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보는 세상
나만의 박물관-6
마음을 전하는 방식의 진화, 편지와 전화기의 역사
김지환
《가톨릭평론》 편집장
꼭꼭 눌러쓴 편지
누군가에게 정성껏 편지를 쓸 때, 일단 연습장에 쭉 적어놓고 그것을 고운 편지지에 옮긴다. 봉투에 고이 집어넣고 우표를 붙이고, 낮이 되면 차마 보내지 못할까 봐, 깊은 밤에 집 근처 우체통에 집어넣는다. 그렇게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린다. 그렇게 편지를 썼던 시절이 있다. 본격적인 연애편지는 아니겠지만, 그렇게 정성껏 적으면 마음이 전해지리라 믿는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해서 제대로 전해지는 것 같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특활 시간으로 영화반에 들어갔다. 그 반을 담당하셨던 아주 낭만적인 영어 선생님은 한번은 연애편지 쓰는 법을 정성스럽게 가르쳐주셨고, 또 그것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성탄 카드도 정성스럽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성탄절을 앞두고 예쁜 카드를 사서 보내기도 하지만, 괜찮은 그림 하나를 트레이싱페이퍼로 옮겨서 샤프 끝으로 새긴다. 그다음에 플러스펜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세필붓으로 예쁘게 칠한다. 칫솔을 이용해 눈 내리는 효과로 마무리짓는데, 여러 장을 그려 친구를 비롯한 지인에게 보냈다.
사실 편지를 가장 많이 썼던 때는 군 시절이다. 군인은 우표를 붙이지 않고도 편지를 보낼 수 있다. ‘군사우편’이란 직인이 찍혀 바깥으로 전달된다. 한번은 편지를 한가득 적어 냈더니, 인사계(행정보급관)가 ‘군사우편’이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괜히 시비를 건다. 그 몇 마디에 눈치 보며 편지 쓰기를 자제할 필요는 없었고, 연등(취침 후 공부하는 시간) 때 책을 읽거나 편지를 계속해서 썼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으면 군대라는 공간 안에서 굳어버릴 것 같아 무작정 썼던 시절이다.
이메일이 등장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썼던 손 편지는 갈수록 귀해졌다. 한겨레신문사에서 운영하는 하니메일로 처음으로 이메일 계정을 만들었다. 하니메일은 나중에 서비스가 중단되어 보내고 받았던 이메일은 다 출력해 두었다. 1999년에 다음메일로 만든 계정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프리첼, 한미르, 코리아닷컴, 야후코리아 등 다양한 포털이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줄어든 셈이다.
편지는 오고가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기다림과 설렘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는 편지를 썼다가 찢어버리기도 하고, 용기를 내서 쓰자마자 편지봉투에 집어넣고 우표를 붙여 동네 우체통에 집어넣기도 한다. 그리고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떨림과 기대가 있다. 그런데 이젠 이별 통보도 문자로 하는 시대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인들에게 받았던 편지를 모아둔 클리어파일. 가끔 펼쳐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1994년 갓 일병을 달았을 무렵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께 받았던 편지.

성탄절을 앞두고 형들과 함께 열심히 그렸던 카드 샘플이다. 트레이싱페이퍼로 베껴서 똑같은 모양으로 카드를 만들곤 했다. 칫솔에 흰 물감을 바르고 쭉 뿌리면 눈 내리는 효과도 생겨 제법 운치가 있었다.

중학교 때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해외 펜팔 붐이 일었다. 첫 펜팔 미국의 줄리 웬델에게 받았던 첫 편지.
