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ᄋᆞᆯ 시론
이재명 정권에서 노동운동의 갈 길은 어디인가
전지윤
사회운동가, 《내란과 광장, 끝나지 않은 이야기》 저자
이재명 대통령은 얼마 전 창원에서 열린 ‘타운홀 미팅’에서 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열심히 일해도 격차가 크고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토로였다.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의 답변은 다소 놀라웠다. “해결 방법은 뭐냐, 노동운동을 열심히 하는 거예요. 노동자들은 약자이기 때문에 혼자서는 안 됩니다. 힘을 모아야 노동자의 지위가 올라가고, 사용자와 힘의 균형을 맞춰 정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어요. 정부도 과거처럼 부당한 탄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발언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 이 발언이 나온 장소와 청중이 상징적이다. 창원은 한국 제조업의 핵심 거점이자, 대기업과 중소 하청업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대표적 산업 도시이다. 타운홀 미팅의 참가자들 중에서도 창원 산업 단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노동자,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수백 명이 모인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 나라 국가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이 특히 미조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를 겨냥해 ‘노동자는 단결해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 것은 결코 가벼운 장면이 아니다. 이는 단순하거나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위험한 말’, ‘불편한 말’로 취급되어 왔던 노동운동의 정당성을 최고 권력자가 공개적으로 인정한 장면이다.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조직되고 투쟁해야만 임금과 노동 조건이 개선된다는 사실은 노동운동의 기본 명제이지만, 그동안 정부 책임자의 입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었던 말이다. 특히 “정부도 과거처럼 부당한 탄압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언급은, 그동안 국가 권력이 노동운동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떠올리면 더 의미심장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이 발언은 현장에 있던 노동자들뿐 아니라, 언론 보도와 SNS, 영상 공유를 통해 이를 접한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당시 현장을 촬영한 영상을 보면, 대통령의 발언이 끝나자 곳곳에서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온다. 이는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감정과 기대가 순간적으로 표출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노조로 조직돼 있지 않거나 정치적 의식이 상대적으로 낮은 미조직 노동자일수록 ‘대통령도 이렇게 말한다’는 사실은 큰 심리적 영향을 미친다. ‘노동운동을 해도 되는구나’, ‘노조를 만들거나 가입하는 것이 정당하고 필요한 일이구나’라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미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에게도 이 발언은 결코 작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사실, 조직 노동자들 역시 지난 몇 년간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윤석열 정권 3년 동안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업무 개시 명령, 건설노조에 대한 대대적인 ‘건폭 몰이’, 민주노총을 향한 ‘간첩단 마녀사냥’과 같은 정치적 공격은 노동운동 전반에 강한 위축 효과를 낳았다.
그 결과 노조 조직률은 정체되거나 하락했고, 임금 인상률과 파업 건수, 파업 참가자 수 역시 감소했다는 것이 각종 통계에서 확인된다. 조직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투지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윤석열의 12·3 친위 쿠데타 직후 상황에서도 드러났다. 당시에 헌정 질서를 뒤흔드는 계엄 선포라는 초유의 사태 앞에서 노동자들의 충격과 분노는 컸다.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을 선언했다. 정치적·도덕적 정당성 면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명분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총파업은 부분 파업에 그쳤고 실제 참가자는 민주노총 조합원의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는 노동자들이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오랜 사기 저하와 두려움이 넓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대통령이 직접 강조한 노동운동의 정당성과 단결의 필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조직 노동자들에게도 ‘이제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신호로 읽힐 수 있다. 국가 권력이 공개적으로 노동운동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부당한 탄압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심리적 방어선을 낮춘다. 그래서인지 친기업적 성향의 보수적 주류 언론들은 이 발언을 거의 보도하지 않거나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이 발언이 노동자들에게 미칠 잠재적 효과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노동운동은 이 발언을 외면하거나 냉소적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말만 번지르르하다’거나 ‘어리석게 속지 말라’는 식의 반응은 현장에서 박수치고 환호했던 노동자들의 감정을 이해하거나 설명하지 못하고 거리감만 만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발언을 무비판적으로 신뢰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낼 정치적·사회적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더욱이 미조직 노동자들의 대다수, 그리고 조직된 노동자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대통령이나 민주당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윤석열 탄핵 국면에서 거리와 광장을 돌아보면, 수많은 민주당 깃발과 지지자들이 함께했던 장면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들에게 이번 발언은, 자신들이 거리에서 싸워 만들어낸 성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따라서 출발점은 그 기대와 감정을 인정하는 것이다. 윤석열 탄핵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승리와 정권 교체는 우연이 아니라, 수많은 시민과 노동자들이 거리와 광장에서 힘을 모아 싸운 결과였다. 이 성과를 분명히 인정할 때, 그 자신감의 불씨를 다시 일터와 삶터로 옮겨 붙일 수 있다.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낸 정치 투쟁의 경험은, 작업장에서 노조를 조직하고 임금과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경제 투쟁의 자신감을 고무한다.
