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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호 씨ᄋᆞᆯ 이야기) 듣는 문화와 보는 문화 ―〈요한복음〉 2장 13~16절, 10장 35절, 〈고린도전서〉 12장 1~2절 말씀을 함께 나누며 - 장익근

사무국
2026-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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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ᄋᆞᆯ 이야기

 

듣는 문화와 보는 문화

―〈요한복음〉 2장 13~16절, 10장 35절, 〈고린도전서〉 12장 1~2절 말씀을 함께 나누며 ― 

  

장익근

목사, 미국 거주

  

히브리-셈족인 유대인은 안전이 지속된다는 보장 없이, 항상 새롭게 도전하는 유목민의 텐트 생활을 하였습니다. 양떼들을 몰고 계속 새 풀이 자라는 장소로 옮겨야 했던 유목민족 유대인들은 창고를 지어서 곡식을 쌓아둘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날 다 함께 나누어 먹어야 하는 역동적·수평적 공동체의 삶, 바로 기독교 정신의 원형을 이루는 삶을 살았습니다.

인격적 관계로, 수평적으로 지속되던 삶이 점점 유목민에서 농경민으로 정착이 되면서 계급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안전이 지속되면서 신도수가 많아지니까, 대제사장, 제사장, 레위인 등 수직적 계급이 생겼습니다. 결국 평등한 수평적 인격공동체, 듣는 문화가 무너지고, 점점 수직적 권위적 지배로, 보는 문화로 변질되었습니다.

제사장과 평민, 천민간의 인격적 관계는 불가능합니다. 결국 약한 자를 착취하는 지배계급이 정착되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지은 죄를 회개하는, 대 속죄일이 며칠 계속됩니다. 평민들이 소나 양을 성전으로 데려와서 불에 태우면 그 뿜어 나오는 연기와 더불어 그동안 지은 죄를 용서받는다는 제식입니다. 유월절에도 번제물을 태우는 제사가 7일간 계속됩니다. 종교의 탈을 쓴, 조공을 바치는 세금 형태입니다.

나중에는 번제물을 다 태우지 않고, 기름만 태우고 고기는 제사계급과, 예루살렘을 지키는 로마군인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먼 거리에서 소나 양을 돌밭길을 데려오다가 다리에 상처가 나면, 제사장들이 성스러운 제물로 바칠 수 없으니, 상처 없는 성한 것으로 사오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는 비둘기를 번제물로 바쳤습니다. 어떨 때는 무엇을 먹여 키웠는지 모르니, 성전에서 정한 음식 먹여 키운 제물을 다시 사오라는 착취행위가 이루어집니다.

유월절 7일 동안, 예루살렘은 로마 점령 군인들의 엄호 아래 제물들을 사고파는 장사꾼들로 난장판을 이룹니다.

예수가 죽음을 각오하고, 대 제사장이 있는 유대권력과 로마권력의 심장부인 예루살렘에서 유대교의 수직적 착취의 고리를 끊고, 수평적 평등의 공동체를 회복하려고, 성전에 뛰어 들어, 성전을 정화시킨 광경이 〈요한복음〉 2장 말씀입니다.

여러분, 박물관이나 미술 전시회에는 들으려고 갑니까? 보려고 갑니까? 보려는 공간으로 가지요. 그리고 시간을 정해 놓고 갑니까? 아무 때나 갑니까? 보는 문화는 아무 때나 전시돼 있는 그림이나 조각 골동품들을 조용히 시간관계 없이 공간에서 감상합니다.

이것이 희랍 또는 헬라 그리스의 해양 농경문화이고, 동적이 아닌 정적으로 보는, 공간문화, 시각문화입니다.

