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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호 근현대 인물 탐구) ‘님학(Nimology)’의 문을 연 만해 한용운 - 조성환

사무국
2026-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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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인물 탐구

 

‘님학(Nimology)’의 문을 연 만해 한용운

  

조성환

원광대 철학과 교수

  

들어가며: 《님의 침묵》 다시 읽기

올해는 《님의 침묵》 간행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님의 침묵》은 만해를 대표하는 저작으로, 그동안 문학연구자들에 의해 방대한 연구가 축적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종래와는 약간 다른 관점에서 《님의 침묵》에 담긴 사상사적 의미를 추적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님’을 한국철학의 중요 개념의 하나로 보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텍스트로서 《님의 침묵》을 독해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님의 침묵》이 한국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자리매김하고, 그것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묻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최근에 시민사회에서 대두되고 있는 이른바 ‘K-사상’ 내지는 ‘K-철학’의 요구에 대한 응답의 일환이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K-사상’ 또는 ‘K-철학’이란 종래에 제도권에서 통용되던 교과서적인 의미에서의 ‘한국철학’과는 다른, 이 시대가 요구하는 현대적이고 글로벌한 문제와 호응할 수 있는 한반도의 철학을 말한다. 한국철학이 K-철학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에 맞는 재해석과 재독해가 요청된다. 이것은 마치 100여 년 전의 조선학 운동가들이 당시의 시대정신인 ‘근대’라는 틀을 사용해서 조선후기 유학을 ‘실학’으로 재해석하고 재독해한 작업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근대라는 틀은 이제 실효성을 상실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탈근대(post-modernism)’가 대안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둘 다 ‘인간중심의 철학’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는 근대를 넘어 인류세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 포스트휴머니즘이 요청되고 있다. 과연 이 시대에 한국철학은, 그중에서도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이 글은 이러한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시론이다.


형이상학적 ‘님’의 탄생

《님의 침묵》이 간행된 해는 1926년이지만 그것이 탈고된 것은 1925년이다. 그런데 이 해에 세간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님의 침묵》 못지않게 획기적인 글이 발표되었다. 그것은 전남 영광 출신의 시조시인 조운이 쓴 〈님에 대하야〉이다. 《님의 침묵》이 탈고된 것이 8월인데, 이 글은 4월에 《조선문단》 제7호에 실렸다. 〈님에 대하야〉는 시나 소설이 아닌 철학적 에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님론(On Nim)’이라고 할 수 있다. 약 6쪽 분량의 짧은 글에서 조운은 획기적인 주장을 하였다. 핵심은 님의 의미를 확장하자는 제안이다. 즉 사랑하는 연인만 님으로 부르지 말고, 예수, 전 인류, 심지어는 우주생명까지도 ‘님’으로 부르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나는 또 이 님이라는 말의 뜻을 더 넓히고자 합니다. 아니 넓히고저 하는 것보다 넓어졌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님이란 군주라거나 부모 형제 친구라거나 이성이라거나 그 연모하는 사람 하나에게만 붙여 부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넓어진 오늘에 있어서는 동포라거나 전 인류를 ‘님’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며, 자기 방향의 목표, 이상의 자리, 동경의 초점, 그리워하는 곳, 또 우주생명의 본체를 ‘님’이라 하며, ‘님’의 품이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조운은 두 가지 주장을 한다. 하나는 님의 뜻을 넓히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유가 ‘우리의 의식이 넓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의미가 확장된 님의 용례로서 동포, 인류, 목표, 이상, 동경, 그리움의 대상, 우주생명의 본체 등을 들고 있다. 여기에서 이상이나 동경 또는 우주생명의 본체는 성리학으로 말하면 ‘리(理)’에 해당된다. 그러나 조운이 말하는 님의 범위는 그보다 더 크다. 즉 리(理)와 같은 추상적 실체나 가치뿐만 아니라 동포나 인류와 같은 구체적 사물(物)까지도 포함된다. 다만 그 사물(物)이 동경과 그리움의 대상이어야 한다.

동경과 그리움은 성리학적 개념으로 바꾸면 리(理)나 기(氣)보다는 ‘정(情)’에 가깝다. 다만 사단칠정과 같은 감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의 “정이 들다”나 “정이 간다”와 같이 주관적인 관심과 지향, 관계맺음 등을 말한다. 그래서 님은 리와 기의 어느 한쪽에 국한되지 않고 양자를 넘나들며 사용될 수 있는데, 다만 거기에는 주관적인 ‘관계 지향성’, 즉 ‘정’이 담겨있어야 한다.