실제로 9년 전 박근혜 탄핵 투쟁 이후를 돌아보면, 그 효과는 분명하다. 박근혜 정부 붕괴 이후 등장한 문재인 정부는 이전처럼 노골적인 노동 탄압을 이어받기는 어려웠고, 그 정치적 공간 속에서 노동조합 조직률은 2016년 약 10% 수준에서 2021년 14% 내외까지 상승했다. 전 세계적으로 노조 조직률이 장기 하락 추세에 있던 시기에도 이는 매우 이례적인 변화였다.
지금의 상황 역시 다르지 않다. ‘빛의 혁명’이라 불린 윤석열 탄핵 이후, 한국 노동운동 앞에는 다시 한번 기회가 열려 있다. 오랜 숙원이었던 노란봉투법이 통과되었고, 대통령의 입에서 “노동운동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발언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조건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고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조직 노동자들이 앞장서서 이 공간을 넓히고,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손을 내밀 때만 의미를 갖는다.
특히 전체 노동자의 80%가 넘는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핵심 과제다. 중소 영세 사업장, 비정규직, 플랫폼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은 여전히 낯설거나 두렵다. 그러나 노동조합이라는 집단적 방패와 무기를 가질 때만 권리를 지키고 늘릴 수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사례와 경험으로 보여줘야 한다. 동시에 노동운동 내부의 문화 역시 더 민주적이고 투명하게 바꾸며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과 소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정치적 승리의 자신감을 일터의 조직화로 이어갈 과제
사실 이재명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여름 국무회의에서도 그는 산업재해 문제를 논의하던 중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혼자 대응할 수 없기에 노동자들이 단결하는 역량이 중요한데, 노조 조직률은 올라가고 있느냐”고 직접 물은 바 있다. 이는 노동조합의 역할과 힘을 정책적 차원에서 인정한 발언이었다.
물론 이재명 정부가 과연 이러한 발언에 걸맞게 노동자들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고 노동운동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느냐는 질문과 비판은 당연히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비판은 ‘차라리 이런 말도 하지 말라’는 방향이 아니라, ‘당신이 한 말대로 하라’고 압박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대통령의 발언은 그 자체로 투쟁의 좋은 근거가 될 수 있다.
어차피 노동운동의 대표적인 투쟁가인 〈인터내셔널〉의 가사처럼, “우리의 것을 되찾는 것”은 “어떠한 높으신 양반”이 아니라 “강철 같은 우리 손”의 몫이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창원 타운홀 미팅에서 이렇게 말했다. “결국 누가 해야 합니까? 국민들이 해야 하는 거죠. 여러분이 직접 하세요.” 공은 이미 노동운동에게 넘어왔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발언과 이 국면, 그리고 노동운동이 쌓아온 모든 경험을 최대한 활용해 투쟁과 연대를 건설하는 일이다.
이런 관점과 태도는 노동운동에 제기되는 여러 구체적 쟁점에 적용되어야 한다. 예컨대 얼마 전 이재명 대통령이 인공지능(AI)과 로봇 기술의 급속한 발전을 두고 “밀려오는 거대한 수레를 피할 수는 없다”고 언급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발언은 현대자동차 노조가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Atlas)’의 일방적 도입에 반대한 상황에서 나왔다. 대다수 보수 언론과 경제 매체들은 이 발언이 ‘노조의 발목 잡기를 비판한 것’이라며 확증 편향적 보도를 쏟아냈다.
