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발길에 차여서 산 함석헌 선생님의 삶
함석헌 그의 발자취
인생의 역사는 릴레이 경주같다. 날때는 바통을 받아들고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고, 갈때는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여러분은 아직까지 바통을 넘길 생각까지 안 할 거다. 보통으로 말하면 아직도 몇십년 더 살아야 하니까 나는 이제 죽을 날이 가까웠기 때문에 요새는 그 생각만 한다. 바통! 아무래도 넘겨주어야 하잖아? 그러니까 실컷 뛰었다가도 바통 넘겨주지 못하면 소용없고, 저 사람도 아무리 뛴다해도 바통을 받아 쥐지 않고 뛰면 소용없다.
1901년~1945년
■ 1901.03.13
평북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 출생 父母 함형택, 김형도(석혜,석헌,석란,석창,석보)
■ 1906
사립 기독교 德一小學校 입학 [삼천재(三遷齋)서당에 들어갔다 그해에 덕일소학교로 개편]
■ 1912
이용엽, 장이순, 장자일, 장창규, 함석헌,? 다섯친구가 단지동맹 일심단을 만듦
■ 1914
사립 기독교 德一小學校 졸업
■ 1914~1916
양시 공립 보통학교 3학년 편입하여 2년후 졸업
■ 1916.04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 입학(8회)
■ 1917.08
평양고보 2년(17살) 황창욱,김영두의 장녀 황득순(1902.1.15음력)과 결혼
■ 1919.03.01
3년 재학중 숭실학교 교사로 있었던 일가인 함석은의 영향으로 3.1운동 참가 후 2년간 학업 중단,수리조합 사무원, 소학교 선생등을 이 시기에 하다.
■ 1919.11.25
장남 국용 출생
■ 1921.04
다시 학업을 계속하려고 서울로 올라가다.
■ 1921.08.14
장녀 은수출생
■ 1921
함석규 목사 권유로 오산학교 3학년으로 편입-조형균 장로 주선으로. 유영모선생을 만남 (9월)
■ 1923
오산학교졸업 (상급학교 지원할 자격이 없음) 동경유학 (상급학교 지원 자격 시험 준비) 19-p148 관동대지진을 경험
■ 1924.04
東京高等師範學校 文科一部에 입학 (파우스트 읽음 - 요한복음을 고쳐 읽음)
■ 1925
내촌감삼(內村鑑三) 문하생 6명 '조선성서연구회' 결성
■ 1926.04.20
2녀 은삼 출생
■ 1927.07
성서조선 창간 (김교신,함석헌,송두용,정상훈,양인성,류석동)
■ 1928.03
東京高等師範學校 졸업
■ 1928.04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歷史와 修身을 가르치신다
■ 1929.08.16
3녀 은자 출생
■ 1930.05.09
남강 이승훈선생 운명하시다.
■ 1930.07.22~23
성서조선 독자회 ( 김교신,류석동,송두용- 오산을 방문)
■ 1930.09
오산학생들의 ML당 사건으로 정주경찰서에 1주일간 구금 4. p294
■ 1931.08.04
김교신 선생 방문. 9일 함께 주일예배를 드리다.(야고보4;13 말씀하다)
■ 1931.09.01
2남 우용 출생
■ 1933.03.30
4녀 은화 출생
■ 1933.12.31~01.04
6박7일 성서조선 독자회에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강의
■ 1934.02~1935.12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연재
■ 1936.03.07
김교신 선생 방문
■ 1936.06.21
김교신 선생 방문, 부활사 강당에서 함께 예배
■ 1936.12.28~1937.01.04
성서조선 독자회 참석. '성서적 세계관과 교육' 강의하다.
■ 1937.07.26
김교신 선생, 박물연구 9인과 함께 함흥 부전고원 탐방
■ 1937.12.29
성서조선 독자회 참석키 위해 서울 방문, 집회 중지를 결정하여 12/30 김교신선생 댁에서 유숙하고 오산으로 돌아가다
■ 1938.03.06
오산학교 사임후 김교신 선생 방문
■ 1938.03
오산학교 사임후 2년간 오산에서 과수원 경영
■ 1938.03
딸 은숙(4살) 홍역으로 죽다. <김교신 선생 전집-고백> 같은달 아들 철용(2살) 홍역으로 죽다.