당시는 근대 문명의 수용에 의해 동아시아인들의 의식 세계가 ‘중화’에서 ‘세계’로, ‘도학’에서 ‘서학’으로, ‘삼교’(유교, 불교, 도교)에서 ‘백교’(모든 종교)로 확장되는 시기였다. 따라서 이에 걸맞게 우리의 언어도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조운의 주장이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지향하는 가치와 대상’의 범위가 넓어져야 하고, 그에 맞는 개념이 발명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조운은 그것을 ‘님’에서 찾았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조운은 ‘님’의 대상을 종교적 차원에까지 확장한다.


원문은 모르되 “아버지여 만일 질기시거든 내게서 이 잔을 떠나게 하소서”(라고) 한 예수의 감람산 기도의 일정과,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한 예수의 최후의 말을 나로 하여금 번역케 한다면, “님이여 만일 질기시거든”, “님이여 내 영혼을 님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로 읽겠습니다. 노자의 태상경과 석존의 용화와 극락이 님의 나라며 님의 따뜻한 품안일 것이올시다.


여기에서 조운은 신(God), 노자, 석존(붓다)을 모두 ‘님’으로 바꿔 부를 것을 제안한다. 주지하다시피 노자나 붓다는 공자와 더불어 전통시대에 ‘성인’으로 불리던 존재이다. 그런데 조운은 이들을 성인이 아닌 ‘님’으로 부르자고 하는 것이다. ‘성인’이 중국사상의 맥락에서 나온 개념이라면, ‘(확장된) 님’은 한국사상의 맥락에서 탄생한 개념이다. 그리고 ‘확장된 님’은 리와 같은 철학적 대상이나, 신과 같은 종교적 대상을 아우르고 있고, 그런 점에서 전통적인 ‘성인’ 개념과도 다르다. 즉 철학이든 종교이든, 혹은 추상적 가치이든 구체적 인물이든 할 것 없이, 자신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대상은 모두 ‘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과 근대가 만나는 접점에서 일어난 현상이다. 즉 근대문명의 수용으로 인해 넓혀진 인식 세계를 토착적 언어(=‘님’)를 사용하여 표현하고자 한 데서 생긴 개념의 확장이다. 이러한 변화를 이해해야 《님의 침묵》에 나오는 ‘님’의 사상사적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님의 침묵》은 조운이 제안한 ‘확장된 님’ 개념을, 달리 말하면 철학화되고 종교화된 님 개념을, ‘시’라는 형식을 통해서 표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님의 님: 메타적 님

《님의 침묵》에는 서문에 해당하는 〈군말〉이 달려 있는데, 거기에는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는 유명한 ‘님’의 정의(定義)가 나온다. 여기에서 ‘기루다’는 ‘그리워하다’는 뜻이고, “님만 님이 아니라”는 종래에 연인과 같이 한정된 대상에만 사용되었던 ‘님’의 외연이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만해의 ‘님’의 정의는 조운의 그것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런데 만해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확장된 님의 사례로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후자, 즉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는 조운이 제안한 님의 용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조운은 ‘동경의 대상’이나 ‘우주생명의 본체’도 님으로 부를 것을 제안했는데, 칸트가 평생 동경한 대상은 철학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전자의 용례이다.

“석가의 님은 중생이다”는 정의상으로는 조운의 그것과 다르지 않지만, 그리워하는 주체가 일반인이 아니라 ‘석가’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즉 조운이 ‘그리움’의 대상으로 들었던 석가를 반대로 그리움의 주체로 설정하고, 그것이 그리워하는 대상을 ‘중생’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주객이 전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운에게서는 석가가 중생의 님, 즉 중생이 그리워하는 대상이었다면, 만해에게 있어서는 중생이 석가의 님, 즉 석가가 그리워하는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해에게 있어서는 양방향의 님 개념이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즉 조운이 말하는 일반인이 동경하는 님 개념도 물론 있지만, 조운에게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던 초월적 존재가 그리워하는 ‘님’ 개념도 등장하고 있다. 확실히 불교나 그리스도교에서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고 할 때, 부처님이나 하느님에게 있어서 ‘님’은 ‘인간’ 또는 ‘중생’, 혹은 ‘피조물’ 전체가 될 것이다. 이러한 만해식 님 개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님의 님’이다.