이에 대해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은 아틀라스의 일방적인 도입이 “노동자의 안전, 작업 방식, 고용 안정에 심각한 영향이 예상되기에 정당한 협상을 요구한 것”이라며 “대통령의 역할은 사회의 안정적인 유지·발전, 국민 다수의 이익, 그리고 공평한 분배에 있다”고 반박했다. 기술 도입이 자본의 일방적인 결정과 노동자의 희생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재명 대통령의 전체 발언과 맥락을 뜯어보면 언론의 자극적 보도와 프레임이 부정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대통령은 “노조의 반대는 투쟁 전략의 일부일 것”이라고 노동자의 저항을 이해하면서 “생산수단을 가진 쪽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겠지만, 대다수 사람은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질 것”이라며 기술 발전이 가져올 불평등을 우려했다.
이것은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노동조합의 우려와 궤를 같이한다. 나아가 이 대통령은 “‘기본사회’ 시스템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이런 얘기를 하면 공산주의자라고 몰아붙여서는 변화에 적응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현 정부는 대통령 직속 ‘기본사회위원회’를 통해 이런 고민을 구체화하고 있다.
결국 이재명 정부와 금속노조의 입장을 보면 ‘거대한 수레바퀴와 같은 위기가 오고 있다’는 인식과 새로운 대응 방안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서로 대립할 이유가 없는 일부 공통된 인식을 찾을 수 있다. 다만 노조는 현장에서의 민주적 합의를, 정부는 이를 뒷받침할 사회 제도적 방안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거대 기술의 수레바퀴를 멈춰 세울 민주적 통제의 당위성
그러나 족벌 언론과 친기업 경제 언론들은 프레임을 단순화하여 갈등을 증폭시키는 데만 급급했다. 이들은 ‘미래 지향적인 정부 vs 과거에 발이 묶인 노조’라는 허구의 대립 구도를 설정하고 노조를 공격하는 도구로 이용했다. ‘글로벌 기술 전쟁 중인데 국가 경쟁력을 깎아먹고 청년 세대의 미래 일자리를 가로막는 이기적인 강성노조’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특히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이들은 글로벌 경쟁 상황이나 회사의 미래엔 관심이 없다”, “혁신이 나타날 때마다 싹을 밟아버리는 일”이라며 노조의 행보를 ‘현대판 러다이트(Luddite)’라고 낙인찍었다. 하지만 이는 19세기 초 영국 산업혁명 당시의 러다이트 운동과 역사에 대한 전형적인 왜곡과 오해에서 비롯한 악선전이다.
기술비평가 브라이언 머천트(Brian Merchant)는 러다이트를 새롭게 재해석하고 정의한 바 있다. “그들의 투쟁은 ‘기술’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의 혜택을 누가 가져갈 것인가에 대한 투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러다이트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노동의 미래에 대해 민주적인 통제권을 행사하고 싶어 했을 뿐이다.”
러다이트 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기술을 모르는 ‘무지몽매한 대중’이 아니라, 기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활용하던 숙련된 직공과 장인들이었다. 그들은 공장주들에게 자신들의 요구를 담은 편지를 먼저 보냈으며, 대체로 공공의 이익을 해치고 임금을 깎으며 노동 조건을 개악한 악덕 공장주들의 기계를 선별적으로 공격했다.
이는 노동조합이나 단체행동이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던 시절,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하고 강력한 협상과 저항 방식이었고, 오늘날 노동조합과 단체행동의 초기 형태였다.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이를 “폭동에 의한 단체교섭”이라고 칭하며 이렇게 분석했다.
노동자들은 기술 그 자체에 분노를 터뜨린 것이 아니라, 고용주가 양보하도록 강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계를 파괴했다. 그들은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의 도입 속도와 방식을 결정해야 한다고 믿었다.―〈기계 파괴자들〉
비록 러다이트 운동은 군대를 동원한 영국 국가의 폭력적 탄압으로 쇠퇴했지만, 이후 노동운동이 합법적인 노동조합 운동과 차티스트(Chartist) 운동으로 발전하는 역사적 과정과 디딤돌이 되었다. 친자본 언론이 아무리 역사를 왜곡하며 낙인을 찍어도, 그 본질은 노동의 존엄과 공동의 미래를 지키려는 필사적 투쟁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인공지능의 발전은 산업혁명 초기보다 훨씬 급격하고 위협적이다. 고도로 집적된 인공신경망은 이제 단순 계산이나 응용을 넘어 인간의 사고 과정과 직관까지 흉내 내고 있다. 이것이 모든 영역으로 확대되고 로봇 기술과 결합할 때 숙련 노동, 지식 노동, 심지어 서비스 노동의 영역까지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수억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특히 우리를 소름 끼치게 하는 대목은 ‘군사 분야와 전쟁 무기에서의 혁명적 발전’이다. 이미 미국과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인공지능을 통해 표적을 식별하고 폭격을 감행하면서 놀라운 규모의 인종청소와 집단학살로 생지옥을 만들고 있다.