귀했던 전화기와 설레었던 삐삐
전화기는 정말 귀해 없는 집이 많았다. 어떤 집은 빚보증 대신으로 전화기를 받기도 했다. 그나마 서울 지역은 일찍 보급되었지만, 지방에서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우리 시골에서는 가겟집에 전화기가 있었는데, 서울에서 전화가 오면 ‘아무개 집, 서울 아들이 전화했어요’ 이런 식으로 방송을 해주면, 그 집으로 가서 받는다. 그리고 타지에 전화하려면 그 가겟집에 가서 교환을 거쳐 통화한다. 전화하는 것도 간단치 않았던 시절이다. DDD(Direct Distance Dialing)가 도입되면서, 교환수 없이 직접 거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전화요금이 만만치 않았다. 이등병 시절 100원짜리 동전 한가득 들고 공중전화로 집에 통화하는데, 동전이 팍팍 떨어졌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떨어지는 속도가 반감되는 느낌으로 통화요금이 많이 떨어졌나 싶었다. 내가 근무했던 작은 포대에 공중전화기가 들어오자, 전우들이 너무 기뻐했다. 모든 일과가 끝나면 통화가 자유로웠고, 어머니 목소리 듣고 싶어 집으로 전화하는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동네 곳곳에 빨간 공중전화기가 있었다. 집에서 통화하기가 조금 그러면, 10원짜리 동전을 준비해서 인적 드문 공중전화기로 가서 통화를 한다. 한참 통화하다 보면 ‘띠띠띠’ 소리가 들릴 때 10원짜리 동전 두 개를 더 넣어주고 통화를 이어간다. 혹시나 뒤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잠시 끊었다가 다시 이어서 한다. 고등학교 때 그렇게 여사친과 한참 통화했던 적이 있다. 공중전화는 정말 소중한 소통수단이었다. 카드 전화기와 전화 카드가 나왔을 때는 정말 편했다. 굳이 10원짜리 들고 다니지 않아도 지갑에 카드 한 장이면 족했다. 꽃다지 노래 ‘전화카드 한 장’처럼 “언제라도 힘들고 지쳤을 때 내게 전화를 하라고” 전화 카드 한 장을 선물처럼 건넬 수도 있었다.
공중전화기 부스에는 전화번호부도 있었는데, 그 전화번호부는 악동들의 장난 전화에 활용되기도 했다. 엄청 두꺼운 전화번호부는 전화국에서 나눠주었는데, 아버지 심부름으로 눈 내리는 날 홍대입구 전철역 부근 신촌전화국(현재 KT)까지 가서 전화번호부를 받아왔다. ‘옐로페이퍼’라는 별명이 붙은 전화전호부는 엄청 두꺼웠다. 로버트 드니로와 앤 해서웨이가 출연한 영화 〈인턴〉(2015)을 보면, 로버트 드니로가 40여 년간 일했던 전화번호부 회사 자리에 온라인 의류 업체가 들어선다. 드니로는 그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오는데, 공간의 용도 변경이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다 쓴 전화카드 20장인가 30장인가를 전화국에 가져오면 새 전화카드로 바꿔주기도 했다. 다양한 종류의 전화카드는 잘 모아두면 그 자체로 하나의 컬렉션이다. 김대중 대통령 노벨상 수상 기념 전화카드도 갖고 있었는데, 눈에 띄지 않는다.
삐삐는 꽤 신박했던 필수품이었다.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삐삐부터 장만했다. 삐삐로 인해 공중전화는 여전히 중요한 통신 수단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리면 바로 역 안에 공중전화기가 많았는데, 한참 지하철을 타고 가다 삐삐에 연락이 오면 중간에 내려서 전화를 걸기도 했다. 삐삐 자체가 급하게 연락을 해야 하기에 바로 연락하는 편이었는데, 만사 재치고 후딱 연락하다 보니 ‘삐삐 모범생’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삐삐는 연락처를 남기는 수단이지만, 숫자 자체로도 일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1004, 8282 등은 확실히 읽히는데 7676(‘착륙착륙’을 연상해서 도착했을 때 사용) 같은 표현도 있다. ‘리베’라는 초콜릿 광고는 ‘38317’이 뒤집어지면서 ‘LIEBE’ 모양으로 바뀐다. 다소 삐삐 감성이 짙게 배었던 광고다. 삐삐의 촉촉한 감성 중 하나는 음성 메시지 확인이다. 반가운 사람의 목소리나 응원의 목소리는 반복해서 듣기도 한다.

제대하자마자 구입한 삼성 위드미 삐삐. 012 번호로 사용했다.
