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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호 그림 없는 그림 이야기-2)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 ― 데카브리스트 이후 러시아의 근대정신 - 최광열

사무국
2026-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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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없는 그림 이야기-2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

― 데카브리스트 이후 러시아의 근대정신 ― 

  

최광열

기독교예술연구회 이사장

  

이 글은 알렉산드르 안드레예비치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19세기 러시아의 정치적 억압과 지성사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도덕적 저항’의 미학을 고찰한다. 데카브리스트 반란 이후 러시아 사회는 전제군주제와 검열 체제 아래에서 직접적인 정치 언어를 발화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시대적 조건 속에서 종교적 형상은 정치적 은유이자 윤리적 상징의 언어로 기능하였다.

이바노프는 20여 년에 걸쳐 완성한 이 작품에서 그리스도를 화면의 중심에 배치하면서도 지배적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인간 군상의 상이한 반응을 병치함으로써, 진리 앞에 선 인간의 자유와 선택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무력 봉기로 좌절된 데카브리스트의 정치적 이상이 종교적·도덕적 차원에서 지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시각적 증언으로 읽을 수 있다.

이 글은 이바노프를 단순한 종교화가가 아니라, 그리스도 형상을 통해 강요되지 않는 진리와 인내의 저항을 형상화한 예술가로 해석한다. 나아가 그의 작업이 이후 러시아 사실주의와 이동파 미술로 이어지는 정신적 토대를 형성하였음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예술이 권력의 도구를 넘어 시대의 양심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조명하고자 한다.

 

러시아 화가 알렉산드르 안드레예비치 이바노프(1806~1858)는 〈민중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그렸다. 지금까지 이런 미술 작품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압도적인 크기에 놀라게 된다. 물론 미술사에는 이보다 더 큰 그림도 있다. 틴토레토가 베네치아 도제궁에 그린 〈천국〉은 22×9m에 이르는 거대한 화면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 그림 앞에서 느끼는 놀라움은 단지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가 더 유명하다고 여겨 왔다. 씨앗을 많이 뿌려야 결실이 풍성해지듯, 예술도 그러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화가가 같은 작품을 여러 점 그린 경우는 많다. 화가가 특정 주제에 집착했을 수도 있고, 주문자의 수요가 많았을 수도 있으니 이를 탓할 일은 아니다. 더구나 예술가는 오랫동안 창작자라기보다는 고용된 장인으로 취급되었다. 적어도 르네상스 이전까지는 그러했다. 화가는 예술의 주문자인 권력과 종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고, 자신의 사상과 의지와 혼을 온전히 담은 작품에 몰두하는 일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이바노프는 〈민중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평생 씨름했다. 그는 20년이 넘는 세월을 이 한 작품에 바쳤다. 한 작품에 생애를 거는 일은,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걸 만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물론 다작이 곧 가벼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파블로 피카소(1881~1973)와 같은 화가들의 왕성한 창작열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미술사를 확장시켰다. 특히 루벤스와 피카소는 개인적 재능뿐 아니라 작업실과 협업 체계를 갖춘 생산 구조 속에서 활동했다.

반면 완성작이 많지 않은 화가들도 있다. 점묘법을 정교하게 완성한 조르주 쇠라(1859~1891)는 비교적 적은 수의 작품을 남겼고, 네덜란드 황금기의 얀 페르메이르(1632~1675) 역시 동시대 화가들에 비해 작품 수가 현저히 적다.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0) 또한 다작가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평생 한 작품을 붙들고 씨름한 이바노프의 선택은 더욱 놀랍다. 그는 양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았다. 대신 한 화면 속에 시대와 신앙, 인간의 내면을 모두 담아내고자 했다.

 

러시아의 정치 현실―구원이 절실한 사회

그러나 단순히 작품의 크기보다 이 그림에 담긴 이야기가 놀랍다. 이 그림을 이해하려면 19세기 초 러시아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러시아는 전제군주제와 농노제, 엄격한 검열 체제가 결합된 사회였다. 알렉산드르 1세와 니콜라이 1세로 이어진 통치는 겉으로는 안정되어 보였지만, 그 기반에는 정치 참여가 차단된 민중의 침묵과 억압이 자리하고 있었다.

1825년 12월 1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부 청년 장교들이 니콜라이 1세의 황제 즉위를 반대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이 사건이 이른바 ‘데카브리스트(12월) 반란’이다. 이들은 전제군주제의 폐지 또는 제한, 헌법 제정, 농노제 폐지, 법 앞의 평등을 요구하였다. 일부는 입헌군주제를, 일부는 공화정을 주장하였다.

