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ᄋᆞᆯ 시론
쇠락하는 한국교회와 회복을 위한 과제
정종훈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교회가 쇠락하고 있다
한국교회 안에 가나안 교인들이 증가하고 있다. 가나안 교인이라고 말하면 무슨 말인지 모를 사람도 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가고자 했던 최종 목적지로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을 상징한다.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가 된다. 가나안 교인이란, 이전에는 교회를 나가던 교인이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더 이상 교회에 나가는 것을 포기한 교인을 희화화해서 지칭하는 말이다. 가나안 신도의 증가 요인은 교회 내부 요인으로 목회자의 권위주의, 교회 세습, 재정 비리, 정치적 편향성 등에 대한 반감을 들 수 있고, 사회적 변화 요인으로 개인주의 확산, 종교 의무감 약화, 무종교 문화 확대 등을 들 수 있으며, 대안적 신앙 형태 도래 요인으로 온라인 예배, 소모임과 개인적 영성 추구의 선호 등을 들 수 있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한국갤럽에 의뢰해서 2022년 2월부터 11월까지 만 19세 이상 성인 9,182명을 대상으로 한 ‘종교생활과 신앙의식 조사’에 의하면, 현재 가나안 교인들의 수는 개신교 전체 인구 771만 명 가운데 29.3%, 226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개신교 전체 인구 3/10이라면, 적지 않은 숫자이다. 이들 가나안 교인이 아직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오래지 않아서 그것마저 포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우리 주변에는 무늬만 기독교인인 사람들이 적지 않다.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지만, 신앙인은 아닌 사람들이다. 이들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지도 않다. 이들은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독교인이라면 자기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지도 않는다. 특히 정치인들이 그러하다. 정치인들은 교회를 자신의 표밭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고, 선거철 전후가 되면 교회 주변에서 어슬렁댄다. 그들은 자신이 “안수집사다”, “권사다”, 또는 “장로다”라고 말하며 자기 소개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비기독교인 정치인들과 다를 바 없이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적 세계관과 정신 위에서 어떤 의미 있는 정책을 개발할 것인지 고민하지도 않고, 비기독교인 정치인들과 구별되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교인 행세나 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욕망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급성장하던 한국교회 교인의 절대 수가 1995년대 이래로 명백히 줄고 있다. 경제적으로 먹고살 만한 데다 문민 정권의 등장으로 사회가 안정화된 것이 원인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2020년 코로나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러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각 교단 총회의 통계를 보면, 지난 10년 동안 주요 교단의 경우 수십만 명의 교인 수가 감소했다. 2025년 10월 1일 〈아이굿뉴스〉 기사를 보면, 장로교 주요 교단의 교인 수를 10년 전(2014년)과 비교할 때, 합동총회는 272만 1,427명에서 –17%인 224만 2,844명, 통합총회는 280만 9,471명에서 –22%인 219만 919명, 고신총회는 46만 1,746명에서 –18%인 37만 6,629명, 기장총회는 28만 4,160명에서 –33%인 18만 8,159명을 기록할 정도로 교세 하락이 심각하다. 그런데 장년과 노인의 감소보다 저출산으로 인한 아동과 MZ세대 청년의 감소가 더욱 심하다. 지금은 교회마다 예산을 줄이며 어느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런 추세라면 향후 20년, 30년이 지나지 않아서 대형교회들의 경우 건물의 유지, 보수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가 될 수 있다. 이는 서구사회의 교회들이 이미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다. 교회의 주축이 되는 장년세대에 청년세대가 더 이상 유입되지 않을 때, “한국교회의 미래는 밝지 않다.”고 할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교회가 세상에서 질타를 당하며 호감을 잃고 신뢰를 잃은 것은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2025년 1월 6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주요 종교에 대한 비개신교인의 호감도는 불교가 52.9%, 천주교가 48.5%, 원불교가 17.9%였고, 개신교가 제일 낮은 14.3%였다. 주요 종교인에 대한 무종교인의 신뢰도 역시 불교인 39.8%, 천주교인 36.4%, 개신교인이 8.9%였다. 2024년 12월 11일 한국리서치의 조사 발표에 의하면, 2024년 한국의 종교 인구는 개신교 20%, 불교 17%, 천주교 11%, 무종교 51%였는데, 종교 인구로 비중이 제일 큰 개신교가 호감도나 신뢰도 측면에서 가장 낮은 상태라면, 분명한 위기이다. 비개신교인들 또는 무종교인들이 한국교회에 호감을 갖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 요인들을 살펴보면, 교회 지도자들의 부끄러운 행태(불투명한 재정 사용과 교회 세습, 성 스캔들), 교인들의 맹목적인 순종과 위선적인 삶, 공격적이고 위압적인 전도 방식, 이웃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 극우 정치적 편향성과 정치권력과의 유착,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이단 사이비로 인한 이미지 추락 등으로 나열되고 있다.