과연 인공지능 의사의 진료와 처방은 ‘돈보다 생명’을 우선시할 것인가? 자율주행차의 알고리즘은 사고 직전의 순간에 보험금과 수익성이 아닌 인간의 생명을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 인공지능 무기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반대편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시민을 제거해야할 ‘테러리스트’로 인식하지 않을 것인가?
이러한 판단의 결과에 대해 우리는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결국 핵심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알고리즘을 설계하느냐에 있다. 기본적 관점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기계사용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찰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기계 자체는 노동시간을 단축시키고 노동을 편하게 하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시간을 연장시키고 노동의 강도를 높인다. 기계 자체는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승리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인간을 자연력의 노예로 만든다. 기계 자체는 생산자의 부를 늘리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생산자를 빈민으로 만든다.―《자본》
자본의 알고리즘을 넘어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연대의 길
오늘날 인공지능과 로봇의 철저한 ‘자본주의적 사용’을 주도하는 이들은 인간적인 공감 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새벽 배송 현장에서 “개처럼 뛰고 있다”던 노동자들이 죽어 나가고, 수천만 고객의 개인정보가 유출되어도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하다. 이민자들을 폭력적으로 단속하다 항의하는 시민이 비참하게 죽어가도 사과는커녕 더 가혹한 탄압을 이어간다.
가자에서 집단학살을 자행하는 이스라엘 정부에 기술과 무기를 지원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빅테크 기업들의 모습은, 아동 노동까지 착취하며 수익만을 쫓던 19세기 영국 공장주들과 소름 돋게 닮아 있다. 노동법을 우회해 노동자를 쥐어짜고, 그 대가로 천문학적인 보너스를 챙겨가는 이런 자들이 기술의 미래를 독점한다면 인류의 앞날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 발전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고 다수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새로운 ‘네오 러다이트’ 운동이다. 우리는 기술의 진보 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을 위한 기술인가? 누가 이것을 통제하는가? 누구에게 그 이익이 돌아가는가?
인공지능 플랫폼과 알고리즘의 투명성을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우리의 동의 없이는 그 어떤 데이터와 창작물도 자본의 학습 도구로 사용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기 전에 그것이 사회와 공공, 노동과 생태에 끼칠 영향을 엄격히 평가하고 검증하는 절차를 제도화해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최근 시행한 ‘인공지능기본법’에는 이러한 통제 노력이 일부 포함되어 있으나, 여전히 인공지능 산업의 ‘진흥’에 과도하게 치우쳐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더욱이 미국의 트럼프 정부는 자국 빅테크 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하며 한국 정부에 이 정도의 인공지능 규제조차 완화하고 철폐할 것을 압박하고 있다.
이러한 국제적 흐름에 함께 맞서면서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할 더 강력한 법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미국의 작가조합(WGA)과 배우조합(SAG-AFTRA)이 2023년 파업을 통해 ‘인공지능 도입 과정에서의 노동자 동의 및 구체적 통제권’을 계약서에 명시해 낸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인공지능이나 로봇과 달리, 살아있는 인간은 감정적으로 동요하고 때로는 딴생각을 하며 실수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이야말로 인간만의 고귀한 장점이다. 흔들리고, 두려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은 우리가 기계가 아닌 인간이라는 증거다. 살아있는 인간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며 자기 일처럼 아파할 수 있다.
그런 고통과 슬픔이 사라지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손을 맞잡고 함께 투쟁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함께 웃고 울며,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을 느끼는 인간들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해야 한다. 기술의 수레바퀴를 운전하는 주체는 자본의 알고리즘이 아니라, 노동하고 사랑하고 저항하는 인간들이어야 한다.
결국 이재명 대통령이 이야기한 ‘노동운동의 정당성’과 인공지능 시대의 ‘기술의 민주적 통제’에 대한 논란은 노동자가 역사의 주체로 서야 한다는 하나의 지점에서 만난다. 최고 권력자가 노동의 단결을 촉구하고 새로운 기술이 일상을 위협하는 지금, 노동운동은 단순히 과거를 지키는 보루가 아니라 미래의 방향을 결정하는 조타수가 되어야 한다. 주어진 정치적 기회의 공간을 넓히며 새로운 진보의 역사를 써 내려가야 할 때이다.



