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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ᄋᆞᆯ이야기오세훈: 거기, '코리아협의회'가 있었다. - 봄날과 '코리아협의회'의 만남(291호)

씨ᄋᆞᆯ
2024-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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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ᄋᆞᆯ 이야기


거기, ‘코리아협의회’가 있었다

― 봄날과 ‘코리아협의회’의 만남


오세훈

편집위원


필자는 2023년 세계합창대회에서 금상을 받은 종합예술단 ‘봄날’의 단원이다. 우리는 창단 이후 처음으로 해외 공연을 하게 되었다.  7월 초에 독일을 방문했다. 80년 가까이 분단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처지를 34년 전(1990년 10월 3일)에 극복한 독일! 베를린 장벽 앞에서 평화통일의 염원을, 철거 위기에 처한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인권을 강조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주요 일정이었다. 독일통일 기념일은 우리의 개천절과 같은 날이다.

우리는 ‘평화의 소녀상’과 문제의 관청 미테구청 앞에서 〈아침이슬〉, 〈임을 위한 행진곡〉, 〈착한 전쟁은 없다〉, 〈홀로 아리랑〉 등 네 곡을 불렀다. 독일 및 일본계 교양시민들, 유학생들, 코리아협의회 회원들이 관객이었다.

‘평화의 소녀상’은 지난 2020년 9월 코리아협의회 주도로 유럽에서 최초로 베를린에 세워졌다. 우리는 베를린시와 미테구 당국에게 소녀상을 철거하지 말고, 지금 그대로 존치하라고 요구했다. 종주먹을 들이대지 않고, 대신 아름다운 화음으로 당부한 것이다. 반평화, 반인권의 거친 공세 앞에서 이토록 부드럽게 저항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자부심이 짙게 느껴졌다.


베를린 마테구청 앞에서 동참한 시민들과 함께


베를린 시장과 미테구 구청장이 품위있는 정치인들이라면, “한국 사람들은 참으로 특별하다”면서 진지하게 받아들인 뒤, 세상을 감동시키는 결정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예순 살이 훌쩍 넘은 나는 속으로 이렇게 순진한 생각을 했다. 기대도 했다.

알아보니, 베를린 시장은 이미 몇 달 전, 자매도시인 도쿄에 방문하여 시장과 외무상에게 소녀상 철거에 협조하겠다고 약속한 모양이다. 일본의 거대기업 미쓰비시와 후지쓰가 베를린에 막대한 투자를 하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일자리와 먹거리를 책임져야 하는 정치인의 입장을 이해하지만, 미래의 청소년을 위한 평화인권교육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지 않은가.

‘평화의 소녀상’은 베를린시와 미테구의 10대 20대에게만 해당되는 정신문화 자산이 아니다. 독일 전체, 나아가 유럽의 모든 어린이들과 젊은이들, 실은 세대를 초월하여 만인에게 효익(效益)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 효과가 일본 기업의 투자보다 비교가 안될만큼 낮을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베를린을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르는 명소가 된다면, 그 경제 가치가 작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 특별한 텍스트로서 ‘평화의 소녀상’과 그 아픈 역사는 홀로코스트 교훈의 가치를 높여주는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양국 정치인들이 높은 협상력을 발휘하여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베를린쪽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그 길은 얼마든지 있다고 본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당사국 아니오? 투자는 약속한 대로 해주시오. 선심 쓰는 일이 아니지 않소. 이 일은 보편가치를 따르는 것으로 합시다.” 이렇게 설득하기를 권한다. 인류사회는 높이, 세기를 넘어서도 길게 감동할 것이다. 두 나라의 신인도는 크게 상승할 것이다. 생명존중의 반전평화를 선도하는 위대한 결단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순진한 생각이다. 하지만, 그 기대를 버리고 살고 싶지는 않다.


‘평화의 소녀상’, 존재의 위기

2024년 8월 15일 현재, ‘평화의 소녀상’은 ‘존재의 위기’에 처했다. 광복 79주년 기념일이 지나갔다. ‘2025년 80주년을 맞아 통일의 초석을 어떻게 놓을 것인가’와 같은 큰 구상들을 궁리하여 발표해야 하는데, 무도한 정부가 마치 오랫동안 기획해온 것처럼, 흡사 경술국치를 상기시키는 작태들을 선보이고 있다. 대통령 윤석열이 친일파를 독립기념관장에 앉혔다. 언어도단의 인사가 줄을 잇는다. 마치 이완용이 여럿으로 복제되어 부활한 것 같은 세상이 되었다.