■ 1938.03
묘향산행
■ 1938.10.15
김교신선생 장녀 진술 결혼식에 주례( 호수돈 재학중인 장녀 은수와 함께 참석)
■ 1939.01.25
5녀 은선 출생
■ 1940.03
평양 松山農事學院 인수 (김 혁선생으로부터)
■ 1940.08
계우회 사건으로 김 혁선생이 동경에서 체포, 이 일로인해 평양 대동경찰서에 1년간 구치되다
■ 1940.11.15
아버지 함형택 별세 (김교신, 송두용 두분이 대신 상주가 되다)
■ 1940.07.17
성서조선 14주년 기념감사 특별집회(김교신-서울)에 유영모선생과 함께 참석 로마서 11장 <야나이하라 선생의 조선인에게 던진 과제에 해답함>
■ 1942.03.20
장남 국용 결혼식 용암포 중흥동 자택에서 김교신 선생 주례
■ 1942.05~1943.04
聖書朝鮮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미결수로 1년간 복역. 수형번호1588번
■ 1945.04.25
혈맹의 친구 김교신 흥남에서 장티푸스로 사망
■ 1945.08.15
고향에서 농사꾼으로 해방을 맞이하다
■ 1945.09.11
평북자치위원회 문교부장
■ 1945.01.23
신의주 학생사건-소련군 사령부에 체포 50일간 구금 (이때 어머니를 생각하며 시 '쉰 날'을 쓰다)
1946년~1969년
■ 1946.01.11
소련군으로부터 석방
■ 1946.03.05
장녀 은수 결혼
■ 1946.12.22
장녀의 첫아이 출산으로 신의주 민포동 딸네 집에서 계시다 23일 해산을 돕고 27일 체포당하시다 (최익상 증언)
■ 1946.12.27
오산학교 반정부 전단 살포 사건의 배후인물 협의로 피검되어 1개월간 옥고 치르다 (수감중 쓴 시집 '섧은날')
■ 1947.02.26
박승방씨와 주위의 강권으로 월남 ("내 생각은 말고 어서 가거라"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
■ 1947.03.17
서울에도착 오류동 노연태씨 댁에서 우거 Y.M.C.A. 강당에서 일요 종교 집회 시작
■ 1947.04
유영모 선생님과 함께 광주등지로 한달 여행하시다.
■ 1947.07.20
시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쓰시다
■ 1947.11
유영모 선생님의 주일모임에서 북한산 등정(하루 일식하는 결단을 하시다)
■ 1949.10.23
3녀 은자 결혼(오류동에서)
■ 1950.01
최태사의 부인 윤유정 장례식에서
■ 1950.03.28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 출판
■ 1950.04
‘內村鑑三과 無敎會主義’ YMCA 2층 강당에서 강연회(김용준님의 증언) 제2의종교개혁
■ 1950.06.25
6.25 발발 28일 피난차 남하 대구에서 수영(부산)으로 성서집회는 부산에서 계속하심
■ 1953
서울로 귀환(서대문구 충정로 3가) 최태사 선생과 친지들 도움으로
■ 1953.07
"대선언"을 발표 (무교회에서 신앙적 변화)
■ 1954.07
대학생 하기 수양강좌
■ 1955.03
중앙신학교에서 강연
■ 1955.12
2만날 맞이하며 김용준선생외 10여명 모임(다석선생의 회고, 김용준님의 증언)
■ 1956.01
사상계에 글을 쓰시기 시작하다 ('다시 그리워지는 함석헌선생님'에서 안병욱 선생의 증언)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나'-신촌집에서 집필(함우용님의 증언)
■ 1956
용산구 원효로 4가 70번지 친지들의 도움으로 집을 마련
■ 1957
씨알농장 시작( 천안시 봉명동 1만평 농장을 정만수장로가 기증) 홍명순 김종태, 씨알의 소리 114호
■ 1957
사상계에 '할말 있다'를 기고 윤형중신부와 지상논쟁
■ 1957.03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사상계)-글로 인해 서대문 형무소에 20일간 구금
■ 1961
안반덕과 관계 (시작- 강원도 고성군 간성면 선유리. 김종태 윤형노 권술용 송용등 문대골 김복관 이금용 박세정 김종성 박상균 김영록 송상호)
■ 1961.07
[ 5·16을 어떻게 볼까 ]사상계에 발표
■ 1961 겨울
뜻으로 본 한국역사 -3판 출판(해인사에서 한달동안 대대적인 개작을 하다)
■ 1962.02.09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3개월간 미국여행. 10개월간 퀘이커학교에서 공부 세계일주여행- 영국 화란 독일
■ 1962.02.02
동경( 2일) 호놀룰루( 7일)
■ 1962.02.23
미국도착, 어네스트 학킹(87세)을 만나다
■ 1962.04.05
미국, 펜실베이니아
■ 1962.07.30
미국, 뉴욕
■ 1962.08.30
미국, 워싱턴
■ 1962.09.12~1963.01.05
미국, 펜들힐
■ 1963.01.06
영국 런던에 도착
■ 1963.01.18
영국, 우드브록 ( 1.18.-2.7.)
