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ᄋᆞᆯ의 소리

우리 자신을 모든 역사적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격을 스스로 닦아내기 위해 일부러 만든 말, 씨ᄋᆞᆯ

씨ᄋᆞᆯ의 소리 보기

(300호 작은 목소리) 함석헌을 읽는다 - 박상률

사무국
2026-04-06
조회수 30

작은 목소리

 

함석헌을 읽는다

  

박상률

작가

  

함석헌을 읽는다. 우리에게 함석헌은 ‘읽기’의 대상이다. 그러나 함석헌은 결코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의 문장이 난해해서도 아니고, 그의 사상이 복잡해서도 아니고, 그의 인간됨이 신비스러워서도 아니다.

그는 한 마디로 무어라 규정되지 않기에 그를 읽기가 쉽지 않다. 하나의 무엇으로 규정되지 않는 사람. 함석헌은 그런 사람이다. 교육자인가 하면 종교가이고, 종교가인가 하면 언론가이고, 언론가인가 하면 사회운동가이고, 사회운동가인가 하면 철학자이고, 철학자인가 하면 시인이고, 시인인가 하면 사상가이다. 도대체 그는 하나의 무엇으로 잡히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 그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모였다. 혼자 어려우면 둘이, 둘이 어려우면 셋이서 해보기 위해서였다. 오래전인 1994년 7월에 우리는 첫 모임을 가졌다. 그 모임엔 20대부터 50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때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함석헌에 대해 ‘외경심’을 지니고 있었다. 각자 지니고 있는 그 외경심이 바탕이 되어 한 달에 한 번씩 정기 모임을 갖기로 쉽게 뜻을 모았다.

그렇게 해서 ‘함석헌사상연구회’가 탄생했다. 그러나 모임의 명칭만큼 거창하게 함석헌 사상을 ‘연구’하는 건 아니었다. 이 모임에선 무엇보다도 《함석헌전집》 20권을 다 읽어보기로 했기 때문에 독본을 가지고 한 줄 한 줄, 아니 한 자 한 자 빼지 않고 읽는 걸 최우선으로 했다. 바쁜 사정이 있어 못 나오는 사람이 있어도 최소한 두 사람이 나왔으면 읽기는 계속했다.

 97157cbd67393.png

《함석헌전집》 장서본 전20권. 한길사, 1993.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신문도 시조창 하시듯 목청을 길게 빼며 소리 내어 읽으셨다. 오랫동안 나는 글은 그렇게 읽어야 하는 줄 알았다. 예전 서당에서 학동들이 《천자문》을 배울 때엔 새가 조잘거리듯 소리 지르며 몸을 앞뒤로 흔들며 외웠다. 그런데 학교가 생기면서 그런 낭독이 없어지고 눈으로 읽는 묵독이 글 읽기의 전부인 양 치부되었다.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학교에선 국어책을 학급 전체 아이들이 함께 소리 내어 읽었는데…….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면 머릿속에 더 잘 들어온다. 문장을 빼먹지도 않는다. 어색한 문장은 금세 드러난다. 그런데 속도 경쟁에 치여 낭독이 없어져 버렸다. 나는 낭독의 장점을 알기에 글을 쓰고자 하는 내 학생들에게 자기가 쓴 글을 반드시 소리 내어 읽게 하였다. 소리 내어 읽는 건 혼자 읽는 게 아니다. 노래를 합창 하듯 글을 같이 읽게 된다.


《함석헌전집》 스무 권을 소리 내어 읽는 모임을 한 까닭도 그런 경험이 작용했다. 기본 텍스트를 한 글자도 빼지 않고 읽으려면 무엇보다도 소리를 내어 읽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권 읽는 데 3년 걸렸다. 3년이라 하면 무척 오랜 시간인 성싶지만 혼자였다면 3년 아니라 30년 걸려도 못 읽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한두 권 읽다 그만두었을지도. 하여튼 혼자가 아닌 여럿이어서 가능했다. 여럿이 함께 모여 한 달에 한두 번 무작정 읽었다. 우스갯소리로 이 글을 읽은 사람은 저자와 편집자뿐일 텐데, 이제 우리도 있다고 했다!

무슨 일이든 혼자서는 하기 힘들다. 항심을 오래도록 갖고 있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 선방에선 도반 힘으로 같이 한다고 한다(아주 근기가 센 수행자라면 혼자도 가능하겠지만). 소싯적 절에서 지낼 때 108배, 1,080배, 3,000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여럿이 하면 할 수 있으니까 어려워하지 마시오!” 하던 스님의 말씀이 귓전을 울린다. 다른 사람의 힘에 기대어 나를 끌고 가는 느낌. 동료의 힘을 믿고서.

뻘밭에 놓인, 미끌미끌한 광주리에 잡아놓은 게들이 탈출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지? 게 한 마리는 절대 광주리를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게 여러 마리가 뭉치면 가능하다. 게들은 본능적으로 서로 어깨동무하듯 다리를 걸고 얽어서 광주리를 탈출한다.