이종찬 광복회장(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상징 우당 이회영의 손자)은 광복절 기념사에서 “피로 쓴 역사를 세 치 혀로 지울 수는 없다”며 초강경 논조로 윤석열을 비판했다. 이 위기의식은 국민 모두의 것이 되었다. 국회의원 조국은 “윤석열 귀하는 대한민국 20대 대통령인가, 10대 조선총독인가?”, 물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맘속으로 모두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비극이다. 통제불가능한 재앙의 전조현상 아닐까. 특히 조만간 정계은퇴하는 기시다 일본 총리의 후임자를 위하여 ‘평화의 소녀상’을 치워주지 않을까. 취임 선물로 제격 아닌가.

우리 ‘봄날’은 독일로 떠나기 전 자체 모금활동을 벌여 모은 돈 583만 원을 ‘코리아협의회’에 기부했다. 크지 않지만 큰 격려가 되었다고 한다. 《씨ᄋᆞᆯ의소리》에 이 소중하고 특별한 ‘코리아협의회’를 소개한다. 


코리아협의회의 역사, 설립목적 및 활동내용

1990년 설립되었다. 쾰른에 있는 아시아 하우스재단(Stiftung Asienhauses)의 창립단체이다. 한반도의 역사 정치 사회 문화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협력하며 참여광장을 마련해주는 한독 시민단체이다.


1) 취지와 과제

- 민주주의 문화의 표출과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을 통한 시민사회의 발전

- 한반도의 분단극복을 위한 전제조건과 통일 그 이후: 독일 통일 경험 반추

-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적 공존을 위한 과거 청산

- 세계화의 도전과 이로 인한 긍정적/부정적 영향에 대한 고찰: 이주민의 인권보호

- 가족, 성/젠더 역할 변화와 사회구성원의 관계 및 영향에 관한 연구활동

-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다문화적 만남의 장 마련


2) 사업분야와 내용

한국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고, 비판적인 성찰을 돕는 홍보 및 교육사업, 국가주의적 관점과 한쪽으로 치우친 편견을 극복할 수 있는 토론을 함께 진행

- 다문화간 대화를 강화하는 교환 프로그램

- 독일어권에서 유일한 한반도 관련 《코리아 포럼》 잡지 발행. 출판사업

- 한반도 관련 주제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학술회의 워크숍 토론회 주최 

- 일본군 위안부, 이주민, 북한 등 다양한 주제의 워킹그룹을 통한 연대사업 

- 아시아와 유럽의 사회 정치 노조 교회 등과의 연대활동


솔직히 사업목적을 보니 걱정이 앞섰다. 오직 애국심과 민족의식, 정의감과 휴머니즘을 자산으로 시작하여, 30년이 넘었다. 그 특별한, 그래서 감동적인 생존력의 배경에는 두 특별하고 감동적인 여걸들이 있었다. 이 말에 손사래치며 겸손해 하겠지만, 그들은 비범한 인물들이다. 그들로 하여 코리아협의회는 오늘의 위상을 갖게 된 것이다.


최영숙/한민족 유럽연대 자문위원

최영숙 전 의장은 1966년 경북대 간호학과를 마치고 서울의 한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스물두 살이었다. 그 어린 처녀는 어느날 신문에서 독일에 간호사로 취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자! 두 가지의 동기가 결정적이었다. 하나는 동생의 학업을 위하여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돕고 싶은 마음이었다. 또 한 가지는 클래식 음악의 고향인 독일에 대한 동경이었다. 그리고, 당시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던 작가 전혜린이 공부한 뮌헨,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괴테도 이 젊은이의 마음을 독일로 달려가게 만들었다.

그는 1944년생, 곧 여든 살이다. 아들 둘을 두었다. 장남은 싱가포르에서 사업을 하고, 차남은 베를린에서 직장에 다닌다. 아들이 결혼식날 인사말을 하면서, “우리 엄마는 데모만 하신다”며 하객들을 웃겼다. 저 멀리 동방의 이방인 출신으로서, 그 어떤 독일 여성들보다 강하게 안착하여 뿌리내리고, 올바른 세상을 위하여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과 그 아들로서의 자부심을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아들의 그 발언은 엄마에게 우렁찬 응원가였다.


아들의 큰 자랑, 운동권 엄마

최 전 의장(2001년 창립 이후 2년 전까지 의장이었다)이 독일 사회에서 당당한 위상과 높은 신뢰를 확보하여 60년을 한결같은 열정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한 1차적인 동력은 이렇게 가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스물 갓 넘어 머나먼 길을 동행했던 동료와 친구들은 서로 본받으며 지혜를 나누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 머뭇거리지 않고 뛰어가서 도와주며 함께 나이를 먹었다. 친자매 같은 혈맹들이다.

그 과정에서 함께 겪은 수난과 좌절과 슬픔, 그 극복의 과정은 그들이 독일 사회에서 성장하고 당당하게 인정받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아가 한민족 공동체의 성장과 성취를 삶의 목표로 세우고 살아가도록 힘을 주었다. 그 중심에 항상 최영숙 의장이 있었다.

