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인물 탐구
인간을 상대화한 해월 최시형
―〈한살림선언〉과 ‘이천식천’을 중심으로
조성환
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교수

들어가며
해월 최시형(1827~1898)은 “21세기에 다시 부활한 한국사상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학 연구의 권위자인 박맹수 교수(원광대)가 1996년에 최시형으로 박사논문을 쓸 때만 하더라도 역사학계의 관심은 온통 전봉준에 쏠려 있었다고 한다. 반면에 천도교에서는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와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 손병희가 중심이었다. 그렇게 존재감이 희박하던 최시형을 한 명의 ‘사상가’로, 그것도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생태사상가’로 일찍부터 주목한 그룹은 ‘한살림’ 운동의 장일순과 김지하였다.
무위당 장일순은 최시형의 피체지인 강원도 원주에 추모비를 세우고(1990), 그의 사상을 강연과 시화 등의 형태로 우리에게 알려주었고, 김지하는 최시형의 ‘향아설위’나 ‘밥사상’을 ‘후천개벽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그를 현대사상가로 부활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이 하나의 선언문의 형태로 공개된 것이 〈한살림선언〉(1989)이다. 장일순, 김지하, 최혜성, 박재일, 김민기 등이 공동 저자로 참여하고, 최혜성이 대표로 집필한 이 선언문은 ‘환경오염’과 ‘생태위기’라는 20세기 후반의 지구적 과제를 동학사상, 그중에서도 특히 최시형 사상으로 극복하고자 한 실천 운동이자 “토착적 근대”(indigenous modernity, 기타지마 기신)의 사례였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들이 그 이후에 ‘최시형’이라는 인물이 한국 사회에 알려지게 되는 데 토대가 되었다.
학계에서 최시형에 관한 연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그중에서 생태사상가로서의 최시형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2010년 무렵부터이다. 최시형의 설법을 모은 《해월신사법설》의 한글 번역이 출판된 것도 이 무렵이다.[이규성, 《최시형의 철학》(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최시형의 평전은 2021년에 처음 나왔고[성주현, 《해월 최시형 평전》(선인)], 2025년에는 최시형 철학과 언행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연구서도 나왔다.(김용휘, 《평민철학자 해월 최시형》(모시는사람들); 백승종, 《해월 최시형》(논형)]
이상을 정리해 보면, 환경오염과 생태위기라는 산업문명의 그늘이 최시형이라는 잊혀진 사상가를 재조명하게 만들었고, 여기에는 ‘한살림운동’이라는 자생적 생명 운동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이하에서는 구체적으로 한살림운동에서 최시형의 철학이 어떻게 부활하고 있는지를 1989년의 〈한살림선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한살림선언〉과 동학사상
〈한살림선언〉은 총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산업문명의 위기
2. 기계론적 모형의 이데올로기
3. 전일적 생명의 창조적 신화
4. 인간 안에 모셔진 우주생명
5. 한살림
이 중에서 1은 현실 진단이고, 2와 3은 그것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며, 4와 5는 한국철학적 관점에서의 대안 제시이다. 특히 4에서는 한국의 고유 사상이자 문명 전환 사상으로서 19세기 동학사상이 호출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한’ 사상은 서세가 동점하는 근세에 와서 우리 민족이 봉건적 질곡과 외세의 억압에 신음하고 있을 때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그 위대한 모습을 다시 나타냈다. 동학의 한울님 사상은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의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우리 민족의 마음에 수천 년 간 형성되어 맥락을 이어온 한울님의 상(像)이 민족의 암울한 전환기에 성(誠)과 경(敬)과 신(信)으로써 모셔져야 하는 한울님으로 다시 현현하게 되었다. 한울님은 ‘한’, ‘길〔道〕’, ‘태극(太極)’, ‘기(氣)’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 동학은 이러한 한울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동학사상은 하늘과 사람과 물건이 다 같이 ‘한생명’이라는 우주적인 자각에서 시작해서 우주의 생명을 모시고〔侍天〕 키워 살림으로써〔養天〕 모든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체천(體天)의 도를 설파하였다.
이에 의하면 한국철학의 특징을 나타내는 개념은 ‘한’이고, 그 의미는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뜻이며, 동학의 ‘한울님 사상’은 이러한 ‘한사상’의 전통을 잇고 있다. ‘한사상’은 고조선 시대 이래로 면면히 내려오고 있고, 신라 시대에는 그것이 ‘풍류’로 드러났으며, 조선 후기에는 ‘동학’으로 발현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한사상은 중국의 철학적 개념을 수용하는 토대로 기능하였다.