한국교회를 쇠락시키는 원인은 무엇일까
오늘 한국교회 쇠락의 원인은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다양하게 진단할 수 있다. 기독교 신학자로서,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성적인 측면에서 그 원인을 추적하고자 한다.
오늘 한국교회 쇠락의 원인은 근본주의의 오류이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류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육체적 부활, 기적의 사건들에 대한 확신 등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근본주의는 성경의 모든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다가, 전체적으로 읽어야 할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근본주의는 반과학주의, 반지성주의, 율법주의적인 금기에 매몰되어서, 세상의 상식적인 사람들과 정상적으로 소통하는 것이 쉽지 않다. 특히 한국교회의 근본주의는 반공주의, 이슬람포비아, 반동성애의 주장 아래 다른 이들을 마녀사냥하듯 증오하며, 극우 보수주의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결국 한국교회의 근본주의자들은 인종차별, 여성 차별, 성소수자 차별 등의 양태를 띄고, 마치 반인권의 대변자처럼 행동하며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오늘 한국교회 쇠락의 원인은 교회주의의 집착이다. 예수의 관심은 교회를 세우는 데 있지 않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예수 공사역의 일성(一聲)에도, 예수의 가르침에 등장하는 수많은 비유와 가르침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핵심이 되고 있다. 지금 세상을 위해서 존재해야 할 기관인 교회가 세상과 담을 치고 이분법적으로 게토화된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오신 방향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가 1970년대와 1980년대 양적으로 급성장하던 시절을 잊지 못하고, 교회 규모와 교인 수 등에 집착하면서 신앙의 질적 성숙을 외면한 결과이다. 더욱이 누구라도 동일하게 환영해야 하는 교회가 사람을 선택적으로 환영하고, 남성 중심의 비민주적인 위계질서로 변질, 고착화한 것은 한국교회의 자기모순이라 할 수 있다.
오늘 한국교회 쇠락의 원인은 삼박자 구원식의 맘몬이즘과 이중이기주의이다. 삼박자 구원을 주장하는 자들이 초석으로 삼는 성경 구절이 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3서 1:2) 그들은 이 짧은 한 구절을 성경의 핵심인 것처럼 금과옥조처럼 인용해 왔다. 한국교회의 삼박자 구원론은 기복신앙과 물량주의를 조장하고, 구원의 의미를 육체적인 건강과 물질적인 복으로 왜곡하고 있다. 이는 조건부 신앙의 형태로써 물질적으로 어렵거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좌절에 빠뜨릴 수 있고 복에만 집중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약화시킬 수 있다. 삼박자 구원론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사명보다 복을 향한 강렬한 욕망을 부추기고,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다 누린 후 ‘저 세상’에서 천국까지 차지하라는 식이라서 기독교인들의 이중이기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데,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맘몬을 동등한 위치에 두고, 이기심을 부추기며 교인을 끌어모으는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오늘 한국교회 쇠락의 원인은 종교의 자유, 정교분리, 정치참여의 책임에 대한 오해이다. 종교의 자유는 개인이 특정 종교를 선택하고, 그 종교를 자신의 신념에 따라 외부적으로 표현하고 실천할 자유를 의미한다. 또한 국가가 특정 종교를 우대하거나 차별하지 않으며, 국민의 종교 생활을 간섭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종교의 자유는 종교를 갖지 않을 자유와 종교를 자의적으로 간섭하는 국가에 대해서 저항할 자유를 포함하며, 문제가 있는 종교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과 범죄적인 종교 단체에 대해서 국가가 법적으로 제재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정교분리란 국가와 종교 각각의 고유한 역할을 인정하고, 독립적인 관계를 서로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종교와 정치가 결합하면, 특정 종교가 정치권력을 행사하고, 정치권력이 종교를 강제함으로써 사회적 갈등과 혼란을 촉발할 수 있다. 정교분리 아래에서는 국가종교도, 기독교 왕국도 결코 허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불의한 정치권력에 대해서 종교가 침묵하거나 무관심할 수는 없다. 이때 정치참여의 책임이 대두된다. 왕 중의 왕인 하나님을 역사의 주권자로 고백하는 교회라면, 비민주적, 반인권적, 반평화적, 반통일적 정치권력이나 정권에 대해서 예언자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교회 다수는 이승만 문민 독재정권과 그 이후 군사정권, 최근의 검찰정권에 대해서 동조하거나 지지했고, 우파 정권에 대해서 정치적, 정서적 일체성을 드러내며 교회의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을 범해 왔다.
