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ᄋᆞᆯ의 소리

우리 자신을 모든 역사적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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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호 함석헌사상연구) 함석헌의 역사 우리의 역사-7 조선 씨ᄋᆞᆯ, 압록강 건너편을 바라보다 - 민대홍

씨ᄋᆞᆯ
202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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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사상 연구


함석헌의 역사 우리의 역사-7

조선 씨ᄋᆞᆯ, 압록강 건너편을 바라보다




민대홍

함석헌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서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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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ᄋᆞᆯ의 종교

함석헌은 고대사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긴 시간을 역사 서술의 대상으로 삼았다. 반만년의 역사를 꿰뚫는 시각은 다름 아닌 ‘고난’과 ‘섭리’. 그에게 고난은 씨ᄋᆞᆯ을 일깨우기 위해 신이 내린 복의 통로였다. 그것이 섭리요, 이 섭리를 깨달은 존재가 씨ᄋᆞᆯ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씨ᄋᆞᆯ은 자기됨을 찾았지만, 그것은 일순간의 발현이었다. 흥안령을 넘어 당당한 역사를 펼쳐나간 북방 선조, 그 뜻을 이어가기 위해 분투한 고구려와 고려, 조선시대의 정신을 강조했다.

그러나 씨ᄋᆞᆯ이 자기 사명을 깨달은 사례는 손꼽을 만큼 작다. 이 땅의 역사는 사명을 받들지 못한 잠재적(아직 깨어나지 못한) 씨ᄋᆞᆯ의 고난으로 얼룩졌다. 그리고 그 고난은 함석헌의 삶의 자리에까지 찾아왔다. 바로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전환을 맞은 조선 땅이다.

함석헌은 어려서부터 기독교인이었다. 그리고 평생을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다. 그가 몸담았던 장로교회도, 무교회주의도, 퀘이커도 큰 틀에서는 전부 기독교다. 그가 다양한 종교에 관심을 기울이며 경전을 연구한 것은 결국 더 깊은 ‘신앙’을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씨ᄋᆞᆯ에게 주어진 신의 선물이었다. 


유교도 불교도 다 씨ᄋᆞᆯ의 종교는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완전히 씨ᄋᆞᆯ을 떠나 특권층의 것이 되어버렸고, 그 특권층과 함께 썩었으므로 도저히 씨ᄋᆞᆯ의 가슴을 흔들 힘이 없었다. 씨ᄋᆞᆯ이 구하는 것은 곧 새 양심이다.―함석헌, 《함석헌저작집》 1권 《뜻으로 본 한국역사》, 350쪽.


함석헌은 삼국시대에 ‘종교’가 이 세상에 들어온 것에 집중했다. 종교는 씨ᄋᆞᆯ 정신 고양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약 1,500년 동안 불교와 유교는 씨ᄋᆞᆯ 정신의 밑힘이 됐다. 그러나 함석헌이 세상에 나온 20세기 초, 이 종교들은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씨ᄋᆞᆯ의 가슴을 흔들어 얼을 깨우는 역할을 포기하고, 특권층과 함께 썩었다. 하여, 씨ᄋᆞᆯ은 정신의 밑뿌리에 둘 새 종교를 기다렸다. 함석헌은 그러한 씨ᄋᆞᆯ의 소망을 아래와 같이 표현한다.


마침내 소아시아에 있는 바울을 보고 건너와 진리를 가르쳐주기를 청하던 마케도니아 사람 모양으로 압록강 건너편에서는 사자를 향하여 오기를 청하는 날이 오게 되었다.―함석헌, 윗글, 354쪽.


그는 앞의 두 종교가 ‘정치 세력’을 타고 들어왔음에 주목한다. 그러나 기독교(개신교)는 민중의 열망으로 이 땅에 들어왔다. 함석헌은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일에 대해 교회사학자와 같은 엄밀한 역사 서술을 하지 않는다. 대략적인 설명만을 남긴다. 이승훈을 통해 천주교가 들어와 핍박 받은 역사,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의 성경 번역과 배포 역사 등을 매우 간략하게 언급한다. 그러나 그는 이른바 ‘선교사관’, 곧 한국 기독교 역사를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한 ‘파종 유형’으로 보지 않는다. 씨ᄋᆞᆯ이 꿈꾼 종교, 시대가 요구하는 새 종교의 도래로 보았다.(윗글, 360쪽)


압록강 건너편을 바라본 서북청년

기독교 역사학자 김양선은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온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873년경 혁신 사상(革新思想)을 품은 의주 청년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등이 만주에 들어가서 국금(國禁)을 무릅쓰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가지고 국내로 잠입하여 비밀히 전도하기 시작하였으며 정부의 고관인 이수정은 188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기독교에 개종한 후에 성서를 역간(譯刊)하는 한편, 미국 교회에 한국 선교를 제의한 결과로 개국과 함께 선교사의 대거 입국이 가능케 되었다.―김양선, 〈韓國 新敎 八十年史〉, 《기독교사상》 제86권(1965), 7쪽.