여기에서 ‘한울(님)’이라는 표현은 19세기 동학 시기에는 나오지 않는 개념이다. 그것은 1910년대 이후에 ‘천도교’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신개념이다. 동학 시기에는 아래아 ‘하늘’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한살림선언〉에서는 오늘날 천도교에서 사용하는 최고신 개념을 동학 시기에 소급해서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례는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지금의 천도교뿐만 아니라 〈한살림선언〉도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살림선언〉에서는 왜 ‘하늘(ᄒᆞᄂᆞᆯ)’ 대신에 ‘한울’ 개념을 선호한 것일까? 일차적인 이유는 한사상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한살림철학’을 정립하기 위해서이다. ‘한살림’이라는 개념은 박재일이 처음 제안했다고 하는데,1) 그것을 사후에 철학적으로 이론화하기 위해서 ‘한사상’에 주목한 것이리라(실제로 〈한살림선언〉의 마지막 챕터인 ‘5. 한살림’은 한살림철학의 전개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한사상’ 내지는 ‘한철학’을 역사상 처음으로 전개한 인물은 천도교 이론가 이돈화이다. 야뢰 이돈화는 1930년대에 쓴 《신인철학(新人哲學)》의 서두에서 ‘한울’의 철학적 의미를 설명하였다. 즉 ‘한’은 ‘크다’는 뜻이고, ‘울’은 ‘울타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한울’은 우주 전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울’은 종래에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사용되던 ‘천지(天地)’나 ‘우주(宇宙)’ 개념을 아우르는 한글 철학 개념으로 새롭게 해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이 해방 이후에 백세명으로 이어지고[백세명, 《동학사상과 천도교》(1956)], 20세기 후반에는 〈한살림선언〉으로 부활한 것이다.
〈한살림선언〉과 최시형 철학
이처럼 〈한살림선언〉에서는 동학사상을 한국사상의 전통에 자리매김과 동시에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문명 전환 사상’으로까지 발전시킨다.
오늘날 인류는 진화냐 파멸이냐 하는 분기점에 서 있다. 진화는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고 있다. 문명의 전환기는 인간에게 새로운 각성과 결단으로써 잃어버린 생명과 정신을 되찾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야말로 우리는 기존의 세계관과 가치관에서 벗어나 우리의 행동을 의식적으로 변화시켜야 할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인류의 진화 과정에 축적된 문화 유산에서 우리의 진로를 현명하게 결정할 지혜를 찾아내 활용해야 하겠다. 특히 동학사상은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에게 지혜와 희망을 줄 것이다.(강조는 인용자. 이하도 마찬가지)
먼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문명 전환’이라는 표현이 이미 여기에서 나오고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한살림 창립 멤버들이 일찍이 1980년대부터 문명 전환의 필요성을 감지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전환 사상으로 ‘동학’에 주목하고 있는 점도 선구적이다. 당시에 동학을 ‘문명 전환의 한국사상’으로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한살림선언〉에서는 위의 문장에 이어서 구체적으로 동학사상을 소개하는데, 여기에는 최제우의 철학과 함께 최시형의 철학도 같이 등장한다.
첫째, 사람은 물건과 더불어 다 같이 공경해야 할 한울이다.
(생략) 동학은 ‘사람’과 ‘자연’이 모두 공경해야 할 ‘한울생명’에 합일된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한울님같이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해월(海月)은 일찍이 인간이 자연에 대해 공경심을 가짐으로써 자연과 생태적 균형을 이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주의 진화에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하여 해월은 “초목의 싹을 꺾지 아니한 뒤에라야 산림이 무성하고” “손수 꽃가지를 꺾으면 그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며 “폐물을 버리면 부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생태적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람을 공경하라”는 가르침은 수운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 사상, 즉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는 사상에 대한 설명에 해당한다. 하지만 “자연을 공경하라”는 사상,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생태적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설명은 최시형의 경물(敬物) 사상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한살림선언〉은 이어서 최시형의 ‘이천식천(以天食天)’ 사상, 즉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식(食) 철학’을 소개한다.
