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말한다
역사적 진실 규명을 향한 정직한 역사학자의 고투
백승종, 《원균의 진실》(논형, 2025)
김영
인하대 명예교수, 민사네 공동대표
백승종 교수의 지적 활동과 정의의 실천 노력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기록하고 당시 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포폄(褒貶)을 목표로 한다. 중국의 문호 노신도 자신이 글을 쓰는 목적은 진실을 쓰는 것이라고 하였고, 1970년대 젊은이들의 사상적 은사였던 리영희 선생도 자신은 기존의 허위의식과 가면을 쓰고 있는 우상을 깨뜨리고 이성의 빛으로 사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지당하고 맞는 말씀이다. 문제는 누가 어떤 문제의식으로 역사적 사건과 과제를 선택하며, 그 과제를 해명함에 있어 어떤 자료와 역사적 문헌에 의지하고 있느냐 하는 데 있다.
대학과 대학원 수학 시절 송준호 선생과 이기백 선생 같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의 훈도를 받고 실증적 문헌분석과 올바른 역사연구 방법을 전수받은 백승종 교수(이하 백 교수로 줄임)는 동서고금의 학문을 포섭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가서 넓은 학문의 세계를 접하며 연구의 폭과 수준을 비약시켰다. 백 교수는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 기존의 정치경제사 위주의 일국사적 관점을 확장하여 생활사, 미시사, 생태와 기후 환경에 대한 전망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연구 시야를 가지고 《상속의 역사》, 《신사와 숙녀》, 《제국의 시대》, 《해월 최시형》을 비롯한 개성적인 저작을 펴냈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으로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을 정도로 30여 권의 왕성한 저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근년에는 격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전망하는 전방위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왕성하게 수행하고 있다.
백 교수와 서평을 쓰는 필자는 전공이 역사와 문학으로 다르고 출생 지역과 공부한 학교도 상이했지만 백 교수의 개성적인 책들을 주목해 오다가, 근년의 역사 퇴행적인 정권의 무모한 행태에 함께 저항하면서 많이 배우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지로서의 연대감을 느끼며 서로를 일깨우고 있었다. 이런 학문적 실천적 동지로서 백 교수는 나이로는 필자보다 조금 후배이지만 학문적 성실성과 정의를 향한 열정은 늘 앞서갔다. 이번에도 백 교수는 이 부족한 필자의 《저항과 성찰》을 보고 《씨ᄋᆞᆯ의소리》 지면에 〈어둠의 심연을 건너 새벽을 연 지성의 기록〉이라는 서평을 써서 기고한다기에, 지난달에 출간된 무려 1,108쪽에 달하는 방대한 백 교수의 역작 《원균의 진실》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국문학/한문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역사적 식견이 부족하지만 그동안 한 지식인으로 수불석권(手不釋卷)의 생활은 유지해왔기에, 무딘 붓이나마 이 석학 동지의 저작을 읽고 느낀 소감을 두서없이 적어, 백 교수의 진실과 공정에 대한 열정과 끊임없이 공부하고 올바른 글을 써서 역사의 정의를 구현하려는 학자로서의 자세를 응원하고자 한다.
왜곡된 원균에 대한 기록 재검토
백 교수는 독일의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다가 귀국 후 자리잡은 평택에서 왕성한 저술활동과 교양 강좌를 해왔는데, 그곳 출신인 원균에 대한 교양 강의를 하면서 원균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서술이 왜곡되었음을 발견하고, 미시사가(Microhistorian)로서 역사적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기존의 사료와 기록들을 깊숙이 검토하여 원균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을 수년간 진행하여 이렇게 방대한 저작을 간행하였다.
백 교수는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실록, 정탁의 〈신구차〉, 유성룡의 《징비록》, 이순신의 《난중일기》, 〈원균 행장〉, 〈원균 선무공신교서〉, 〈이충무공 유사〉와 같은 사료와 문헌을 집중적으로 재검토하여 원균에게 씌워진 간신 이미지와 부정적 평가는 당시 남인들의 ‘이순신 영웅 만들기’의 반대급부로 ‘원균 악역 만들기’의 일환으로 왜곡된 것이었음을 밝힌다.