노예나 천민을 부리면서 창고를 짓고 곡식을 저장하고 생을 한껏 즐기는 농경민의 귀족들은, 대리석으로 비인격적인 제우스신을 조각하여 거대한 동상을 만들고, 화려한 예술 작품들을 만들어, 조용히 그것을 감상하는 자들은, 생각에 생각을 골똘이하며, 실체 없는 추상명사들을 만들어냅니다. 그 추상명사를 예배하고 웅장한 건물 안에 화려한 예술품들 속에서 감동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적 시각문화, 보는 문화가 발전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절에, 말 못하는 비인격적 조각 우상을 경배하는 이방인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농경민들은 상하 관계로 귀족 평민 천민들이 서로 따로 어울리기 때문에 공동체가 없는 수직적 지배집단입니다. 그곳에는 일대일의 인격적 만남이 불가능합니다.

말을 바꾸어서,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였습니다. 교회공동체는 웅장한 건물 조각 예술품이 필요 없습니다. 〈마가복음〉 4장 23절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음악 감상이나 강연회 또는 교회에는 들으러 갑니까? 보려고 갑니까? 들으러 가지요. 아무 때나 갑니까? 시간 정해 놓고 갑니까? 시간 맞추어 가야 합니다. 그래서 듣는 문화는 시간문화, 동적인 청각문화라 합니다.

교회공동체는 갑과 을의 수직적 농경민의 관계가 아니라 갑과 갑의 다 함께 창조적 생성에 참여하는 수평적 유목민의 인격적 관계입니다. 그래서 인격신이 가능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약성서는 유목민들의 시간적 듣는 문화로, 활력이 넘치는 말씀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 서신은 그리스 농경 해양민들의 공간적, 보는 문화에 영향을 받아서, 논리적·추상적 부분들이 섞여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역사적 기원에 대해 딱할 정도로 호기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성서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자기 민족 유대인을 죽이지 말라는 아주 구체적인 명령입니다. ‘네이웃’과 관련된 모든 계명들은 똑같이 배타적 민족주의입니다. ‘네 이웃’은 유대인뿐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는 유대교의 배타적 편견을 깨버리고 유대인이 아닌, 선한 사마리아인을 통해서, 세계인을 향해서 평등과 자유의 성숙함을 갈릴리공동체에서 실천했습니다.

예수가 온 몸으로 실천한, 인류의 선구자적 갈릴리공동체는, 로마황제의 숭배를 거부하는 불법단체로 지목받고, 예수는 십자가 처형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로마의 지속적인 박해에서도,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온 열정을 쏟아 목숨 바쳐, 300년간 수평적 초대교회, 갈릴리공동체의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박해의 고난 속에서 지내오다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313년 밀라노 칙령, 325년 니케아 신경,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380년 데살로니카 칙령 등, 로마황제들의 특별한 배려와 혜택을 받았습니다.

로마황제들이 예수의 갈릴리공동체의 세계인을 향한 사랑 나눔의 깊은 뜻에 감명을 받아서 혜택을 준 것은 결코 아닙니다. 드넓은 로마의 점령지역을 질서 있게 관리하는 데 정치적으로 악용한 것뿐입니다.

기원전 27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는 로마황제의 칭호를 받고 기원후 180년까지의 200년간은 ‘팍스 로마나 시대’, 평화와 법과 질서가 잘 잡혀 있던 로마제국의 가장 찬란한 전성기였습니다. 그 이유는 600명의 원로원들이 황제들의 혈연이 아닌, 가장 유능한 인물을 뽑아 황제의 양자로 삼아 제위를 물려주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후계자를 선택하던 전통을 지켜오다가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좋은 전통을 깨고, 낭비와 사치, 향락에 빠져 있던 친아들 콤모두스에게 제위를 물려줌으로써, 로마의 긴 몰락의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무능한 아들 콤모두스 황제가 3개월 만에 암살당하자, 그해 일 년 사이에 다섯 명의 황제가 등장했다가 사라졌습니다.

드디어 로마는 능력이나 혈통이 아닌, 군대의 힘으로 황제가 결정되는 혼란 속에 빠졌습니다. 제국의 여러 점령지역 군단이, 자신들의 장군을 황제로 추대하므로, 끊임없는 내전의 연속이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암울한 군인황제 시대로, 어떤 때는 50년 사이에 25명의 황제가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판국이었습니다.