우주 차원에서 보면 양천(養天)은 바로 한울이 한울 전체를 키우기 위해 동질적인 생명들이 서로 상부상조하게 함으로써 서로 발전하게 하는 것이고, 이질적인 생명들이 먹이사슬 순환을 통해 연대적인 성장발전을 도모하도록 함으로써 한울 자신이 진화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해월은 이를 “한울이 한울을 먹는다〔以天食天〕”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현행본 《해월신사법설》의 〈이천식천〉 챕터에 나오는 구절을 현대문으로 압축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그래서 최시형 철학의 얼개나 원문의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최시형의 철학에서는 “만물이 하늘님이다”가 대전제가 되는데, 여기에서는 그 “하늘님들이 서로 먹고 먹힌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일견 모순적인 것처럼 들릴 수 있어서 부연 설명을 한 것이 이 설법이라고 생각된다. 이 점은 이 설법의 원문이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것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내 항상 말할 때에 물물천(物物天)이요 사사천(事事天)이라 하였는데, 만약 이 이치를 시인한다면 만물이 다 이천식천(以天食天)이 아닌 게 없을 것이다. 이천식천(以天食天)은 어찌 생각하면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 것 같은데, 이것은 인간의 편견에서 보기 때문이다.
먼저 “물물천 사사천”은 “만물이 하늘이고 만사가 하늘이다”는 뜻이다. 동학보다 반세기 뒤에 탄생한 원불교에서는 ‘천(天)’을 ‘불(佛)’로 바꿔서,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이라고 말한다. 또한 2019년에 개벽학당을 다니던 청년들은(일명 ‘벽청’) “물물천 사사천”이 노랫말로 들어간 동학 노래를 만들기도 하였다. 최시형은 만물이 하늘인데, 그것들끼리 서로 먹고 먹힌다는 것은 일견 모순처럼 들린다고 자문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물음에 대해 최시형은 어떻게 답하였을까?
만일 하늘 전체로 본다면 하늘이 하늘 전체를 키우기 위해서 동질적인 것은 상호부조로 서로 기화(氣化)를 이루게 하고, 이질적인 것은 이천식천(以天食天)으로 서로 기화(氣化)를 통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은 한편으로는 동질적 기화로 종(種)을 기르게〔養〕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질적 기화로 종(種)과 종(種)의 연대적 성장 발전을 도모한다.
최시형의 대답은 개체 차원에서는 ‘먹힘’이지만 전체 차원에서는 ‘기름〔養〕’이라는 것이다. 한살림적인 개념으로 다시 표현하면 개별적 하늘의 차원에서는 ‘죽음’이지만 전체적 하늘의 차원에서는 ‘살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살림선언〉에서는 “전체 하늘을 기른다”는 점에서 ‘양천(養天)’이라는 최시형의 개념으로 바꿔서 표현하고 있다.
맺으며
‘이천식천’의 설법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라는 ‘종(種)’을 상대화하는 사유로 볼 수 있다. 즉 인간 안에서만 인간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이 아닌 존재, 즉 비인간 존재(nonhuman beings)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먹는다’는 행위가 인간과 비인간 모두에게 공통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통 유학에서는 ‘먹음’이라는 행위에 대해서는 철학적인 고찰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학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주목하여 인간다움을 극대화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최시형은 인간과 동물(더 나아가서는 만물)의 공통점에서부터 자신의 철학을 시작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먹는다’는 행위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은 인간이 아닌 것이 자기 몸 안에 들어오는 사건이다. 최시형은 그것을 ‘이질적 기화’라고 표현한다. ‘먹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두 존재가 하나로 되는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런데 최시형의 철학에서는 단지 ‘음식’을 먹거나 ‘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먹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것은 먹는 대상을 ‘하늘처럼 대하라’는 윤리적 메시지에 다름 아니다. 즉 먹이를 대하는 태도의 경건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점을 나타낸 말이 ‘하늘로써’, 즉 ‘이천(以天)’이다.