진짜 통신혁명 손 전화기의 등장
정겨운 012와 015는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이동통신의 대중화 때문이다. ‘벽돌폰’으로 불렸던 커다란 핸드폰은 성공한 사람의 상징과도 같았는데, 좀 더 대중화하면서 ‘1인 1폰’ 시대가 열린다. 통화요금이 만만치 않았는데, PCS보다 조금 먼저 시작된 시티폰은 단말기 가격이나 통화료가 저렴한 편이었다. 하지만 시티폰은 정말 애매하기만 했다. 받을 수는 없고 걸 수만 있어 삐삐를 함께 갖고 다녀야 했고, 또 근처에 기지국이 있어야 통화가 가능했다. 이처럼 사용도 불편하고 나중엔 가성비에서도 썩 매력적이지 않아 PCS가 압도하고 만다. 011, 016, 017, 018, 019 같은 다양한 앞자리 번호의 PCS가 널리 보급된다.
처음엔 핸드폰이 없던 사람도 많았지만, 나중엔 갖고 있지 않기가 더 힘든 환경으로 변했다. 나는 그럭저럭 삐삐로 버텨볼 생각이었는데, LG 통신에서 잠시 아르바이트하던 친구 덕분에 아주 저렴하게 019로 가입하고 핸드폰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사용했던 핸드폰은 한화 G2였는데, 처음 쓸 때만 해도 꽤 혁신적인 디자인이었다. 2000년을 몇 달 앞두었을 때다. 요금은 여전히 비싸 썩 자주 쓰기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전화기를 들고 다닌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핸드폰은 지난 세기말 가장 놀랍고 획기적인 생활의 변화였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랫동안 감옥에 있다가 세상에 나온 이들에게 세상의 변화상 중에서 가장 신기하고 놀라운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사람들이 전화기를 들고 다니면서 통화하는 모습이라고 했다.
지금처럼 많은 전화번호를 저장할 수 없었고, 문자도 길게 보낼 수 없었지만 누군가와 소통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원래 삐삐로 더 버텨볼 생각이었지만, 집에서 급한 전화가 오면 받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장만했던 핸드폰이라 그럭저럭 잘 썼다. 그런데 하나의 문제가 생겼다. 집을 나설 때 신경 써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겼는데, 지갑만 잘 챙겨 나갔다가 이젠 핸드폰도 잘 챙겨야 한다. 거기에 보조 배터리까지. 언젠가 핸드폰을 집에 두고 출근했는데, 너무도 불안했다. 핸드폰은 신체의 일부가 되어갔다. 핸드폰은 또 약속을 꽤 느슨하게 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엔 약속 장소에서 1시간까지 기다린 적이 있는데, 핸드폰이 등장한 이후엔 약속을 파하기가 더 수월해졌다.

한화 G2는 처음 나왔을 때는 꽤 괜찮았는데 쓴 지 5년쯤 지났을 땐 훨씬 성능이 좋은 핸드폰이 넘쳐났다. 전화번호 저장 개수도 많지 않고 문자 길이도 제한되었지만 그럭저럭 잘 썼다.
그래도 초기 핸드폰은 통화나 문자 외에는 핸드폰을 들여다볼 일이 많지는 않았다. 외출할 때 책 한 권 정도는 두고 틈날 때마다 읽곤 했는데, 스마트폰의 등장은 확실히 책을 멀리하게 했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한 장면에서는 “모두 고개를 들었던 시절”, 그리고 서로 바라보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바로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다. 이젠 거의 모두 스마트폰만 들여다본다. 어쩌다 외국에 여행 가서 버스를 타게 되면, 이국적인 바깥 풍경을 감상하다가 잠시 잠들기를 반복하는데, 아이들은 바깥 풍경을 감상하지 않고 스마트폰만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스마트폰의 화면은 점차 세상이 되어갔다. 예전엔 지하철에서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는 사람이 많았다. 지하철 선반에는 신문과 잡지 등이 그득했지만, 이젠 찾아보기가 어렵다. 독서량의 감소는 스마트폰의 급격한 보급과 확실히 관련 있다. 해서 많은 편집자는 책의 적은 스마트폰이라고 했지만, 그들 또한 스마트폰을 끼고 살기는 매한가지다.