데카브리스트 운동의 기원은 1816년 결성된 비밀결사 ‘구원동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폴레옹 전쟁을 수행하며 서유럽을 경험한 청년 장교들은 자유주의와 입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러시아의 정치 체제를 개혁하고자 조직을 결성하였다. 이는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조직된 정치 비밀결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더욱 중요한 것은, 특권을 누리던 귀족 계층의 일부가 스스로 자기 특권을 부정하였다는 점에서 뜻이 깊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황위 계승 문제가 불분명해졌다. 법적 계승 서열상 폴란드 총독으로 입헌군주제에서 통치 경험을 가진 황태자 콘스탄틴 파블로비치가 전제 군국주의자인 니콜라이 1세보다 러시아의 미래를 위해 유익하다고 생각하였다. 파블로비치가 즉위하면 헌법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도 가졌다. 하지만 파블로비치는 귀천상혼(貴賤相婚)을 하여 폴란드 총독으로 러시아 황제 계승권을 포기하였다.

결국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하였다. 그는 비밀경찰과 검열 제도를 운용하는 보수 반동 정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에 반대하여 봉기를 주도한 이들은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하고 참가자들은 시베리아 유배형에, 참가 부대는 해체되거나 전장으로 보내졌다.1) 이를 마음에 새긴 푸쉬킨은 〈시베리아에 보낸다〉를 썼다.2)

 

시베리아의 깊은 광맥 속에서

그대의 자긍심 어린 인내를 지켜라.

그대의 슬픈 노동은 헛되지 않으리니,

고귀한 사유의 열망 또한 사라지지 않으리라.

 

불행의 충실한 자매인 희망은

어두운 지하 감옥 속에서도

용기와 기쁨을 다시 깨울 것이며,

기다리던 그날은 반드시 오리라.

 

사랑과 우정은

음울한 감옥의 빗장을 지나

그대들에게 닿을 것이다.

나의 자유로운 목소리가

그대들의 유형지에 이르듯이.

 

무거운 사슬은 마침내 떨어지고

감옥은 무너질 것이며,

자유는 문 앞에서 그대들을 기쁨으로 맞이하리라.

그리고 형제들은

그대들의 손에 다시 검을 쥐어 주리라.

 

데카브리스트 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1861년에 이르러 농노제가 폐지되었고, 1905년에는 제한적 입헌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1917년에는 결국 제정 체제가 붕괴되었다. 데카브리스트는 시도 당시에 성공하지 못했으나, 러시아 근대 정치사에서 최초로 헌정과 자유를 공론화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이바노프―평생 한 점의 작품을 그린 화가

데카브리스트 반란 이후 러시아 지성 사회에는 날선 정치 발언이나 혁명 구호 대신 종교·도덕·역사의 언어로 우회하는 방식이 전개되었다. 민중의 자유 의지는 간고한 니콜라이 1세에 의하여 억눌렸지만,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 강처럼 복류천이 되어 지하를 흘렀다. 이 시기에 ‘그리스도’는 단순한 신앙 대상이 아니라, 정의·진리·심판·연대의 상징적 언어로 작동했다.

이바노프는 11살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카를 브률로프(1799~1852) 등과 함께 공부했다. 재학 중에는 크고 작은 상들을 받으며 주목받는 화가로 성장하였다. 학교를 졸업한 후 1830년 황실의 후원으로 로마 유학을 떠났다. 〈예수 그리스도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다〉(1834~1835)를 그려 로마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호평을 받았다. 러시아 제국예술원은 그에게 명예학위를 수여했다. 그는 성경에 담긴 보편적 가르침을 캔버스에 담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지오토를 비롯하여 마사초,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프라 안젤리코,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의 종교화를 심도 있게 연구했다.3)

로마에 체류하는 동안 조국에서 들려오는 답답하고 암담한 소식을 안타까워하며 성경의 서사를 통해 시대를 향한 질문을 제기하고자 하였다. 1837년부터 1857년까지 20년 동안 청춘을 다 바쳐 그린 작품이 바로 〈민중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다. 이바노프에게 이 작품은 단순한 대작이 아니라 그의 인생 자체였다. 그는 러시아 현실과 유럽 사상의 변화를 작품에 담고자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황실 유학생의 명예는 빼앗기고 불온한 반국가 세력으로 취급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불우한 생활을 연명하면서도 가슴에서 불타는 조국애는 식지 않았고 예술혼은 멈추지 않았다.