먹이를 하늘로 대해야 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먹이도 원래 하늘이었기 때문이지만, 종교학적으로 보면 그것이 나의 먹이가 됨으로써 ‘희생’을 하였기 때문이다.2) 그리고 제사라는 행위는 신에게 음식을 바치는 것인데, 동학에서는 “내가 하늘님”이기 때문에, 먹는다는 행위는 나라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보면 일종의 ‘희생제의’일 수 있다. 내 안의 하늘님을 위해서 제물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인간이 먹음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이천식천’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인간이 다른 동물이나 생물에 의해 ‘먹히는’ 피식자가 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주어와 목적어가 바뀌어서 ‘이천(以天)’의 ‘천(天)’은 인간 이외의 존재가 되고, ‘식천(食天)’의 ‘천(天)’이 인간이 된다. 실제로 우리는 죽어서 시체가 되면 미생물이나 벌레들의 먹이가 된다. 발 플럼우드라는 생태철학자는 살아서 악어의 먹이가 될 뻔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을 계기로 철학적 회심을 하여 “우리는 모두 음식이다. 죽음으로써 다른 생명을 길러준다”고 하였고, 서구 문화는 인간을 인간 이외의 존재와 분리시키는 ‘인간예외주의(human exceptionalism)’로 인해 오늘날의 생태 위기를 초래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나아가서 “생명이란 지구라는 도서관에서 잠시 빌린 책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토마스 베리가 《지구의 꿈》(1988)에서 주창한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적 사유를 강조하였다. ‘지구공동체’는 최시형의 개념으로 바꾸면 ‘하늘 전체’에 해당하고, ‘이천식천’은 지구공동체 안에서 인간을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최시형의 철학은 한때는 잊혀졌지만 한살림운동을 거쳐 21세기에 그 빛을 발하고 있다.
각주
1) 박재선, 〈[인터뷰] 언제나 생명 가진 모든 존재와 함께〉, 《인농 박재일 “한살림답게!”》, 2011. 9. 14.
https://parkjaeil.tistory.com/entry/%EC%96%B8%EC%A0%9C%EB%82%98-%EC%83%9D%EB%AA%85-%EA%B0%80%EC%A7%84-%EB%AA%A8%EB%93%A0-%EC%A1%B4%EC%9E%AC%EC%99%80-%ED%95%A8%EA%BB%98
2) 황종원, 〈최시형 ‘식(食)’ 사상의 종교생태학적 의의〉, 《신종교연구》 제26집(한국신종교학회, 2012) 참조.


근현대 인물 탐구
인간을 상대화한 해월 최시형
―〈한살림선언〉과 ‘이천식천’을 중심으로
조성환
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교수
들어가며
해월 최시형(1827~1898)은 “21세기에 다시 부활한 한국사상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학 연구의 권위자인 박맹수 교수(원광대)가 1996년에 최시형으로 박사논문을 쓸 때만 하더라도 역사학계의 관심은 온통 전봉준에 쏠려 있었다고 한다. 반면에 천도교에서는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와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 손병희가 중심이었다. 그렇게 존재감이 희박하던 최시형을 한 명의 ‘사상가’로, 그것도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생태사상가’로 일찍부터 주목한 그룹은 ‘한살림’ 운동의 장일순과 김지하였다.
무위당 장일순은 최시형의 피체지인 강원도 원주에 추모비를 세우고(1990), 그의 사상을 강연과 시화 등의 형태로 우리에게 알려주었고, 김지하는 최시형의 ‘향아설위’나 ‘밥사상’을 ‘후천개벽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그를 현대사상가로 부활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이 하나의 선언문의 형태로 공개된 것이 〈한살림선언〉(1989)이다. 장일순, 김지하, 최혜성, 박재일, 김민기 등이 공동 저자로 참여하고, 최혜성이 대표로 집필한 이 선언문은 ‘환경오염’과 ‘생태위기’라는 20세기 후반의 지구적 과제를 동학사상, 그중에서도 특히 최시형 사상으로 극복하고자 한 실천 운동이자 “토착적 근대”(indigenous modernity, 기타지마 기신)의 사례였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들이 그 이후에 ‘최시형’이라는 인물이 한국 사회에 알려지게 되는 데 토대가 되었다.
학계에서 최시형에 관한 연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그중에서 생태사상가로서의 최시형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2010년 무렵부터이다. 최시형의 설법을 모은 《해월신사법설》의 한글 번역이 출판된 것도 이 무렵이다.[이규성, 《최시형의 철학》(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최시형의 평전은 2021년에 처음 나왔고[성주현, 《해월 최시형 평전》(선인)], 2025년에는 최시형 철학과 언행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연구서도 나왔다.(김용휘, 《평민철학자 해월 최시형》(모시는사람들); 백승종, 《해월 최시형》(논형)]
이상을 정리해 보면, 환경오염과 생태위기라는 산업문명의 그늘이 최시형이라는 잊혀진 사상가를 재조명하게 만들었고, 여기에는 ‘한살림운동’이라는 자생적 생명 운동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이하에서는 구체적으로 한살림운동에서 최시형의 철학이 어떻게 부활하고 있는지를 1989년의 〈한살림선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한살림선언〉과 동학사상
〈한살림선언〉은 총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산업문명의 위기
2. 기계론적 모형의 이데올로기
3. 전일적 생명의 창조적 신화
4. 인간 안에 모셔진 우주생명
5. 한살림
이 중에서 1은 현실 진단이고, 2와 3은 그것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며, 4와 5는 한국철학적 관점에서의 대안 제시이다. 특히 4에서는 한국의 고유 사상이자 문명 전환 사상으로서 19세기 동학사상이 호출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이에 의하면 한국철학의 특징을 나타내는 개념은 ‘한’이고, 그 의미는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뜻이며, 동학의 ‘한울님 사상’은 이러한 ‘한사상’의 전통을 잇고 있다. ‘한사상’은 고조선 시대 이래로 면면히 내려오고 있고, 신라 시대에는 그것이 ‘풍류’로 드러났으며, 조선 후기에는 ‘동학’으로 발현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한사상은 중국의 철학적 개념을 수용하는 토대로 기능하였다.