씨ᄋᆞᆯ 시론
이재명 정권에서 노동운동의 갈 길은 어디인가
전지윤
사회운동가, 《내란과 광장, 끝나지 않은 이야기》 저자
이재명 대통령은 얼마 전 창원에서 열린 ‘타운홀 미팅’에서 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열심히 일해도 격차가 크고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토로였다.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의 답변은 다소 놀라웠다. “해결 방법은 뭐냐, 노동운동을 열심히 하는 거예요. 노동자들은 약자이기 때문에 혼자서는 안 됩니다. 힘을 모아야 노동자의 지위가 올라가고, 사용자와 힘의 균형을 맞춰 정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어요. 정부도 과거처럼 부당한 탄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발언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 이 발언이 나온 장소와 청중이 상징적이다. 창원은 한국 제조업의 핵심 거점이자, 대기업과 중소 하청업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대표적 산업 도시이다. 타운홀 미팅의 참가자들 중에서도 창원 산업 단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노동자,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수백 명이 모인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 나라 국가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이 특히 미조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를 겨냥해 ‘노동자는 단결해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 것은 결코 가벼운 장면이 아니다. 이는 단순하거나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위험한 말’, ‘불편한 말’로 취급되어 왔던 노동운동의 정당성을 최고 권력자가 공개적으로 인정한 장면이다.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조직되고 투쟁해야만 임금과 노동 조건이 개선된다는 사실은 노동운동의 기본 명제이지만, 그동안 정부 책임자의 입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었던 말이다. 특히 “정부도 과거처럼 부당한 탄압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언급은, 그동안 국가 권력이 노동운동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떠올리면 더 의미심장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이 발언은 현장에 있던 노동자들뿐 아니라, 언론 보도와 SNS, 영상 공유를 통해 이를 접한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당시 현장을 촬영한 영상을 보면, 대통령의 발언이 끝나자 곳곳에서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온다. 이는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감정과 기대가 순간적으로 표출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노조로 조직돼 있지 않거나 정치적 의식이 상대적으로 낮은 미조직 노동자일수록 ‘대통령도 이렇게 말한다’는 사실은 큰 심리적 영향을 미친다. ‘노동운동을 해도 되는구나’, ‘노조를 만들거나 가입하는 것이 정당하고 필요한 일이구나’라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미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에게도 이 발언은 결코 작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사실, 조직 노동자들 역시 지난 몇 년간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윤석열 정권 3년 동안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업무 개시 명령, 건설노조에 대한 대대적인 ‘건폭 몰이’, 민주노총을 향한 ‘간첩단 마녀사냥’과 같은 정치적 공격은 노동운동 전반에 강한 위축 효과를 낳았다.
그 결과 노조 조직률은 정체되거나 하락했고, 임금 인상률과 파업 건수, 파업 참가자 수 역시 감소했다는 것이 각종 통계에서 확인된다. 조직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투지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윤석열의 12·3 친위 쿠데타 직후 상황에서도 드러났다. 당시에 헌정 질서를 뒤흔드는 계엄 선포라는 초유의 사태 앞에서 노동자들의 충격과 분노는 컸다.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을 선언했다. 정치적·도덕적 정당성 면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명분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총파업은 부분 파업에 그쳤고 실제 참가자는 민주노총 조합원의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는 노동자들이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오랜 사기 저하와 두려움이 넓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대통령이 직접 강조한 노동운동의 정당성과 단결의 필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조직 노동자들에게도 ‘이제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신호로 읽힐 수 있다. 국가 권력이 공개적으로 노동운동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부당한 탄압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심리적 방어선을 낮춘다. 그래서인지 친기업적 성향의 보수적 주류 언론들은 이 발언을 거의 보도하지 않거나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이 발언이 노동자들에게 미칠 잠재적 효과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노동운동은 이 발언을 외면하거나 냉소적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말만 번지르르하다’거나 ‘어리석게 속지 말라’는 식의 반응은 현장에서 박수치고 환호했던 노동자들의 감정을 이해하거나 설명하지 못하고 거리감만 만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발언을 무비판적으로 신뢰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낼 정치적·사회적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더욱이 미조직 노동자들의 대다수, 그리고 조직된 노동자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대통령이나 민주당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윤석열 탄핵 국면에서 거리와 광장을 돌아보면, 수많은 민주당 깃발과 지지자들이 함께했던 장면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들에게 이번 발언은, 자신들이 거리에서 싸워 만들어낸 성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따라서 출발점은 그 기대와 감정을 인정하는 것이다. 윤석열 탄핵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승리와 정권 교체는 우연이 아니라, 수많은 시민과 노동자들이 거리와 광장에서 힘을 모아 싸운 결과였다. 이 성과를 분명히 인정할 때, 그 자신감의 불씨를 다시 일터와 삶터로 옮겨 붙일 수 있다.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낸 정치 투쟁의 경험은, 작업장에서 노조를 조직하고 임금과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경제 투쟁의 자신감을 고무한다.