서북지방은 조선 시대 내내 ‘차별의 땅’이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과거에 급제해도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차별받는 땅에서 살기 위해 무역(봇짐장수)을 택했고, 더 나은 삶,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이들은 한자와 청나라 말, 만주어 능력을 탑재한 다문화 지식인이었다. 무역을 하며 경제력도 키웠다. 한양을 바라보며 살지 않고 ‘대륙’을 품으며 살았다. 다른 지역의 사람들보다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서북 청년은 고려문이라 불리던 책문(柵門)에서 선교사를 찾아간다. 

선교사들은 모든 능력이 갖춰진 개혁적 서북청년들을 만나면서 ‘조선어 교본’도 만들고 ‘성서’도 번역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한국인 최초의 개신교 세례자가 되었음도 명백하다. 이들은 간도, 의주, 황해도 소래 등지로 돌아와 동족에게 성서를 나눠주고 교회를 세웠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로 알려진 ‘소래교회’는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이 땅에 들어온 1884년보다 한 해 전인 1883년도에 설립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서상륜에 의해서였다.

당시 조선은 희망의 불빛이 꺼져가는 중이었다. 서구 열강은 탐욕스런 이빨을 드러내며 우리 강토를 노렸고, 일본도 그 치열한 쟁투에 합류했다. 결국, 일제에 의해 우리 역사는 짓밟히고 씨ᄋᆞᆯ은 어둠의 기나긴 시간을 헤매야 했다. 이때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서북청년들이 기독교를 만나고 그 가르침의 알짬을 주체적으로 수용한 일이 한국 개신교 역사의 출발이 되었다. 

압록강 이남 지역에 살던 이들이, 그 너머를 바라보고 찾아가 주체적으로 수용한 기독교. 새 종교를 기다리는 씨ᄋᆞᆯ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역사학자 박정신은 평안도 개신교의 특징을 주자학의 체제와 한양 중심 질서에 맞서는 사회 변혁적 요소로 보았다.(박정신, 〈체제의 교육, 삶의 교육: 백년 전 베어드 그리고 백년 후 김 예슬〉, 《현상과인식》 제119호(2013), 19~22쪽) 서북지방이 이러한 종교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힘은 곧 씨ᄋᆞᆯ로부터 나왔다. 

이것이 시대가 요구하는 씨ᄋᆞᆯ의 새 종교 아니었나? 오랜 수난 후 맑은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하였고 새 생명의 빛은 제시되었다. 빛이 이기어 새 시대를 지을 것인가? 어둠이 다시 새로 나는 새 생명의 싹을 삼키고 말 것인가? 이 중요한 시기에 새 종교의 투사들은 용감하였다.―함석헌, 윗글, 360쪽.


씨ᄋᆞᆯ은 권력과 결탁한 기성 종교가 정신적 고양을 저해하면 어김없이 새 종교를 기다렸다. 게다가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새로운 종교를 찾아 나섰다. 서세동점과 일본의 야욕 속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조선의 씨ᄋᆞᆯ은 그렇게 기독교를 수용했다. 하여, 서북 청년들이 바라본 압록강 저 건너편에서부터 새 종교의 바람이 불어왔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 질서 속에 ‘평등’의 폭탄이 떨어지고, 오륜(五倫)으로 얽히고설킨 관계망을 하나님의 딸-아들 들이 헤집어 놓았다.


새 종교의 굴절

함석헌은 조선 말기 이 땅에 들어온 개신교가 한국을 건지기 위해 한 일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계급주의를 깨뜨리는 일

둘째, 사대사상을 쓸어버리는 일

셋째, 숙명론의 미신을 없애는 일―함석헌, 윗글, 362쪽.