여기에서 ‘한울(님)’이라는 표현은 19세기 동학 시기에는 나오지 않는 개념이다. 그것은 1910년대 이후에 ‘천도교’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신개념이다. 동학 시기에는 아래아 ‘하늘’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한살림선언〉에서는 오늘날 천도교에서 사용하는 최고신 개념을 동학 시기에 소급해서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례는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지금의 천도교뿐만 아니라 〈한살림선언〉도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살림선언〉에서는 왜 ‘하늘(ᄒᆞᄂᆞᆯ)’ 대신에 ‘한울’ 개념을 선호한 것일까? 일차적인 이유는 한사상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한살림철학’을 정립하기 위해서이다. ‘한살림’이라는 개념은 박재일이 처음 제안했다고 하는데,1) 그것을 사후에 철학적으로 이론화하기 위해서 ‘한사상’에 주목한 것이리라(실제로 〈한살림선언〉의 마지막 챕터인 ‘5. 한살림’은 한살림철학의 전개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한사상’ 내지는 ‘한철학’을 역사상 처음으로 전개한 인물은 천도교 이론가 이돈화이다. 야뢰 이돈화는 1930년대에 쓴 《신인철학(新人哲學)》의 서두에서 ‘한울’의 철학적 의미를 설명하였다. 즉 ‘한’은 ‘크다’는 뜻이고, ‘울’은 ‘울타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한울’은 우주 전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울’은 종래에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사용되던 ‘천지(天地)’나 ‘우주(宇宙)’ 개념을 아우르는 한글 철학 개념으로 새롭게 해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이 해방 이후에 백세명으로 이어지고[백세명, 《동학사상과 천도교》(1956)], 20세기 후반에는 〈한살림선언〉으로 부활한 것이다.
〈한살림선언〉과 최시형 철학
이처럼 〈한살림선언〉에서는 동학사상을 한국사상의 전통에 자리매김과 동시에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문명 전환 사상’으로까지 발전시킨다.
먼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문명 전환’이라는 표현이 이미 여기에서 나오고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한살림 창립 멤버들이 일찍이 1980년대부터 문명 전환의 필요성을 감지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전환 사상으로 ‘동학’에 주목하고 있는 점도 선구적이다. 당시에 동학을 ‘문명 전환의 한국사상’으로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한살림선언〉에서는 위의 문장에 이어서 구체적으로 동학사상을 소개하는데, 여기에는 최제우의 철학과 함께 최시형의 철학도 같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사람을 공경하라”는 가르침은 수운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 사상, 즉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는 사상에 대한 설명에 해당한다. 하지만 “자연을 공경하라”는 사상,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생태적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설명은 최시형의 경물(敬物) 사상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한살림선언〉은 이어서 최시형의 ‘이천식천(以天食天)’ 사상, 즉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는 ‘식(食) 철학’을 소개한다.
이것은 현행본 《해월신사법설》의 〈이천식천〉 챕터에 나오는 구절을 현대문으로 압축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그래서 최시형 철학의 얼개나 원문의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최시형의 철학에서는 “만물이 하늘님이다”가 대전제가 되는데, 여기에서는 그 “하늘님들이 서로 먹고 먹힌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일견 모순적인 것처럼 들릴 수 있어서 부연 설명을 한 것이 이 설법이라고 생각된다. 이 점은 이 설법의 원문이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것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먼저 “물물천 사사천”은 “만물이 하늘이고 만사가 하늘이다”는 뜻이다. 동학보다 반세기 뒤에 탄생한 원불교에서는 ‘천(天)’을 ‘불(佛)’로 바꿔서,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이라고 말한다. 또한 2019년에 개벽학당을 다니던 청년들은(일명 ‘벽청’) “물물천 사사천”이 노랫말로 들어간 동학 노래를 만들기도 하였다. 최시형은 만물이 하늘인데, 그것들끼리 서로 먹고 먹힌다는 것은 일견 모순처럼 들린다고 자문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물음에 대해 최시형은 어떻게 답하였을까?