먼저 백 교수는 엘리트 무장 원균의 활약과 업적을 발굴하여 재조명한다. 원균은 경상우수영의 선봉장으로서 연합함대를 결성하여 초기 해전의 승리에 기여하였으며, 통제사 시절 기문포에서 수군의 전투력을 끌어올려 일본군을 상대로 압도적 승리를 거둔 용기 있고 공세적 명장이었다는 것을 논증했다. 원균은 통제사 부임 이후 단 4개월 만에 가용 판옥선을 180여 척으로 늘리는 경이로운 성취를 거두었다. 그리고 통제영의 직할부대를 강화하는 제도 개편을 단행하고, 수군 내에서 계파를 초월해 능력 있는 인재를 요직에 배치하여 전투력을 증강하고 조직의 안정을 위한 지도력을 발휘했다.(《원균의 진실》 제3부 참조. 앞으로 ‘이 책’으로 줄임)
칠천량 해전 패배의 진실 규명
원균에게 씌워진 가장 큰 낙인은 칠천량 해전에서의 패배였다. 원균은 이 전투에서 이억기, 최호 등과 함께 순국하였는데, 그 원인 중의 하나가 도원수 권율과 도체찰사 이원익의 보고에 따라 선조가 원균 등 수사들이 명령을 어긴다며 비망기를 내린 데서 비롯되었다. 선조는 부산포 전투에서 돌아오면 군공이 있더라도 반드시 단죄하겠다고 승지에게 명백히 선언했다. 이러한 왕의 단죄 방침은 전선의 사령관들에게 돌아올 길이 없는 배수의 진을 치게 만든 심리적 사형 선고였다. 이는 원균과 이억기 등이 승산 없는 전투에서 후퇴하지 못하고 끝까지 싸우다 전사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말하자면 칠천량의 참화는 현장의 실상을 외면한 중앙 조정의 공포 정치가 빚어낸 비극적 결과였다.
권율이 명령에 불응한다는 이유로 원균의 부관을 붙잡아 곤장을 때리는 대장(代杖)을 가했다는 사실도 빠뜨릴 수 없다. 이는 통제사의 자존심을 짓밟고 강제로 사지에 내모는 행위였으며 원균은 위압에 못 이겨 출전했다. 따라서 칠천량의 참패는 현장의 전문적 판단을 무시한 중앙 정치의 탁상공론이 부른 국가 시스템의 실패였다. 선조 역시 나중에 원균이 처음부터 가려 하지 않았는데 권율이 독촉하여 그 지경이 되었다고 자책했다. 패전의 책임은 현장 지휘관이 아닌 무리한 작전을 종용한 중앙 정부와 상급 지휘관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돌아오면 처벌하겠다는 협박 속에서 원균은 죽음으로써 자신의 충성을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참전 규모와 생존 장수들의 기록을 분석한 결과 함선의 상당수가 온전히 보존되었음이 증명되었다고 하면서, 칠천량에서의 사건은 정면 해전의 패배라기보다 ‘퇴각 중의 참사’로 재정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원균은 현장에서 승산이 없음을 판단하고 철수를 결정했으나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것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원균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당시 해군의 양대 장수
백 교수는 정부 공식 문서인 〈선무공신교서〉 분석을 통해서 원균이 이순신, 권율과 대등한 반열의 ‘선무 1등 공신’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조정은 원균이 왜선 130여 척을 격파하고 수급 237급을 베었다는 구체적인 전공을 명시하기도 했다. 선조는 이 교서를 통해 원균을 중국의 명장 주유나 장료에 비유하며 그의 지혜와 용기를 극찬했다. 한 달에 세 번이나 승전보를 전해왔다는 기록은 그가 수군을 승리로 이끈 주역임을 국가가 공인했음을 보여준다. 조정은 이순신과 원균을 조선 수군을 떠받친 양대 산맥으로 인식했다.
사나운 도적들이 난리를 꾀하자 당나라 조정은 서쪽으로 피란하였고, 진나라의 문물도 남쪽으로 건너갔노라. 내(선조)가 의지한 바는 경(원균)과 이순신이 서로 의기를 합하고 규모를 크게 함이었다. [……] 경이 전후로 왜선을 격파한 것이 130척에 이르렀고 적의 목을 벤 것은 수백 명이었노라. [……] 우리 군대의 명성이 경으로 말미암아 더욱 높아졌고 군기와 사기 또한 한층 드높아졌다.―〈원균 선무공신교서〉, 이 책 481~482쪽에서 재인용.