이바노프는 단순히 성경의 한 장면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를 대면하는 인간의 다양한 심리를 탐구하였다. 화면 속 인물들은 기쁨과 의심, 공포와 기대, 경외와 망설임 사이에서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인다. 이를 위해 그는 인물의 표정, 신체의 긴장, 빛의 각도와 색채의 변화까지 세밀하게 연구하며 600점이 넘는 습작과 드로잉을 남겼다. 이 집요한 준비 과정은 미술사에서도 드문 사례로 평가된다. 개별 습작들 또한 독립된 작품으로서 높은 완성도를 지닌다.

1857년 작품을 완성한 그는 거대한 캔버스를 들고 1858년에 고향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니콜라이 1세 사후의 비교적 완화된 분위기 속에서 귀국이 가능했다. 유럽을 가로질러 운반하는 과정은 힘들고 고단하였다. 그 과정에 이바노프는 병이 들어 독일에 머물며 한동안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 곧 도착한다’는 기사가 떴다. 하지만 정작 이 그림이 〈겨울궁전〉에 전시되었을 때 고국의 비평가들은 냉담했다. 그는 여전히 가난과 실망 속에 살다가 고국에 온 지 두 달 만에 콜레라로 숨졌다. 예술가가 당대에 호평 받지 못하는 게 다반사이기는 해도 애석하다.

그는 성공한 예술가의 전형처럼 다작(多作)하지 않았고, 미술사의 유행 유파를 따르지 않았으며, 궁중 취향에 영합하지도 않았다. 한 주제에 몰두하여 수백 점의 습작과 드로잉을 남겼다. 완성도만큼이나 완성에 이르는 과정의 진실성을 중시한 화가였다. 화려한 명성 대신 고독한 탐구의 길을 선택한 셈이다. 생전에 그의 작품은 대접받지 못했으나 그는 붓을 든 예언자였다.

사후에야 러시아 미술의 전환점을 마련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를 기점으로 러시아 미술은 모방과 형식의 미술에서 사실과 정신의 미술로 전환되었다. 신화와 종교의 한 장면을 이상화하는 유럽의 기교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과 사회 현실을 응시하는 태도가 강화되었다. 화가는 황실과 귀족의 주문을 수행하던 고급 기술자가 아니라 시대의 질문에 답하는 탐구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는 성공한 화가라기보다, 실패와 고독을 견디며 한 시대의 윤리를 끝까지 밀어붙인 예술가였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격언이 그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민중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조용히 다가오신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요한복음〉 1:29)

캔버스 중앙에서 약간 왼쪽, 십자가를 든 세례자 요한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요단강에서 백성에게 세례를 베풀던 그는 멀리서 다가오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긴장하면서도 확신에 찬 어조로 외친다. 그에게서 구약과 신약을 잇는 선구자이자, 진리를 선포하는 ‘광야의 소리’로서의 책임감이 느껴진다. 요한의 뒤편으로는 훗날 예수의 제자가 될 요한과 베드로, 안드레가 호기심과 경외, 설렘이 뒤섞인 표정으로 스승의 메시지에 반응하고 있다. 그 왼쪽에는 이바노프의 예술적 동반자였던 작가 니콜라이 고골이 눈을 내리감은 채 서 있다. 작품 제작 기간 내내 화가의 곁을 지켰던 그에게선 시대적 고뇌를 짊어진 지성인의 절망과 한계가 읽힌다. 세례자 요한 앞쪽 나무 그늘 아래, 붉은 모자를 쓰고 관람객과 시선을 맞추는 이는 화가 자신인 이바노프다.

그 대칭점에는 젖은 옷을 들고 있는 노예와 아이가 있다. 막 요단강에서 세례를 마친 그들의 표정에는 생경한 위로와 기대가 어려 있다. 이바노프는 이 인물 묘사에 각별한 공을 들였는데, 이는 데카브리스트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갈구했던 러시아 민중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화면 중앙의 부유해 보이는 이들 역시 방금 세례를 마친 모습이다. 몸을 돌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남자는 아마도 오른쪽 노예들의 주인인 듯하다. 그는 진리를 마주하는 데 있어 신분의 차별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의 나신(裸身)은 단순한 신고전주의적 이상화를 넘어, 진리 앞에 단독자로 선 인간의 본질과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상징한다. 그 왼편에는 늙고 병든 노인과 그를 부축하는 젊은이가 대조를 이룬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젊든 늙든 인간은 누구나 운명적으로 진리와 대면해야 함을 시사한다.