오늘 한국교회 쇠락의 원인은 실천적 무신론자들이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무신론으로는 자연의 위협과 삶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인간의 자율성과 책임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서 초월적 존재가 만들어졌다는 심리학적 무신론이 있다. 종교의 신성한 존재나 초자연적인 신은 사회가 질서유지를 위해서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보는 사회학적 무신론이 있다. 신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과학적 증거가 없으며, 진화론으로 생명의 기원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과학적 무신론이 있다. 신앙을 합리적인 증거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비이성적이며, 종교적 믿음이란 인간의 지적 탐구를 방해할 뿐이라고 보는 철학적 무신론이 있다. 나아가 종교가 인간의 창조적 잠재력을 억누를 뿐 아니라, 인간을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존재로 만든다고 비판하는 신학적 무신론이 있다. 이러한 입장 위에 있는 이론적인 무신론자들은 자신의 이론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거나, 그들 스스로 신적인 체험을 하게 되면, 언제라도 신앙인으로 전환할 가능성을 갖는다. 그러나 자신을 스스로 신앙인이라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사는 코람데오의 삶을 거부하는 실천적인 무신론자들이 제대로 된 신앙인으로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들은 자신을 진실한 신앙인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는 교회는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외면하거나 예수를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사는 실천적인 무신론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이야말로 자기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까지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한 과제는 무엇이어야 할까
지금 한국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처럼, 빛을 더 이상 비추지 못하는 고장난 등대처럼, 사회에서의 건강한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요한계시록〉의 책망 받은 교회들처럼, 처음 사랑을 버렸고, 사이비 이단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으며, 맘몬에 눈이 먼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 한국교회는 아무런 열정도 없이 덥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 가운데 있다. 이제라도 한국교회가 죽도록 충성하는 교회, 가난하지만 영적으로 부유한 교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교회, 생동력이 넘쳐서 주님께 인정받는 교회로 회복하기 위해서 어떤 과제를 설정해야 할까.
한국교회는 회복을 위해서 무엇보다 기독교가 어떤 신앙의 종교인지 그 본질을 인식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 본질대로 살도록 가르쳐야 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만큼 기독교의 본질을 잘 해명할 수 있는 구절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찾아와 은혜를 베푸는 데서 출발하는 은혜의 종교이다. 그리스도인은 범죄한 아담과 카인을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처럼, 세상으로 나아가 은혜를 베푸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기독교는 독생자 스스로 희생을 감수한 사랑의 종교이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 인격을 체화한 작은 예수로서 살아야 한다. 기독교는 믿기만 하면 누구라도 구원에 이르는 만인 평등의 종교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만나도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며 더불어 평화를 만들어야 한다. 기독교는 영생을 소망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종교이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소망하며 다른 이들이 지고 있는 ‘고난의 십자가’를 함께 지며 살아야 한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의 본질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만이 세상의 기쁨이고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다.
한국교회는 회복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생활신앙으로 전환하도록 도전해야 한다. 대다수 교인에게 신앙생활이란 많은 생활 영역 가운데 추가된 또 하나의 생활영역처럼 취급되고 있다. 가정에서의 생활, 직장에서의 생활, 공공영역에서의 생활, 그리고 신앙영역에서의 생활. 기독교 신앙이 이렇게 이해되면, 다른 모든 생활영역으로부터 추방되고, 자기만의 영역 안에 이분법적으로 갇히고 만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신앙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궁극적인 방향이고, 인간의 삶 전체를 추동하는 근원적인 힘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해 주는 삶의 방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신앙을 주일과 평일을 달리해서 적용할 수 없고, 교회 안과 밖을 구분해서 실행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게 작동해야 하고, 또 동일하게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생활신앙이어야 한다. 가정생활에서든, 직장생활에서든, 또는 공공생활에서든, 그리스도인이 처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유감없이 꽃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생활신앙으로서의 기독교 신앙을 교인들에게 가르치며 진정한 신앙인으로 살도록 도전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회복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에서 예수를 따라 사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16:24) 세상에서 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을 따라가는 제자로서 살아야 한다. 나아가 지금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예수의 교훈과 삶을 자기 삶으로 살아냄으로써 작은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성경을 보면, 귀신들도 예수를 알고 떤다. 예수를 아는 것, 단지 믿는다고 말만 하고, 삶이 동반되지 않는 신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수를 알고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동시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를 믿기만 하지 말고, 예수를 따라서 살아야 한다. 