피처폰을 썼을 때는 뭔가 별것도 아닌 것 다운받다가 ‘요금 폭탄’을 맞은 적도 있고, 사진기는 맹탕이라 거의 쓰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스마트폰의 기능은 엄청나다. 사진을 물론 녹음, 그리고 검색까지 이젠 전화기가 아니라 컴퓨터 하나를 들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기다림도 설렘도 사라졌지만
세상이 급속히 빨라지고 더 편해지면서, 이젠 예전 같은 기다림이나 설렘은 사라져가는 듯하다. 수동 카메라로 한 장 한 장 아껴 찍은 뒤에 필름을 맡겨 인화된 사진을 찾는 즐거움은 스마트폰이 빼앗았고, 라디오에서 들었던 노래 제목을 잘 기억했다가 레코드 가게에서 녹음한 카세트테이프의 즐거움은 유튜브가 다 빼앗아버렸다.
그런데 한편에서 생각하면, 그렇게 변하고 사라진 것은 사라진 대로 그리워하는 것과 그것을 향유하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일본에서는 1980년대 제작되었고, 대한민국에선 1990년대에 방영된 〈출동! 러쉬맨〉이란 애니메이션을 보면 이런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현재에서 미래로 간 주인공이 마지막 운행을 하는 신칸센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신칸센 하면 지금도 첨단인데, 미래사회엔 충분히 사라질 수 있으리라. 기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누군가에겐 쇳덩어리가 빠른 속도로 질주하니 공포로 느꼈을 수도 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기차 안에서 온갖 추억을 공유한다. 편지나 삐삐 같은 것이 가끔 그립기도 하지만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두고, 우리는 더 편하게 사용하는 수단을 찾아갈 것이다. 사실 이렇게 손쉽게 갈아탔기에 지난 것이 그리운 것이기도 하다. 우리 세대는 많은 것이 아날로그에서 급격하게 디지털로 전환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생각해보면, 아날로그는 아날로그대로 디지털은 디지털대로 좋다. 새롭게 등장하는 수단을 통해 소통하는 방식만 바뀌었을 뿐, 계속해서 마음을 나누고 정을 나누리라.



문화로 보는 세상
나만의 박물관-6
마음을 전하는 방식의 진화, 편지와 전화기의 역사
김지환
《가톨릭평론》 편집장
꼭꼭 눌러쓴 편지
누군가에게 정성껏 편지를 쓸 때, 일단 연습장에 쭉 적어놓고 그것을 고운 편지지에 옮긴다. 봉투에 고이 집어넣고 우표를 붙이고, 낮이 되면 차마 보내지 못할까 봐, 깊은 밤에 집 근처 우체통에 집어넣는다. 그렇게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린다. 그렇게 편지를 썼던 시절이 있다. 본격적인 연애편지는 아니겠지만, 그렇게 정성껏 적으면 마음이 전해지리라 믿는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해서 제대로 전해지는 것 같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특활 시간으로 영화반에 들어갔다. 그 반을 담당하셨던 아주 낭만적인 영어 선생님은 한번은 연애편지 쓰는 법을 정성스럽게 가르쳐주셨고, 또 그것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성탄 카드도 정성스럽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성탄절을 앞두고 예쁜 카드를 사서 보내기도 하지만, 괜찮은 그림 하나를 트레이싱페이퍼로 옮겨서 샤프 끝으로 새긴다. 그다음에 플러스펜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세필붓으로 예쁘게 칠한다. 칫솔을 이용해 눈 내리는 효과로 마무리짓는데, 여러 장을 그려 친구를 비롯한 지인에게 보냈다.
사실 편지를 가장 많이 썼던 때는 군 시절이다. 군인은 우표를 붙이지 않고도 편지를 보낼 수 있다. ‘군사우편’이란 직인이 찍혀 바깥으로 전달된다. 한번은 편지를 한가득 적어 냈더니, 인사계(행정보급관)가 ‘군사우편’이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괜히 시비를 건다. 그 몇 마디에 눈치 보며 편지 쓰기를 자제할 필요는 없었고, 연등(취침 후 공부하는 시간) 때 책을 읽거나 편지를 계속해서 썼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으면 군대라는 공간 안에서 굳어버릴 것 같아 무작정 썼던 시절이다.