화면 오른쪽에는 전혀 다른 인간 군상이 자리한다. 전통 가치와 기득권을 중시하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다. 기존의 질서에 안주하는 그들은 새로운 가치의 등장을 반기지 않는다. 메시아의 출현 소식에 비웃음을 짓거나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낸다. 더러 고개를 돌려 그리스도를 살피는 이도 있다. 멀리 보이는 군인들 또한 말 위에서 방관자적인 태도로 예수를 바라보지만, 감히 말에서 내려 그리스도에게 다가가지는 않는다.

화면 오른쪽에는 우거진 나무가 있고 멀리는 피어오르는 안개 위로 거대한 산이 있다. 나무에는 오래되어 생명력을 잃은 가지가 있는가 하면 연한 새잎도 있다. 나무는 그리스도를 긍정하는 이들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고 그 숲속에는 진리를 갈구하는 이들의 절규가 숨어 있다. 신에 의해 창조된 자연은 인류가 이룬 문화의 근간이 되었다. 이런 자연을 배경으로 캔버스 중심에는 맨발의 그리스도가 민중에게 천천히 다가오신다. 작품의 주인공이지만 이바노프는 그리스도를 배경처럼 멀리 배치하였다. 갈릴리에서 30년을 인내하며 지내다가 마침내 세상 밖으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다. 그리스도는 요한처럼 외치지 않는다. 그저 침묵하며 다가올 뿐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세상을 마주하는 방식이다. 그는 진리를 수용하려는 이들과 의심과 무관심에 갇힌 이들 사이로 걸어 들어온다. 하늘에 속한 존재가 불완전하고 세속적인 땅 위로 천천히 발을 내딛고 있다.


이동파 미술―역사에 섬은 없다

지금까지 이런 미술은 없었다. 미술은 언제나 권력의 편이었으며, 그 자리는 늘 왕과 종교, 그리고 물질 사이에 존재했다. 미술의 주제는 주로 성공과 영웅담이었고, 거부할 수 없는 종교적 교리였다. 그 시선 끝에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의 자리는 없었다. 러시아 미술의 도상에서 그리스도 역시 언제나 군림하는 왕이자 엄격한 심판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바노프는 이 작품에서 진리를 마주한 인간 군상의 반응을 포착했다. 인물들의 얼굴에는 진리 앞에 선 인류의 다양한 태도가 투영되어 있다. 환희와 희망이 서려 있는가 하면, 한편으론 의심과 두려움, 무관심과 적대감이 교차한다.

데카브리스트 혁명에 담긴 지성인의 도덕적 저항 정신은 이바노프에게로 이어졌다. 그는 봉기 이후 성인이 된 세대로서 혁명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그 시대적 공기 속에서 성장하며 정치 언어 대신 예술의 언어로 그 정신에 동참했다. 〈민중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에는 극적인 기적도 거창한 혁명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중앙에 서 있으나 화면을 압도하며 지배하지 않고, 모든 민중이 그를 메시아로 알아보는 것도 아니다. 진리는 강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바노프는 간파한 것이다.

이러한 이바노프의 예술혼은 다음 세대에 이르러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이반 크람스코이(1837~1887)는 이바노프의 도덕적 엄격함을 계승하여 〈광야의 그리스도〉(1872)를 그렸고, 일리야 레핀(1844~1930)은 인물들의 심리 묘사를 극대화하여 러시아 민중의 삶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것이 바로 ‘이동파 미술’이다. 이동파가 ‘민중 속으로 들어간 미술’이라면, 이바노프는 ‘그리스도를 민중의 한가운데 세우려 한 선구자’였다. 이바노프가 없었다면 이동파의 탄생이 가능했을지 의문이 들 만큼, 1863년 태동한 이동파의 정신적 토양은 이미 그에 의해 비옥해져 있었다. 대다수 예술이 신화와 영웅, 이상화된 종교에 매몰되어 있을 때 배고픈 민중과 소외된 다수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화가가 있었다는 사실은 반갑고도 경이롭다.

세상일에는 맥락이 있고 지향점이 있다. 오늘날의 나는 과거 누군가가 지켰던 지성과 고집에 기대어 존재한다. 문화와 역사에 고립된 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뜻을 이루었다고 오만할 것도 아니고,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다.


1) 데카브리스트는 실패하였으나 러시아는 1861년에 농노제가 폐지되었고, 1905년에 입허 개혁이 이루어졌고, 1917년에는 체제가 붕괴되었다.

2) 이 시는 시베리아로 유형된 데카브리스를 향한 위로가 아니라 패배 이후에도 폐기할 수 없는 자유의 약속을 환기시킨다.

3) Tretyakov Gallery Magazine, “THE APPEARANCE OF CHRIST TO THE PEOPLE: A Life-long Enterprise”, https://www.tretyakovgallerymagazine.com/ (접속일: 2026.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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