그래서 선조는 이순신과 함께 원균에게도 포상 규정을 동일하게 적용하여 선무 1등 공신의 품계를 내려주었다.
당파에 따른 인물 평가와 왜곡
당시의 재상이었던 유성룡은 자신의 실책을 방어하기 위해 비난의 화살을 원균 개인에게 돌리는 전략을 취했다. 그는 원균을 무능하고 비겁한 인물로 설정하여 이순신을 천거한 자신의 안목을 정당화하려 했다. 원균이 전함을 수장시키고 도망쳤다는 《징비록》의 서술은 실록의 기록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왜곡이다. 유성룡은 남인 정권의 실책을 덮기 위해 원균을 역사적 희생양으로 삼는 정치적 장치를 동원했다.
윤휴는 이순신을 성자로 찬양하기 위해 원균을 비겁하고 사악한 인물로 묘사하는 왜곡 서사를 구축했다. 원균이 도망치려 하자 이영남이 칼을 뽑아 협박했다는 자극적인 설화는 윤휴가 날조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지배 이념이 성리학적 가치관에 맞는 ‘유장(儒將)’ 중심으로 군부를 재편하면서 원균은 서서히 배제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집권 세력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 이순신을 완벽한 충신의 표상으로 이상화했다. 영웅 만들기는 필연적으로 악인을 필요로 했고 성격이 거칠었던 무장 원균이 희생양이 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원균을 옹호했던 북인 세력이 몰락하고 이순신을 지지한 남인과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며 기록과 기억이 왜곡되었다. 남해안에 원균의 사당이 전무한 까닭은 승자가 독점한 기억의 폭력이 빚어낸 역사적 배제였다.
하지만 백 교수는 이 책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가 특정 1인의 공이 아닌 연합 함대의 성과였음을 밝혀냈다. 한산대첩 등 주요 승전은 원균, 이순신, 이억기 삼도 수사가 긴밀히 협력하여 이뤄낸 결과였다는 것이다. 후세에 이순신 중심으로 역사가 재구성되면서 원균을 비롯한 다른 장수들의 공적은 의도적으로 지워졌다. 조선이 전라도를 보전하고 일본의 작전을 좌절시킨 근본 원인은 수군의 유기적인 연합 작전에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유교국가인 조선국의 발전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숭문(崇文)을 앞세우고 나라의 보위를 위해서는 상무(尙武)의 명장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선조는 공신 책봉을 할 때에 원균은 탁월한 명장으로, 이순신을 조선의 자존심을 드높인 성인 반열의 영웅으로 높였다.(〈이순신 선무공신교서〉, 이 책 496쪽 참조)
왜곡된 인물평을 바로잡는 것은 역사를 올바로 쓰는 길의 시작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우리 역사가 지닌 다층적인 면모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과정이다. 칠천량 패전의 책임을 이미 순국하여 스스로를 도저히 변호할 수 없는 원균에게 모두 떠넘긴 것이 조작의 시작이었다. 당시 조정은 패전의 비난 화살을 돌릴 대상이 절실히 필요했고 원균은 가장 적절한 표적이 되었다. 원균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움으로써 조정의 권위는 유지될 수 있었고 영웅 서사의 선명성은 극대화되었다.
백승종 교수는 수년간의 집중적인 연구를 거쳐 완성된 이 《원균의 진실》에서 원균이 국가 시스템의 실패를 가리기 위해 역사적으로 학대당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잘못된 정보를 직접 수정하고 역사 인식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은 민주 시민의 소중한 역할이다. 원균의 진실을 찾는 작업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편향된 텍스트와 가짜 뉴스를 걷어내는 과정의 일부라 할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인물을 평가함에 있어 선인과 악인, 영웅과 패장이라는 이분법에 빠지기 쉽다. 인간에 대한 평가도 시대마다 달라지고 역사적 사건도 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옳고 그름을 가리고 역사의 발전을 평가하는 기준은 달라진다.
