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말한다
여백의 언어로 마주하는 삶
―《여백으로 살아가기―오늘도 이름 없이 빛나는 당신에게》(세움북스, 2025)
김선영
작가


김선영 지음, 여백으로 살아가기(세움북스, 2025) 도서 정보 및 구매는 책 사진 클릭
여백
책의 제목이 《여백으로 살아가기》입니다. 독자들이 제목에 대하여 질문을 합니다. 제목을 왜 ‘여백으로 살아가기’로 정했는가를 궁금해 합니다.
이 책은 대부분 전업주부로 살아갔던 제 삶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 해석의 키워드를 한 단어로 말한다면 ‘여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여백을 빈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해석한 여백은 주위를 빛나게 하는 공간입니다. 사진 찍기는 제 취미 중 하나입니다. 나들이를 나가면 인물 사진을 찍을 기회가 많아지는데, 인물 사진을 잘 찍는 방법 중 하나는 주인공을 잘 받쳐줄 배경을 잘 찾는 것입니다. 배경이 인물을 돋보이게 합니다. 제가 바라본 여백은 바로 이런 배경을 말합니다.
도종환 시인의 〈여백〉이란 시의 일부만 읽어봐도 그 느낌이 확연해집니다.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 나무 뒤에서 말없이 /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 다 보여주는 /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전업주부는 우리 사회에서 대단한 가치를 부여받지 못합니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마치 허공처럼 존재하는 것 같지만, 주위를 밝히는 존재가 전업주부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백의 자리에서 존재, 이것이 전업주부를 바라보는 저의 시선입니다.
일상
일상은 지루합니다. 지루함은 어느덧 삶의 자리에 공허함을 초청하곤 합니다.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삶의 의미를 대단한 것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일상이 주는 신비를 자주 놓쳐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그 일상은 가장 가까이에서 신의 손길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장소입니다.
제가 일상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인도한 시가 있습니다. 임길택 시인의 〈엄마 무릎〉입니다. 한 아이가 엄마 무릎에 누워 있습니다. 엄마는 아이의 귀이지를 파줍니다. 아이는 스르르 잠이 듭니다. 저도 어렸을 때 이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햇볕이 온화하게 내리쬐는 봄날, 집 마당에 있는 평상에 누워 엄마가 귀이지를 파주시던 기억. 〈엄마 무릎〉은 그때의 기억을 소환했습니다. 시인의 프레임에 끼워지자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허드레 같은 나의 일상도 시가 될 수 있구나, 울림이 컸습니다. 이 경험은 저로 하여금 일상을 새롭게 보게 했습니다. 책 속에도 기록한 냉장고 이야기, 가방 빠는 이야기, 빨래를 널고 개키는 이야기, 이런 시간들이 저에게 시처럼 다가오곤 합니다. 일상의 가치는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쳇바퀴 같은 일상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간혹은 김기택 시인의 〈걸레질하는 여자〉 같은 시를 읽으며 영성을 느끼기도 합니다.
걸레질을 하려면 무릎을 꿇어야 한다. / 허리와 머리를 깊이 숙여야 한다. / 엉덩이를 들어야 한다. [중략] 그렇게 그녀는 방과 마루에게 먼지에게 / 매일 오체투지하듯 걸레질을 한다.
시간
독자들이 저의 시간에 대한 해석을 인상 깊게 느꼈다고 하십니다. “시간은 흐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머무르기도 한다”(33쪽)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는 얘길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시간의 발효’라고 이름 붙였는데요. 실제로 저의 경험을 빌려 기록한 것입니다. 전업주부가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은 먹는 시간의 수십 배입니다. 재료를 손질하는 시간이 꽤 깁니다. 대부분 단순 노동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시간을 무용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단순 노동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시간이 흐른다기보다 시간 안에 머물러 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시간의 고요 속에 잠깁니다. 그러면 그 고요 속에서 제 자신과 대화를 합니다. 또는 기도를 합니다. ‘흘러가는 시간’만 의식하다면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느림의 미학을 말하는 이가 있는가 싶지만, 현대적인 시간 개념을 간혹은 무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효용의 시간으로부터 멀어지는 경험은 ‘영원’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의 흐름 속에 두지 않고 영원의 시각으로 통합하여 바라본다면, 지나치게 시간을 수량화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이즈음에서 요즘 제가 의미 있게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겠습니다.
시간을 사는 우리의 마음을 신의 마음처럼 ‘영원’을 살도록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로 끝없이 분산되어 흘러가면서 그 안에서 사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분산시켜 단지 흘러가고 말게 하는 것, 그래서 값어치 없는 것,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시간의 파괴성’을 극복하고 영원한 것, 그래서 값어치 있는 것,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자는 것이지요.―《신, 인문학으로 읽는 서양문명 이야기》, 333쪽.