이메일이 등장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썼던 손 편지는 갈수록 귀해졌다. 한겨레신문사에서 운영하는 하니메일로 처음으로 이메일 계정을 만들었다. 하니메일은 나중에 서비스가 중단되어 보내고 받았던 이메일은 다 출력해 두었다. 1999년에 다음메일로 만든 계정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프리첼, 한미르, 코리아닷컴, 야후코리아 등 다양한 포털이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줄어든 셈이다.
편지는 오고가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기다림과 설렘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는 편지를 썼다가 찢어버리기도 하고, 용기를 내서 쓰자마자 편지봉투에 집어넣고 우표를 붙여 동네 우체통에 집어넣기도 한다. 그리고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떨림과 기대가 있다. 그런데 이젠 이별 통보도 문자로 하는 시대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인들에게 받았던 편지를 모아둔 클리어파일. 가끔 펼쳐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1994년 갓 일병을 달았을 무렵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께 받았던 편지.
성탄절을 앞두고 형들과 함께 열심히 그렸던 카드 샘플이다. 트레이싱페이퍼로 베껴서 똑같은 모양으로 카드를 만들곤 했다. 칫솔에 흰 물감을 바르고 쭉 뿌리면 눈 내리는 효과도 생겨 제법 운치가 있었다.
중학교 때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해외 펜팔 붐이 일었다. 첫 펜팔 미국의 줄리 웬델에게 받았던 첫 편지.
귀했던 전화기와 설레었던 삐삐
전화기는 정말 귀해 없는 집이 많았다. 어떤 집은 빚보증 대신으로 전화기를 받기도 했다. 그나마 서울 지역은 일찍 보급되었지만, 지방에서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우리 시골에서는 가겟집에 전화기가 있었는데, 서울에서 전화가 오면 ‘아무개 집, 서울 아들이 전화했어요’ 이런 식으로 방송을 해주면, 그 집으로 가서 받는다. 그리고 타지에 전화하려면 그 가겟집에 가서 교환을 거쳐 통화한다. 전화하는 것도 간단치 않았던 시절이다. DDD(Direct Distance Dialing)가 도입되면서, 교환수 없이 직접 거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전화요금이 만만치 않았다. 이등병 시절 100원짜리 동전 한가득 들고 공중전화로 집에 통화하는데, 동전이 팍팍 떨어졌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떨어지는 속도가 반감되는 느낌으로 통화요금이 많이 떨어졌나 싶었다. 내가 근무했던 작은 포대에 공중전화기가 들어오자, 전우들이 너무 기뻐했다. 모든 일과가 끝나면 통화가 자유로웠고, 어머니 목소리 듣고 싶어 집으로 전화하는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동네 곳곳에 빨간 공중전화기가 있었다. 집에서 통화하기가 조금 그러면, 10원짜리 동전을 준비해서 인적 드문 공중전화기로 가서 통화를 한다. 한참 통화하다 보면 ‘띠띠띠’ 소리가 들릴 때 10원짜리 동전 두 개를 더 넣어주고 통화를 이어간다. 혹시나 뒤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잠시 끊었다가 다시 이어서 한다. 고등학교 때 그렇게 여사친과 한참 통화했던 적이 있다. 공중전화는 정말 소중한 소통수단이었다. 카드 전화기와 전화 카드가 나왔을 때는 정말 편했다. 굳이 10원짜리 들고 다니지 않아도 지갑에 카드 한 장이면 족했다. 꽃다지 노래 ‘전화카드 한 장’처럼 “언제라도 힘들고 지쳤을 때 내게 전화를 하라고” 전화 카드 한 장을 선물처럼 건넬 수도 있었다.