그러나 다수의 이익이 아니라 소수 특권세력의 이익을 옹호하거나, 발전과 변화가 아니라 기득권 옹호와 소수의 특권 유지를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실제 사실에 대한 공정한 기술과 한 인물의 공과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보다 나은 미래와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필수적인 작업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승종 교수의 《원균의 진실》이 우리 학계와 시민사회에 준 진실과 공정이라는 화두는 묵직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 책을 말한다
역사적 진실 규명을 향한 정직한 역사학자의 고투
백승종, 《원균의 진실》(논형, 2025)
김영
인하대 명예교수, 민사네 공동대표
백승종 교수의 지적 활동과 정의의 실천 노력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기록하고 당시 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포폄(褒貶)을 목표로 한다. 중국의 문호 노신도 자신이 글을 쓰는 목적은 진실을 쓰는 것이라고 하였고, 1970년대 젊은이들의 사상적 은사였던 리영희 선생도 자신은 기존의 허위의식과 가면을 쓰고 있는 우상을 깨뜨리고 이성의 빛으로 사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지당하고 맞는 말씀이다. 문제는 누가 어떤 문제의식으로 역사적 사건과 과제를 선택하며, 그 과제를 해명함에 있어 어떤 자료와 역사적 문헌에 의지하고 있느냐 하는 데 있다.
대학과 대학원 수학 시절 송준호 선생과 이기백 선생 같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의 훈도를 받고 실증적 문헌분석과 올바른 역사연구 방법을 전수받은 백승종 교수(이하 백 교수로 줄임)는 동서고금의 학문을 포섭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가서 넓은 학문의 세계를 접하며 연구의 폭과 수준을 비약시켰다. 백 교수는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 기존의 정치경제사 위주의 일국사적 관점을 확장하여 생활사, 미시사, 생태와 기후 환경에 대한 전망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연구 시야를 가지고 《상속의 역사》, 《신사와 숙녀》, 《제국의 시대》, 《해월 최시형》을 비롯한 개성적인 저작을 펴냈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으로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을 정도로 30여 권의 왕성한 저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근년에는 격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전망하는 전방위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왕성하게 수행하고 있다.
백 교수와 서평을 쓰는 필자는 전공이 역사와 문학으로 다르고 출생 지역과 공부한 학교도 상이했지만 백 교수의 개성적인 책들을 주목해 오다가, 근년의 역사 퇴행적인 정권의 무모한 행태에 함께 저항하면서 많이 배우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지로서의 연대감을 느끼며 서로를 일깨우고 있었다. 이런 학문적 실천적 동지로서 백 교수는 나이로는 필자보다 조금 후배이지만 학문적 성실성과 정의를 향한 열정은 늘 앞서갔다. 이번에도 백 교수는 이 부족한 필자의 《저항과 성찰》을 보고 《씨ᄋᆞᆯ의소리》 지면에 〈어둠의 심연을 건너 새벽을 연 지성의 기록〉이라는 서평을 써서 기고한다기에, 지난달에 출간된 무려 1,108쪽에 달하는 방대한 백 교수의 역작 《원균의 진실》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국문학/한문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역사적 식견이 부족하지만 그동안 한 지식인으로 수불석권(手不釋卷)의 생활은 유지해왔기에, 무딘 붓이나마 이 석학 동지의 저작을 읽고 느낀 소감을 두서없이 적어, 백 교수의 진실과 공정에 대한 열정과 끊임없이 공부하고 올바른 글을 써서 역사의 정의를 구현하려는 학자로서의 자세를 응원하고자 한다.
왜곡된 원균에 대한 기록 재검토
백 교수는 독일의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다가 귀국 후 자리잡은 평택에서 왕성한 저술활동과 교양 강좌를 해왔는데, 그곳 출신인 원균에 대한 교양 강의를 하면서 원균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서술이 왜곡되었음을 발견하고, 미시사가(Microhistorian)로서 역사적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기존의 사료와 기록들을 깊숙이 검토하여 원균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을 수년간 진행하여 이렇게 방대한 저작을 간행하였다.
백 교수는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실록, 정탁의 〈신구차〉, 유성룡의 《징비록》, 이순신의 《난중일기》, 〈원균 행장〉, 〈원균 선무공신교서〉, 〈이충무공 유사〉와 같은 사료와 문헌을 집중적으로 재검토하여 원균에게 씌워진 간신 이미지와 부정적 평가는 당시 남인들의 ‘이순신 영웅 만들기’의 반대급부로 ‘원균 악역 만들기’의 일환으로 왜곡된 것이었음을 밝힌다.