음식과 밥상
제 책의 챕터 2장은 모두 음식에 관한 글입니다. 나이 들수록 바깥 음식보다 집밥이 좋아집니다. 전업주부가 이웃을 가장 손쉽게 섬길 수 있는 방법도 집밥을 대접하는 일입니다. 사회적 대의를 추구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일은 못하더라도 손수 지은 밥으로 이웃을 섬길 수는 있습니다.
밥상은 누구나 평등한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살리는 자리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누가복음〉 7:34)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진 비호감 별명 중 하나지요. 저는 이 별명을 참 좋아합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음식과 포도주가 차려진 밥상이 있었을 거란 상상을 합니다. 예수님도 먹는 일은 무척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밥상 앞에서 우리는 긴장을 해체합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밥상 앞에서는 조금 여유 있는 인심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습니다.
밥상에서 예수님의 사람을 살리는 일이 빈번했을 것이라 상상합니다.
이런 일의 대표적인 사례가 디베랴 바닷가에서 일어나지요. 부활하신 주님이 그분을 배신한 제자들과 만나는 장면. 다시 어부로 돌아간 일곱 제자,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그들 앞에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 장면을 〈예수의 식탁 이야기〉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가 내민 것은 조촐한 아침상이다. 예수는 ‘왜’를 묻지 않는다. [중략] 어떤 말도 변명이 되는 순간, 어떤 말로도 스스로를 입증할 수 없는 순간, 어떤 말로도 마음을 다 설명할 수 없는 순간, 그러한 때에 차려진 따뜻한 한 상은 위로이며 이해이며 말 없는 환대다. [중략] 그것은 떠났던 제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식탁이며 잃었던 생명을 다시 찾게 하는 식탁이다. 그것은 이제야 진정으로 ‘다시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식탁이다.―김호경, 《예수의 식탁 이야기》, 206~207쪽.
예수님이 계신 자리에 먹을 것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저에게는 일종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이 어렵기만 한 제가, 그나마 밥상을 차리는 일은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저항
반칠환 시인의 〈새해 첫 기적〉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황새는 날아서 /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 달팽이는 기어서 / 굼벵이는 굴렀는데 / 한 날 한 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저는 이 시를 세상을 향한 ‘저항의 목소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장과 발전만을 의미 있다고 규정하는 세상, 그래서 경쟁만이 생존 전략인 세상, 큰 것과 주인공만이 가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세상을 향하여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황새와 말, 거북이와 달팽이, 굼벵이, 심지어 제 자리에 있기만 했던 바위마저도 자신만의 속도로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모두 고유함을 덧입고 새해로 골인한 것입니다.
뒤처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자신의 고유함을 미처 발견하지도 못한 채 불안 속에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처한 함정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 함정에 쉽게 빠지지 않으려면 세상의 소리를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다지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단한 것을 주장하거나 격렬한 투쟁은 못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싶습니다. 글을 통해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함을 도구로 살아가도 빛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내 삶에 대한 해석은 타인이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을 해석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빛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향한 저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글을 통해 제 삶을 나름으로 해석했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특별하지 않은 전업주부의 자리를 저의 시야로 해석을 했습니다. 세상에 무의미한 인생은 세상에 없습니다. 제가 제 삶을 ‘여백’이라는 이름표로 해석했듯이, 제 글을 읽는 분들이 나름으로 자신의 삶을 고유하게 해석할 수 있기를……. 이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이 책을 말한다
여백의 언어로 마주하는 삶
―《여백으로 살아가기―오늘도 이름 없이 빛나는 당신에게》(세움북스, 2025)
김선영
작가
김선영 지음, 여백으로 살아가기(세움북스, 2025) 도서 정보 및 구매는 책 사진 클릭
여백
책의 제목이 《여백으로 살아가기》입니다. 독자들이 제목에 대하여 질문을 합니다. 제목을 왜 ‘여백으로 살아가기’로 정했는가를 궁금해 합니다.
이 책은 대부분 전업주부로 살아갔던 제 삶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 해석의 키워드를 한 단어로 말한다면 ‘여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여백을 빈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해석한 여백은 주위를 빛나게 하는 공간입니다. 사진 찍기는 제 취미 중 하나입니다. 나들이를 나가면 인물 사진을 찍을 기회가 많아지는데, 인물 사진을 잘 찍는 방법 중 하나는 주인공을 잘 받쳐줄 배경을 잘 찾는 것입니다. 배경이 인물을 돋보이게 합니다. 제가 바라본 여백은 바로 이런 배경을 말합니다.
도종환 시인의 〈여백〉이란 시의 일부만 읽어봐도 그 느낌이 확연해집니다.
전업주부는 우리 사회에서 대단한 가치를 부여받지 못합니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마치 허공처럼 존재하는 것 같지만, 주위를 밝히는 존재가 전업주부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백의 자리에서 존재, 이것이 전업주부를 바라보는 저의 시선입니다.
일상
일상은 지루합니다. 지루함은 어느덧 삶의 자리에 공허함을 초청하곤 합니다.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삶의 의미를 대단한 것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일상이 주는 신비를 자주 놓쳐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그 일상은 가장 가까이에서 신의 손길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장소입니다.