신앙의 그리스도만 고백하지 말고, 역사적 예수를 따라서 예수처럼 살아갈 것을 결단해야 한다.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기만 하지 말고, 예수처럼 하나님의 뜻을 실제로 실행하며 살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회복을 위해서 죽은 후 천국에 가겠다는 내세(來世) 신앙으로부터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현세(現世) 신앙으로 바꾸어야 한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 사랑과 정의에 기초한 평화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억압과 착취가 사라지고 빈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있는 모습 그대로 초대받지만, 초대에 응한 자는 죄된 삶의 방식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살아야 하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 개체의 존엄성이 존중되며, 누구라도 사람답게 대접받고 사람답게 대접하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청지기권이 구현되어서 인간과 자연이 공존을 이루며 사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금 여기에서 근사치적으로 실현해야 하는 과제이자 책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막연한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로 도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에 기반한 그분의 뜻과 다스림에 순종함으로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임하도록 하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회복을 위해서 교회 신학에 머물지 말고, 공공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임에 틀림이 없다. 1차적으로 교회와 기독교인의 삶을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신학은 교회와 기독교인만을 위한 신학에 머물지 않고, 공공을 위한 신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세상과 비기독교인의 삶에도 의미를 줄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때문에 신학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의 공공영역 가운데서 기독교인과 교회가 감당해야 할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 어떻게 세상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을지를 질문해야 한다. 교회와 기독교인의 사명은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세상에서 빛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복음〉 5:13, 14)라고 말씀하셨지, “교회의 소금이다. 교회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 하늘이 땅이 되며, 신성이 세속화하는 성육신의 신비를 따라서 세상으로 나아가 공공영역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특히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사회적인 약자들의 목소리를 우선으로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도 기독교 신앙이 사적인 것으로 제한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끝으로 한국교회는 회복을 위해서 이웃 종교들과 대화하는 태도를 지향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다종교사회에서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 드러내는 태도 유형이 다섯 있다. 첫째, 배타적인 태도이다. 다종교 상황의 현실 자체를 부인하고, 다른 종교들을 무시하거나 적대시하는 태도이다. 둘째, 우월적인 태도이다. 다른 종교들도 종교의 일반 범주에 있지만,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에는 비견될 수 없다며 비하하는 태도이다. 셋째, 병존적인 태도이다. 다른 종교들의 존재 자체를 현실적으로 인정하지만,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이유나 여유가 없다는 태도이다. 넷째, 종교통합적인 태도이다. 모든 종교는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본질, 동일한 목표를 지니고 있다는 태도이다. 다섯째, 대화적인 태도이다. 다른 종교들의 입장에서 다른 종교들을 이해하고, 다른 종교들의 진리성에 비추어서 스스로 도전하며, 다른 종교들과 서로 대화하는 가운데 더욱 풍성한 삶에 도달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오늘 우리는 다종교가 공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가 다종교사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면, 평화를 말하는 종교 때문에 평화를 깨뜨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은 “종교 간의 평화 없이 세계평화 없다.”라는 핵심 명제를 내세운 바 있다. 그는 모든 종교가 서로 적대시하거나 배제하지 말고, 대화를 통해서 보편적 윤리를 추구하며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종교들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 우월적인 태도, 병존적인 태도, 종교통합적인 태도를 벗어나서, 이웃 종교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서로 협력하며 공공선을 함께 실현하는 실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교회,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끓는 물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와 같다. 시간이 지나면 ‘어찌되겠지’ 하며 막연한 회복을 기대할 수는 없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경험했던 급성장의 경험에 그대로 안주할 수도 없다. 한국교회는 지금의 무기력하고 부끄러운 현실을 인정하고, 한국교회 초창기 선배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었던 신앙의 순수함과 열정, 사회적 책임을 회복해야 한다. 그들은 척박한 삶의 자리에서 존재 자체를 바꾸었고, 교육, 의료, 복지, 계몽, 독립투쟁 등 모든 분야에서 카이로스의 사건을 만들며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 민족을 선도했다. 이제 한국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직시하고, 환골탈태하는 개혁으로 거듭나야 한다. 40년을 살아온 독수리가 다시 40년을 힘차게 살려면, 자신의 부리와 발톱을 갈고, 깃털을 가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처럼, 환골탈태의 개혁만이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세상이 자정력을 잃고 있는 한국교회를 질타할 때, 한국교회는 변명하거나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려 하기보다는 겸허하게 청종하고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해서 새 부대를 만드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가 위기 가운데 있다고 말하지만, 아직 기회는 있다. 