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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호 특별 기고) 주권자 혁명의 길, 인민의 권력·인민의 지배 ― 지방선거는 정치적 내전이며 그 축은 내란세력 척결의 완성이다 -김민웅

사무국
2026-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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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주권자 혁명의 길, 인민의 권력·인민의 지배

― 지방선거는 정치적 내전이며 그 축은 내란세력 척결의 완성이다 ― 

 

김민웅

촛불행동 상임대표

 

봄날은 간다

4월, 봄이 시작되면 짙은 슬픔부터 밀려온다. 1948년 그해, 우리는 제주 4·3의 통곡을 마주했다. 섬을 뚫고 솟아오르고 내려 흐르는 산하(山河)에 아비규환(阿鼻叫喚)의 비명소리 가득했고 태양은 잔인하도록 침묵했다. 아이들이 뛰놀던 들길은 그대로 처형장이 되었으며 형체를 알아볼 길 없는 시신이 널브러진 무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바다는 수장(水葬)으로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으니, 그건 사실 장례 한번 제대로 치르지 못한 “지옥의 수장(水藏)”이었다.

그날은 아직도 자신의 이름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인민항쟁과 학살 사이에서 이름 하나 적히지 못한 백비(白碑)는 죽은 자처럼 누워있다. 하지만 그건 알고 보면 4월이 올 때마다 포승줄에 꽁꽁 묶여 계곡으로 끌려가는 자의 모습이 되어 몸부림친다.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내 이름은〉은 그 비통한 역사를 여지없이 꿰뚫고 있다. 자기 이름을 스스로 모르는 채 하고 살아야 그나마 생존이 가능했던 시절의 절규가 기억의 창고에서 세상 밖으로 결국 뛰쳐나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미군정이 유일한 합법정부였던 시절에 그들이 지휘한 “초토화 전략”이라는 제주에서의 인간 말살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의 킬링필드였고 반인류범죄인 제노사이드의 피어린 기록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재일 작가 김석범 선생의 《화산도》는 해방이 된 후 일제와 임무를 교대한 미군정의 폭압적인 현실을 고발한다. 그건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점령의 시작이었고 탄압과 학살, 그리고 전쟁이 예비된 시간이었다. 해방된 나라 주권자 인민의 권리는 불법이 된 것이다. 지배자만 교체되고 그 하수인들은 그대로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이듬해 1949년 6월 6일 미국이 그토록 좌절시키려 했던 반민특위가 이승만의 계략으로 움직인 친일경찰들에게 공격당하고 20일 뒤인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기어이 암살당한다. 친일매국 세력의 이른바 “6월 총공세”였다.(그 6월 6일은 훗날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하는 의미를 숨긴 채 ‘현충일’이 된다.) 멸망해야 할 자들이 득세를 했고 독립투쟁의 경력은 훈장이 아니라 도리어 죽여도 된다는 표적이 되었다. 친일매국 세력이 자신들의 비루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매달린 것은 오로지 하나, “빨갱이 학살”이었다. 그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일제 총독부와 미군정이 이들 친일매국 세력의 몸에서 합체가 되어 괴물 키메라가 출몰했다. 이들 키메라의 먹잇감은 민족해방의 역사와 미래였다. 얼핏 이념투쟁인 듯했으나 사실은 식민지해방투쟁의 민족사에 대한 총공세였다. “빨갱이”의 진정한 정체는 다른 무엇이 아닌, 그 민족사에 대한 친일매국 세력의 공격과 폭력의 무자비한 호명이었던 것이다. 미국이 진격명령을 내리고 친일매국 세력이 수행한 이 나라의 냉전은 그렇게 민족해방의 길을 틀어막았다.

세월이 지나 이 참혹한 역사와 다시 끈질지게 싸운 것이 다름 아닌 4·19혁명이요, 5·18광주민중항쟁이며 마침내 오늘의 촛불혁명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권자 혁명”으로 가는 길이요, 민주주의와 자주가 하나 되는 역사를 가로막는 현실에 결정적 돌파구를 열어내는 위업이다. 그야말로 인민의 권력을 뜻하는 민주주의(데모스-크라티아/Demos-Kratia/Democracy)의 진군이자, 인민의 지배를 확정해나가는 혁명의 괄목할 만한 진화의 과정이다.