공중전화기 부스에는 전화번호부도 있었는데, 그 전화번호부는 악동들의 장난 전화에 활용되기도 했다. 엄청 두꺼운 전화번호부는 전화국에서 나눠주었는데, 아버지 심부름으로 눈 내리는 날 홍대입구 전철역 부근 신촌전화국(현재 KT)까지 가서 전화번호부를 받아왔다. ‘옐로페이퍼’라는 별명이 붙은 전화전호부는 엄청 두꺼웠다. 로버트 드니로와 앤 해서웨이가 출연한 영화 〈인턴〉(2015)을 보면, 로버트 드니로가 40여 년간 일했던 전화번호부 회사 자리에 온라인 의류 업체가 들어선다. 드니로는 그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오는데, 공간의 용도 변경이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다 쓴 전화카드 20장인가 30장인가를 전화국에 가져오면 새 전화카드로 바꿔주기도 했다. 다양한 종류의 전화카드는 잘 모아두면 그 자체로 하나의 컬렉션이다. 김대중 대통령 노벨상 수상 기념 전화카드도 갖고 있었는데, 눈에 띄지 않는다.
삐삐는 꽤 신박했던 필수품이었다.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삐삐부터 장만했다. 삐삐로 인해 공중전화는 여전히 중요한 통신 수단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리면 바로 역 안에 공중전화기가 많았는데, 한참 지하철을 타고 가다 삐삐에 연락이 오면 중간에 내려서 전화를 걸기도 했다. 삐삐 자체가 급하게 연락을 해야 하기에 바로 연락하는 편이었는데, 만사 재치고 후딱 연락하다 보니 ‘삐삐 모범생’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삐삐는 연락처를 남기는 수단이지만, 숫자 자체로도 일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1004, 8282 등은 확실히 읽히는데 7676(‘착륙착륙’을 연상해서 도착했을 때 사용) 같은 표현도 있다. ‘리베’라는 초콜릿 광고는 ‘38317’이 뒤집어지면서 ‘LIEBE’ 모양으로 바뀐다. 다소 삐삐 감성이 짙게 배었던 광고다. 삐삐의 촉촉한 감성 중 하나는 음성 메시지 확인이다. 반가운 사람의 목소리나 응원의 목소리는 반복해서 듣기도 한다.
제대하자마자 구입한 삼성 위드미 삐삐. 012 번호로 사용했다.
진짜 통신혁명 손 전화기의 등장
정겨운 012와 015는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이동통신의 대중화 때문이다. ‘벽돌폰’으로 불렸던 커다란 핸드폰은 성공한 사람의 상징과도 같았는데, 좀 더 대중화하면서 ‘1인 1폰’ 시대가 열린다. 통화요금이 만만치 않았는데, PCS보다 조금 먼저 시작된 시티폰은 단말기 가격이나 통화료가 저렴한 편이었다. 하지만 시티폰은 정말 애매하기만 했다. 받을 수는 없고 걸 수만 있어 삐삐를 함께 갖고 다녀야 했고, 또 근처에 기지국이 있어야 통화가 가능했다. 이처럼 사용도 불편하고 나중엔 가성비에서도 썩 매력적이지 않아 PCS가 압도하고 만다. 011, 016, 017, 018, 019 같은 다양한 앞자리 번호의 PCS가 널리 보급된다.
처음엔 핸드폰이 없던 사람도 많았지만, 나중엔 갖고 있지 않기가 더 힘든 환경으로 변했다. 나는 그럭저럭 삐삐로 버텨볼 생각이었는데, LG 통신에서 잠시 아르바이트하던 친구 덕분에 아주 저렴하게 019로 가입하고 핸드폰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사용했던 핸드폰은 한화 G2였는데, 처음 쓸 때만 해도 꽤 혁신적인 디자인이었다. 2000년을 몇 달 앞두었을 때다. 요금은 여전히 비싸 썩 자주 쓰기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전화기를 들고 다닌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핸드폰은 지난 세기말 가장 놀랍고 획기적인 생활의 변화였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랫동안 감옥에 있다가 세상에 나온 이들에게 세상의 변화상 중에서 가장 신기하고 놀라운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사람들이 전화기를 들고 다니면서 통화하는 모습이라고 했다.