실제로 9년 전 박근혜 탄핵 투쟁 이후를 돌아보면, 그 효과는 분명하다. 박근혜 정부 붕괴 이후 등장한 문재인 정부는 이전처럼 노골적인 노동 탄압을 이어받기는 어려웠고, 그 정치적 공간 속에서 노동조합 조직률은 2016년 약 10% 수준에서 2021년 14% 내외까지 상승했다. 전 세계적으로 노조 조직률이 장기 하락 추세에 있던 시기에도 이는 매우 이례적인 변화였다.
지금의 상황 역시 다르지 않다. ‘빛의 혁명’이라 불린 윤석열 탄핵 이후, 한국 노동운동 앞에는 다시 한번 기회가 열려 있다. 오랜 숙원이었던 노란봉투법이 통과되었고, 대통령의 입에서 “노동운동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발언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조건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고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조직 노동자들이 앞장서서 이 공간을 넓히고,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손을 내밀 때만 의미를 갖는다.
특히 전체 노동자의 80%가 넘는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핵심 과제다. 중소 영세 사업장, 비정규직, 플랫폼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은 여전히 낯설거나 두렵다. 그러나 노동조합이라는 집단적 방패와 무기를 가질 때만 권리를 지키고 늘릴 수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사례와 경험으로 보여줘야 한다. 동시에 노동운동 내부의 문화 역시 더 민주적이고 투명하게 바꾸며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과 소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정치적 승리의 자신감을 일터의 조직화로 이어갈 과제
사실 이재명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여름 국무회의에서도 그는 산업재해 문제를 논의하던 중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혼자 대응할 수 없기에 노동자들이 단결하는 역량이 중요한데, 노조 조직률은 올라가고 있느냐”고 직접 물은 바 있다. 이는 노동조합의 역할과 힘을 정책적 차원에서 인정한 발언이었다.
물론 이재명 정부가 과연 이러한 발언에 걸맞게 노동자들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고 노동운동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느냐는 질문과 비판은 당연히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비판은 ‘차라리 이런 말도 하지 말라’는 방향이 아니라, ‘당신이 한 말대로 하라’고 압박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대통령의 발언은 그 자체로 투쟁의 좋은 근거가 될 수 있다.
어차피 노동운동의 대표적인 투쟁가인 〈인터내셔널〉의 가사처럼, “우리의 것을 되찾는 것”은 “어떠한 높으신 양반”이 아니라 “강철 같은 우리 손”의 몫이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창원 타운홀 미팅에서 이렇게 말했다. “결국 누가 해야 합니까? 국민들이 해야 하는 거죠. 여러분이 직접 하세요.” 공은 이미 노동운동에게 넘어왔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발언과 이 국면, 그리고 노동운동이 쌓아온 모든 경험을 최대한 활용해 투쟁과 연대를 건설하는 일이다.
이런 관점과 태도는 노동운동에 제기되는 여러 구체적 쟁점에 적용되어야 한다. 예컨대 얼마 전 이재명 대통령이 인공지능(AI)과 로봇 기술의 급속한 발전을 두고 “밀려오는 거대한 수레를 피할 수는 없다”고 언급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발언은 현대자동차 노조가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Atlas)’의 일방적 도입에 반대한 상황에서 나왔다. 대다수 보수 언론과 경제 매체들은 이 발언이 ‘노조의 발목 잡기를 비판한 것’이라며 확증 편향적 보도를 쏟아냈다.