봄은 왔으되 봄도 빼앗기고 땅도 빼앗겼던 시절의 통한은 그래서 이제 마무리되어야 한다. 노래 〈봄날은 간다〉를 채 마치기도 전에 바람처럼 지나가버린 봄날을, 하여, 이제 더는 아쉬워하지 말자. 그런 비극의 봄날은 가고 새로운 봄이 와야 한다. 우리의 투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어느 세력에 대한 반대자나 지지자 정도로 머문 역사는 단연코 과거지사다. 국민주권 시대라는 이름 아래 주권자 인민의 참 주인되는 역사는 이제 비로소 진정 시작이기 때문이다.


촛불 휘날리며 ― 광장이 일상인 주권자 정치

촛불행동은 여전히 촛불광장을 지키고 있다. 이 글을 쓰는 5월 초, 벌써 190차가 되어가고 있다. 4년이 넘는 시간이다. 그 사이에 내란정권은 종식을 고했다.

그러니 “아직도 촛불을 들고 있는가? 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내란수괴 윤석열도 감옥에 집어넣었고 이제 더 할 일은 없는 것이 아닌가. 이재명 정부가 잘하고 있는데 뭘 또 그리 애를 쓰는가? 믿고 열심히 지지하고 응원하면 될 일일 텐데 촛불을 드는 건 불필요한 수고가 아닌가? 때로 비판도 하던데 그래 가지고는 이재명 정부에게 도움이 되겠는가. 이런 종류의 것들이다.

현실을 직시해보자. 내란수괴 윤석열과 그 일당을 일단 진압한 이후에도 내란세력의 준동은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촛불광장이 해산되는 순간, 내란세력의 기세는 더욱 드세질 것이며 땅속에 갇힌 줄로 알았던 내란의 밤은 다시 눈을 번쩍 뜨고 인적이 드문 길에 난데없이 나타난 귀신처럼 우리에게 달려들 것이다. 그건 역사가 입증한다.

10년 전 문재인 정부가 촛불혁명의 정신에 따른 촛불정부를 자임했다가 3개월이 지나자 적폐청산 피로도요 뭐요 하면서 촛불혁명의 정신을 슬그머니 내려놓은 결과가 무엇이었던가? 주권자 국민은 지지자로서의 임무만 다하면 모든 것은 기존의 정치가 알아서 할 것이라고 했던 그 기대와 신뢰는 철저하게 배신당하고 만다. 내란을 일으킨 윤석열 정권은 “문재인 정부의 윤석열 엄호” 아래, “촛불광장이 사라진 공간”에서 등장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문재인 정부의 책임만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었다. 주권자 자신의 책무를 완성시키는 정치적 자각과 실천이 확고하고도 완강하게 이뤄지지 못한 결과였다. 이 뼈저린 교훈이 휘발되면 내란세력의 재기와 득세는 비현실적 서사가 결코 아니다.

문재인의 이름 끝을 따서 “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했던 그 시기의 언사는 정치적 애정의 극단적 표현이면서도 당시로서도 그렇고 지금 보면 더더욱 얼마나 어이없었던 것인가. 주권자의 뜻과 명령을 받들어 정치를 하라고 강력하게 명령을 내려야 할 판에 문재인에 대한 정치적 지지에 머물러버린 당시 우리의 정치적 수준을 드러낸 엽기적 풍경이었다. 그건 문재인 정부에게도 마이너스였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득이 되지 못했던 정치적 자살행위였다.