변방의 넓은 점령지역을 다스리는 장군들의 세력이 강해지고, 로마황제의 지위가 점점 불안해지는 어지러운 시대에 피점령지역의 고트족, 프랑크족, 게르만족들은 변방의 군인들과 땅을 공동으로 차지하였습니다. 국경을 지키는 다민족의 힘이 로마의 시민군보다 훨씬 힘이 커진 300년경에, 콘스탄티누스 장군이 내전의 소용돌이 결전 속에서, 변방 다민족의 힘을 누르고 황제가 됐습니다.

기독교가 귀족층으로 점점 퍼져 들어가니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가 303년 대규모 기독교 탄압 칙령을 내려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박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당할수록 귀족층을 파고드는 힘이 더 강해지니까, 드디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의 강한 응집력을 제국 통일에 이용하려고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습니다.

오랫동안 탄압받던 기독교가 통일된 교리가 없었으므로, 황제의 힘으로 터키에 있는 니케아에 주교들을 불러 모아, 예수를 인간이라 주장하는 아리우스파를 모두 제거 참수하고, 예수를 신으로 숭배하는 아타나시우스파의 교리를 325년 정통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황제도 자동적으로 왕권신수설, 즉 신적 존재로 지위를 격상시켜, 무너져가는 제국의 기둥을 다시 세워 보려고 하였습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380년 데살로니카 칙령을 선포하여, 그동안의 신앙의 자유로 번성하던 모든 로마의 토호 종교들을 철폐하고 기독교만을 국교로 선포하여, 혼란한 로마제국의 정신적 통일을 꿈꾸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토호 타종교를 말살하고 기독교를 황제교회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황제가 교회에 드넓은 땅을 제공하고 돈을 퍼 부었으니, 종래에는 교황이 황제와 맞먹는 권위와 힘을 가지게 됐습니다. 인격의 만남으로 시작되던 수평적 교회공동체 원형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교황이라는 권위 밑에 수직적 지배계급으로 이교도들을 학살하고, 교리를 비판하면 화형을 서심 없이 자행했습니다.

황제교회를 이어받은 천주교는 보는 문화로, 말 못하는 많은 그림과 조각 형상들을 성전 안에 화려하게 꾸며 놓고, 신도들에게는 듣는 시간은 짤막하게 5분만 각론하고, 유대교의 번제물을 태우듯이 연기를 뿜어 휘날리고, 성수를 뿌리면서 주로 시각적 제식만 올리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수직적 지배계급으로 변질된 천주교는 면죄부를 사고파는 부패가 깊어지자,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으로, 시각에서 청각으로, 예수의 말을 읽고 들음으로 실천하는 듣는 문화로, 변화된 삶으로 예수를 따르려는 열정을 쏟아냈습니다.

루터는 1534년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사제만 읽던 성경을 평신도도 읽을 수 있도록, 종교개혁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천주교와 같은 화려한 성전이 필요 없이 아무데서나 성경의 말을 듣고 찬양하면 거룩한 예배가 된다는 초대교회의 수평적 갈릴리공동체를 회복시켜 실천했습니다.

500년이 지나는 동안 기독교는 다시 비대해지고 권위적 수직적 지배계급으로 변하면서, 신도들의 헌금으로 부동산 투기하는 집단 등으로 사회적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천년의 황제교회의 잔악한 전통을 붙들고, 자유평등의 가치를 전파하는 초대교회의 공동체정신을 또다시 무너뜨렸습니다.

예수를 신으로 모시면, 우리는 엎드려 경배만 해야 합니다. 예수와 인격적 만남이 불가능합니다. 말끝마다 왕으로 오신 예수, 왕이신 예수를 경배하라, 왕 왕 하는 황제교회의 썩은 전통의 노예근성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설교 시간에 성경을 뒤적이며 지혜의 근거를 찾아 설명들 하는데, 세계 어느 종교, 어느 고전에 다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오직 성경에만 있는 진리는 없습니다.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황제교회 껍데기 안에 갇혀 있는 사기꾼들입니다. 장로교의 종교개혁자 칼빈의 예정설 등 허구 많은 교리들을 가지고 거품을 품고 미쳐 날뛰는 광신도들도 황제교회의 노예들입니다.