함석헌, 그의 생애는 20세기 초부터 시작해 줄곧 조국의 변화와 같이 했다. 20세기의 간단치 않은 이 땅의 현실은 곧바로 함석헌의 삶 속에도 그대로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한평생 들사람으로 들사람 일을 주장하고 구현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 땅의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는 그가 있어야 할 자리, 그가 해야 할 일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들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었고, 들사람 일을 구체적 모습으로 드러내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함석헌은 여러 모습으로 이야기된다. 어떤 모습으로 말해지든 그는 기본적으론 들사람이다. 그가 종교가이면서도 어느 한 울타리에 갇힌 성직자가 아니고 동양의 노장사상에서 서양의 기독교에 이르기까지 두루 막힘없는 모습을 보여주듯 특정한 교단의 종교가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종교가이다. 또 그가 교육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기성 교육제도의 틀에서 보면 결코 교육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역시 교육자이다. 그뿐인가. 그를 역사가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는 결코 연대기 위주의 어려운 역사 논문을 쓴 적도 없고, 그런 논문을 해당 학회에 발표한 적도 없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권위 있는’ 역사가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가다.

왜 그런가? 그는 기존의 제도, 기존의 고정관념 속에 자신을 묶어 두려 하지 않고 언제나 들사람으로 살려 했기 때문이다. 들사람으로 살아야 들사람 얼을 볼 수 있고, 누릴 수 있고, 그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들사람 얼이 있어야 이 세상 모든 것이 참되리라 여겼다. 물론 참된 것은 곧 진리이다.

들사람 얼, 함석헌은 그걸 위해 90 평생을 살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터이다. 종교를 가졌지만 종교가가 아니고, 가르침을 베풀었지만 교육자가 아니고, 역사를 풀어내고 얘기했지만 역사가가 아니면서, 또 종교가이고 교육자이고 역사가인 것은 그가 들사람으로 살았고 들사람 일을 무엇보다도 위에 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e8bc9bb701539.png

 함석헌 회갑 사진. 1961. 3. 13.


중국에 가면 노신이 있고, 영국에 가면 토인비가 있고, 인도에 가면 간디가 있고, 러시아에 가면 톨스토이가 있고, 미국에 가면 소로가 있고, 일본에 가면 우치무라가 있다. 그리고 한국에 오면 함석헌이 있다. 그러나 함석헌은 한국의 노신, 한국의 토인비, 한국의 간디, 한국의 톨스토이, 한국의 소로, 한국의 우치무라가 아니다.

함석헌은 어쩌면 그들 모두를 합해 놓은 인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순히 산술적 합이 아니다. 그들이 지닌 각각의 장점과 특기와 사상을 함석헌이라는 들사람 속에 녹여서 지니고 있다.

함석헌은 동서양을 넘나드는 사상과 철학과 문장을 지녔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면 그는 재주 있는 사람으로 천수를 누린 노인으로밖에 기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나고 자라서 묻힐 이 땅의 고난에 대해 누구보다 염려하고 고민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그 방안이 과격하지 않고, 그 방안이 부박하지 않고, 그 방안이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함석헌은 한평생을 고민하고 사색하고 실천했다. 그래서 그러한 결과로 20권의 전집을 비롯한 저작물을 남겼다. 때로 그의 글에 대해 논리적이지 못한 낭만적 감상이니 하며 폄하하려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말을 듣는 건 함석헌이 서재에만 틀어박혀 많은 참고도서를 들춘 뒤 남의 말을 정연하게 엮어서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함석헌은 책을 보고 글을 쓴 게 아니었다. 그는 깊은 사색의 결과로 나온 걸 직관적으로 썼고, 또 청중을 앞에 두고 말하듯이 입말 투로 썼다. 그래서 함석헌의 글은 학자들이 쓴 글처럼 기호 풀이가 아니다. 자신이 생각한 것만을, 자신이 아는 것만을 자신만의 문장으로 ‘휘갈겨’ 놓는다. 그렇게 휘갈겨 놓은 글이기에 가끔은 억지 논리가 있는 듯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직관은 사소한 논리를 넘어서기에 그의 글은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설득력을 얻는다. 간혹 사색의 날개가 우주와 동서고금을 종횡으로 날다 보면, 그의 글이 낭만주의 풍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글에서 허무주의나 패배주의의 냄새가 나는 일은 없다.

그의 글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앞에 사람을 앉혀 놓고 말하듯이 쓰는 입말 투라는 것과 순우리말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데에 있다. 그래서 그러한 게 어려운 문장 글에 중독된 지식인에겐 오히려 낯설고 부담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가령 이런 글.