그 교훈의 핵심은 단 하나다. “주권자가 주권자의 권리를 ‘일상적으로’ 발동하라”는 것이다. 광장은 그 현장이다. 우리의 일상은 광장을 떠나는 것에 있지 않고 광장이 장착된 일상이 될 때 주권자의 지위를 누릴 수 있다. 따라서 광장을 포기하는 순간, 주권자는 홀로 고립된 개별적 존재가 되어 힘을 잃게 된다. 엄중한 현실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전체주의의 기원’은 그로써 시작된다.

고대 그리스의 광장 “아고라”는 일상이었다. 그것이 작동하면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데모스-크라티아는 유지될 수 있었다. 그것이 파괴될 때 인민의 권리를 무시하고 그 위에 서는 참주정치가 등장했다. 인민의 권력과 인민의 지배질서는 무너지는 것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언론이 한때 그런 아고라의 역할을 감당했으나 이제는 특권과 대자본의 도구로서 기계처럼 행동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아고라, 촛불광장을 지키는 주권자가 없게 된다면, 정치권력은 주권자를 말로만 받들면 되고 긴장감을 가지고 두렵게 여기고 존중할 태세를 가지지 않아도 된다.

결국 주권자는 지지자로만 멈추라는 강고한 기득권의 요새가 요구하는 것에 순응하고 만다. 급기야는 그냥 투쟁하고만 있지 정치에 들어서는 것은 시민운동의 순수성을 해치는 것이라는 세뇌가 작동하게 된다. 순수성이라는 말로 주권자를 배제하는 교묘하고 교활한 술책이 체제가 되고 만다. 그건 이른바 “순수문학”, “순수예술”이라는 말로 갈등과 대결, 탄압과 투쟁이 예리하게 맞서는 정치와 역사를 그 안에 담지 못하도록 했던 것과 다를 바 없다. 역사적 사실주의를 추방시킨 시절의 협잡이었다.

개혁은 이러면서 불가능해지며 기득권은 아주 손쉽게 특권화되고 주권자는 겉만 주권자이고 속은 권력을 따라다니며 이리 저리 몰려다니는 지지자 군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비극이다. 주권자의 지위를 스스로 폐기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권자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런 관점에서 촛불광장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최근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정부의 검찰개혁안은 정치검찰의 요구가 슬쩍 끼어들어온 것이라는 비판을 대대적으로 받았다. 급기야는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파급, 확산되었다. 이런 비판에 대해 대통령은 SNS 플랫폼 “X”를 통해 ‘대통령이 되기 전과 되고 나서는 다르다’, ‘국민통합의 역할을 해야 한다’, ‘검사라고 다 나쁘지 않다’, ‘좋은 검사를 만나 살아난 개인 경험이 있다’라는 글을 올렸다.

어떻게 되었을까? 정치검찰의 기득권과 일체였던 언론은 이를 보도하지 않았으나 온라인상에서는 엄청난 분노가 들끓었다. ‘대통령되고 나서 딴 맘이라? 배신 아닌가?’, ‘대통령의 권한을 준 것은 검찰개혁을 철저히 하라고 준 것이다’, ‘당신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구해준 것은 검판사가 아니라 국민이다’, 등등.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지율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비판은 매우 거셌던 것이었다. 음해자들이 아니라 지지자들의 날선 발언이었으니 정부로서는 이를 나몰라라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2026년 3월, 주권자 국민들의 요구를 받들어 촛불행동이 청와대 앞까지 촛불대행진을 하면서 긴장은 매우 높아져 갔다. “정부안 철회”가 핵심 구호였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던가.

결국 정부안은 철회되고 대통령은 담대한 결정을 내린 지도자로 정리되었다. “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하라”처럼 “재명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지지를 접지 않으면서도 주권자 명령이 최우선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그리고 전략적 지혜를 발휘해 경고했던 사태였다. 촛불광장이 일상인 정치의 효능감이 그렇게 발휘되었다. 결과적으로 대통령도 지켜내고 개혁도 완수했던 것이다.