이에 대해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은 아틀라스의 일방적인 도입이 “노동자의 안전, 작업 방식, 고용 안정에 심각한 영향이 예상되기에 정당한 협상을 요구한 것”이라며 “대통령의 역할은 사회의 안정적인 유지·발전, 국민 다수의 이익, 그리고 공평한 분배에 있다”고 반박했다. 기술 도입이 자본의 일방적인 결정과 노동자의 희생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재명 대통령의 전체 발언과 맥락을 뜯어보면 언론의 자극적 보도와 프레임이 부정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대통령은 “노조의 반대는 투쟁 전략의 일부일 것”이라고 노동자의 저항을 이해하면서 “생산수단을 가진 쪽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겠지만, 대다수 사람은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질 것”이라며 기술 발전이 가져올 불평등을 우려했다.
이것은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노동조합의 우려와 궤를 같이한다. 나아가 이 대통령은 “‘기본사회’ 시스템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이런 얘기를 하면 공산주의자라고 몰아붙여서는 변화에 적응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현 정부는 대통령 직속 ‘기본사회위원회’를 통해 이런 고민을 구체화하고 있다.
결국 이재명 정부와 금속노조의 입장을 보면 ‘거대한 수레바퀴와 같은 위기가 오고 있다’는 인식과 새로운 대응 방안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서로 대립할 이유가 없는 일부 공통된 인식을 찾을 수 있다. 다만 노조는 현장에서의 민주적 합의를, 정부는 이를 뒷받침할 사회 제도적 방안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거대 기술의 수레바퀴를 멈춰 세울 민주적 통제의 당위성
그러나 족벌 언론과 친기업 경제 언론들은 프레임을 단순화하여 갈등을 증폭시키는 데만 급급했다. 이들은 ‘미래 지향적인 정부 vs 과거에 발이 묶인 노조’라는 허구의 대립 구도를 설정하고 노조를 공격하는 도구로 이용했다. ‘글로벌 기술 전쟁 중인데 국가 경쟁력을 깎아먹고 청년 세대의 미래 일자리를 가로막는 이기적인 강성노조’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특히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이들은 글로벌 경쟁 상황이나 회사의 미래엔 관심이 없다”, “혁신이 나타날 때마다 싹을 밟아버리는 일”이라며 노조의 행보를 ‘현대판 러다이트(Luddite)’라고 낙인찍었다. 하지만 이는 19세기 초 영국 산업혁명 당시의 러다이트 운동과 역사에 대한 전형적인 왜곡과 오해에서 비롯한 악선전이다.
기술비평가 브라이언 머천트(Brian Merchant)는 러다이트를 새롭게 재해석하고 정의한 바 있다. “그들의 투쟁은 ‘기술’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의 혜택을 누가 가져갈 것인가에 대한 투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러다이트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노동의 미래에 대해 민주적인 통제권을 행사하고 싶어 했을 뿐이다.”
러다이트 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기술을 모르는 ‘무지몽매한 대중’이 아니라, 기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활용하던 숙련된 직공과 장인들이었다. 그들은 공장주들에게 자신들의 요구를 담은 편지를 먼저 보냈으며, 대체로 공공의 이익을 해치고 임금을 깎으며 노동 조건을 개악한 악덕 공장주들의 기계를 선별적으로 공격했다.
이는 노동조합이나 단체행동이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던 시절,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하고 강력한 협상과 저항 방식이었고, 오늘날 노동조합과 단체행동의 초기 형태였다.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이를 “폭동에 의한 단체교섭”이라고 칭하며 이렇게 분석했다.
비록 러다이트 운동은 군대를 동원한 영국 국가의 폭력적 탄압으로 쇠퇴했지만, 이후 노동운동이 합법적인 노동조합 운동과 차티스트(Chartist) 운동으로 발전하는 역사적 과정과 디딤돌이 되었다. 친자본 언론이 아무리 역사를 왜곡하며 낙인을 찍어도, 그 본질은 노동의 존엄과 공동의 미래를 지키려는 필사적 투쟁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인공지능의 발전은 산업혁명 초기보다 훨씬 급격하고 위협적이다. 고도로 집적된 인공신경망은 이제 단순 계산이나 응용을 넘어 인간의 사고 과정과 직관까지 흉내 내고 있다. 이것이 모든 영역으로 확대되고 로봇 기술과 결합할 때 숙련 노동, 지식 노동, 심지어 서비스 노동의 영역까지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수억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특히 우리를 소름 끼치게 하는 대목은 ‘군사 분야와 전쟁 무기에서의 혁명적 발전’이다. 이미 미국과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인공지능을 통해 표적을 식별하고 폭격을 감행하면서 놀라운 규모의 인종청소와 집단학살로 생지옥을 만들고 있다.