먼저 백 교수는 엘리트 무장 원균의 활약과 업적을 발굴하여 재조명한다. 원균은 경상우수영의 선봉장으로서 연합함대를 결성하여 초기 해전의 승리에 기여하였으며, 통제사 시절 기문포에서 수군의 전투력을 끌어올려 일본군을 상대로 압도적 승리를 거둔 용기 있고 공세적 명장이었다는 것을 논증했다. 원균은 통제사 부임 이후 단 4개월 만에 가용 판옥선을 180여 척으로 늘리는 경이로운 성취를 거두었다. 그리고 통제영의 직할부대를 강화하는 제도 개편을 단행하고, 수군 내에서 계파를 초월해 능력 있는 인재를 요직에 배치하여 전투력을 증강하고 조직의 안정을 위한 지도력을 발휘했다.(《원균의 진실》 제3부 참조. 앞으로 ‘이 책’으로 줄임)
칠천량 해전 패배의 진실 규명
원균에게 씌워진 가장 큰 낙인은 칠천량 해전에서의 패배였다. 원균은 이 전투에서 이억기, 최호 등과 함께 순국하였는데, 그 원인 중의 하나가 도원수 권율과 도체찰사 이원익의 보고에 따라 선조가 원균 등 수사들이 명령을 어긴다며 비망기를 내린 데서 비롯되었다. 선조는 부산포 전투에서 돌아오면 군공이 있더라도 반드시 단죄하겠다고 승지에게 명백히 선언했다. 이러한 왕의 단죄 방침은 전선의 사령관들에게 돌아올 길이 없는 배수의 진을 치게 만든 심리적 사형 선고였다. 이는 원균과 이억기 등이 승산 없는 전투에서 후퇴하지 못하고 끝까지 싸우다 전사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말하자면 칠천량의 참화는 현장의 실상을 외면한 중앙 조정의 공포 정치가 빚어낸 비극적 결과였다.
권율이 명령에 불응한다는 이유로 원균의 부관을 붙잡아 곤장을 때리는 대장(代杖)을 가했다는 사실도 빠뜨릴 수 없다. 이는 통제사의 자존심을 짓밟고 강제로 사지에 내모는 행위였으며 원균은 위압에 못 이겨 출전했다. 따라서 칠천량의 참패는 현장의 전문적 판단을 무시한 중앙 정치의 탁상공론이 부른 국가 시스템의 실패였다. 선조 역시 나중에 원균이 처음부터 가려 하지 않았는데 권율이 독촉하여 그 지경이 되었다고 자책했다. 패전의 책임은 현장 지휘관이 아닌 무리한 작전을 종용한 중앙 정부와 상급 지휘관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돌아오면 처벌하겠다는 협박 속에서 원균은 죽음으로써 자신의 충성을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참전 규모와 생존 장수들의 기록을 분석한 결과 함선의 상당수가 온전히 보존되었음이 증명되었다고 하면서, 칠천량에서의 사건은 정면 해전의 패배라기보다 ‘퇴각 중의 참사’로 재정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원균은 현장에서 승산이 없음을 판단하고 철수를 결정했으나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것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원균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당시 해군의 양대 장수
백 교수는 정부 공식 문서인 〈선무공신교서〉 분석을 통해서 원균이 이순신, 권율과 대등한 반열의 ‘선무 1등 공신’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조정은 원균이 왜선 130여 척을 격파하고 수급 237급을 베었다는 구체적인 전공을 명시하기도 했다. 선조는 이 교서를 통해 원균을 중국의 명장 주유나 장료에 비유하며 그의 지혜와 용기를 극찬했다. 한 달에 세 번이나 승전보를 전해왔다는 기록은 그가 수군을 승리로 이끈 주역임을 국가가 공인했음을 보여준다. 조정은 이순신과 원균을 조선 수군을 떠받친 양대 산맥으로 인식했다.
사나운 도적들이 난리를 꾀하자 당나라 조정은 서쪽으로 피란하였고, 진나라의 문물도 남쪽으로 건너갔노라. 내(선조)가 의지한 바는 경(원균)과 이순신이 서로 의기를 합하고 규모를 크게 함이었다. [……] 경이 전후로 왜선을 격파한 것이 130척에 이르렀고 적의 목을 벤 것은 수백 명이었노라. [……] 우리 군대의 명성이 경으로 말미암아 더욱 높아졌고 군기와 사기 또한 한층 드높아졌다.―〈원균 선무공신교서〉, 이 책 481~482쪽에서 재인용.