주권자 혁명이 보인 놀라운 정치적 성과였다. 이처럼 되지 않았다면 정부의 개혁과 국정동력은 난관에 부딪혔을 것이다. 주권자 의식을 가진 국민들은 예전의 국민들이 아님을 확실하게 증명해냈다. 이제 질문은 바뀐 것이다. ‘누가 대통령 편인가’가 아니라 ‘대통령이 누구 편인가’의 문제가 관건이 된 것이다. ‘누가 대통령과 가까운가’가 아니라 ‘대통령이 누구와 가까운가’가 핵심이다. 주권자와의 밀착 강도, 그 명령을 받드는 태도, 그것이 국민주권 시대의 정치다.

이는 촛불이 휘날리는 광장이 존재할 때 가능하다. 아니면 주권자는 권력이 가장 먼저 망각하는 존재가 될 뿐이다.


지방선거를 마주하며 ― 정치적 내전과 주권자 혁명의 길

그렇다면 이제 현실정치의 가로막힌 지점을 촛불광장이 주권자 혁명의 차원에서 어떻게 뚫고나갈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이번 6월 지방선거는 매우 폭발력 높은 정세를 만들고 있다. 첫째로 내란진압 이후 권력지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달려 있고, 둘째로 서울·인천·경기 수도권의 정세를 판가름 짓고, 셋째로 영남과 TK 권역의 정치적 선택을 가늠하는 중대선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당인 민주당의 선거 기조는 “일 잘하는 정부론”으로 그치고 있다. 이재명 정부에 대한 높은 지지율을 그대로 타고 가면서 승리를 굳히겠다는 건데 이는 매우 안이하고 긴장감 없는 태도다. 이번 지방선거의 역사적 특수성에 대한 절박감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주권자의 의식에 따르지 못한 정치적 후진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의 중심에는 여전히 준동하고 있는 내란세력에 대한 척결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외면한 채 기능주의적 실용주의를 앞세운 이른바 “일 잘하는 ~” 운운은 내란세력 재기의 기회를 마련하면서 이들에 대한 주권자 국민들의 공세를 만들어내는 공간을 제공해주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이재명 정부의 등장을 돌아봐도 이런 기조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당장에 알 수 있다. 내란진압 없이 이재명에게 기회는 돌아가지 않았다. 지방선거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만일 여당이 지방선거의 기조를 내란세력 척결로 내세웠다면 언론은 이를 받아쓰지 않을 수 없고, 해산되어야 할 정당의 후보와 그 세력은 내란세력으로 정리가 되어 상당한 정치적 파멸이 필연적으로 된다. 그런데 이 싸움을 치열하게 해야 하는 판국에 그와 같은 중요한 선거전략을 포기하니 도리어 역공을 당하고 내란진압의 완전성을 위한 정치판을 만들어가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에 112명이나 되는 국회의원들이 서명한 조희대 탄핵발의도 외면하고 있는 여당이다. 자신들의 전략무기를 창고에 가둬두고 있는 셈이다.

사법내란 수괴 조희대는 대선 기간에 당시 이재명 대선후보에 대한 판결공작을 벌인 범죄자일 뿐만 아니라 내란세력의 최후보루로서 이들 세력이 기댈 곳이 되어주고 있으니 내란세력의 발호가 그치지 않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이 자와 미국의 정치공작이 은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상황까지 폭로된 지경에 조희대 탄핵을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내란척결의 기조를 바로 세우지 않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주권자가 들고 일어나 이룬 혁명의 의미와 가치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 결과다. 주권자에 대한 능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내란세력이 이런 정치세력을 무섭게 여길 리가 없다. 그러니 이들의 준동은 필연적인 데다가 그 수준도 막가파인 것이다.

따라서 반민특위를 거꾸러뜨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친일매국 세력의 반동적 반격인 소위 “6월 총공세”가 정국의 판을 완전히 바꾼 것이 그때와 지금의 조건은 달라도 오늘의 경고로 되새겨져야 마땅하다.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척결되지 않은 내란세력들은 미국과 더불어 이 나라의 주권자 국민 그리고 이재명 정부를 공격하고 있지 않은가.