이를 위해 개신교는 권력이 아닌 씨ᄋᆞᆯ의 삶을 선택했다. 병든 씨ᄋᆞᆯ을 위해 의료를, 부패한 권력에 의해 갓길로 내몰린 씨ᄋᆞᆯ의 삶의 자리를 온당히 찾도록 돕기 위해 교육에 힘썼다. 실(實)의 종교였다. 함석헌은 “실(實)이란 참이 물질적으로 나타난 것이다”(함석헌, 《함석헌 문집》 22권 《오산 뜰의 현자》, 22쪽)라고 말한 바 있다. 암클, 언문 등으로 폄훼되었던 한글이 기독교를 통해 ‘경전(성서)의 글’로 새 자리를 찾은 것처럼 씨ᄋᆞᆯ도 실질적인 제 자리를 찾았다. 노비와 백정이 교회 장로가 되고(승동교회 박성춘), 삶을 비관하며 시장에서 주먹질 하던 청년이 한센인을 돌보는 목사가 되기도 했다(오방 최흥종 목사). 

이렇듯, 개신교는 초창기에 씨ᄋᆞᆯ의 실제적인 삶의 개선을 위하는 종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일제의 서슬 푸른 칼날 아래 주류 개신교는 보신(保身)을 위해 점차 비정치화의 길을 걸었다. 사회 변혁과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던 공간이 내세 지향적 순수 종교공동체로 변해갔다. 역설적으로 비정치화를 표방한 주류 개신교는 일제의 부당하고 무자비한 폭력에 ‘침묵’함으로써 정치적인 집단이 되었다. 일제 말기에는 일본의 승전을 위한 기도회를 열고, 교회의 종탑을 떼어 전쟁 물자로 헌납했다. 중일전쟁이 터진 1937년부터는 ‘국방헌금’이라는 명목하에 전투기를 헌납하기도 했다. ‘조선장로호’(보국 745호)가 대표적 보기다. 

권력 친화적 종교가 된 개신교(뿐만 아니라 불교, 천주교도)는 씨ᄋᆞᆯ의 삶을 위한 사명을 저버렸다. 그리고 그 영향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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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가 헌금해 만든 일본군 전투기 ‘조선장로호’


극우 개신교 시대의 시작

해방공간. 남한은 3년간 미군정의 통치를 받는다. 그사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당시 민족의 지도자였던 김구, 김규식, 이승만 등이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한다. ‘3영수’로 불린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개신교인이었다는 점. 교회사학자 류대영은 “이들은 공개적으로 기독교적 국가 건설을 말하면서 개신교계의 지지를 호소했다”(류대영, 《새로 쓴 한국 기독교의 역사》, 308쪽)고 평가하며, “기독신민회는 김구를,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와 기독교민주동맹은 각각 김규식과 김일성을,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 그리스도교연맹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독교 정치 단체, 함태영, 김활란, 배은희 같은 개신교 지도부는 이승만을 지지”(윗글)했음을 밝힌다.

남북통일정부의 수립은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남과 북이 각각의 정부를 세웠다. 남한에서는 이승만이 승자가 되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회 시 이승만은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은 종교 사상에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만으로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며 성경에 손을 얹고 국회의장 맹세문을 낭독, 선서했다. 또한 당시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5%도 되지 않던 상황 속에서 이승만이 임명한 135명의 고위직 가운데 48%가 기독교인이었다. 

많은 교회와 개신교계 학교가 일제강탈기 때 일본의 종교 시설이었던 땅을 미군정 시기에 불하받는다. 영락교회, 경동교회, 조선신학교, 남산장로회신학교 등이 그렇게 자리잡았다. 또한 이승만 정권의 비호 속에서 군대에는 군목이, 형무소에는 형목이 제도화되었고, 개신교계 신문, 방송국, YMCA 등의 기관이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았다. 이는 개신교인에게 승리요 영광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의 영광은 씨ᄋᆞᆯ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될 수 없었다. 일제강탈기에 형성된 권력 친화적 속성이 해방 이후 진화한 모습에 불과했다.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서 개신교는 권력과 더욱 밀착된 형태로 발전한다. 1966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 국가조찬기도회’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권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좋은 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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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국가조찬기도회. 좌측부터 김수환 추기경, 한경직·김준곤 목사, 박정희 대통령, 1966년 3월 8일 조선호텔에서


