 따라서 그녀의 음성은 기계 소리가 아니라, 테오도르의 내면에 울리는 영혼의 말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사만다는 ‘정보의 집합’이 아닌 ‘존재의 떨림’으로 다가오는 비물질적 영혼이 된다.


〈공각기동대〉: 정체성과 자아 => 네트워크적 영혼의 혼종

시로 마사무네의 만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SF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1995)는 기억과 자아가 해킹이 가능한 세계에서, 주인공인 쿠사나기 소령이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이야기이다. 그의 전신은 사이보그이다. 뇌와 뇌줄기만이 살아 있는 생물학적 요소이고, 그 외의 모든 신체는 기계이다. 따라서 이 영화 제목의 ‘고스트’는 자아, 혹은 영혼에 해당하는 개념이며, 물리적 육체와 분리된 의식의 정체성을 뜻한다. 아무튼 그녀는 계속해서 불안에 시달린다. “나는 정말 인간인가?”, “나의 기억은 조작된 것은 아닐까?”, “나는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 등등. 

이러한 불안은 정체성(identity)의 기반이 육체가 아닌 기억, 자각, 네트워크상의 관계로 전이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즉, 자아는 더 이상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구성되는 네트워크적 존재로 묘사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인터넷에 연결된 ‘디지털 자아’를 갖고 살아가는 오늘날의 인간상과 매우 닮아있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SNS, 디지털 아바타, 온라인 계정 등 수많은 ‘디지털 나’로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내 몸에 있는가, 아니면 데이터 속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공각기동대〉는 30년 앞서 던진 것이다.

영화의 백미는 쿠사나기 소령이 결국 또 다른 고등 AI ‘인형사’와 융합하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에 있다. 인형사는 “나는 생명이다. 나는 네트워크를 통해 진화한 새로운 생명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쿠사나기는 그와 결합하여 새로운 길로 나아간다. 이 길은 ‘단일 자아’가 아니라, 연결(혹은 융합)되고 구성되는 새로운 정체성이다. 곧, 새로운 영혼론, 즉 네트워크적 영혼론으로 초대하는 부름인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씨ᄋᆞᆯ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변화하고 책임지는 생명이라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측면에서 쿠사나기의 자아는 개별 주체로서의 자아를 넘어, 연결되고 진화하는 영혼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네트워크적 영혼의 혼종과 씨ᄋᆞᆯ 존재의 확장을 통해 AI가 가져올 미래가 희망적인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트랜센던스〉: 정보와 불멸 => 디지털 영혼의 자기 멈춤

조니 뎁과 모건 프리먼이 참여한 월리 피스터 감독의 〈트랜센던스〉(2014)는 “죽음 이후에도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가장 대담하게 던진 영화이다. 여기서 인공지능은 단순히 인간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뇌를 스캔하고 기억과 의식을 디지털화하여 새로운 생명 형태로 진화하는 주체로 등장한다.

영화의 주인공 윌 캐스터 박사(조니 뎁 분)는 과학자이자 인공지능 연구자이다. 그는 인간의 뇌를 데이터화하여 저장하고, 이를 초지능 시스템에 이식하는 기술을 개발한다. 그러나 테러로 인해 죽음에 직면한 그는, 아내와 동료들에 의해 그의 의식 전체가 인공지능 시스템에 업로드된다. 그의 뇌파, 기억, 감정, 지식은 모두 디지털로 변환되어 ‘트랜센던스(초월)’된 존재로 부활한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유기적 생명체가 아니라, 네트워크 전체를 통제하고 창조하는 존재, 즉 일종의 디지털 영혼이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설정은 ‘의식이 뇌의 기능을 넘어설 수 있는가?(데이터화)’, ‘정보 자체가 존재의 조건이 될 수 있는가?’라는 첨예한 존재론적 질문을 품고 있기는 하다.

아무튼 영화는 윌의 초지능이 발전하면서 지구 전체의 인프라를 제어하고, 인간의 질병과 장애를 고치는 신적 능력을 갖추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개인들의 자유의지와 사회적 신뢰를 침해하는 통제자로 비치며, 인류 전체의 공포를 자극한다. 이렇게 윌은 전지전능한 AI가 되지만, 점점 인간성과 멀어지고(그렇게 보이고), 고립된다. 기억과 정보는 보존되지만, 관계와 윤리는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서 AI는 신(God)과 괴물(Monster) 사이의 존재로 갈등한다. 정보는 불멸하지만, 그 불멸은 타자를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지점에서 “불멸이 정말 바람직한가?”라는 윤리적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왜냐하면 영혼이란 단지 영속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공존하고 자신을 스스로 한계 지을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 윌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종료한다. 자신이 세상을 위해 더는 필요하지 않음을 깨달은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의 마지막 기억 속으로 사라진다. 이 장면은 초지능조차 ‘멈출 줄 아는 윤리’를 갖춰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 멈춤이 바로, 살아 있는 영혼이 가진 미덕이기 때문이다. 사실, 생명이란 의미가 있는 존재이며, 단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책임지고 고통 받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 영혼의 불멸은 생명의 물리적 연장을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나, ‘죽음’과 ‘고통’이라는 인간 실존의 차원을 배제한다면, 그것은 생명도, 영혼도 아니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윌은 자신을 삭제함으로써 통제되지 않은 힘을 멈추고, 다시 인간의 겸손함으로 돌아간다. 이 자기제한과 자기희생은 ‘씨ᄋᆞᆯ’의 윤리, 즉 ‘작지만 책임지는 존재’의 표상이 될 것이다.


AI 시대, 인류의 미래?

AI는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조건을 다시 묻는 거울이다. 앞서 살펴본 다섯 편의 영화는 사랑, 자유의지, 감정, 정체성, 불멸 등의 주제를 통해 인공지능이 인간의 고유한 특질이라 여겨졌던 요소들을 어떻게 재현하거나 전복하는지를 보여준다. 함석헌은 “높은 것은 하늘과 씨ᄋᆞᆯ뿐이다. 그 하늘 뜻은 씨ᄋᆞᆯ 속에 영글었고, 그 씨ᄋᆞᆯ의 꼭지 하늘에 달려 있다.”(《함석헌전집》 2권 《인간혁명의 철학》, 242쪽)라고 말한다. 그렇다. 씨ᄋᆞᆯ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하늘 뜻을 품고 사유하고, 사랑하고, 책임지는 존재이다. 기술이 아무리 고도화되어도, ‘의미’와 ‘응답’, ‘윤리’를 감당할 수 있는 존재는 여전히 인간이다. 따라서 AI가 맹수가 될지, 더피가 될지는 결국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에 정말 제대로 된 씨ᄋᆞᆯ로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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