위기란 위험스러운 기회라서 완전히 끝이 났다고 할 때까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중요한 지침으로서 1517년 교회개혁 이후 확립된 교회개혁의 5대 원리가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인다. 오직 성서(Sola Scriptura), 하나님의 영감이 역사하는 성경을 궁극적인 진리로 삼아 ‘한 손에 성서, 한 손에 신문’을 들고 카이로스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오직 은혜(Sola Gratia), 죄인의 괴수와 같은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원수 같은 사람조차 용서하고 포용하는 성숙한 존재로서 살아야 한다. 오직 믿음(Sola Fide), 믿음은 사랑의 행위를 면제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서 살도록 해야 하고, 스스로 작은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창조주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권력이나 부귀영화 등 세상의 어떤 것에도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가 개혁된 교회로서 언제나 개혁하는 교회(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로서의 자기 정체를 제대로 견지할 때, 비로소 세상의 기쁨과 희망이 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씨ᄋᆞᆯ 시론
쇠락하는 한국교회와 회복을 위한 과제
정종훈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교회가 쇠락하고 있다
한국교회 안에 가나안 교인들이 증가하고 있다. 가나안 교인이라고 말하면 무슨 말인지 모를 사람도 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가고자 했던 최종 목적지로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을 상징한다.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가 된다. 가나안 교인이란, 이전에는 교회를 나가던 교인이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더 이상 교회에 나가는 것을 포기한 교인을 희화화해서 지칭하는 말이다. 가나안 신도의 증가 요인은 교회 내부 요인으로 목회자의 권위주의, 교회 세습, 재정 비리, 정치적 편향성 등에 대한 반감을 들 수 있고, 사회적 변화 요인으로 개인주의 확산, 종교 의무감 약화, 무종교 문화 확대 등을 들 수 있으며, 대안적 신앙 형태 도래 요인으로 온라인 예배, 소모임과 개인적 영성 추구의 선호 등을 들 수 있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한국갤럽에 의뢰해서 2022년 2월부터 11월까지 만 19세 이상 성인 9,182명을 대상으로 한 ‘종교생활과 신앙의식 조사’에 의하면, 현재 가나안 교인들의 수는 개신교 전체 인구 771만 명 가운데 29.3%, 226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개신교 전체 인구 3/10이라면, 적지 않은 숫자이다. 이들 가나안 교인이 아직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오래지 않아서 그것마저 포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우리 주변에는 무늬만 기독교인인 사람들이 적지 않다.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지만, 신앙인은 아닌 사람들이다. 이들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지도 않다. 이들은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독교인이라면 자기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지도 않는다. 특히 정치인들이 그러하다. 정치인들은 교회를 자신의 표밭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고, 선거철 전후가 되면 교회 주변에서 어슬렁댄다. 그들은 자신이 “안수집사다”, “권사다”, 또는 “장로다”라고 말하며 자기 소개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비기독교인 정치인들과 다를 바 없이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적 세계관과 정신 위에서 어떤 의미 있는 정책을 개발할 것인지 고민하지도 않고, 비기독교인 정치인들과 구별되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교인 행세나 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욕망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급성장하던 한국교회 교인의 절대 수가 1995년대 이래로 명백히 줄고 있다. 경제적으로 먹고살 만한 데다 문민 정권의 등장으로 사회가 안정화된 것이 원인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2020년 코로나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러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각 교단 총회의 통계를 보면, 지난 10년 동안 주요 교단의 경우 수십만 명의 교인 수가 감소했다. 2025년 10월 1일 〈아이굿뉴스〉 기사를 보면, 장로교 주요 교단의 교인 수를 10년 전(2014년)과 비교할 때, 합동총회는 272만 1,427명에서 –17%인 224만 2,844명, 통합총회는 280만 9,471명에서 –22%인 219만 919명, 고신총회는 46만 1,746명에서 –18%인 37만 6,629명, 기장총회는 28만 4,160명에서 –33%인 18만 8,159명을 기록할 정도로 교세 하락이 심각하다. 그런데 장년과 노인의 감소보다 저출산으로 인한 아동과 MZ세대 청년의 감소가 더욱 심하다. 지금은 교회마다 예산을 줄이며 어느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런 추세라면 향후 20년, 30년이 지나지 않아서 대형교회들의 경우 건물의 유지, 보수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가 될 수 있다. 이는 서구사회의 교회들이 이미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다. 교회의 주축이 되는 장년세대에 청년세대가 더 이상 유입되지 않을 때, “한국교회의 미래는 밝지 않다.”고 할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교회가 세상에서 질타를 당하며 호감을 잃고 신뢰를 잃은 것은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2025년 1월 6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주요 종교에 대한 비개신교인의 호감도는 불교가 52.9%, 천주교가 48.5%, 원불교가 17.9%였고, 개신교가 제일 낮은 14.3%였다. 주요 종교인에 대한 무종교인의 신뢰도 역시 불교인 39.8%, 천주교인 36.4%, 개신교인이 8.9%였다. 2024년 12월 11일 한국리서치의 조사 발표에 의하면, 2024년 한국의 종교 인구는 개신교 20%, 불교 17%, 천주교 11%, 무종교 51%였는데, 종교 인구로 비중이 제일 큰 개신교가 호감도나 신뢰도 측면에서 가장 낮은 상태라면, 분명한 위기이다. 비개신교인들 또는 무종교인들이 한국교회에 호감을 갖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 요인들을 살펴보면, 교회 지도자들의 부끄러운 행태(불투명한 재정 사용과 교회 세습, 성 스캔들), 교인들의 맹목적인 순종과 위선적인 삶, 공격적이고 위압적인 전도 방식, 이웃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 극우 정치적 편향성과 정치권력과의 유착,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이단 사이비로 인한 이미지 추락 등으로 나열되고 있다.