죄인을 모조리 잡아 혁명 재판에 부치고 나를 바로 잡고 사회를 깨끗이 했거니 하는 마음은 풀을 낫으로 베고 다 됐거니 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마음이다. 혁명이 매양 풀 베는 낫같이 분주하면서 기실 한 일이 없이 실패하고 마는 것은 그 보복주의, 숙청주의, 독선주의, 결과 어서 보자는 강제획일주의 떄문이다. 혁명은 돌을 다루는 것 아니라 자유 있는, 자존심 있는 인간을 다루는 것이요, 풀을 베는 것이 아니라, 인심의 깊은 데서 나오는 죄를 베는 것이 아니라 뽑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뿌리를 뽑으려 해보라. 그 뿌리가 땅 속에서 한데 얽힌 것을 발견할 것이다. 나를 내놓고 어떻게 죄 처분을 하느냐? 그리고 죄 처분을 못하고 누구를 상 주며 누구를 벌 주고 무슨 제도를 새로 지으며 어떤 인물을 쓰느냐? 그러므로 혁명은 반드시 국민적 회개가 돼야 한다. 국민이 다 스스로 책임감을 느끼고 역사적 죄악을 제 몸에서 아프게 슬프게 회개를 해서만 새 역사를 지을 감격과 지혜가 나온다. 회개 아니 한 민족 가지고 아무 것도 못한다.―함석헌, 〈인간혁명〉 부분

 

2017년 여름을 달구었던, 1980년 광주 5·18을 다룬 영화 〈택시 운전사〉의 주인공 김만섭이 늘 흥얼거려 영화의 주제곡이라 할 수 있는 가수 조용필의 노래 〈단발머리〉. 노래 단발머리에 “비에 젖은 풀잎처럼 단발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라는 구절이 나온다. 단발머리를 곱게 빗은 게 마치 비에 젖은 풀잎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풀잎은 여리고 청순한 이미지로 나타내진다. 더구나 비에 젖어 머리통에 단정하게 착 달라붙은 모습은 더욱 청초한 모습일 터. 그래서 비극을 다룬 영화의 주제가로 쓰인 듯하다. 단지 노래가 유행하던 그 시절을 나타낸 것 이상으로…….

일찍이 함석헌은 〈할 말이 있다〉라는 글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못 되는 사람이라 했다. 그저 사람일 뿐이라 했다. 그런데 함석헌이 이르는 사람은 민중이다. 그러면서 민(民)은 민초(民草)라며, 풀 같은 것이라고 했다.

 

나는 풀이다. 들에 가도 있는 풀, 산에 가도 있는 풀, 동양에도 있는 풀, 서양에도 있는 풀, 옛날에도 그 풀, 지금도 그 풀, 이 담에도 영원히 그 풀일 풀 [……] 나는 사람들 중의 풀이지, 아름드리 나무도, 나는 새도, 달리는 짐승도, 벌레도, 고기도 아니다. 내가 썩어 그 나무가 있고 내가 먹혀 그 노래, 그것, 그 날뜀이 있건만, 언제 그렇다는 소리 한 마디도 하지 않더라. 그래도 또 먹히고 또 썩는 나지만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흙을 먹고 살아 남의 밥이 될지언정 누구를 내 밥으로 하지는 않는다. 모든 생명의 밑에 깔렸건만 또 아무리 잘 나고 아름답고 날고 긴다 하던 놈도 내 거름으로 돌아오지 않는 놈도 없더라. [……] 밟아도 밟아도 사는 풀, 베어도 베어도 또 돋아나는 풀, 너는 무한의 노래 아니냐? 다 죽었다가도 봄만 오면 또 나는 풀, 심은 이 없이 나는 풀, [……]―함석헌, 〈할 말이 있다〉 부분


함석헌은 자신을 풀에 빗대고 나아가 민중을 풀에 빗댔다. 민중을 풀에 빗댄 시를 쓴 시인은 많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조기조 시인의 〈풀의 기술〉이라는 시의 끝부분에 늘 고개를 끄덕인다.

 

[……]

풀처럼 살아라

내가 이기지 못한 것은 저 풀밖에 없다.

―조기조, 〈풀의 기술〉 부분

 

평생 땅농사를 짓다 보니 몸 여기저기가 망가져 이젠 농사를 못 짓는 시인의 어머니. 그 어머니가 시인에게 풀처럼 살라고 한다. 자신이 평생 이기지 못한 건 풀뿐이라고……. 그도 그럴 것이 논농사든 밭농사든 일단은 잡초라 하는 풀과의 싸움이다. 하지만 풀은 매고 돌아서면 그 뒷날 또 나 있다. 그래서 또 매야 한다. 함석헌은 그래서 베어도 베어도 또 나는 풀이라 했고, 심은 이도 없는데 나는 풀이라 했다.

농부들이 베거나 매는 풀은 잡초라 한다. ‘잡초는 없다’지만 농부 자리에서 보면 잡초는 농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 거치적거리는 ‘훼방꾼’이다. 그래서 시인의 어머니는 자식에게 풀처럼 살라고 했다. 끈질긴 생명력이 감탄스러웠을 터.

연약해 보이지만 끈질긴 풀의 생명력. 그래서 풀을 곧잘 민중으로 여긴다. 굳세기도 하지만 연약하고, 연약하지만 굳세기도 한 풀. 그래서 풀은 곧잘 보통 사람을 이르는 민초(民草)가 되기도 한다. 힘없는 ‘민초’들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도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 민초는 거대한 존재가 아니다. 풀처럼 사나운 바람이 불면 눕는다. 하지만 사나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기도 한다. 결코 풀은 나약하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민초는 힘이 세다!

 


5e5157b52ff05.png


ea94f5182b084.jpg


23c7bd4ae9d47.jpg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