최시형의 대답은 개체 차원에서는 ‘먹힘’이지만 전체 차원에서는 ‘기름〔養〕’이라는 것이다. 한살림적인 개념으로 다시 표현하면 개별적 하늘의 차원에서는 ‘죽음’이지만 전체적 하늘의 차원에서는 ‘살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살림선언〉에서는 “전체 하늘을 기른다”는 점에서 ‘양천(養天)’이라는 최시형의 개념으로 바꿔서 표현하고 있다.
맺으며
‘이천식천’의 설법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라는 ‘종(種)’을 상대화하는 사유로 볼 수 있다. 즉 인간 안에서만 인간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이 아닌 존재, 즉 비인간 존재(nonhuman beings)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먹는다’는 행위가 인간과 비인간 모두에게 공통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통 유학에서는 ‘먹음’이라는 행위에 대해서는 철학적인 고찰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학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주목하여 인간다움을 극대화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최시형은 인간과 동물(더 나아가서는 만물)의 공통점에서부터 자신의 철학을 시작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먹는다’는 행위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은 인간이 아닌 것이 자기 몸 안에 들어오는 사건이다. 최시형은 그것을 ‘이질적 기화’라고 표현한다. ‘먹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두 존재가 하나로 되는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런데 최시형의 철학에서는 단지 ‘음식’을 먹거나 ‘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먹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것은 먹는 대상을 ‘하늘처럼 대하라’는 윤리적 메시지에 다름 아니다. 즉 먹이를 대하는 태도의 경건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점을 나타낸 말이 ‘하늘로써’, 즉 ‘이천(以天)’이다.
먹이를 하늘로 대해야 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먹이도 원래 하늘이었기 때문이지만, 종교학적으로 보면 그것이 나의 먹이가 됨으로써 ‘희생’을 하였기 때문이다.2) 그리고 제사라는 행위는 신에게 음식을 바치는 것인데, 동학에서는 “내가 하늘님”이기 때문에, 먹는다는 행위는 나라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보면 일종의 ‘희생제의’일 수 있다. 내 안의 하늘님을 위해서 제물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인간이 먹음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이천식천’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인간이 다른 동물이나 생물에 의해 ‘먹히는’ 피식자가 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주어와 목적어가 바뀌어서 ‘이천(以天)’의 ‘천(天)’은 인간 이외의 존재가 되고, ‘식천(食天)’의 ‘천(天)’이 인간이 된다. 실제로 우리는 죽어서 시체가 되면 미생물이나 벌레들의 먹이가 된다. 발 플럼우드라는 생태철학자는 살아서 악어의 먹이가 될 뻔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을 계기로 철학적 회심을 하여 “우리는 모두 음식이다. 죽음으로써 다른 생명을 길러준다”고 하였고, 서구 문화는 인간을 인간 이외의 존재와 분리시키는 ‘인간예외주의(human exceptionalism)’로 인해 오늘날의 생태 위기를 초래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나아가서 “생명이란 지구라는 도서관에서 잠시 빌린 책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토마스 베리가 《지구의 꿈》(1988)에서 주창한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적 사유를 강조하였다. ‘지구공동체’는 최시형의 개념으로 바꾸면 ‘하늘 전체’에 해당하고, ‘이천식천’은 지구공동체 안에서 인간을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최시형의 철학은 한때는 잊혀졌지만 한살림운동을 거쳐 21세기에 그 빛을 발하고 있다.
각주
1) 박재선, 〈[인터뷰] 언제나 생명 가진 모든 존재와 함께〉, 《인농 박재일 “한살림답게!”》, 2011. 9. 14.
https://parkjaeil.tistory.com/entry/%EC%96%B8%EC%A0%9C%EB%82%98-%EC%83%9D%EB%AA%85-%EA%B0%80%EC%A7%84-%EB%AA%A8%EB%93%A0-%EC%A1%B4%EC%9E%AC%EC%99%80-%ED%95%A8%EA%BB%98
2) 황종원, 〈최시형 ‘식(食)’ 사상의 종교생태학적 의의〉, 《신종교연구》 제26집(한국신종교학회, 201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