과연 인공지능 의사의 진료와 처방은 ‘돈보다 생명’을 우선시할 것인가? 자율주행차의 알고리즘은 사고 직전의 순간에 보험금과 수익성이 아닌 인간의 생명을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 인공지능 무기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반대편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시민을 제거해야할 ‘테러리스트’로 인식하지 않을 것인가?
이러한 판단의 결과에 대해 우리는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결국 핵심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알고리즘을 설계하느냐에 있다. 기본적 관점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기계사용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찰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자본의 알고리즘을 넘어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연대의 길
오늘날 인공지능과 로봇의 철저한 ‘자본주의적 사용’을 주도하는 이들은 인간적인 공감 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새벽 배송 현장에서 “개처럼 뛰고 있다”던 노동자들이 죽어 나가고, 수천만 고객의 개인정보가 유출되어도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하다. 이민자들을 폭력적으로 단속하다 항의하는 시민이 비참하게 죽어가도 사과는커녕 더 가혹한 탄압을 이어간다.
가자에서 집단학살을 자행하는 이스라엘 정부에 기술과 무기를 지원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빅테크 기업들의 모습은, 아동 노동까지 착취하며 수익만을 쫓던 19세기 영국 공장주들과 소름 돋게 닮아 있다. 노동법을 우회해 노동자를 쥐어짜고, 그 대가로 천문학적인 보너스를 챙겨가는 이런 자들이 기술의 미래를 독점한다면 인류의 앞날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 발전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고 다수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새로운 ‘네오 러다이트’ 운동이다. 우리는 기술의 진보 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을 위한 기술인가? 누가 이것을 통제하는가? 누구에게 그 이익이 돌아가는가?
인공지능 플랫폼과 알고리즘의 투명성을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우리의 동의 없이는 그 어떤 데이터와 창작물도 자본의 학습 도구로 사용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기 전에 그것이 사회와 공공, 노동과 생태에 끼칠 영향을 엄격히 평가하고 검증하는 절차를 제도화해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최근 시행한 ‘인공지능기본법’에는 이러한 통제 노력이 일부 포함되어 있으나, 여전히 인공지능 산업의 ‘진흥’에 과도하게 치우쳐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더욱이 미국의 트럼프 정부는 자국 빅테크 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하며 한국 정부에 이 정도의 인공지능 규제조차 완화하고 철폐할 것을 압박하고 있다.
이러한 국제적 흐름에 함께 맞서면서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할 더 강력한 법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미국의 작가조합(WGA)과 배우조합(SAG-AFTRA)이 2023년 파업을 통해 ‘인공지능 도입 과정에서의 노동자 동의 및 구체적 통제권’을 계약서에 명시해 낸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인공지능이나 로봇과 달리, 살아있는 인간은 감정적으로 동요하고 때로는 딴생각을 하며 실수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이야말로 인간만의 고귀한 장점이다. 흔들리고, 두려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은 우리가 기계가 아닌 인간이라는 증거다. 살아있는 인간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며 자기 일처럼 아파할 수 있다.
그런 고통과 슬픔이 사라지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손을 맞잡고 함께 투쟁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함께 웃고 울며,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을 느끼는 인간들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해야 한다. 기술의 수레바퀴를 운전하는 주체는 자본의 알고리즘이 아니라, 노동하고 사랑하고 저항하는 인간들이어야 한다.
결국 이재명 대통령이 이야기한 ‘노동운동의 정당성’과 인공지능 시대의 ‘기술의 민주적 통제’에 대한 논란은 노동자가 역사의 주체로 서야 한다는 하나의 지점에서 만난다. 최고 권력자가 노동의 단결을 촉구하고 새로운 기술이 일상을 위협하는 지금, 노동운동은 단순히 과거를 지키는 보루가 아니라 미래의 방향을 결정하는 조타수가 되어야 한다. 주어진 정치적 기회의 공간을 넓히며 새로운 진보의 역사를 써 내려가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