■ 1963.06.23
서독에서 안병무 선생과 함께 계시다 여행 중단 귀국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
■ 1963.07.16
삼천만(三千萬)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 -조선일보에 발표
■ 1963.07.22
사상계 주최 시국 강연회에서 말씀
■ 1963.08.03
시국 강연회-대광고등학교
■ 1964.04
권오기와의 대담 (신동아-권력도 문화도 분산되어야)
■ 1964.09.06
지명관과 대담 (조선일보-이 나라의 오늘을 말한다)
■ 1964.09.06
2남 우용 결혼(서울 대성빌딩에서)
■ 1965.09.10
뜻으로 본 한국역사-4판 출판(삼중당)
■ 1967
장준하선생 옥중 출마 지원
■ 1967.08.13
미국 방문 L.A. 퀘이커 연회에 참석
■ 1968.04.12
'새로운 종교사상과 지성인' 대전대학(현 한남대학) 청림 축전 행사에서 강연
■ 1968.06.02
남한산성 역사의 격전지를 찾아서 (사상계)를 쓰기위해 답사
■ 1968.06.28
행주산성 역사의 격전지를 찾아서 (사상계)를 쓰기위해 답사
■ 1969.04.19
1969년 4·19 기념 강연회를 마친 후 범청년민주투쟁위원회 소속 인사들과 침묵시위. 함석헌 옹을 중심으로 이기택(왼쪽), 이철승(오른쪽)
■ 1969.09.12
공화당의 삼선개헌 추진에 대한 반대시위(시위중 경찰에 의해 강제로 귀가조치 당함)
1970년~1980년
■ 1970.01.28
"종교경전의 재음미, 문명의 비평, 역사적 반성, 시사논평,수상 등을 통하여 건전한 상식을 길러 민주주의 발전과 씨알의
깨우침에 이바지하자"는 목적으로 문화공보부에 정기간행물 (월간) 등록을 신청하여 교부받다.(등록번호 라-1257)
■ 1970.04.19
'씨알의 소리' 창간호 발간
■ 1970.05.29
'씨알의 소리' 인가취소로 법정투쟁(이병린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 1970.08.02
퀘이커 11차 세계대회 (스웨덴의 시그투나Sigtuna) 참석차 출국하시다.
■ 1970.08.08
스웨덴 시그투나에서 편지(씨알의소리)
■ 1970.08.12
영국 런던에서(씨알의소리)
■ 1970.08.18
영국 엑서터에서(씨알의소리)Exeter -퀘이커 런던 연회 참석
■ 1970.08.19
미국 뉴욕에서(씨알의소리)
■ 1970.08.24
미국 뉴욕에서(씨알의소리)
■ 1970.09.29
카나다 토론토에서 편지(씨알의소리)
■ 1970.10.21
미국 뉴저지에서 편지(씨알의소리)
■ 1970.11
미국 펜들힐에서의 체험-펜들힐명상(1971년8월호)
■ 1970.11.13
전태일 평화시장에서 분신자살
■ 1971.04.22
퀘이커 세계대회 참석후 인도방문을 마치고 귀국
■ 1971.05.04
고등법원 재판장 안병수, 윤영일, 김석수 판사에 의하여 문공부의"씨알의소리" 폐간처분은 "재량권의 범위를 넘은 처사" 이며
"등록을 취소한 처분은 위법부당"하다고 판시, 본지 승소판결를 내리다.
■ 1971.07.06
대법원 재판장 김치걸, 사광욱, 홍남표, 김영제, 양병호 판사에 의하여 문공부의 상고를 기각, "씨알의소리 등록을 취소한 처분은 위법부당하다고 한 원판결의 결과에는 영향이 없는 것이라'고 판시, 본지의 승소판결을 확정하다.