한국교회를 쇠락시키는 원인은 무엇일까
오늘 한국교회 쇠락의 원인은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다양하게 진단할 수 있다. 기독교 신학자로서,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성적인 측면에서 그 원인을 추적하고자 한다.
오늘 한국교회 쇠락의 원인은 근본주의의 오류이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류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육체적 부활, 기적의 사건들에 대한 확신 등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근본주의는 성경의 모든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다가, 전체적으로 읽어야 할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근본주의는 반과학주의, 반지성주의, 율법주의적인 금기에 매몰되어서, 세상의 상식적인 사람들과 정상적으로 소통하는 것이 쉽지 않다. 특히 한국교회의 근본주의는 반공주의, 이슬람포비아, 반동성애의 주장 아래 다른 이들을 마녀사냥하듯 증오하며, 극우 보수주의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결국 한국교회의 근본주의자들은 인종차별, 여성 차별, 성소수자 차별 등의 양태를 띄고, 마치 반인권의 대변자처럼 행동하며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오늘 한국교회 쇠락의 원인은 교회주의의 집착이다. 예수의 관심은 교회를 세우는 데 있지 않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예수 공사역의 일성(一聲)에도, 예수의 가르침에 등장하는 수많은 비유와 가르침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핵심이 되고 있다. 지금 세상을 위해서 존재해야 할 기관인 교회가 세상과 담을 치고 이분법적으로 게토화된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오신 방향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가 1970년대와 1980년대 양적으로 급성장하던 시절을 잊지 못하고, 교회 규모와 교인 수 등에 집착하면서 신앙의 질적 성숙을 외면한 결과이다. 더욱이 누구라도 동일하게 환영해야 하는 교회가 사람을 선택적으로 환영하고, 남성 중심의 비민주적인 위계질서로 변질, 고착화한 것은 한국교회의 자기모순이라 할 수 있다.
오늘 한국교회 쇠락의 원인은 삼박자 구원식의 맘몬이즘과 이중이기주의이다. 삼박자 구원을 주장하는 자들이 초석으로 삼는 성경 구절이 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3서 1:2) 그들은 이 짧은 한 구절을 성경의 핵심인 것처럼 금과옥조처럼 인용해 왔다. 한국교회의 삼박자 구원론은 기복신앙과 물량주의를 조장하고, 구원의 의미를 육체적인 건강과 물질적인 복으로 왜곡하고 있다. 이는 조건부 신앙의 형태로써 물질적으로 어렵거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좌절에 빠뜨릴 수 있고 복에만 집중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약화시킬 수 있다. 삼박자 구원론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사명보다 복을 향한 강렬한 욕망을 부추기고,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다 누린 후 ‘저 세상’에서 천국까지 차지하라는 식이라서 기독교인들의 이중이기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데,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맘몬을 동등한 위치에 두고, 이기심을 부추기며 교인을 끌어모으는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오늘 한국교회 쇠락의 원인은 종교의 자유, 정교분리, 정치참여의 책임에 대한 오해이다. 종교의 자유는 개인이 특정 종교를 선택하고, 그 종교를 자신의 신념에 따라 외부적으로 표현하고 실천할 자유를 의미한다. 또한 국가가 특정 종교를 우대하거나 차별하지 않으며, 국민의 종교 생활을 간섭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종교의 자유는 종교를 갖지 않을 자유와 종교를 자의적으로 간섭하는 국가에 대해서 저항할 자유를 포함하며, 문제가 있는 종교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과 범죄적인 종교 단체에 대해서 국가가 법적으로 제재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정교분리란 국가와 종교 각각의 고유한 역할을 인정하고, 독립적인 관계를 서로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종교와 정치가 결합하면, 특정 종교가 정치권력을 행사하고, 정치권력이 종교를 강제함으로써 사회적 갈등과 혼란을 촉발할 수 있다. 정교분리 아래에서는 국가종교도, 기독교 왕국도 결코 허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불의한 정치권력에 대해서 종교가 침묵하거나 무관심할 수는 없다. 이때 정치참여의 책임이 대두된다. 왕 중의 왕인 하나님을 역사의 주권자로 고백하는 교회라면, 비민주적, 반인권적, 반평화적, 반통일적 정치권력이나 정권에 대해서 예언자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교회 다수는 이승만 문민 독재정권과 그 이후 군사정권, 최근의 검찰정권에 대해서 동조하거나 지지했고, 우파 정권에 대해서 정치적, 정서적 일체성을 드러내며 교회의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을 범해 왔다.