칼빈은 1539년 인구 일만삼천 명의 적은 도시 제네바에서, 4년 동안 종교법원을 주관하면서, 58명을 자기의 교리를 비판한다고, 황제교회에서 배운 그대로, 화형 참수한 극악무도한 살인자입니다. 칼빈의 이단 처형이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시대의 잘못이라 주장합니다. 그 당시 제네바 시민들의 반대가 없었다고 변명합니다. 그리고 칼빈이 죽은 사람들을 위해 무릎 꿇고 눈물 흘리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라도 그가 생명을 죽인 살인마라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35만 개의 교회 중에, 일 년에 일만오천 개의 교회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백 년이 넘는 전통의 유수한 신학교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한국도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자유로운 질의응답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하고, 정답에만 매몰됐던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갈 엄두도 못 내고, 능력도 없습니다. 천년 묵은 황제교회의 썩은 전통을 붙들고, 목사는 일방적으로 말하고, 청중들은 듣고 믿기만 하는 권위적인 관습 안에서는 질문하고 토론하는 창의성은 불가능합니다.

웅장한 뼈 죽당 건물은 황제교의 부산물입니다. 제가 평양에서 살다 1948년 서울 와서 처음 본 웅장한 조선총독부 중앙청의 권위와 압제의 위용에 기가 죽어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대형 건물 조각 예술품이 주는, 보는 문화로 안도감을 느끼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한국의 대형교회는 미국처럼 이제 곧 텅 빈 콘크리트 무덤으로 변합니다.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200명 이하의 수평적 소형교회로, 진심어린 마음으로 질문과 토론을 통해 함께 답을 찾아가는, 듣는 문화로 전환될 것입니다.

옛날 라디오만 있을 때는, 연속극을 듣고, ‘아! 껴안을 것이다’, ‘도망갈 것이다’, 잡다한 여러 가지 그 나름대로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들었었는데, TV가 나오고 부터는 몽땅 다 보여주니까 상상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그냥 멍청히 앉아 눈만 뜨면 됩니다.

이제는 인터넷을 넘어서, 가장 적절한 지식을 제공하는 AI라는 대답하는 도구를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AI가 대신할 수 없는 창의적 활동, 질문하고 토론하고 생각하는 묻는 교회로, 그리고 독창성과 주체성을 갖고 수동적 소비자에서 주체적 창조자로 성장해야 AI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AI의 학습 대상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 역사의 답습이기 때문에, 1,700년의 황제교 전통은 AI가 다 흡수해 버렸으니, 의미 없는 과거 전통을 과감히 청산해야 합니다. 새로운 교회는 미래만 남아 있습니다. 솔직하고 자유로운 독서클럽의 회복과, AI를 활용하지 않은 창작물을 만들어가는 소형교회로 발전한다면 많은 젊은이들이 염원하는 뜨거운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300년 전 왕정시대에는 ‘국민이 주인이다’라고 주장하면, 역모죄로 사형당했습니다. 200년 전에는 여성은 직업을 가지지 않는 것이 우주의 섭리라 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1920년에 비로소 여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됐습니다.

2, 3백 년 사이에 피 흘린 시민운동으로 쟁취한 왕정 청산, 인권 쟁취라는 시대의 격변기가 남녀평등을 만들어냈습니다. 지금 시시각각 변하는 대전환의 시대를 맞았는데도 1,700년 전 황제교가 만든 ‘니케아신경’, 그 원시 야만의 언어를 지금도 차렷 자세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박사라는 인간들이 교회 문턱을 들어서면 원시인으로 변절되는 것,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꽃처럼 순간순간 새롭게 피어나야 사람입니다. 맨날 똑같은 것 되풀이하는 사람, 어떤 틀에 박혀 황제교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사람은 죽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전지전능한 신으로 예배드리는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요한복음〉 15장 15절의 ‘예수와 나는 동등한 인간이며 친구’라는 말을 설교 본문으로 사용하는 목사를 못 봤습니다. 예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닙니다. 이웃이 슬퍼하면 같이 슬퍼하고 기쁘면 같이 기뻐하는, 그리고 그 범위를 넓혀 나가고, 타인의 삶을 고무시켜 용기를 주는 우리들 친구입니다.