■ 1971.07
老子 莊子 강의 시작( 88. 5. 까지 계속)
■ 1971.08
김재준선생과 같이 삼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 구성
■ 1971.10.01
마하트마 간디 탄생 102주년 기념강연회를 인도영사관과 공동주최하다(한국일보 12층 강당).
■ 1971.11.13
전태일 1주기 추도회(경동교회) 씨알의 소리사 주최로 75년까지 계속
■ 1971.12.02
고희 기념강연회 YWCA. 대성빌딩
■ 1971.12
부산 모임(장기려 선생)에 매월 2째 일요일 참석 ( 88. 5.까지)
■ 1972.01.28~30
제 1차 씨알의소리 독자수련회를 안양농민교육원에서 개최하다.(주제 "세계평화의 길")
■ 1972.04.19
씨알의소리 창간 2주년 기념 강연회를 대성빌딩(당시 명동소재)에서 개최하다.
(함선생님은 여기서 "같이 살기 운동을 제창하다"는 강연을 하심)
■ 1972.10.17
오후 7시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국회해산, 헌법일부 효력정지, 비상국무호의, 헌법개정, 1개월내로
국민투표 실시 공고)
■ 1972.11.21
오후 7시 기관원 2명에 의해 함선생님 연행되다.
■ 1972-11-13
오후 7시 함선생님 장준하선생님 귀가.
■ 1973.05.21
YMCA 시민서당 김동길과 공개 대담
■ 1973.05.22
씨알의 소리 창간 3주년 기념 독자모임을 대서빌딩에서 열다
■ 1973.07.08
씨알농장을 정리하여 모산의 구화 고등 공민학교를 시작하다.(장준하선생과 몇분의 도움으로)
■ 1973.11.05
시국선언 씨알의소리1973.11
■ 1973.11.13
고 전태일 제 3주기 추도예배(젠센기념관) 개최하다. (함선생님 설교 "민족의 씨를 키우는 사람")
■ 1973.11.16
삭발(시국선언)
■ 1973.11.20
The Christian Science Monitor 의 Elizabeth Pond와 대담
■ 1973.11.25
일요성서강좌 시작
■ 1974.01.08
오후 5시 대통령 긴급조치 선포(유신헌법부정, 개정요구, 비판 및 반체제활동 엄단, 위반자 15년 이하
징역발표)
■ 1974.01.21
기관원에 의해 연행당하다
■ 1974.01.22
새벽 2시경 함선생님 귀가
■ 1974.04.20
씨알의소리 창간 4주년 기념강연회 개최(연사 법정스님 이태영, 김동길 박사 함석헌 선생)
*김동길 박사는 이 강연후 기관원에 의해 연행, 민청학련사건 혐의로 1심에서 징역15년 자격정지 15년 받다.
■ 1974.09.23
중앙정보부에 연행, 3일만에 귀가.
■ 1974.11.27
윤보선, 김대중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 동참 시국선언 씨알의소리.
■ 1975.01
동아일보 광고 탄압사태 발생.
■ 1975.01.16
그 동아일보를 후원하기 위해 씨알의소리 독자들이 본사후원을 얻어 "자유, 정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는
동아를 돕고자 여기 작은 씨알들의 뜻을 모으다" 또는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하는 함선생님 제자의 패난트 팔기 시작하다.
■ 1975.01.19
중앙정보부에 다시 연행 됐다 귀가.
■ 1975.03.01
성남주민교회 이해학 전도사 구속 1주년을 맞이하여 이해영 목사의 설교와 함석헌 선생의 강연으로 기념예배를 가짐.
■ 1975.03.14
김동길, 김찬국 교수 석방기도회 참석차 출발한 함선생님 자택 노상에서 경찰에 의해 2시간 연금당하다.
(이후에 수시로 자택 도청 또는 차에 싣고 다른 곳으로 가는 등 연금 계속.)