경제, 군사, 정치, 외교 그 모든 주축이 되는 영역에서 동시다발적 공세가 진행되고 있다. 한 국가의 가장 중요한 군사주권은 물론이요, 이재명 정부를 공격한 자를 주한 미대사로 임명하겠다는 것까지 포함해 미국과 이들 친일매국 내란세력들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다. 주한미군사령관의 행태를 보면 우리의 주권, 대통령에 대한 능멸을 넘어 전쟁까지 불사할 기세다. 이 모두를 종합적으로 보자면, 이른바 2026년 내란세력의 반격, “5월 총공세”다. 당연히 6월 지방선거에 대한 전방위적 전초전이다.

친일세력의 몰락이 분명해졌던 때 6월 총공세라는 반동적 반격이 있었던 것처럼 내란세력 몰락이 불가역적이 되는 현실에서 이들의 반동적 총공세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명백하게 “정치적 내전”이다.

혁명은 정치적 내전이 언제나 그 승패의 관건이다. 주권자 혁명의 과정과 경로에서 선거는 더더욱 치열하고 투쟁적인 정치적 내전이다. 통상의 선거가 결코 아니다. 여기서 모든 정치관이 세워져야 한다. 애초 내란진압의 기조 위에 섰다면 국힘당은 해산되고 선거판에 올라서지 못했어야 한다. 그걸 허용한 것은 기존의 정치권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바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다. 내란척결의 완성을 전면에 내걸어야 한다. 외세의 배격까지 담지는 못한다고 해도 그건 주권자 국민이 알아서 할 것이니(주권자 국민들은 이제 “미군기지 철수”까지 외치고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적어도 내란척결이 지방선거의 중심 기조가 되어야 한다. 그 관점에서 모든 정치 현안에 대한 평가, 비판, 대응, 구호, 실천이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촛불행동은 회원 토론과 총투표를 통해 압도적인 찬성으로 구본기 전 공동대표를 광주 광산을의 후보로 내세웠다. 그 기조는 “거침없는 내란척결”에, “촛불이 파견하는 국회의원”이다. 광주를 지역구로 선택한 것은 마땅하다. 광주 5·18 정신만큼 내란척결의 기세를 선도할

수 있는 곳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결국 주권자 혁명이 달성되는 정치, “정치의 촛불화”가 이 시대의 막중한 과제다. 정치적 내전은 주권자 국민의 적을 소멸시키는 전격적인 과정이다. 국민을 총부리로 겨누고 폭력으로 억압하고 죽이려 했던 세력은 철저하게 배제되어야 한다. 그것이 혁명의 원칙이다. 그걸 하지 않고 치루는 선거는 당선과 낙선에 상관없이 내란세력에게 오로지 법적, 정치적 정당성의 기회만 줄 뿐이다. 이는 촛불혁명, 빛의 혁명에 대한 배반이다.

답은 명확하지 않은가? 이번 지방선거는 12·3 내란 진압 이후의 우리 국가의 운명을 판가름 내는 정치적 내전이다. 그 싸움의 깃발을 제대로 걸지 않고 무슨 전투인가. 이 기회에 내란세력을 완전히 패망시켜야 한다. 외세의 도구로 정치공작을 일삼는 자들의 정치적 기본권을 박탈해야 한다. 다시는 이들이 주권자가 주인인 권력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게, 철저하게 밀어내고 추방해야 한다. 그 공동체에 위험한 자들을 내어쫓는 고대 그리스의 도편추방제(陶片追放制)인 “오스트라시즘(ostracism)”은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야 “주권자 혁명”의 원칙답게 “인민의 권력”으로 “인민의 지배”를 관철시키는 진정한 민주정치, 자주국가가 이뤄지게 된다.

1949년 6월 반민특위의 좌절이 이후 어떤 고통을 우리에게 가했는지를 온 몸에 새기면, 이제 저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야말로 “5월 총공세의 주역”이 될 차례다. 주권자 혁명의 길은 그렇게 열린다.

6월의 승리를 향해, 거침없이 내란척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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