소설가 황석영이 독일에 체류할 때, 최 의장이 한국 사회의 문제점들 가운데 굵직굵직한 대부분의 사안들에 연관되어 쉴 새 없이 운동하는 것을 보고서는 ‘여러 가지 문제 연구소장’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큰 격려였다. 이 여인의 독일살이는 58년째다. 그 긴 세월 동안 그가 주도하거나 적극적으로 관여한 일들을 보면, 입을 다물 수가 없을 정도다. 실로 큰 일꾼이다.


‘5월 광주’가 나를 의식화시켰다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군대가 자국민을 향하여 총을 쏘는가. 그 배신감과 분노, 나라가 망할 것 같다는 걱정이 그를 격동시켰다. 그때 국내 언론들은 모두 전두환 신군부가 불러주는 대로, 더러운 기사를 쓰고 있었다.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이를 목숨걸고 들어가서 보도하였다. 내국인들보다 멀리 유럽 사람들이 광주의 진상을 더 정확히 알게 되었다.

최 의장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을 교포사회에 알렸다. 욕설을 퍼붓고 협박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유학생들, 양식있는 독일 시민들과 연대하며 활동을 강화해 나갔다. 단식투쟁도 함께 했다.

독일에 오자마자 바로 이듬해에 벌어진 ‘동백림 사건’(1967년)의 충격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전두환 신군부에 덤비는 이 싸움은 두려운 도전이었다. 불안감이 수시로 엄습했지만, 그때마다  뜻을 굽히지 않고 당차게 달려들었다.


송환반대투쟁 완승, 독일 정부를 무릎 꿇게 하다

실은 그 몇 년 전, 독일정부와 큰 싸움을 벌여 이긴 승리의 역사를 주도했던 일이 있었다. 독일은 국제적으로 국가신인도가 낮은 한국 정부와 협력하여, 소위 ‘파독간호사’와 ‘파독광부’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한 항목으로 입안하여 밀어붙였다. 차관을 받기 위한 국책사업이었다. 우리 간호사들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여건이었지만, 고생하면서도 짧은 시간 안에 독일시민들로부터 친절하고 헌신적이고, 주사를 아프지 않게 놓는 ‘진짜 천사’로 인정받았다.

그렇게 잘 부려먹다가 석유파동으로 인하여 내수경기가 악화되자 파독 간호사들을 본국으로 송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코리안 천사들’은 이에 분연히 일어나 독일 정부의 결정을 취소하게 만들었다. 독일 시민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그로써, 5년 근무자는 무기한 장기체류, 8년 이상 근무자들에게는 국적을 부여하는 결정을 이끌어냈다. 그 ‘송환반대투쟁’에서 완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 승리의 기억이 전두환과의 싸움에서도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다. 독재자와 그 졸개들은 국내가 아니라 해외라고 해서 제재나 보복, 즉 공격을 부드럽게 하지 않는다. 공포정치로 온 국민을 겁박하여 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숨긴 목적이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동백림 사건’ 때 윤이상 선생 등 죄없는 예술가와 학자들을 간첩으로 조작하고 납치하여 국내로 끌고 들어온 과정이 바로 그거였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이었으니 더 말할 것이 없다.


전두환과 맞짱뜨다! 가장 보람 있었던 ‘5월 민중제’ 

이를 계기로 이 특별한 여인들은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전태일 평전》 등으로 조국 대한민국을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독일 한인여성회다. 그 단체는 외국, 특히 선진국 독일에 대한 막연한 동경, 높은 소득, 더 바란다면 높은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기대하며 왔던 젊은 간호사들을 주축으로 하였다.

가장 먼저 접한 충격은 반공사상이 허구적인 이념이라는 것이었다. 받아들이기 힘들고 두려웠다. 특히 대구 출신의 최 의장에게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결국 그 고비를 다 넘었다. 1980년 5월, 광주 출신 동료 간호사가 고향의 비극을 접하고 실신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이역만리 객지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고향은 모성이다.

최 의장은 1981년 ‘5월 민중제’를 시작하여 유럽 한민족 전체의 기념일로 만들었다. 오늘까지 40년 넘게 지속하고 있다. 그는 “‘5월 광주’가 나를 의식화시켰다”고 말했다. 의식화!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표현이다. 독일 동포 할머니로부터 그 ‘전설적인’ 개념을 듣다니! 참으로 신선했다.


“윤석열 친일정권 퇴진”을 촉구하는 제10차 촛불행동에 참가해 연설하는 최영숙 의장


의식화란, 새끼들과 잘먹고 잘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다가, ‘이게 아니지’ 하며 내가 속한 세상을 나의 가정으로 확장하고 동일시한다. 그 세계관의 변화를 시작으로, 삶의 질과 품격을 고민하면서 갖게 되는 높은 깨달음이다. 그 각성이 주변을 함께 깨우친다. 격상된다. 이것이 의식화다. 큰 정의와 다정한 세상의 든든한 인프라다. 최 의장은 여전히 젊음과 순수함, 열정이 넘친다. 그는 100세에도 여전히 운동가로 살아갈 것 같다. 의식화가 노화를 정지시킨 것인가?