■ 1975.03.15
동아일보 사태에 대한 재야 22인의 호소문
■ 1975.04.19
74회 탄신축하모임을 젠센기념관(당시 서대문소재)에서 갖다(안병무 박사 "함선생님의 역사관"발표)
■ 1975.08.17
창간 5주년 기념강연회(젠센 기념관, 연사 김대중, 백낙청, 함석헌 선생, 김대중 선생 납치 이후
최초 강연, 청중 3천여명 참석)
■ 1975.10.03
장준하 선생 의문의 실족사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3리 약사봉에서)
■ 1975.11.15
전태일 5주기 추모예배 주최하다. (향린교회, 함석헌 선생, 문익환 목사)
■ 1976.03.01
3. 1명동사건 발생(신구교 합동미사후 구국선언문 발표 함선생님 가담)
■ 1976.03.02
오후 2시 정보부에 함선생님 연행, 3일만에 일단 귀가
■ 1976.03.03
오전 10:30 - 12시 씨알의소리 사무실 및 가택 수색당하다.
■ 1976.03.26
3. 1사건으로 불구속 기소되다.
■ 1976.04.26
오늘의 基督者 像 KSCM창립기념예배 기독교회관에서 말씀
■ 1976.08.21
장준하 선생 1주기 추모 예배를 드리고자 기독교회관 강당을 계약했으나 당국의 저지로 못드리다.
■ 1976.08.28
1심에서 김대중, 윤보선, 문익환 선생과 같이 8년징역, 자격정지 8년을 받다
■ 1976.11.02
전태일 6주기 추모예배 금지통보 받다.(정보부담당관)
■ 1977.03.22
3.1 민주구국 선언 사건 -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과 함께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 받다. (80년 복권)
■ 1977.06.07
법정 스님께 서신(법정스님의 글 "묵은 편지 속에서")
■ 1977.07.08
"고난" 기독자 교수협의회주관으로 가진 고난을 받는 형제들을 위한 기도회에서 강연
■ 1977.08.17
장준하 선생 추도사-명동성당에서
■ 1977.09.18
"뿌리" 성경모임 명동 카톨릭회관에서 하신 말씀
■ 1978.01.29
선우휘와 대담 (조선일보-남 따라가면 뒤진다)
■ 1978.01.30
"간디의 생애에서 배운다 간디" 서거 30주기 추모강연 개최(기독교회관, 연사, 함석헌 선생, 안병무, 김동길 박사)
■ 1978.02.24
3. 1절 구국선언문 발표(기독교회관 기도회에서)
■ 1978.03.18
77회 생신축하모임을 위해 흥사단강당(동숭동소재)을 계약했으나 이유없이 해약통고로, 흥사단 뒤뜰에서 축하모임을 갖다.
■ 1978.05.08
부인 황득순(77세) 별세 (밤9시 57분) 기독교장로 전남노회 교사위원회 초청으로 광주에서 2차례 강연 (오후3시. 8시)
■ 1978.05
역사속의 민족관 YWCA 수요강좌에서 하신 말씀
■ 1978.06.28
광주YWCA 강당에서 문익환목사와 함께 강연회
■ 1978.07.05
함선생님 자택연금 3일만에 해제되다
■ 1978.10.27
내속에서 맑은 빛을 내야합니다 김완순님의 결혼식<태화관>에서 하신 말씀
■ 1978.11.16
대구강연 약속으로 출발했으나 새벽6시 경찰. 기관원 7,8명 폭력으로 저지당하다.
■ 1979.02.26
미국궤이커봉사회에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사실이 중앙일보에 1단기사로 보도되다.
■ 1979.03.01
새벽 5시로부터 자택연금, 10여일간 계속 하다.
■ 1979.03.04
윤보선선생 댁에서 김대중 씨와 함께 기자회견, 3. 1절 성명 발표.
■ 1979.03.05
검찰에 소환되어 윤보선씨 대 기자회견 내용 및 성명사건, 또는 작년도 3. 1절 성명 등 조사 받다
■ 1979.03.05
미국 퀘이커봉사회 바바라 바우만여사가 내한, 함선생님 노벨평화상 추천서 전달하다
■ 1979.03.22
목요기도회 참석을 저지하고자 형사 및 기관원 12명 자택 앞길을 막다. 오후 4:30부터 함선생님 기관원들과 대치, 박선균 편집장, 박영자, 최응일 군등 합세하여 150m까지 밀고 나갔으나 좌절, 7시까지 2시간반동안 비맞으며 싸우다.
■ 1979.03.26
대구 통일당대회 강연차 새벽 4:30분 형사들의 눈을 피해 출발하다.