오늘 한국교회 쇠락의 원인은 실천적 무신론자들이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무신론으로는 자연의 위협과 삶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인간의 자율성과 책임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서 초월적 존재가 만들어졌다는 심리학적 무신론이 있다. 종교의 신성한 존재나 초자연적인 신은 사회가 질서유지를 위해서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보는 사회학적 무신론이 있다. 신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과학적 증거가 없으며, 진화론으로 생명의 기원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과학적 무신론이 있다. 신앙을 합리적인 증거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비이성적이며, 종교적 믿음이란 인간의 지적 탐구를 방해할 뿐이라고 보는 철학적 무신론이 있다. 나아가 종교가 인간의 창조적 잠재력을 억누를 뿐 아니라, 인간을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존재로 만든다고 비판하는 신학적 무신론이 있다. 이러한 입장 위에 있는 이론적인 무신론자들은 자신의 이론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거나, 그들 스스로 신적인 체험을 하게 되면, 언제라도 신앙인으로 전환할 가능성을 갖는다. 그러나 자신을 스스로 신앙인이라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사는 코람데오의 삶을 거부하는 실천적인 무신론자들이 제대로 된 신앙인으로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들은 자신을 진실한 신앙인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는 교회는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외면하거나 예수를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사는 실천적인 무신론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이야말로 자기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까지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한 과제는 무엇이어야 할까
지금 한국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처럼, 빛을 더 이상 비추지 못하는 고장난 등대처럼, 사회에서의 건강한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요한계시록〉의 책망 받은 교회들처럼, 처음 사랑을 버렸고, 사이비 이단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으며, 맘몬에 눈이 먼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 한국교회는 아무런 열정도 없이 덥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 가운데 있다. 이제라도 한국교회가 죽도록 충성하는 교회, 가난하지만 영적으로 부유한 교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교회, 생동력이 넘쳐서 주님께 인정받는 교회로 회복하기 위해서 어떤 과제를 설정해야 할까.
한국교회는 회복을 위해서 무엇보다 기독교가 어떤 신앙의 종교인지 그 본질을 인식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 본질대로 살도록 가르쳐야 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만큼 기독교의 본질을 잘 해명할 수 있는 구절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찾아와 은혜를 베푸는 데서 출발하는 은혜의 종교이다. 그리스도인은 범죄한 아담과 카인을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처럼, 세상으로 나아가 은혜를 베푸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기독교는 독생자 스스로 희생을 감수한 사랑의 종교이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 인격을 체화한 작은 예수로서 살아야 한다. 기독교는 믿기만 하면 누구라도 구원에 이르는 만인 평등의 종교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만나도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며 더불어 평화를 만들어야 한다. 기독교는 영생을 소망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종교이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소망하며 다른 이들이 지고 있는 ‘고난의 십자가’를 함께 지며 살아야 한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의 본질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만이 세상의 기쁨이고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다.
한국교회는 회복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생활신앙으로 전환하도록 도전해야 한다. 대다수 교인에게 신앙생활이란 많은 생활 영역 가운데 추가된 또 하나의 생활영역처럼 취급되고 있다. 가정에서의 생활, 직장에서의 생활, 공공영역에서의 생활, 그리고 신앙영역에서의 생활. 기독교 신앙이 이렇게 이해되면, 다른 모든 생활영역으로부터 추방되고, 자기만의 영역 안에 이분법적으로 갇히고 만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신앙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궁극적인 방향이고, 인간의 삶 전체를 추동하는 근원적인 힘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해 주는 삶의 방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신앙을 주일과 평일을 달리해서 적용할 수 없고, 교회 안과 밖을 구분해서 실행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게 작동해야 하고, 또 동일하게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생활신앙이어야 한다. 가정생활에서든, 직장생활에서든, 또는 공공생활에서든, 그리스도인이 처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유감없이 꽃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생활신앙으로서의 기독교 신앙을 교인들에게 가르치며 진정한 신앙인으로 살도록 도전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회복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에서 예수를 따라 사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16:24) 세상에서 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을 따라가는 제자로서 살아야 한다. 나아가 지금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예수의 교훈과 삶을 자기 삶으로 살아냄으로써 작은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성경을 보면, 귀신들도 예수를 알고 떤다. 예수를 아는 것, 단지 믿는다고 말만 하고, 삶이 동반되지 않는 신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수를 알고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동시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를 믿기만 하지 말고, 예수를 따라서 살아야 한다. 신앙의 그리스도만 고백하지 말고, 역사적 예수를 따라서 예수처럼 살아갈 것을 결단해야 한다.