이승만-박정희-전두환에 걸친 독재 시기를 이끈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친미와 반공’. 개신교 역시 한국에서 가장 반공적 집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은 종교와 권력이 무엇을 중심으로 연대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성별, 출신 지역, 나이, 학교(학력) 등을 근거로 ‘차별하지 말자’고 외치는 세상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개신교. 이들은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 받는 목사를 구하자고 외치며 태극기를 흔든다. 더 많은 개신교인이 결집하여 광장에서 외치면 그 메시지가 옳든 그르든 ‘정치’는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이른바 전광훈 현상으로 회자되는 개신교 극우집회는 미국과 이스라엘 국기를 내세운다. 이들의 밑뿌리에는 미국 사대주의와 반공이 자리잡고 있다. 집회의 주요 장소인 광화문 광장을 이들은 이승만 광장이라고 부른다. 극우 개신교의 시대가 이승만 시대로부터 연원(淵源)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의 주류 개신교가 민중, 씨ᄋᆞᆯ의 종교라고 할 수 있을까? 


다시 압록강 너머를 바라보다

함석헌의 눈으로 오늘을 성찰해본다. 기성 종교가 제 역할을 못하면 씨ᄋᆞᆯ이 새 종교를 열망한다는 그의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교회 내에 머무르던 신자들이 ‘예수는 믿되 교회라는 조직체에는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하겠다’며 가나안 성도의 길에 들어섰다. 벌써 20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가나안 신도 200만 시대〉, 《한국성결신문》, 2023. 4. 5.) 

교회를 떠났다고 종교를 버린 것은 아니다. 종교가 제 역할을 못 하니, 자신만의 종교생활을 위해 구도자의 길로 나선 것이다. 서세동점과 일제의 야욕 속에서 무너져가는 조선에 새로운 희망을 공급하고자 압록강을 건넌 서북청년들이 만난 새 종교. 오늘도 그런 새 종교가 필요하다. 계급적이지 않은 종교공동체, 사대가 아닌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신앙생활을 담보하는 종교공동체, 미신과 숙명론을 내세우며 혹세무민하는 종교가 아닌 상식적인 종교공동체 말이다. 

 

석조 교회당이 일어나는 것은 결코 진정한 종교부흥이 아니다. 그 종교는 일부 소수인의 종교지 민중의 종교가 아니다. 지배하자는 종교지 봉사하자는 종교가 아니다. 도취하자는 종교지 수도·정진하자는 종교가 아니다. 안락을 구하는 종교지 세계 정복을 뜻하는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지나가려는 시대의 보수주의자들이 뻔히 알면서도 아니 그럴 수 없어 일시적이나마 안전을 찾아보려는 자기기만적인 현상이다.

광장에 나가면 벌판에서, 바닷가에 가면 배 위에서, 밭에 가면 밭고랑에서, 길을 가다가는 우물가에서 예배하는 종교하고 목자 없는 양같이 헤매는 무지한 군중을 찾아 가르치다가 저물면 그대로 보낼 수 없어 많거나 적거나 간에 같이 나눠 먹고, 밤이면 홀로 산에 올라 별을 바라보며 기도·예배하는 종교, 그러한 예수의 종교, 성당 없는 종교, 종교 아닌 종교는 지금 이 나라에 있나, 없나.―함석헌,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함석헌저작집》 16권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117~118쪽.


1956년 함석헌이 《사상계》에 쓴 글이다. 6·25전쟁 직후 폐허가 된 이 땅이 재건되는 과정 중 교회도 재건되었다. 함석헌의 눈에 이러한 재건은 온당하지 않았다. 그는 건물 세우고 사람 많이 모이게 한다고 종교가 다시 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벌판과 바닷가 위, 밭고랑과 우물가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씨ᄋᆞᆯ을 위해 일하는 종교를 꿈꿨다. 

그가 1956년에 던진 질문은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150여 년 전, 서북지역 씨ᄋᆞᆯ들이 낡은 체제가 주지 못하는 희망을 찾아 스스로 압록강을 건넜다. 오늘날 200만 가나안 성도와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모색하는 이들 역시 같은 여정 위에 있다. 이제, 이들과 함께 건너야 할 강은 지리적 경계가 아니라 제도, 관습, 체제 등 보이지 않는 강이다.

씨ᄋᆞᆯ의 종교는 언제나 씨ᄋᆞᆯ 스스로가 만들어왔다. 씨ᄋᆞᆯ은 권력과 짝하는 종교로부터 과감한 탈출을 감행한다. 함석헌이 역사의 섭리를 봤다면 그것은 고난 속에서도 씨ᄋᆞᆯ이 깨어나 새 길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다. 압록강 건너편을 바라보던 그 눈으로, 우리는 어디를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새 종교를 찾고자 하는 오늘의 씨ᄋᆞᆯ이 던져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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