그것이 참말인가요. 님이여, 속임없이 말씀해 주셔요.

당신을 나에게서 빼앗아 간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그대는 님이 없다”고 하였다지요. [……]

그러면 나는 그것을 변명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의 생명의 꽃가지를 있는 대로 꺾어서 화환을 만들어 당신의 목에 걸고, “이것이 님의 님이라”고 소리쳐 말하겠습니다. [……]

많지 않은 나의 피를 더운 눈물에 섞어서 피에 목마른 그들의 칼에 뿌리고 “이것이 님의 님이라”고 울음 섞어서 말하겠습니다.


〈참말인가요〉라는 제목의 이 시에는 두 가지 차원의 님이 등장하고 있다. 하나는 “님이여 속임없이 말씀해 주셔요”나 “그대는 님이 없다”고 할 때의 님이다. 여기에서의 님은 부처님이나 하느님과 같은 초월적 존재, 또는 독립이나 자유와 같은 잃어버린 가치 등을 상징할 것이다. 반면에 “님의 님”은 그런 존재가 지향하는 가치로서의 님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 앞서 〈군말〉에 나온 “석가의 님은 중생이다”는 말을 참고하면, 붓다에게 있어서의 님은 ‘중생’이 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의 꽃가지를 꺾어서 화환을 만드는 행위”는 “중생이 님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종교적으로 보면 순교에 해당하고, 당시 역사적 상황으로 보면 독립지사의 순국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순교이든 순국이든 모두 ‘생명을 바친다’는 점에 있어서는 공통적이다. 그래서 ‘님의 님’은 결국 ‘중생’ 또는 ‘중생의 생명’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김지하가 동학과 만해의 님을 모두 “생명의 님”이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비록 ‘님의 님’을 언급하거나 분석하지는 않았지만, 만해의 님 개념에는 조운이 말한 ‘우주생명’과 같은 형이상학적 의미도 들어있음을 통찰한 것이다. 김지하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만해가 말한 ‘기루다’에는 ‘기르다(=생성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고, 그 대상은 ‘사물’에까지 확대된다고 하였다.(김지하, 〈모심과 살림의 미학〉, 장일순 외, 《모심 侍》, 모심과살림연구소, 2005) 즉 님의 의미와 범위를 한 차원 더 확장시킨 것이다. 김지하가 이런 해석을 하게 된 배경은 당시에 ‘생태위기’라고 하는 위기의식이 대두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지하가 제안한 ‘사물님’ 개념은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휴먼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후변화와 생태위기의 도래로 종래에 인간에게만 적용하던 가치들을 인간 이외의 존재에까지 확장해서 적용하고자 하는 것이 포스트휴머니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비서구 지역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다. 근대화되기 이전의 토착적 세계관에서는 사물의 세계에 대해서도 공감과 유대를 느끼는 ‘포스트휴먼적 님의 정서’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조선후기의 유씨부인이 썼다고 하는 〈조침문(弔針文)〉이 그러한 예이다. 조문 형식의 이 에세이에서 유씨부인은 평생을 함께한 바늘을 부러뜨린 자신을 자책하면서, 바늘을 향해 애도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바늘을 향한 이러한 ‘정’은 김지하가 말한 ‘사물로 확장된 님’의 사례에 다름 아니다. 바늘과의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즉 정이 깊어짐에 따라 바늘이 단순한 사물(物)이 아닌 님으로 다가온 것이다.


맺으며: 님학 시론

신학, 리학, 기학, 심학, …… 이 범주들은 신이나 리, 또는 기나 심을 탐구하는 학문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님의 철학적 또는 종교적 의미를 탐구하는 학문은 ‘님학’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해의 《님의 침묵》은 ‘님학’의 텍스트로서 더할 나위 없다. 님의 용례와 의미가 다채롭고 풍부하게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님’은 합일의 대상이다. 만해의 〈하나가 되어 주셔요〉는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주는 시이다.


님이여, 나의 마음을 가져가려거든 마음을 가진 나에게서 가져가세요.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님에게서 하나가 되게 하셔요.

그렇지 아니하거든 나에게 고통만을 주지 마시고 님의 마음을 다 주셔요.

그리고 마음을 가진 님에게서 나에게 주셔요.

그래서 님으로 하여금 나에게서 하나가 되게 하셔요.