■ 1979.03.27
귀가 즉시 자택연금 무기한, 4월 22일까지 계속하다. (함선생님 모임 장자, 노자 부산모임 등은 형사 동행하여 허락하다)
■ 1979.05.25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사명 금요 기도회에서 하신 말씀
■ 1979.06.01
금요기도회 참석저지로 자택 앞 500m까지 기관원들과 싸우며 나가시다 손에 가벼운 부상을 입다.
■ 1979.06.02
김대중씨댁 방문 차 가시다가 경찰과 대치하는 가운데 두루마기 모두 찢어지다.
■ 1979.06.18
윤형중 신부 장례식 참석 저지당하다.
■ 1979.07.19
목요기도회 참석 저지당하다(형사 4
■ 1979-.08.11
퀘이커 세계대회 참석차 출국(스위스행)
■ 1979.08
스위스의 전형적인 농가를 방문-바젤에서 유학중이던 오영석님의 안내
■ 1979.08.20
스위스에서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제1신 씨알의 소리로 보내오다
■ 1979.08.26
독일 아헨교회, 듀이스부르크교회에서 말씀(독일에서 만난 선생님)
■ 1979.09
카나다에서 국제전화하시다.
■ 1979.09.14
카나다 토론토 한인연합교회에서 장공 김재준 목사와 만나다.
■ 1979.10.03
우찌무라 선생의 일화(대니-He isa great man!)가 있었던 정신박약아 학교(펜실베니아주 래딩)를 찾아가다.
지금 <엘윈 인스티튜트>라 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큰 사업체가 되었다. Elwyn 방문
■ 1979.10.14
웃으면서 싸워봅시다 미국 워싱톤 한인교회에서 하신 말씀
■ 1979.10.26
미국 피츠버그에서 전화
■ 1979.10.26
미국 오하이오주 컬럼부스에서 박정희 저격사건을 듣다.
■ 1979.11.07
모든 일정취소하고 귀국하신다는 편지받다.
■ 1979.11.15
여행 일정을 중지하고 귀국
■ 1979.11.24
YMCA강당에서 통대대통령선출저지 국민대회에 참석 후 중부서에 연행, 익일 새벽 2시 귀가하셨으나 계엄사에 다시 연행되다
■ 1979.11.26
박종태, 김병걸 씨 등 YMCA 불법집회사건으로 90여명 연행조사 발표(계엄사)
■ 1979.12.10
연행 15일만에 귀가
■ 1979.12.27
계엄사 검찰부 소환 심문받다.
■ 1979.12
Margaret Bacon과 대담
■ 1980.02.06
"80년대의 민족통일의 꿈을 그려본다" YWCA 수요강좌에서 하신 말씀
■ 1980.02.25
보통군법회의에서 1년선고받고 형 확인 과정에서 형면제 처분받다. 문공부와 계엄사 검열 과정에서 15일 걸리다.
■ 1980.02.28
함선생님 등 687명 복권조치 발표
■ 1980.03.14
안병무와 대담 (씨알의 소리 4월호-'씨알의 소리'는 왜 내고 있는가)
■ 1980.04.10
"오늘 우리에게 4.19는 무엇인가"CBS공개강좌에서 하신 말씀
■ 1980.04.16
작가 최일남과 대담(동아일보- 민주화 물결 누구도 거스르지 못해)
■ 1980.04.18
씨알의소리 10주년 기념강연회 서울 대구 전주 부산 광주
■ 1980.05.03
씨알 혁명의 꿈 씨알의소리 창간 10주년 기념강연 광주YWCA에서 하신 말씀
■ 1980.05.16
창간 10주년기념 제주강연(연사: 함선생님, 서남동 교수, 장소:제주학생회관)을 마치고 제주 숙소에서 5. 17 확대 계엄령을 맞다. 여기서 서남동 교수 5. 17자정,미리 대기하고 있던 정보원들에 의해 연행되다.