그는 그 후 거침없이 우리 한민족, 조국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점들, 남북관계 및 평화통일의 과제들, 아쉬운 점들, 나쁜 정치가 만들어낸 민족공동체의 불명예와 고통들, 절실하고 긴급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협력 및 구제 프로젝트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과 평화 우호협력 관계들 등에 모두 관여한다. 그는 이상의 공로로 지난 2021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한정화/코리아협의회 대표, 젊은 리더의 등장

소녀상 설치, 위안부 박물관 건립, 철거 반대 투쟁의 전위, 독일 코리아협의회 한정화 대표


그는 선배세대와 달리, 1962년생으로 비교적 젊다. 중학교를 마치고 독일 남쪽 슈투트가르트에 조기유학을 왔다. 튀빙겐대학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한국학과 일본학, 그리고 미술사를 공부했다. 1987년에 베를린으로 옮겨서 ‘평화의 소녀상’ 설치에 앞장섰다. 아버지는 1926년생으로, 《코리아 타임즈》와 《코리아 헤럴드》에서 영문으로 논설을 쓰던 인텔리 저널리스트였고, 엄마는 1934년생으로 파독 간호사였다.

한 대표는 이 시간, ‘평화의 소녀상’ 철거반대 운동을 맹렬하게 전개하고 있다. 현재 전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다. 양국 정치세력의 협공을 분쇄해야만 한다. 한 대표에 따르면, “철거 문제를 계기로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소녀상에 매우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각국의 고교생들이 종군 위안부와 평화의 소녀상을 주제로 논문을 쓰기 위하여 자료요청이 이어진다. 석사학위 논문도 10편 이상 나왔다.”고 한다. 이 어려운 여건에서도 2022년에 위안부 박물관도 건립했다.


일본 돈이냐 인권평화의 철학이냐

결국 베를린시가 일본의 돈을 택하느냐, 평화와 인권을 강조하는 철학을 우선시하느냐의 문제가 된 것이다. 독일과 유럽 전역의 인권평화세력이 철거반대 운동에 합세한다면, 이 싸움은 승산이 높다는 게 한 대표의 견해다. 그는 지금이 승리를 위한 ‘골든타임’라고 말한다. 그 연대를 조직해내는 것이 관건이다.

지금 일본은 한국 사람들이 돈을 더 받으려고 철거반대 운동을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독일 공무원들은 그 말을 믿고 오히려 한국 사람들을 오해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 공무원들은 죽기살기로 뛴다. 한국 정부는 일본 편이다. 코리아협의회가 옳은 생각과 바르게 행동하는 씨ᄋᆞᆯ들의 민족공동체를 대신하여 뛰고 있다. 그런 단체가  최근 일꾼들 급여조차 제대로 주지 못하고 있다. 무슨 일을 하든 후원자들이 개미처럼 줄을 이어야 한다. 큰 손들은 그때 나타난다.


후원을 청합니다, 품격시민들과 기업인들께!

먼저 정의롭고 다정한, 유능하고 진취적인 기업인들께 특별한 마음으로 청합니다. 코리아협의회를 후원해 주십시오. 이 ‘평화의 소녀상’ 이슈를 국제 사회의 주요 관심사들 가운데 하나로 만듭시다. 온세상의 평화인권 시민세력과 연대하여 독일과 일본 정치인들의 나쁜 협력을 분쇄합시다. 그 성취는 위대하고, 명예는 하늘에 닿을 것입니다.

기업하시는 분들께는 경영에 도움될 것입니다. 회사에 대한 세상의 신뢰와 존경이 높아질 겁니다. 회사의 브랜드 가치도 함께 올라갈 겁니다. 임직원들과 그 가족들의 자부심 또한 이전과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외국의 우량기업들과 여러 가지로 협력할 기회가 생길 것입니다. 미래가치는 현재 상상할 수 없습니다.

기업은 마음먹기에 따라, 형편에 맞추어 얼마든지 기부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세금혜택도 생기는 것이고요. 그걸 tax-wise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기부 요청을 하는 것은 실은 대를 이을 명예와 자부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시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 제가 염치없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습니다. 품격시민들께는 별도의 얘기를 할 필요가 없어 생략합니다. 

독자 여러분, 긴 글 읽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후원계좌: 국민은행 816301-04-297903 김복동의 희망


<씨ᄋᆞᆯ의소리> 2024년 9-10월호(통권 291호), 157-169쪽

#오세훈 #봄날 #코리아협의회 #씨알의소리 #촛불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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