칸트 이후의 많은 철학자들은, 신은 시공을 초월한 우리 의식 넘어 있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말할 언어가 아니라고 정의 내렸습니다. 많은 현대 철학자들은 하나님은 명사가 아니고 형용사나 감탄사라고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스적 신(Theos) 개념의 본질은, 주어로 사용한 적이 없고 항상 술부나 형용사로 사용해야 하는 독특성이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신은 사랑이다”와 같이 신을 주어로 사용하지만 헬라어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그들의 사랑은 인간의 한계성을 넘어서는 그 무엇, 신적인 것이다.” 이처럼 ‘Theos’는 형용사로 사용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감격의 최대치입니다.

그 감격의 언어는 일 년에 한두 번 사용하는 것입니다. 말끝마다 하나님을 불러대면 이솝 이야기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이 됩니다. 30분 설교에 감탄사 ‘하나님’을 다섯 번 사용하면 95점이고, 50번 사용하면 결국 50점짜리 설교가 됩니다. 100번 불러대면 광신도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선언하는 사람들, 기도한 대로 세상이 자기 뜻대로 돌아간다고 기뻐하는 자들, 모두 죽은 인간들입니다. 구원받고 행복해지고, 변화를 멈춘 인간은 망합니다. 완성된 삶이란 없습니다. 구원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내 몸 안의 온 우주가 춤추고 있습니다. 춤추고 있다는 말이 잘 이해가 안 되지요?

음파가 고막을 1초에 수백에서 수만 번 진동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진동으로 인하여 세계 80억 인구의 목소리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허파에 가스 교환하는 폐포(Alveolus)가 양쪽에 모두 4억 개가 있습니다. 0.1m 두께인 폐포의 벽은, 들여 마신 수십 가지의 공기들 중에 산소만이 단층세포막을 통과시켜, 미토콘드리아에 산소를 공급합니다. 다른 기체가 빠지면 그 자리에서 직사합니다. 거꾸로 나올 때는, 들어온 산소는 붙잡아두고, 탄산가스만 빠져나옵니다. 광활한 우주보다 내 몸 속이 더욱 신비합니다. 그러니 내 몸 안에서 온 우주의 신비가 춤추고 있습니다.

서울 와보니 그 많던 등산 회원은 다 떠나고, 엊그제 세 명이 북한산을 올랐습니다. 우주 나이 138억 년의 광활한 별들 사이에서, 46억 4천만 년 역사의 먼지만한 지구 위에서, 소중한 영광된 생명을 받았습니다. 전철 계단을 오르내리며, 내가 지금 숨을 쉬고 걸을 수 있다는 감격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5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이라 하였습니다. 동학의 핵심교리 ‘인내천(人乃天)’, ‘내가 하늘이다’,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는, ‘인간의 형상대로 하나님 창조’와 같은 언어입니다.

여러분들이 습관처럼 매일같이 불러대는 흔해 빠진 하나님 언어보다 신비한 내 생명이 몇 천억 배 더 소중합니다. 하나님 언어보다 내 피 한 방울이 더 소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임박해서야 ‘내가 우주의 주인이었구나!’ 깨닫고 죽는 답니다. 우주의 주인이면 내가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선포했습니다. 이 말은, 살아있는 거룩한 내 신비의 생명 축제에 몰입하라는 선포입니다.

우주의 주인 나는, 기나긴 역사 위에 있고, 말 못하는 모든 자연 위에 있습니다. 내가 직면한 모든 고난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이, 신비한 내 몸, 거룩한 내 생명의 시간을 털끝만치도 상처낼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십시오. 거룩한 생명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낸 대표적 인물이 미국의 장애인 작가 헬렌 켈러이며, 이씨 조선의 이순신이며, 대한민국의 이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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