지금처럼 많은 전화번호를 저장할 수 없었고, 문자도 길게 보낼 수 없었지만 누군가와 소통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원래 삐삐로 더 버텨볼 생각이었지만, 집에서 급한 전화가 오면 받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장만했던 핸드폰이라 그럭저럭 잘 썼다. 그런데 하나의 문제가 생겼다. 집을 나설 때 신경 써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겼는데, 지갑만 잘 챙겨 나갔다가 이젠 핸드폰도 잘 챙겨야 한다. 거기에 보조 배터리까지. 언젠가 핸드폰을 집에 두고 출근했는데, 너무도 불안했다. 핸드폰은 신체의 일부가 되어갔다. 핸드폰은 또 약속을 꽤 느슨하게 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엔 약속 장소에서 1시간까지 기다린 적이 있는데, 핸드폰이 등장한 이후엔 약속을 파하기가 더 수월해졌다.
한화 G2는 처음 나왔을 때는 꽤 괜찮았는데 쓴 지 5년쯤 지났을 땐 훨씬 성능이 좋은 핸드폰이 넘쳐났다. 전화번호 저장 개수도 많지 않고 문자 길이도 제한되었지만 그럭저럭 잘 썼다.
그래도 초기 핸드폰은 통화나 문자 외에는 핸드폰을 들여다볼 일이 많지는 않았다. 외출할 때 책 한 권 정도는 두고 틈날 때마다 읽곤 했는데, 스마트폰의 등장은 확실히 책을 멀리하게 했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한 장면에서는 “모두 고개를 들었던 시절”, 그리고 서로 바라보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바로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다. 이젠 거의 모두 스마트폰만 들여다본다. 어쩌다 외국에 여행 가서 버스를 타게 되면, 이국적인 바깥 풍경을 감상하다가 잠시 잠들기를 반복하는데, 아이들은 바깥 풍경을 감상하지 않고 스마트폰만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스마트폰의 화면은 점차 세상이 되어갔다. 예전엔 지하철에서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는 사람이 많았다. 지하철 선반에는 신문과 잡지 등이 그득했지만, 이젠 찾아보기가 어렵다. 독서량의 감소는 스마트폰의 급격한 보급과 확실히 관련 있다. 해서 많은 편집자는 책의 적은 스마트폰이라고 했지만, 그들 또한 스마트폰을 끼고 살기는 매한가지다.
피처폰을 썼을 때는 뭔가 별것도 아닌 것 다운받다가 ‘요금 폭탄’을 맞은 적도 있고, 사진기는 맹탕이라 거의 쓰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스마트폰의 기능은 엄청나다. 사진을 물론 녹음, 그리고 검색까지 이젠 전화기가 아니라 컴퓨터 하나를 들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기다림도 설렘도 사라졌지만
세상이 급속히 빨라지고 더 편해지면서, 이젠 예전 같은 기다림이나 설렘은 사라져가는 듯하다. 수동 카메라로 한 장 한 장 아껴 찍은 뒤에 필름을 맡겨 인화된 사진을 찾는 즐거움은 스마트폰이 빼앗았고, 라디오에서 들었던 노래 제목을 잘 기억했다가 레코드 가게에서 녹음한 카세트테이프의 즐거움은 유튜브가 다 빼앗아버렸다.
그런데 한편에서 생각하면, 그렇게 변하고 사라진 것은 사라진 대로 그리워하는 것과 그것을 향유하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일본에서는 1980년대 제작되었고, 대한민국에선 1990년대에 방영된 〈출동! 러쉬맨〉이란 애니메이션을 보면 이런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현재에서 미래로 간 주인공이 마지막 운행을 하는 신칸센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신칸센 하면 지금도 첨단인데, 미래사회엔 충분히 사라질 수 있으리라. 기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누군가에겐 쇳덩어리가 빠른 속도로 질주하니 공포로 느꼈을 수도 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기차 안에서 온갖 추억을 공유한다. 편지나 삐삐 같은 것이 가끔 그립기도 하지만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두고, 우리는 더 편하게 사용하는 수단을 찾아갈 것이다. 사실 이렇게 손쉽게 갈아탔기에 지난 것이 그리운 것이기도 하다. 우리 세대는 많은 것이 아날로그에서 급격하게 디지털로 전환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생각해보면, 아날로그는 아날로그대로 디지털은 디지털대로 좋다. 새롭게 등장하는 수단을 통해 소통하는 방식만 바뀌었을 뿐, 계속해서 마음을 나누고 정을 나누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