그래서 선조는 이순신과 함께 원균에게도 포상 규정을 동일하게 적용하여 선무 1등 공신의 품계를 내려주었다.
당파에 따른 인물 평가와 왜곡
당시의 재상이었던 유성룡은 자신의 실책을 방어하기 위해 비난의 화살을 원균 개인에게 돌리는 전략을 취했다. 그는 원균을 무능하고 비겁한 인물로 설정하여 이순신을 천거한 자신의 안목을 정당화하려 했다. 원균이 전함을 수장시키고 도망쳤다는 《징비록》의 서술은 실록의 기록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왜곡이다. 유성룡은 남인 정권의 실책을 덮기 위해 원균을 역사적 희생양으로 삼는 정치적 장치를 동원했다.
윤휴는 이순신을 성자로 찬양하기 위해 원균을 비겁하고 사악한 인물로 묘사하는 왜곡 서사를 구축했다. 원균이 도망치려 하자 이영남이 칼을 뽑아 협박했다는 자극적인 설화는 윤휴가 날조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지배 이념이 성리학적 가치관에 맞는 ‘유장(儒將)’ 중심으로 군부를 재편하면서 원균은 서서히 배제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집권 세력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 이순신을 완벽한 충신의 표상으로 이상화했다. 영웅 만들기는 필연적으로 악인을 필요로 했고 성격이 거칠었던 무장 원균이 희생양이 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원균을 옹호했던 북인 세력이 몰락하고 이순신을 지지한 남인과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며 기록과 기억이 왜곡되었다. 남해안에 원균의 사당이 전무한 까닭은 승자가 독점한 기억의 폭력이 빚어낸 역사적 배제였다.
하지만 백 교수는 이 책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가 특정 1인의 공이 아닌 연합 함대의 성과였음을 밝혀냈다. 한산대첩 등 주요 승전은 원균, 이순신, 이억기 삼도 수사가 긴밀히 협력하여 이뤄낸 결과였다는 것이다. 후세에 이순신 중심으로 역사가 재구성되면서 원균을 비롯한 다른 장수들의 공적은 의도적으로 지워졌다. 조선이 전라도를 보전하고 일본의 작전을 좌절시킨 근본 원인은 수군의 유기적인 연합 작전에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유교국가인 조선국의 발전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숭문(崇文)을 앞세우고 나라의 보위를 위해서는 상무(尙武)의 명장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선조는 공신 책봉을 할 때에 원균은 탁월한 명장으로, 이순신을 조선의 자존심을 드높인 성인 반열의 영웅으로 높였다.(〈이순신 선무공신교서〉, 이 책 496쪽 참조)
왜곡된 인물평을 바로잡는 것은 역사를 올바로 쓰는 길의 시작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우리 역사가 지닌 다층적인 면모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과정이다. 칠천량 패전의 책임을 이미 순국하여 스스로를 도저히 변호할 수 없는 원균에게 모두 떠넘긴 것이 조작의 시작이었다. 당시 조정은 패전의 비난 화살을 돌릴 대상이 절실히 필요했고 원균은 가장 적절한 표적이 되었다. 원균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움으로써 조정의 권위는 유지될 수 있었고 영웅 서사의 선명성은 극대화되었다.
백승종 교수는 수년간의 집중적인 연구를 거쳐 완성된 이 《원균의 진실》에서 원균이 국가 시스템의 실패를 가리기 위해 역사적으로 학대당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잘못된 정보를 직접 수정하고 역사 인식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은 민주 시민의 소중한 역할이다. 원균의 진실을 찾는 작업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편향된 텍스트와 가짜 뉴스를 걷어내는 과정의 일부라 할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인물을 평가함에 있어 선인과 악인, 영웅과 패장이라는 이분법에 빠지기 쉽다. 인간에 대한 평가도 시대마다 달라지고 역사적 사건도 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옳고 그름을 가리고 역사의 발전을 평가하는 기준은 달라진다.
그러나 다수의 이익이 아니라 소수 특권세력의 이익을 옹호하거나, 발전과 변화가 아니라 기득권 옹호와 소수의 특권 유지를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실제 사실에 대한 공정한 기술과 한 인물의 공과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보다 나은 미래와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필수적인 작업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승종 교수의 《원균의 진실》이 우리 학계와 시민사회에 준 진실과 공정이라는 화두는 묵직한 것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