제가 일상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인도한 시가 있습니다. 임길택 시인의 〈엄마 무릎〉입니다. 한 아이가 엄마 무릎에 누워 있습니다. 엄마는 아이의 귀이지를 파줍니다. 아이는 스르르 잠이 듭니다. 저도 어렸을 때 이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햇볕이 온화하게 내리쬐는 봄날, 집 마당에 있는 평상에 누워 엄마가 귀이지를 파주시던 기억. 〈엄마 무릎〉은 그때의 기억을 소환했습니다. 시인의 프레임에 끼워지자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허드레 같은 나의 일상도 시가 될 수 있구나, 울림이 컸습니다. 이 경험은 저로 하여금 일상을 새롭게 보게 했습니다. 책 속에도 기록한 냉장고 이야기, 가방 빠는 이야기, 빨래를 널고 개키는 이야기, 이런 시간들이 저에게 시처럼 다가오곤 합니다. 일상의 가치는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쳇바퀴 같은 일상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간혹은 김기택 시인의 〈걸레질하는 여자〉 같은 시를 읽으며 영성을 느끼기도 합니다.
시간
독자들이 저의 시간에 대한 해석을 인상 깊게 느꼈다고 하십니다. “시간은 흐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머무르기도 한다”(33쪽)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는 얘길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시간의 발효’라고 이름 붙였는데요. 실제로 저의 경험을 빌려 기록한 것입니다. 전업주부가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은 먹는 시간의 수십 배입니다. 재료를 손질하는 시간이 꽤 깁니다. 대부분 단순 노동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시간을 무용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단순 노동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시간이 흐른다기보다 시간 안에 머물러 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시간의 고요 속에 잠깁니다. 그러면 그 고요 속에서 제 자신과 대화를 합니다. 또는 기도를 합니다. ‘흘러가는 시간’만 의식하다면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느림의 미학을 말하는 이가 있는가 싶지만, 현대적인 시간 개념을 간혹은 무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효용의 시간으로부터 멀어지는 경험은 ‘영원’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의 흐름 속에 두지 않고 영원의 시각으로 통합하여 바라본다면, 지나치게 시간을 수량화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이즈음에서 요즘 제가 의미 있게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겠습니다.
음식과 밥상
제 책의 챕터 2장은 모두 음식에 관한 글입니다. 나이 들수록 바깥 음식보다 집밥이 좋아집니다. 전업주부가 이웃을 가장 손쉽게 섬길 수 있는 방법도 집밥을 대접하는 일입니다. 사회적 대의를 추구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일은 못하더라도 손수 지은 밥으로 이웃을 섬길 수는 있습니다.
밥상은 누구나 평등한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살리는 자리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누가복음〉 7:34)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진 비호감 별명 중 하나지요. 저는 이 별명을 참 좋아합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음식과 포도주가 차려진 밥상이 있었을 거란 상상을 합니다. 예수님도 먹는 일은 무척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밥상 앞에서 우리는 긴장을 해체합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밥상 앞에서는 조금 여유 있는 인심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습니다.
밥상에서 예수님의 사람을 살리는 일이 빈번했을 것이라 상상합니다.
이런 일의 대표적인 사례가 디베랴 바닷가에서 일어나지요. 부활하신 주님이 그분을 배신한 제자들과 만나는 장면. 다시 어부로 돌아간 일곱 제자,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그들 앞에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 장면을 〈예수의 식탁 이야기〉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자리에 먹을 것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저에게는 일종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이 어렵기만 한 제가, 그나마 밥상을 차리는 일은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저항
반칠환 시인의 〈새해 첫 기적〉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시를 세상을 향한 ‘저항의 목소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장과 발전만을 의미 있다고 규정하는 세상, 그래서 경쟁만이 생존 전략인 세상, 큰 것과 주인공만이 가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세상을 향하여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황새와 말, 거북이와 달팽이, 굼벵이, 심지어 제 자리에 있기만 했던 바위마저도 자신만의 속도로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모두 고유함을 덧입고 새해로 골인한 것입니다.
뒤처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자신의 고유함을 미처 발견하지도 못한 채 불안 속에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처한 함정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 함정에 쉽게 빠지지 않으려면 세상의 소리를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다지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단한 것을 주장하거나 격렬한 투쟁은 못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싶습니다. 글을 통해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함을 도구로 살아가도 빛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내 삶에 대한 해석은 타인이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을 해석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빛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향한 저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글을 통해 제 삶을 나름으로 해석했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특별하지 않은 전업주부의 자리를 저의 시야로 해석을 했습니다. 세상에 무의미한 인생은 세상에 없습니다. 제가 제 삶을 ‘여백’이라는 이름표로 해석했듯이, 제 글을 읽는 분들이 나름으로 자신의 삶을 고유하게 해석할 수 있기를……. 이것이 저의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