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기만 하지 말고, 예수처럼 하나님의 뜻을 실제로 실행하며 살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회복을 위해서 죽은 후 천국에 가겠다는 내세(來世) 신앙으로부터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현세(現世) 신앙으로 바꾸어야 한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 사랑과 정의에 기초한 평화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억압과 착취가 사라지고 빈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있는 모습 그대로 초대받지만, 초대에 응한 자는 죄된 삶의 방식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살아야 하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 개체의 존엄성이 존중되며, 누구라도 사람답게 대접받고 사람답게 대접하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청지기권이 구현되어서 인간과 자연이 공존을 이루며 사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금 여기에서 근사치적으로 실현해야 하는 과제이자 책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막연한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로 도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에 기반한 그분의 뜻과 다스림에 순종함으로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임하도록 하는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회복을 위해서 교회 신학에 머물지 말고, 공공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임에 틀림이 없다. 1차적으로 교회와 기독교인의 삶을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신학은 교회와 기독교인만을 위한 신학에 머물지 않고, 공공을 위한 신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세상과 비기독교인의 삶에도 의미를 줄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때문에 신학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의 공공영역 가운데서 기독교인과 교회가 감당해야 할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 어떻게 세상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을지를 질문해야 한다. 교회와 기독교인의 사명은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세상에서 빛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복음〉 5:13, 14)라고 말씀하셨지, “교회의 소금이다. 교회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 하늘이 땅이 되며, 신성이 세속화하는 성육신의 신비를 따라서 세상으로 나아가 공공영역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특히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사회적인 약자들의 목소리를 우선으로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도 기독교 신앙이 사적인 것으로 제한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끝으로 한국교회는 회복을 위해서 이웃 종교들과 대화하는 태도를 지향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다종교사회에서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 드러내는 태도 유형이 다섯 있다. 첫째, 배타적인 태도이다. 다종교 상황의 현실 자체를 부인하고, 다른 종교들을 무시하거나 적대시하는 태도이다. 둘째, 우월적인 태도이다. 다른 종교들도 종교의 일반 범주에 있지만,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에는 비견될 수 없다며 비하하는 태도이다. 셋째, 병존적인 태도이다. 다른 종교들의 존재 자체를 현실적으로 인정하지만,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이유나 여유가 없다는 태도이다. 넷째, 종교통합적인 태도이다. 모든 종교는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본질, 동일한 목표를 지니고 있다는 태도이다. 다섯째, 대화적인 태도이다. 다른 종교들의 입장에서 다른 종교들을 이해하고, 다른 종교들의 진리성에 비추어서 스스로 도전하며, 다른 종교들과 서로 대화하는 가운데 더욱 풍성한 삶에 도달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오늘 우리는 다종교가 공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가 다종교사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면, 평화를 말하는 종교 때문에 평화를 깨뜨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은 “종교 간의 평화 없이 세계평화 없다.”라는 핵심 명제를 내세운 바 있다. 그는 모든 종교가 서로 적대시하거나 배제하지 말고, 대화를 통해서 보편적 윤리를 추구하며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종교들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 우월적인 태도, 병존적인 태도, 종교통합적인 태도를 벗어나서, 이웃 종교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서로 협력하며 공공선을 함께 실현하는 실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교회,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끓는 물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와 같다. 시간이 지나면 ‘어찌되겠지’ 하며 막연한 회복을 기대할 수는 없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경험했던 급성장의 경험에 그대로 안주할 수도 없다. 한국교회는 지금의 무기력하고 부끄러운 현실을 인정하고, 한국교회 초창기 선배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었던 신앙의 순수함과 열정, 사회적 책임을 회복해야 한다. 그들은 척박한 삶의 자리에서 존재 자체를 바꾸었고, 교육, 의료, 복지, 계몽, 독립투쟁 등 모든 분야에서 카이로스의 사건을 만들며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 민족을 선도했다. 이제 한국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직시하고, 환골탈태하는 개혁으로 거듭나야 한다. 40년을 살아온 독수리가 다시 40년을 힘차게 살려면, 자신의 부리와 발톱을 갈고, 깃털을 가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처럼, 환골탈태의 개혁만이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세상이 자정력을 잃고 있는 한국교회를 질타할 때, 한국교회는 변명하거나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려 하기보다는 겸허하게 청종하고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해서 새 부대를 만드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가 위기 가운데 있다고 말하지만, 아직 기회는 있다. 위기란 위험스러운 기회라서 완전히 끝이 났다고 할 때까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중요한 지침으로서 1517년 교회개혁 이후 확립된 교회개혁의 5대 원리가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인다. 오직 성서(Sola Scriptura), 하나님의 영감이 역사하는 성경을 궁극적인 진리로 삼아 ‘한 손에 성서, 한 손에 신문’을 들고 카이로스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오직 은혜(Sola Gratia), 죄인의 괴수와 같은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원수 같은 사람조차 용서하고 포용하는 성숙한 존재로서 살아야 한다. 오직 믿음(Sola Fide), 믿음은 사랑의 행위를 면제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서 살도록 해야 하고, 스스로 작은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창조주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권력이나 부귀영화 등 세상의 어떤 것에도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가 개혁된 교회로서 언제나 개혁하는 교회(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로서의 자기 정체를 제대로 견지할 때, 비로소 세상의 기쁨과 희망이 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