그렇지 아니하거든 나의 마음을 돌려보내 주셔요.

그러고 나에게 고통을 주셔요.

그러면 나는 나의 마음을 가지고 님의 주시는 고통을 사랑하겠습니다.


여기에서 ‘님’은 화자가 그것과 일체가 되고 싶은 대상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그 님과 일체가 되고 싶은 마음을 기도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주요한은 《님의 침묵》을 ‘님을 향한 종교적인 사랑을 노래한 기도시’라고 해석하였다(주요한, 〈愛의 기도, 기도의 愛(上)〉, 《동아일보》 1926. 6. 22. 3면). 󰡔님의 침묵》은 기도시이자 동시에 구도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시련을 견디는 ‘수양’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고 ‘속박’을 즐겨야 한다. 그래서 만해의 〈선사의 설법〉에서는 님에 대한 속박이 오히려 해탈의 길이라고까지 말한다.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해탈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은 님의 사랑의 줄이 약할까 봐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드렸습니다.


전통시대에 동아시아에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는 사상이 있었다. 여기에서는 ‘하늘’이 하나가 되고 싶은 대상이 된다. 즉 하늘이 님이 되는 것이다. 님학의 관점에서는 ‘하늘님’ 개념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성리학으로 오면 ‘천(天)’이 ‘리(理)’로 해석되어 리와의 합일, 즉 ‘합리(合理)’가 새로운 이상으로 자리잡는다. 그래서 김형효는 〈퇴계의 사상과 자연신학적 해석〉에서 퇴계의 ‘리’를 ‘님’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퇴계 철학에서 ‘경(敬)’이 중시되었던 이유를 ‘님’(=리)은 헌신과 경배의 대상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둘째, ‘님’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개념이기도 하다. 즉 자신과 ‘깊은 관계’에 있는 대상을 지칭하는 개념이 님이다. 그리고 관계가 깊어지면서 정서적 유대 관계가 형성되면 ‘정이 들었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님은 ‘정든 대상’을 가리킨다. 그 대상은 사람이나 애완견과 같은 생명체뿐만 아니라 고향이나 조국과 같은 무생물이 될 수도 있다. 최남선은 1910년에 쓴 〈태백산부〉에서 한반도를 ‘님’에 비유하였다.(“태백아 우리 님아, 나 간다고 슬퍼 마라”) 비슷한 맥락에서 어린이 동화책에 나오는 ‘햇님’이나 ‘달님’과 같은 표현은 해나 달을 단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나 나와는 무관한 객관적 자연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정서적 유대 관계에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인식론적 태도를 나타낸다. 김지하가 ‘님’의 범위를 사물로까지 확장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한편 ‘지구학’을 제창한 토마스 베리는 《지구의 꿈》(1988)에서 “근대인들은 지구와 만물과의 친교를 상실하였다”고 갈파하였다. 이것을 님학적으로 말하면 “근대인들은 지구와 만물을 더 이상 님으로 대하지 않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친교(Communion)’는 서로가 ‘님의 관계’에 있음을 나타내는 가톨릭적 표현이다. 인류학자 어빙 할로웰은 카나다의 오지브웨(Ojibwe)족을 관찰하다가 만물에 ‘person’이라는 접미사를 붙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령 rock-person, stone-person같이 말이다. 여기에서의 ‘person’은 사물을 일종의 인격체나 행위자로 간주하는 태도를 나타내고, 그런 점에서 ‘님’ 개념과 상통한다. 다만 person과 달리 ‘님’은 단독으로 쓰여서 모든 존재를 지칭할 수 있는 일반명사로까지 발전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영어의 being이나 thing과 다른 점은 ‘님’으로 불리는 대상은 가치, 관계, 정서 등이 동반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님에 대한 동경이 좌절되거나 님과의 관계가 끝났을 때 “‘한’이 맺힌다.” 반대로 님과 함께 하거나 님에게 다가갈 때 ‘흥’이 나고 신명이 난다.

마지막으로 ‘님’은 한국인의 삶의 태도를 나타낸다. 퇴계가 유학자들의 ‘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생 동안 ‘리’와 ‘성인’을 님으로 모시며 살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만해가 오늘날 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님을 동경하고 그리워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동경하는 지고한 존재나 숭고한 가치를 님으로 받들며 살아가는 가운데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사람들에 의해서 님으로 받들여지는 것이다. 이것이 ‘님의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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