■ 1980.05.17
제주 강연후 중단
■ 1980.07.30
'씨알의 소리' 계엄 당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폐간 당하다
■ 1980.08.17
절대승리 서울 봉원교회에서 하신 말씀
1981년~1989년
■ 1981
오산학교 동창회장으로 추대 (81-89)
■ 1981-03
'뒤돌아보는 나의 일생' 80회생신 기념 강연회 서울 YWCA 강당에서
■ 1981-08-03
퀘이커 모임 (여름수양회 - 원주에서- 요한복음풀이 )
■ 1982-01-08
김광협과 대담 (동아일보-言路 열려야 시민정신 깬다)
■ 1982-07-25~28
부산 성공회 수녀원 수양회
■ 1982
미국 방문, 카나다 방문
■ 1982
우찌무라 선생의 일화(대니-He isa great man!)가 있었던 정신박약아 학교(펜실베니아주 래딩)를 다시 찾아가다
■ 1983-02-22
민중과 새역사 지평 명동 카톨릭 문화회관에서 하신 말씀
■ 1983-03-23
역사속에서 씨알의 위치와 역할 대전 민중교회에서 하신 말씀
■ 1983-05
한용상과 대담 ('마당'-퀘이커와 평화사상)
■ 1983-05-05
시인 고은선생 결혼식 주례(안병무 박사댁에서)
■ 1983-10
최일남과 대담 (신동아 -백성의 기개를 길러줘야 해)
■ 1983-08-20
작가 최일남과 대담(신동아 83.10월호, 백성의 기개를 길러줘야 해)
■ 1983-08-25
일본 관동 대지진 60주년 -한국 기독교단체 강연회
■ 1984-05-03
"새 세대들에게 주는 말" 고려대학 개교 79주년 한국사상 강연회에서 하신 말씀
■ 1984-06-15
"대담의 모임" 함석헌,김재준,이병린,강기철
■ 1984-11
남강문화재단 설립 (오산학교)
■ 1985-03-13
85회 생신 축하 모임(이화여대 후문부근 '석란')
■ 1985-08-09
참해방 CBS주최 해방40주년 기념 강연회 기독교회관에서 말씀
■ 1985-08
쌍문동 자택 화재
■ 1985
미국 방문 퀘이커 세계협회 멕시코 종교대회 참석. 카나다 방문(10월) 두 번째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 1985-08-31
정치와 종교 워싱톤 수도장노교회(The Capital Presbyterian Church for Koreans)
■ 1985-09-01
크리스챤의 사명 워싱톤한인교회(The Korean Baptist Church of Washington)
■ 1985-10-27
새사람 미국L.A 한인교회에서 하신 말씀
■ 1985. 12.20
일본강연
■ 1986-08-06~09
부산모임 수련회
■ 1987-01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 장공 김재준선생과 함께
■ 1987-03-01
'고난의 의미' 서울 봉원교회에서 하신 말씀
■ 1987-06-29
서울대학병원 입원
■ 1987-07-13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췌장, 담낭, 십이지장 종양부위 절제수술 4시간 받으시다.)
■ 1987-08-29
퇴원
■ 1987-09-04
백병원에 재입원하시면서 월간 씨알의 소리 복간할 것을 마음에 결심하시다.
■ 1987-10-12
제 1회 인촌상 수상 (동아일보사)
■ 1987-12-22
5공정권 말기 민주화의 열기 속에 언기법(言其法)이 폐기되고, 언론출판의 자유가 이루어질 희망가운데 씨알의 소리 복간신청을 문공부에 내다. 씨알의 소리 문화공보부에 복간 신청
■ 1988-07-18
강제폐간 8년만에 씨알의 소리 정기간행물 등록증을 교부받다.(신문 3528-4-102651/등록번호 라-3676) 법적처리 기간은 신청한지 1개월내로 내주게 되었으나 무려 7개월만에 등록증을 받게 된 것이다.
■ 1988-08-03
서울대학병원에 1년만에 다시 입원하시다
■ 1988-12-22
24회 서울 올림픽. 서울 올림픽 평화대회 위원장으로서 서울평화선언 제창
■ 1989-02-04
■ 1989. 2. 4.05시 25분 88세 32105일 서울대학병원 12층 108호실에서 서거하시다
■ 1989-02-04
함선생님, 오산학교 강당에서 오산학교장으로 장례식 거행하다(2천여 조문객 참석)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 마차산 자락에 묻히다.
■ 1989-02-08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 되다
■ 2002-08-15
독립 유공자로 선정되어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받다
■ 2006-10-19
대전현충원 안장 (애국지사 제3묘역 329호)
기념사업회
ⓒ 2024 Hamsukhun Memorial
(우) 04001 서울특별시 마포구 월드컵북로 5길 21(구주소: 서교동 448-1) 씨알회관3층
전화번호02-716-2918
팩스 02-716-2919
개인정보보호책임자: 민대홍 ssialvoice@gmail.com
사업자등록번호
106-82-10457